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언니
2008.04.16 19:22
봉순이 언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봉순이 언니'라는 책이 어느 방송국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가 되었다. 제목만 보아도 손끝이 칼로 벤 것처럼 아픔이 스쳤다. 서점 앞에서 차마 그냥 가지 못하고 책을 사서 펼쳐보니 책 속에 봉순이 언니는 불행하고 팔자가 사나운 아이로 시작되고 있었다. 책 속에 봉순이 언니라도 행복하길 바랐지만, 절망이 가득한 삶이어서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러나 봉순이 언니는 희망을 잃지 않고 순박한 모습으로 살아줘서 고마웠다.
보아주는 이 없이 밤에 피었다가 아침에 시들어 버리는 박꽃처럼 21살의 꽃다운 나이에 소리 없이 가버리고 만 우리 봉순이 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모습마저 희미해져 애써 떠올려 봐도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언니는 박꽃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한여름이 되면 박 넝쿨은 온 울타리를 뒤덮고 연초록 꽃망울을 살그머니 숨겨두었다가 어느 날 초저녁에 아무도 모르게 하얗게 웃고 피어난다. 언니는 달밤에 보는 박꽃을 더 좋아했었다. 그런 날 밤에는 내 손을 잡고 박꽃보다 더 하얀 웃음을 웃었다.
언니는 무엇이 그리 급해서 우리 곁을 훌쩍 떠났을까? 언니의 널에는 언니가 밤마다 수놓았던 십장생 횟대보, 원앙새 베갯닛, 목단 꽃 화려한 방석, 다 놓지 못한 책상보 십자수와 함께 차곡차곡 넣어주었다. 언니가 쓰던 오색 한지가 붙은 육각 비단함. 예쁜 왕골 모집작, 즐겨 읽던 구운몽, 춘향전이 모두 태워지려 할 때 나는 오색실로 꿰매진 바가지만 몰래 감추었다.
어느 때인가 정제에서 설거지를 하던 언니를 나는 졸졸 따라다니다가 언니가 아끼던 물바가지를 반쪽으로 갈라놓았다. 아까워하던 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삼거리에서 먹자치기를 신나게 하고 돌아와 보니 바가지가 고운 색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가지에는 언니의 고운 색실들을 담아두고 매일 밤 호롱불 아래서 한 올 한 올 수를 놓았다. ‘비 내리는 고모령'을 가만가만 부르던 언니의 노fot소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언니와 한 방을 쓰던 나는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언니는 스무 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웃어주던 봉순이 언니. 그 고운 우리 언니를 누가 데려갔을까. 언니의 백상여가 연분홍 복숭아꽃잎이 무수히 떨어지던 고개 너머로 사라지고 어머니는 여러 번 기함을 하셨지만 세월이 자꾸 흐르고 어머니의 떨리는 손에는 곱게 치장된 허수아비 봉순이 언니가 만들어졌다. 객지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는 한 동네 사는 내 동창 형과 언니의 혼백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어른들 말씀처럼 정말 언니는 저승을 가지 못하고 우리 주위를 맴돌았을까.
또 다른 봄이 돌아와 마을에 화전놀이가 열리면 내 동창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나란히 앉았고 어머니들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복숭아꽃잎이 떨어졌다. 설이 돌아오면 사돈끼리 음식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봉순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해주던 내 동창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당시 문상을 가려는 오빠에게 어머니는,
"애야, 그 집은 다른 집과 다르다는 것 알제?"
떨리던 어머니의 목소리에 갈퀴보다 더 억센 어머니의 손이 가냘파 보였다. 그 뒤 어머니도 보이지 않는 사위를 털어내시는 듯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이제는 언니를 잊고 살지만 해마다 봄이 오면 울타리 밑에 박씨를 정성껏 심는다. 봉순이 언니를 애써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박꽃이 피면 향기 없는 언니의 희디 흰 웃음을 만나보고 싶어서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형효순
'봉순이 언니'라는 책이 어느 방송국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소개가 되었다. 제목만 보아도 손끝이 칼로 벤 것처럼 아픔이 스쳤다. 서점 앞에서 차마 그냥 가지 못하고 책을 사서 펼쳐보니 책 속에 봉순이 언니는 불행하고 팔자가 사나운 아이로 시작되고 있었다. 책 속에 봉순이 언니라도 행복하길 바랐지만, 절망이 가득한 삶이어서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그러나 봉순이 언니는 희망을 잃지 않고 순박한 모습으로 살아줘서 고마웠다.
보아주는 이 없이 밤에 피었다가 아침에 시들어 버리는 박꽃처럼 21살의 꽃다운 나이에 소리 없이 가버리고 만 우리 봉순이 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이제는 모습마저 희미해져 애써 떠올려 봐도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언니는 박꽃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한여름이 되면 박 넝쿨은 온 울타리를 뒤덮고 연초록 꽃망울을 살그머니 숨겨두었다가 어느 날 초저녁에 아무도 모르게 하얗게 웃고 피어난다. 언니는 달밤에 보는 박꽃을 더 좋아했었다. 그런 날 밤에는 내 손을 잡고 박꽃보다 더 하얀 웃음을 웃었다.
언니는 무엇이 그리 급해서 우리 곁을 훌쩍 떠났을까? 언니의 널에는 언니가 밤마다 수놓았던 십장생 횟대보, 원앙새 베갯닛, 목단 꽃 화려한 방석, 다 놓지 못한 책상보 십자수와 함께 차곡차곡 넣어주었다. 언니가 쓰던 오색 한지가 붙은 육각 비단함. 예쁜 왕골 모집작, 즐겨 읽던 구운몽, 춘향전이 모두 태워지려 할 때 나는 오색실로 꿰매진 바가지만 몰래 감추었다.
어느 때인가 정제에서 설거지를 하던 언니를 나는 졸졸 따라다니다가 언니가 아끼던 물바가지를 반쪽으로 갈라놓았다. 아까워하던 언니를 아랑곳하지 않고 삼거리에서 먹자치기를 신나게 하고 돌아와 보니 바가지가 고운 색실로 꿰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가지에는 언니의 고운 색실들을 담아두고 매일 밤 호롱불 아래서 한 올 한 올 수를 놓았다. ‘비 내리는 고모령'을 가만가만 부르던 언니의 노fot소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언니와 한 방을 쓰던 나는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언니는 스무 살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웃어주던 봉순이 언니. 그 고운 우리 언니를 누가 데려갔을까. 언니의 백상여가 연분홍 복숭아꽃잎이 무수히 떨어지던 고개 너머로 사라지고 어머니는 여러 번 기함을 하셨지만 세월이 자꾸 흐르고 어머니의 떨리는 손에는 곱게 치장된 허수아비 봉순이 언니가 만들어졌다. 객지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는 한 동네 사는 내 동창 형과 언니의 혼백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어른들 말씀처럼 정말 언니는 저승을 가지 못하고 우리 주위를 맴돌았을까.
또 다른 봄이 돌아와 마을에 화전놀이가 열리면 내 동창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나란히 앉았고 어머니들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복숭아꽃잎이 떨어졌다. 설이 돌아오면 사돈끼리 음식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봉순이 언니를 며느리로 인정해주던 내 동창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당시 문상을 가려는 오빠에게 어머니는,
"애야, 그 집은 다른 집과 다르다는 것 알제?"
떨리던 어머니의 목소리에 갈퀴보다 더 억센 어머니의 손이 가냘파 보였다. 그 뒤 어머니도 보이지 않는 사위를 털어내시는 듯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이제는 언니를 잊고 살지만 해마다 봄이 오면 울타리 밑에 박씨를 정성껏 심는다. 봉순이 언니를 애써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박꽃이 피면 향기 없는 언니의 희디 흰 웃음을 만나보고 싶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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