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그녀는 과연 나쁜 여자였을까
2008.04.29 00:05
나혜석, 그녀는 과연 나쁜 여자였을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봄이 되자 뜰에 습습하게 서 있던 꽃나무들이 때를 만난 듯 다투어 꽃을 피웠다. 흩어진 햇빛 조각을 받아 매화, 진달래, 살구꽃, 백목련, 자목련, 꽃사과, 나무 밑의 수선화까지 피었다. 이제는 붉고 흰 철쭉과 영산홍이 한창이다. 키 큰 네 그루의 영산홍 꽃숭어리숭어리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마치 무슨 이야기들을 쏟아낼 것만 같다. 아침저녁으로 보는 꽃인데도 볼 때마다 매번 멈칫해지는 건 왜일까, 가슴에 구곡간장을 품고 생을 마친 농염한 한 여인이 떠오른다.
나혜석! 정말 그는 나쁜(?) 여자였을까. 시대를 잘 못 만난 불운의 여자! 어찌 그가 나쁜 여자였겠는가, 내가 그의 전기를 접한 것은 대학생이던 큰딸이 사다 놓은 책에서다. 30여 년 전 일이다. ‘어미는 선각자였었느니라’라는 제목이었다. 재기(才氣) 넘치고 총명하며 용모가 출중한 여자,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한 여인의 말로(末路)는 그처럼 비참했을까.
나혜석(羅惠錫)은 1896년 4월 28일 수원에서 태어났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뒤에, 일본 도쿄유학까지 마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였다. 1920년대 초, 그 시절은 김일엽, 최승희, 허정숙, 김명순 등의 여성들이 우리보다 100년 앞서 개항한 일본에 유학했을 때였다. 일본에서는 그 무렵 여성해방운동을 내세우는 조류가 사회 모듬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일 때였다. 그 때 열여덟 살이었던 나혜석은 유학생들이 발행하는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란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며, 미술학도이면서 문학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모두 7편의 단편을 발표했는데 처녀작 ‘부부’는 우리 소설사에서 최초의 여성소설이었다. 그림도 모두 300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일생을 화가로 산 여성이다. 유학을 마치고 와서 25살에 자유연애로 변호사 자격을 가진 청년, 김우영과 결혼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성 서양화가도 단 세 명에 불과했었다. 남성 화가들의 활동이 부진할 때임에도 나혜석은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1921년 첫 개인전을 앞두고 동아일보에 보낸 <회화와 조선여자>라는 기고문과 그다음 달에 매일신보에서 <양화 전람에 대하여>라는 글에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70점을 출품한 첫 개인전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이틀 동안에 무려 5천여 명의 관객이 모였었다. 그의 그림에 대한 평도 좋아서 전시 중에 20점이 팔리기도 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성인데다가 이화학당 시절 김마리아, 신준려, 박인덕 등과 함께 3. 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살이까지 한 전력이 있는 여성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이 더했을 것이다. 당시 그의 활동은 일거일동이 신문의 취재꺼리가 되었었다.
나혜석은 결혼 뒤에도 예술, 작가, 사회활동, 현모양처생활도 병행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살려 나갔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우리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 선택 받은 사람이었다. 남편이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로 근무한 덕에 1927년 6월에 그
들 부부는 세계여행을 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 때가 나혜석은 아이들이 셋이나 되었지만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유명한 미술관마다 관람하는 행운도 가졌다. 하늘의 길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부산에서 철도로 서울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한 다음, 파리에 머물면서 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그 시절엔 꿈같은 이야기다. 다시 대서양을 건너고 미국을 가로 질러 태평양을 건넌 다음 1년 9개 월 만에 돌아온 그들 부부는 화젯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여행을 떠날 당시 신문에는 나혜석의 여행기사가 실리고 인터뷰기사도 소개되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기자 최은희는 평북 곽산역까지 동행하며 나혜석을 취재했었다.
그런 그에게 왜 이혼이란 날벼락이 떨어졌을까. 유럽 체류 중 최린(3.1운동계획한 독립운동가, 뒤에는 친일 활동을 한 사람)과의 교제가 발단이 되었고, 그 때문에 나혜석은 남편에게 빌고 빌었지만 두 번째, 나혜석이 어려운 생활문제로 의논 차 최린에게 만나자고 기별을 한 것이 실수였다. 그 일을 최린이 친구에게 흘리고 그 친구가 술좌석에서 발설을 하는 바람에 끝내 수습되지 않고 이혼까지 가고 말았다. 그만한 실수를 남자가 했다면 용서를 받을 법한데도 여자이기에 허망하게 이혼으로 끝난 것이다. 김우영은 이혼한 뒤 한 달도 안 되어서 재혼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억울한 것은 부부공동으로 모은 재산(그림을 판 것)이지만 나혜석은 아무 도움도 못 받았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이던 사회규범이 아까운 한 여인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요즘 여성계에서 바라던 기존의 호주제도폐지, 남녀평등, 모성보호, 여성문제의 법 개정 등을 이미 한 세기를 앞서 주장했던 여성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나혜석이 있었다. 그들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점차적으로 여성해방이란 담론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했으리라. 그가 몸과 가슴으로 경험한 여성문제에 대한 그의 글들이 지금은 우리나라 여성사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1934년 나혜석은 <삼천리>에 ‘이혼고백’이란 글에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경험을 담아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 땐 이광수, 그 외에 쟁쟁한 남성들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좌담을 할 만큼 개방적인데도 그 시절은 법률적으로 여성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나혜석은 위자료 한 푼 주지 않는 남편을 향해 재산 공동소유권을 주장하며 분배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에 빈 몸으로 시댁에서 나온 나혜석은 얼마의 그림을 팔아 금강산으로, 친구가 있는 학교의 비어있는 기숙사로,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 옆 수덕여관으로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예술혼의 불을 살려 보았다. 이미 이혼이 논의되었을 때부터 선전에도 특선, 입선을 거듭하며 이혼 뒤에는 일본 제전에서도 특선, 입선을 하는 영예도 얻었다. 하지만 잡지에, 신문에 글을 기고한 원고료로 생계를 잇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933년 2월에 서울 수성동의 한 2층 집에 ‘여자미술학사’라는 간판을 달아 학생을 기다렸지만 생계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무렵 한 여기자가 찾아갔을 때 방은 냉방이었고 나혜석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이 넷을 떼어놓고 이혼 당한 여자의 손이 어찌 안 떨리겠는가. 가슴에 피멍이 든 그가 어찌 멀쩡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시대를 앞 서 간 한 여성은 슬프게도 그렇게 좌절의 내리막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의 40대가 그렇게 녹아가고 있었다.
1944년, 몇 해 동안 머물었던 수덕사 근처를 떠난 나혜석은 몇 군데 양로원에서 이름을 바꾸어가며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그땐 이미 건강도 나빠졌고 떨리는 손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타던 예술혼도 어느 사이 잿불로 남고 말았다. 그 뒤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1948년 12월 10일 추운 저녁, 서울에 있는 용산 시립병원에 행려병자로 실려 간 누더기를 걸친 한 여인이 바로 나혜석이었다. 53세의 나이로 그는 그렇게 이승을 떠났다.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의 수난사를 더듬어 보며 나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듯 마음이 아팠다. 한 줄 쓰고 또 덮어 놓았다 다시 쓰는 일을 거듭하며 겨우 줄기를 잡아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때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2008. 4. 25.)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봄이 되자 뜰에 습습하게 서 있던 꽃나무들이 때를 만난 듯 다투어 꽃을 피웠다. 흩어진 햇빛 조각을 받아 매화, 진달래, 살구꽃, 백목련, 자목련, 꽃사과, 나무 밑의 수선화까지 피었다. 이제는 붉고 흰 철쭉과 영산홍이 한창이다. 키 큰 네 그루의 영산홍 꽃숭어리숭어리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마치 무슨 이야기들을 쏟아낼 것만 같다. 아침저녁으로 보는 꽃인데도 볼 때마다 매번 멈칫해지는 건 왜일까, 가슴에 구곡간장을 품고 생을 마친 농염한 한 여인이 떠오른다.
나혜석! 정말 그는 나쁜(?) 여자였을까. 시대를 잘 못 만난 불운의 여자! 어찌 그가 나쁜 여자였겠는가, 내가 그의 전기를 접한 것은 대학생이던 큰딸이 사다 놓은 책에서다. 30여 년 전 일이다. ‘어미는 선각자였었느니라’라는 제목이었다. 재기(才氣) 넘치고 총명하며 용모가 출중한 여자, 무엇 하나 빠질 것 없는 한 여인의 말로(末路)는 그처럼 비참했을까.
나혜석(羅惠錫)은 1896년 4월 28일 수원에서 태어났었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는 뒤에, 일본 도쿄유학까지 마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였다. 1920년대 초, 그 시절은 김일엽, 최승희, 허정숙, 김명순 등의 여성들이 우리보다 100년 앞서 개항한 일본에 유학했을 때였다. 일본에서는 그 무렵 여성해방운동을 내세우는 조류가 사회 모듬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일 때였다. 그 때 열여덟 살이었던 나혜석은 유학생들이 발행하는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이란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며, 미술학도이면서 문학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모두 7편의 단편을 발표했는데 처녀작 ‘부부’는 우리 소설사에서 최초의 여성소설이었다. 그림도 모두 300여 점의 작품을 남겼고 일생을 화가로 산 여성이다. 유학을 마치고 와서 25살에 자유연애로 변호사 자격을 가진 청년, 김우영과 결혼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남성 서양화가도 단 세 명에 불과했었다. 남성 화가들의 활동이 부진할 때임에도 나혜석은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 1921년 첫 개인전을 앞두고 동아일보에 보낸 <회화와 조선여자>라는 기고문과 그다음 달에 매일신보에서 <양화 전람에 대하여>라는 글에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기도 했었다. 70점을 출품한 첫 개인전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이틀 동안에 무려 5천여 명의 관객이 모였었다. 그의 그림에 대한 평도 좋아서 전시 중에 20점이 팔리기도 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여성인데다가 이화학당 시절 김마리아, 신준려, 박인덕 등과 함께 3. 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살이까지 한 전력이 있는 여성이어서 사람들의 관심이 더했을 것이다. 당시 그의 활동은 일거일동이 신문의 취재꺼리가 되었었다.
나혜석은 결혼 뒤에도 예술, 작가, 사회활동, 현모양처생활도 병행하며 자기의 정체성을 살려 나갔다. 유교사상이 뿌리 깊은 우리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시절 선택 받은 사람이었다. 남편이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로 근무한 덕에 1927년 6월에 그
들 부부는 세계여행을 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 때가 나혜석은 아이들이 셋이나 되었지만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유명한 미술관마다 관람하는 행운도 가졌다. 하늘의 길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 부산에서 철도로 서울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한 다음, 파리에 머물면서 여행을 했다는 사실은 그 시절엔 꿈같은 이야기다. 다시 대서양을 건너고 미국을 가로 질러 태평양을 건넌 다음 1년 9개 월 만에 돌아온 그들 부부는 화젯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여행을 떠날 당시 신문에는 나혜석의 여행기사가 실리고 인터뷰기사도 소개되었다. 심지어 당시 조선일보 기자 최은희는 평북 곽산역까지 동행하며 나혜석을 취재했었다.
그런 그에게 왜 이혼이란 날벼락이 떨어졌을까. 유럽 체류 중 최린(3.1운동계획한 독립운동가, 뒤에는 친일 활동을 한 사람)과의 교제가 발단이 되었고, 그 때문에 나혜석은 남편에게 빌고 빌었지만 두 번째, 나혜석이 어려운 생활문제로 의논 차 최린에게 만나자고 기별을 한 것이 실수였다. 그 일을 최린이 친구에게 흘리고 그 친구가 술좌석에서 발설을 하는 바람에 끝내 수습되지 않고 이혼까지 가고 말았다. 그만한 실수를 남자가 했다면 용서를 받을 법한데도 여자이기에 허망하게 이혼으로 끝난 것이다. 김우영은 이혼한 뒤 한 달도 안 되어서 재혼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억울한 것은 부부공동으로 모은 재산(그림을 판 것)이지만 나혜석은 아무 도움도 못 받았다.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항력적이던 사회규범이 아까운 한 여인을, 몰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요즘 여성계에서 바라던 기존의 호주제도폐지, 남녀평등, 모성보호, 여성문제의 법 개정 등을 이미 한 세기를 앞서 주장했던 여성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나혜석이 있었다. 그들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점차적으로 여성해방이란 담론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했으리라. 그가 몸과 가슴으로 경험한 여성문제에 대한 그의 글들이 지금은 우리나라 여성사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1934년 나혜석은 <삼천리>에 ‘이혼고백’이란 글에 자신의 솔직한 생각과 경험을 담아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 땐 이광수, 그 외에 쟁쟁한 남성들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좌담을 할 만큼 개방적인데도 그 시절은 법률적으로 여성이 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나혜석은 위자료 한 푼 주지 않는 남편을 향해 재산 공동소유권을 주장하며 분배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말았다. 눈보라가 치는 추운 겨울에 빈 몸으로 시댁에서 나온 나혜석은 얼마의 그림을 팔아 금강산으로, 친구가 있는 학교의 비어있는 기숙사로, 김일엽을 찾아 수덕사 옆 수덕여관으로 이리저리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예술혼의 불을 살려 보았다. 이미 이혼이 논의되었을 때부터 선전에도 특선, 입선을 거듭하며 이혼 뒤에는 일본 제전에서도 특선, 입선을 하는 영예도 얻었다. 하지만 잡지에, 신문에 글을 기고한 원고료로 생계를 잇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933년 2월에 서울 수성동의 한 2층 집에 ‘여자미술학사’라는 간판을 달아 학생을 기다렸지만 생계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무렵 한 여기자가 찾아갔을 때 방은 냉방이었고 나혜석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아이 넷을 떼어놓고 이혼 당한 여자의 손이 어찌 안 떨리겠는가. 가슴에 피멍이 든 그가 어찌 멀쩡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시대를 앞 서 간 한 여성은 슬프게도 그렇게 좌절의 내리막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의 40대가 그렇게 녹아가고 있었다.
1944년, 몇 해 동안 머물었던 수덕사 근처를 떠난 나혜석은 몇 군데 양로원에서 이름을 바꾸어가며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그땐 이미 건강도 나빠졌고 떨리는 손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타던 예술혼도 어느 사이 잿불로 남고 말았다. 그 뒤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1948년 12월 10일 추운 저녁, 서울에 있는 용산 시립병원에 행려병자로 실려 간 누더기를 걸친 한 여인이 바로 나혜석이었다. 53세의 나이로 그는 그렇게 이승을 떠났다.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의 수난사를 더듬어 보며 나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듯 마음이 아팠다. 한 줄 쓰고 또 덮어 놓았다 다시 쓰는 일을 거듭하며 겨우 줄기를 잡아 이 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때늦게나마 명복을 빈다.
(2008.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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