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왜 많은 시간이 걸린 걸까요? 그 이유는 몬드리안이 작품을 완성시키기 위해 끝도 없는 고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정밀하게 사물을 재현한 그림들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구상화들은 그리기 전부터 이미 정해진 방향이 있지만, 몬드리안의 그림은 정해진 결론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완성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 그려놓은 몬드리안의 그림을 비슷하게 따라 그리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런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한다는 것은 결코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몬드리안 그림의 면 하나 선 하나 색 하나는 그의 생각의 결정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 밖의 다른 그림들을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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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 Life with Gingerpot II(1912,oil on canvas)
몬드리안은 사물의 본질을 그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감정은 대상의 외형에서 방해받는다.
그래서 대상은 추상화 되어야 한다.”대부분 그렇듯이, 몬드리안 역시 처음 그림을 시작하며, 위대한 화가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그림을 고민하고, 고흐 마티스 피카소 등 수많은 작가들의 그림에 관해 탐구합니다.
그리고 그림으로 자연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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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de la Concorde (1938-43, oil on canvas)
그가 30대 후반에 그린 그림들을 보면 대상이 점점 절제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물의 본질만을 보여주려는 몬드리안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40대 이후 그의 그림들은 점점 단순화되며,
대담한 원색과 선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그 후 몬드리안의 그림은 완전한 추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추상화가 피트 몬드리안… 그는 관객을 위해 더욱 더 대상의 본질만을 정리해서 간결하게 표현했던 것인데 글쎄요…
그의 그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 컨텐츠 제공 · 서정욱 [미술토크] / 조선일보 2011.01.05.
설명이 필요없는 그림, 마크 로스코 · (Mark Rothko,1903~1970)
오늘 소개할 화가의 작품은 설명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설명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화가는 자신의 작품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 2011.05.12.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 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 어떤 설명을 달아서도 안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의 해야 할 일은 침묵이다. ”
한번은 미술비평가가 자신의 작품에 관해 악평을 늘어놓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작품에 관하여 변호할 의도가 없다.
내 작품은 스스로를 방어한다. ”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설명도 필요없었던 것이죠.
작품이 스스로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그의 가족은 그가 10살되던 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 오레곤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는 불우한 유년을 보냈습니다.
1921년 예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미국의 반유태주의 물결로 인해 장학금은 취소되고 1923년 결국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원래 그가 목표했던 기술자나 변호사를 포기하고 1923년 가을 뉴욕으로 옮겼으며,
1925년 그림을 시작해 거의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습니다.
1968년 예일대에서 명예예술학 박사학위를 받는 등 화가로서 서서히 유명해지고 이름이 나자 자살했다.
1970년 2월 25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유명해 지는 것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의 자살은 고흐를 연상시킨다.
그는 색채를 종교이상으로 생각했다.
이를 통해서 삶을 조명하고 탐색하고 명상하고 성찰했다.
[아래 로스코 사진] 화가라기보다 고뇌하는 철학자처럼 보인다.
▶ Mark Rothko in his West 53rd Street studio, c. 1953, photograph by Henry Elkan
Rothko는 Art Students League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1920년대 후반에 모던니스트 화가인 Milton Avery와 만나 친해지면서
초기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 Mark Rothko, Street Scene, c.1937, National Gallery of Art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Rothko는 주로 거리풍경이나 인물이 있는 실내를 그렸습니다.
그의 그림에선 기존의 표현방식을 거부하고, 물체에 대해 감정적 접근을 강조하여(즉, 동심으로의 접근),
그림의 고의적인 변형과 거친 적용으로 특징되는 방식을 채택하였습니다.
▶ Mark Rothko, Underground Fantasy [Subway], c.1940, National Gallery of Art
그는 뉴욕의 지하철을 소재로 몇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지하철의 창문, 출입구, 그리고 벽 등을 구조적 및 표현적 장치로써 사용하고 있습니다.
Rothko가 그린 1930년대의 거리나 지하철 그림은
'애쉬캔 학파(Ashcan School)'나 대공황기의 사실주의 화풍과도 비교될 수 있으나,
이러한 유사성은 단지 도시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만 일치할 따름입니다.
Rothko는 도시생활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구조적 공간의 인식경험을 표현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후기 작품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습니다.
Rothko는 도시생활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구조적 공간의 인식경험을 표현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점은 그의 후기 작품에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습니다.
Rothko가 '색면 회화'라 불리우는 자신의 방식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47년 무렵부터 입니다.
그 후 몇 차례 변화가 있지만 대체로 Rothko는 거대한 크기의 사각형 캔버스에 강렬한 색채를 칠한 뒤
그 위에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한 사각형의 색채 덩어리가 부유하는 듯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인간의 감성문제, 즉 인간적 고뇌나 비극, 희열, 그리고 운명 등을 그의 그림에서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사람들과 함께 종교적 체험까지 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습니다.
1947년 이후 그는 그림의 제목을 붙이는데 있어 기존 방식대신에 숫자나 색깔로 작품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는 "침묵이 가장 정확하다" 라고 말하며, 작품의 의미를 직접 설명하는 것을 피하였습니다.
즉 단어의 의미가 관객의 마음과 상상을 마비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체적 병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우울증에 빠져,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화면은 점점 어두워져 갔고,
1970년 2월 25일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970년
2월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자살했다.
그의 죽음을 전해 들은 케서린 쿠는
저서에서 "폐부를 파고드는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스스로 갉아먹고 있던 자기모순과 의구심 때문에.... 특히 자신의 작품과 가족에 관해서는 더했다"라고 당시의 감정을 밝혔다.
마크 로스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이다.
뉴욕에서 화가로 활동하며 당시 세계 미술계를 주름잡던 뉴욕파의 일원이 되기도 했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관심은 없었다.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는 잭슨 플록이었으며
팝아트는 앤디 워홀의 독무대였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다이내믹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너무 밋밋해 보였다.
대신 잭슨 플록과 앤디
워홀의 작품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화려함을 갖추고 있었다.
성공에 대한 마크 로스코의 열망은 열등감으로 쌓여갔다.
물론 그의 작품이 세상에 두각을 나타낸 것이 그가 죽은 후는 아니다.
그의 말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은 물론 휘트니 미술관에서도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간곡하게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그는 뉴욕파의 일원으로, 추상표현주의 작가 중 한명으로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어떤 불가능한 색에 대한 도전이었고,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색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가를 듣기 전 스스로 자살을 선택했다.
그가 죽은 후 작품 소유권을 두고 그의 딸과 뉴욕 화랑들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다. 소송은 6년간 지속됐고,
이 소송은 아이러니하게도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재평가하는 시간이 됐다.
사람들은 마크 로스코의 작품에 대해 "초월적 힘을 가진 색채"라고 평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단순한 색의 요동치는 생명력과 숭고함을 가진 작품"이란 말은
마크 로스코가 가장 듣고 싶어 한 평가였는지 모른다.
그런 그의 염원을 담아 그의 작품 세계를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텍사스 휴스턴에 독특한 예배당을 세웠다.
'로스코 예배당'. 그 안에는 종교적 상징물 대신 그의 그림이 걸려 있다.
마티스는 색채를 통해 외부세계가 아닌 자신의 내부감정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대담한 변형과 자유로운 터치 강렬한 보색대비, 평평한 구성 등으로 색채의 해방을 이루었고
야수파를 이끈 화가로 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늦게 그림을 시작한 마티스였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끝이 없었죠.
그는 화가로서 사는 동안 빠짐없이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붓 대신 가위를 잡았습니다. 관절염으로 손이 자유롭지 않았고,
십이지장 암 으로 인해 몸을 거동할 수 없을 때에도 그는 침대에 누워 종이를 잘라 붙여 색종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설화를 바탕으로 꾸민 대작 '왕의 슬픔', 앉아있는 여인을 표현한 연작 '푸른 누드' '이카루스', '다발',
'폴리네시아 하늘', '폴리네시아 바다' 등 그가 남긴 색종이 그림들은 장식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몇 가지 색으로도 풍부함을 드러내는 작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이런 알 수 없는 그림을 통해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 'number 5' 는 2006년 11월 2일 소더비경매에서
1억 4000만 달러에 팔리게 됨으로써 세상에서 거래된 가장 비싼 작품이 됩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잭슨 폴록입니다. 뉴욕에서 활동한 작가이고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추상표현주의라 부르며 또한 이 작가는 액션페인팅으로도 유명합니다.
여기서 추상이란 보이는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형태로 재정리하는 것을 말하며
표현주의란 자기 자신의 느낌 상태 그런 것들을 표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보통 무슨 주의, 이즘 이런 것들은 후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부분 작가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지는 않습니다.
작가 잭슨폴록도 그랬습니다. 잭슨폴록은 작품을 하기 전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캔버스는 자신을 표현하는 공간이었던 것이고
잭슨폴록은 그때그때 어떤 행위를 한 것이고 그렇게 그림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된 것이지요.
잭슨폴록은 어려서부터 무척 가난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집안은 항상 생활고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폴록을 돌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거기서도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심한 알콜 중독자였고, 술에 취하면 폭력적이었고 종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정신병원에도 여러 번 다녀올 만큼 문제가 많던 무명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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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mber 1(1950)
그런데 그의 천재적 직관력을 알아본 운명의 여인이 나타납니다.
'리 크래스너', 당시 뉴욕에서 추상화가로 활동하던 그녀는 모두가 포기했던 잭슨폴록을 뒷바라지하기로 결심합니다.
그 후 그녀의 노력으로 폴록은 그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된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그리고
콜렉터이자 갤러리스트였던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모인 셋은 폴록이 후에 최고의 화가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페기 구겐하임은 그에게 생활비를 대어주고, 전시회를 열어 주기로 합니다.
그린버그는 그의 작품을 칭찬하는 글을 쓰게 되고, 리 크래스너는 늘 그가 작품에 몰입하도록 뒷바라지 합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폴록은 작품에 더 몰입하기 위해 시골마을인 롱아일랜드의 스프링스로 이사를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오로지 작품에만 몰입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폴록은 마침내 그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게 할 특별한 작품방식을 생각해 냅니다.
그것은 바로 공업용 페인트를 캔버스에 뿌리는 것이었죠.
그 후 라이프지는 잭슨폴록 특집기사를 실었고 그는 한 순간에 미국 최고의 작가로 등극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그가 45살이던 1956년 8월 11일 그는 음주운전 사고로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작가로 액션페인팅의 작가로 그의 그림과 함께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미술은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습니다. 미술이 앞으로 우리에게 보여줄 새로운 것 들은 또 어떤 것일까요.
한 번 기대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