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는 감나무 밑에서

2008.04.15 10:07

정원정 조회 수:719 추천:2

계절이 지나는 감나무 밭에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정원정
  
                                                            

아직은 눈이 오지 않은 12월 초, 40여 그루의 감나무는 잎을 다 떨어뜨리고 졸가리만 남아 있다. 잠시 나무 밑 검불 위에 섰다. 한해의 몫을 다한 감나무의 앙상한 형태가 마치 내 말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진즉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은 시리도록 조용한데 이따금 부는 바람은 내 뺨을 훑고 지나간다. 바람결은 내게 무얼 그렇게 서성이냐며 재촉하는 듯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계절의 변화 앞에서 세월의 덧없음을 지금에서야 느끼는 게 아닌데 오늘 따라 가슴을 치는 까닭이 무엇일까. 10년 주기가 마치 1년의 시간 간격으로 훌쩍 넘어 온 듯한 초조 때문일까.

아까부터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듯 허리를 굽혀 하늘을 업은 저 동쪽 산봉우리들은 석양의 햇빛가루를 보듬고서 어디든 금세 숯불을 지필 양, 온 산이 일렁이고 있다. 한 생의 굴곡진 상흔들을 풀어 놓은들, 가는 해가 어찌 멈추겠는가. 휘휘하게 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거늘 지는 해를 고이 보내자니 저렇듯 애타게 가슴을 치는 설움을 담아내는 것이리라. 지나고 나면 뒷날 가슴에 저린 설움도 느껍다 못해 푸르디푸른 그리움으로 남지 않을까.

이제는 다 잊고 편안한 마음으로 계절을 넘겨도 될 나이인데 아직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싸한 바람이 심장을 훑고 요동을 친다. 젊은 날, 봄이 올 무렵에 신록의 5월이 오기 훨씬 전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숲 냄새가 홀연히 코를 자극했었다.  
“아! 이 숲 냄새!”
그럴 적에 옆에서 남편은 허투루 혀를 끌끌 찼다. 얼토당토않은 냄새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저 사람의 비위를 누가 맞출 꺼나?”
그는 동정심을 발휘해서 우스개마냥 혼잣말을 했었다. 한참 일찍 계절을 감지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었다. 나이 들면 덜하겠지 싶었다. 허나 계절이 지날 때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귀중한 무엇을 잃어버린 듯, 또는 무언가에 쫓기는 듯, 나를 채근하는 그림자는 여전했었다. 늘 새로움을 향한 부푼 설렘이, 꼭 내게 어떤 가능성이 주어질 것만 같았다. 그 꿈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무에 그리 가능성이 내 생에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데 막연한 동경은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긴 세월 허상만 붙들고 갈등하다 이곳 시골까지 밀려 온 느낌이다. 십여 년 전, 줄기차게 살아 온 길에서 조금 비껴 살고 싶었다. 내가 이곳에 올 땐 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읽고 싶은 책을 읽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노동과 독서는 함께 할 수 없었다. 혹 젊었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노동은 신성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의미를 덧붙이자면 그렇겠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몸이 지치도록 노동을 하다보면 고결한 언어로 육체노동을 신성시 할 마음이 없었다. 어지간할 땐 그 말이 해당되겠지만 어디 세상사가 그렇게 넘겨지던 일이던가. 그리고 항상 꿈만 꾸다 말았지만, 시골 아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무료독서실을 만들고 싶었다. 성장기에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꿈을 지니게 되고 곁길로 가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다. 건물, 운영비, 관리인력,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거창한 구상이 아닌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허상만 쫓고 있던 사이 세월은 더 기다려 주지 않고 몸은 말을 듣지 않은 데 또 이 계절은 속절없이 지나가는가.

나는 가끔 어렸을 적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하릴 없이 툇마루에서 이리저리 누워서 뒹굴며, 멀찍이 윗동네 너머에 있는 산의 연봉을 바라보던 풍경이다. 산꼭대기마다 줄줄이 하늘을 배경삼아 서 있는 나무들의 형태가 기기묘묘했었다. 어떤 것은 무서운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형상으로, 어떤 것은 아기를 등에 업은 가엾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또 지게를 지고 가는 초부로, 어떤 것은 치마를 휘날리는 여인으로, 씨름선수 같은 장정의 모습으로, 어떤 것은 달구지를 끌고 가는 모양, 참 많은 형상을 감상 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뜯어보고 있노라면 하늘에서는 흰 구름이 느릿느릿 흐르기도 했었다. 그 땐 그토록 눈이 맑았는데 지금은 눈이 거시시해서일까. 이제는 그런 산줄기의 꿈같던 모양은 다시 볼 수 없다. 어디 눈뿐이겠는가. 세상살이에서 마음도 때 묻고 녹슬어 버렸으니 사람이나 사물과 자연까지라도 맑은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우주의 운기 속에서 너와 내가 보살핌을 주고받으며 살아 왔다. 신의 은총이려니 싶다. 그 존재감이 나로 하여금 늘 감사하게 했다. 이제는 해가 서쪽으로 기울듯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내 시간이 많지 않다. 정말 세상은 아름다운데……. 착한 사람이 아름답고 자연이 아름답지 않은가.
성경의 창조설화에서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참 좋았다’라고 하셨다. 내 말년으로 접어든 지금, 계절이 지나는 이 마당에 무엇보다도 마음의 묵은 찌꺼기를 씻고 싶다. 이 세상에 남아 있을 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닦을 일이다. 그래서 너와 내가 다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기어이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갔어도 서녘하늘의 노을은 저토록 아름다운데 말이다.
                                  (2000.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