순천만, 그 그리운 내 고향
2008.04.06 11:54
순천만, 그 그리운 내 고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채선심
내 고향 순천의 순천만은 세계적인 늪지이다. 나는 이곳 전북으로 시집오기 전까지 스물네해 동안을 그곳에서 살았다. 28호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지붕엔 새알박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바다가 가까워 물안개가 자주 피어오르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엄마들의 목소리와 골목에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었다. 어쩔 때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못했다가 꾸지람을 들은 적도 많았다. 때가 되면 들어갈 텐데 왜 데리러 다니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어느새 우리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점심때가 다 되어도 들어오지 않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다녔다.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서야 일이 손에 잡혔던 것은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도, 할머니의 어머니도 그러셨을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나는 바다가 아닌 두메산골에서도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못 믿어웠는데 우리 어머니야 바다가 가까웠으니 얼마나 노심초사하셨겠는가. 나의 고향마을은 작았지만 그래도 우리 또래가 많았다. 어머니들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나던 해에는 일년 내내 마을에 금줄이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어떤 걸인이 "이 마을은 일년 내내 애만 낳느냐?"고 투덜대기도 했단다. 우리 고장의 풍습은 애를 낳거나 제사를 지내면 동냥을 주지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큰마음을 먹고 들어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니 돌아서는 뒤통수가 얼마나 싸늘했을까 싶다. 일년 내내 아이를 낳아준 엄마들 덕에 우리는 또래친구가 많아서 좋았다.
그곳에서 자라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크로바꽃을 따서 족두리도 만들고 꽃시계와 꽃반지를 만들어 끼엇다. 호박꽃초롱으로 불을 밝히고 신랑각시 흉내를 내며 해맑게 웃었던 일이 어제 일인 양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혼례식 예행연습을 일찌감치 한 셈이다. 그시절을 영화필름처럼 다시 한 번 되돌려 놓고 싶은 순간이다.
지금은 예뻐지고 싶어서 황토팩이 유행인데 우리는 벌써 50여년 전부터 갯벌로 팩을 했었다. 날씨가 더울 때면 상의를 벗은 채 바다로 들어가 뻘 싸움을 하면 팩은 힘들이지 않고 자동으로 되었다. 순천엔 눈 구경하기가 어려워 눈싸움을 해본 기억은 없지만 뻘싸움은 자주 했었다.옷을 버렸다고 어머니에게 호되게 야단도 맞았지만 자고 나면 바다가 또 부르는 걸 어쪄겠는가.
순천만은 우리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많은 먹을거리도 제공해 주었다.
길이 2미터 너비 40센티정도의 널판지에 왼쪽 무릎을 얹고 오른쪽발로 갯벌을 박차듯 밀면, 10여미터는 미끄러져 나간다. 널판지를 타고다니며 여러가지의 조개를 잡아다 먹었는데 훗날 우리 딸아이는 그모습을 보고 '갯썰매를 타는모습'이라고 적었다.
내가 널판지를 타고 맨처음 조개잡이를 간 건 낭랑18세 때였다. 친구들이 하는 건 쉬워보였는데 내가 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널판지가 제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왔다갔다하였다. 어미둥지를 갓 나온 열쭝이처럼 엎어지다밀려가다를 반복하며 너무 초라한 내 모습이 안타까워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었다.
나는 그날을 생에 중 가장 절망적이었던 날로 기억한다. 친구들처럼 가사도 못하고, 완고하신 아버님 때문에 진학은 더욱 안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란한 기적소리와 눈부신 아지랑이가 내 마음을 한층 더 심란하게 흔들고 지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엎어지지 않고 조개를 잡아오는 날은 개선장군이 부럽지 않았다. 바다 전역에 널려있는 빨간식물의 칠면초는 잎을 뜯어다 밀가루와 버무려서 찌면 짭조롬하면서도 향긋한 갯내음이 나서 그 시절엔 일품별미였다.
우리 마을은 바다와 가까이 있지만 어업을 생업으로 하지는 못했다. 소위 양반행세를 한답시고 어업은 천민이나 하는 직업이라고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 가 보면 천민촌이라고 혼사도 거부했던 마을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급주택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동네의 자녀들이 타고온 자가용은 여느 유료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양반을 고집했던 양반촌은 아직도 가난한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글은 스승이 반 팔자고 사람은 부모가 반 팔자'라고 한 어느 교수님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주로 게를 많이 잡았고 그 게는 뻘흙만 먹고 사는 것 같았는데 뻘을 큰 엄지발가락으로 집어서 입에다 넣을 땐 나머지 발들을 엉거주춤 세우고 먹는데 우리 중에서 유머감각이 빠른 사람은 이 모양을 보고 '게춤'을 개발해서 추기도 했다.
짱뚱어는 바다에 기어다니는 걸 낚싯대로 긁어 낚는데 탕으로 끓이거나 말려서 구워 갖은양념에 무치면 최고급 도시락 반찬이 된다. 그래서 옛날 선조들은 '흉년이 들면 바닷가로 가라'는 지혜로운 말을 남겼을 것이다.
순천만은 먹을거리만 주는 게 아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귀하신 몸이 된 갈대는 꽃이 만개하기 전에 따서 말렸다. 방에서 쓰는 비를 만들면 아주 미세한 먼지까지 쓸어지고, 대는 울타리를 막거나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카메라를 설치하고 칠면초와 갈대 채취를 감시하고 있으니 아쉽다.
특히 순천만은 일몰광경이 장관이다. 서녘 산에 해가 걸릴 때쯤이면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지천에 널려있는 붉은 칠면초와 어우러져 홍해를 이룬다. 거기에 청순한 갈대가 하늘거리고 철새들이 잠자리를 찾아가느라 끼욱끼욱 울며 나는 모습을 보려고 사진작가와 조류학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람에 조용하고 한가롭던 옛날의 정취가 그립다.
옛날처럼 딸아이가 이름지어 준 갯썰매를 타고 조개잡이도 하고 갓 피어난 갈때꽃도 한아름 꺾어 가슴에 안고, 그리웠던 친구들과 '오늘도 즐거워~어라 조개잡~이 가는 처녀들~'하며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건 지나친 나의 바람일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채선심
내 고향 순천의 순천만은 세계적인 늪지이다. 나는 이곳 전북으로 시집오기 전까지 스물네해 동안을 그곳에서 살았다. 28호의 초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지붕엔 새알박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바다가 가까워 물안개가 자주 피어오르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아이들을 불러들이는 엄마들의 목소리와 골목에서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었다. 어쩔 때는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못했다가 꾸지람을 들은 적도 많았다. 때가 되면 들어갈 텐데 왜 데리러 다니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도 어느새 우리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점심때가 다 되어도 들어오지 않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다녔다. 아이들을 데려다 놓고서야 일이 손에 잡혔던 것은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도, 할머니의 어머니도 그러셨을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
나는 바다가 아닌 두메산골에서도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못 믿어웠는데 우리 어머니야 바다가 가까웠으니 얼마나 노심초사하셨겠는가. 나의 고향마을은 작았지만 그래도 우리 또래가 많았다. 어머니들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나던 해에는 일년 내내 마을에 금줄이 떠나질 않았다고 한다.
어떤 걸인이 "이 마을은 일년 내내 애만 낳느냐?"고 투덜대기도 했단다. 우리 고장의 풍습은 애를 낳거나 제사를 지내면 동냥을 주지않는 풍습이 있었는데 큰마음을 먹고 들어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니 돌아서는 뒤통수가 얼마나 싸늘했을까 싶다. 일년 내내 아이를 낳아준 엄마들 덕에 우리는 또래친구가 많아서 좋았다.
그곳에서 자라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크로바꽃을 따서 족두리도 만들고 꽃시계와 꽃반지를 만들어 끼엇다. 호박꽃초롱으로 불을 밝히고 신랑각시 흉내를 내며 해맑게 웃었던 일이 어제 일인 양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혼례식 예행연습을 일찌감치 한 셈이다. 그시절을 영화필름처럼 다시 한 번 되돌려 놓고 싶은 순간이다.
지금은 예뻐지고 싶어서 황토팩이 유행인데 우리는 벌써 50여년 전부터 갯벌로 팩을 했었다. 날씨가 더울 때면 상의를 벗은 채 바다로 들어가 뻘 싸움을 하면 팩은 힘들이지 않고 자동으로 되었다. 순천엔 눈 구경하기가 어려워 눈싸움을 해본 기억은 없지만 뻘싸움은 자주 했었다.옷을 버렸다고 어머니에게 호되게 야단도 맞았지만 자고 나면 바다가 또 부르는 걸 어쪄겠는가.
순천만은 우리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많은 먹을거리도 제공해 주었다.
길이 2미터 너비 40센티정도의 널판지에 왼쪽 무릎을 얹고 오른쪽발로 갯벌을 박차듯 밀면, 10여미터는 미끄러져 나간다. 널판지를 타고다니며 여러가지의 조개를 잡아다 먹었는데 훗날 우리 딸아이는 그모습을 보고 '갯썰매를 타는모습'이라고 적었다.
내가 널판지를 타고 맨처음 조개잡이를 간 건 낭랑18세 때였다. 친구들이 하는 건 쉬워보였는데 내가 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널판지가 제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왔다갔다하였다. 어미둥지를 갓 나온 열쭝이처럼 엎어지다밀려가다를 반복하며 너무 초라한 내 모습이 안타까워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었다.
나는 그날을 생에 중 가장 절망적이었던 날로 기억한다. 친구들처럼 가사도 못하고, 완고하신 아버님 때문에 진학은 더욱 안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란한 기적소리와 눈부신 아지랑이가 내 마음을 한층 더 심란하게 흔들고 지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엎어지지 않고 조개를 잡아오는 날은 개선장군이 부럽지 않았다. 바다 전역에 널려있는 빨간식물의 칠면초는 잎을 뜯어다 밀가루와 버무려서 찌면 짭조롬하면서도 향긋한 갯내음이 나서 그 시절엔 일품별미였다.
우리 마을은 바다와 가까이 있지만 어업을 생업으로 하지는 못했다. 소위 양반행세를 한답시고 어업은 천민이나 하는 직업이라고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 가 보면 천민촌이라고 혼사도 거부했던 마을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급주택들이 줄지어 서있고,
그 동네의 자녀들이 타고온 자가용은 여느 유료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양반을 고집했던 양반촌은 아직도 가난한 티를 벗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글은 스승이 반 팔자고 사람은 부모가 반 팔자'라고 한 어느 교수님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주로 게를 많이 잡았고 그 게는 뻘흙만 먹고 사는 것 같았는데 뻘을 큰 엄지발가락으로 집어서 입에다 넣을 땐 나머지 발들을 엉거주춤 세우고 먹는데 우리 중에서 유머감각이 빠른 사람은 이 모양을 보고 '게춤'을 개발해서 추기도 했다.
짱뚱어는 바다에 기어다니는 걸 낚싯대로 긁어 낚는데 탕으로 끓이거나 말려서 구워 갖은양념에 무치면 최고급 도시락 반찬이 된다. 그래서 옛날 선조들은 '흉년이 들면 바닷가로 가라'는 지혜로운 말을 남겼을 것이다.
순천만은 먹을거리만 주는 게 아니다. 지금은 관광지가 되어 귀하신 몸이 된 갈대는 꽃이 만개하기 전에 따서 말렸다. 방에서 쓰는 비를 만들면 아주 미세한 먼지까지 쓸어지고, 대는 울타리를 막거나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카메라를 설치하고 칠면초와 갈대 채취를 감시하고 있으니 아쉽다.
특히 순천만은 일몰광경이 장관이다. 서녘 산에 해가 걸릴 때쯤이면 노을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지천에 널려있는 붉은 칠면초와 어우러져 홍해를 이룬다. 거기에 청순한 갈대가 하늘거리고 철새들이 잠자리를 찾아가느라 끼욱끼욱 울며 나는 모습을 보려고 사진작가와 조류학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바람에 조용하고 한가롭던 옛날의 정취가 그립다.
옛날처럼 딸아이가 이름지어 준 갯썰매를 타고 조개잡이도 하고 갓 피어난 갈때꽃도 한아름 꺾어 가슴에 안고, 그리웠던 친구들과 '오늘도 즐거워~어라 조개잡~이 가는 처녀들~'하며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고 싶은 건 지나친 나의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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