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폭풍이 남기고 간 것

2004.03.09 12:34

정찬열 조회 수:172 추천:7

캘리포니아가 불타고 있다. 꺼도 꺼도 번지는 산불, 남가주 '불바다', '불폭풍', 지난 월요일자 신문의 일면 제목들이다. 불 폭풍이 열흘도 넘게 캘리포니아를 휩쓸고 있다. 불꽃을 널름거리며 산등성이를 넘어 불이 사방으로 번져 가는 모습은 불바다를 연상케 한다.
화재 현장과 수 십 마일 떨어져 있는 곳도 재가 날려 하얗게 쌓이고, 매캐한 연기 때문에 눈을 바로 뜰 수가 없다.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2만여 소방관이 동원되어 불길을 잡으려 애쓰나 헛일이다. 인공위성을 통한 위성추적시스템(GPS)등, 첨단 장비를 동원하여 진화작업을 하지만 불은 바람을 타고 퍼져만 간다. 한인 밀집지역도 2백 미터까지 불길이 다가왔다. "하늘이 자비를 베풀기만 기다릴 뿐입니다".소방관이 하늘을 쳐다보며 하던 말이다.
화재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에서 가까운 몇 분이 놀라 안부를 물어왔다. 그 중 어떤 분은 산불이 났다해도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니' 하고 걱정하지 않았는데 보도를 보니 심각한 성싶어 전화를 한다고 했다.
나도 산불 정도야 금방 진화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최고의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미국, 지구 최강국이라는 미국. 보도 듣도 못한 현대무기를 동원하여 전쟁은 거뜬히 수행하는 나라 미국도, 불과의 싸움에서는 도무지 힘을 쓰지 못했다.
속수무책이다. 혹시 불의 신이 화가 난 게 아닐까.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 신전 부엌에서 훔쳐다 준 불, 이롭게 쓰라고 전해준 불로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대한 노여움이 아닐까. 자연 앞에 좀더 겸손해야 한다는 경고가 아닐까.
동시다발로 일어난 이번 산불도 방화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샌디에고 산불은 길을 잃은 사냥꾼이 구조를 위해 피워 올린 불로 인한 것으로 밝혀졌다. 다른 지역 불도 방화범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범인의 몽타쥬 사진이 신문에 실리고 있다. 일부에선 테러조직에 의한 방화인지 의심도하지만 그런 증거는 아직 없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 천금같은 비가 내렸다. 하늘이 자비를 베푸셨다. 타오르던 불길이 잡히고 있다. 인간이 만든 재앙을 자연이 마무리 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번 산불로 인한 피해는 주택 3,432채 전소, 사망 22명. 그리고 75만 에이커 산림이 불탔다. 서울 면적의 다섯 배쯤 되는 넓이다. 돈으로 치면 70억 달러가 넘는, 캘리포니아 사상 최악의 피해라 한다.
산불의 기세가 꺾이자 대피했던 주민들이 귀가하기 시작했다. 피난소동을 겪었던 어떤 주민이 한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막상 짐을 챙기려 하니 꼭 챙겨야겠다 싶은 건 별로 없더군요.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너무 많이 사들이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불이 휩쓸고 지나가면 한 순간에 사라질 것들에 너무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던 것 같아요".
T.V에 비추인 화재현장을 본 순간, 십 년 전에 가 보았던, 산불로 폐허가 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이 생각났다. 불탄 가지만 앙상하게 서있던 산등성이의 그 허허로운 풍경들. 그러나 가까히 다가보니 눈길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검은 재를 비집고 돋아나는 새 싹. 그 뜨거운 불 속에서 씨앗은 살아남아 다시 생명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곳에선 적십자사를 중심으로 산불 피해자를 돕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많은 돈이 모이고 물건들이 쌓이고 있다. 한인들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산불이 우리에게 피해만 남긴 것 같지는 않다. 자연 앞에서 인간의 힘이란 얼마나 미미한가. 인생에서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새삼 깨우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산불은 꺼져가지만 사람들의 가슴은 사랑으로 다시 뜨거워져 가고 있다. (2003년 11월 5일 광주매일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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