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더듬이 아나운서와 말더듬이 교장

2004.03.10 03:37

정찬열 조회 수:154 추천:11

지난 2월 5일, 필자가 교장으로 있는 한국학교 기금모금을 위한 만찬행사가 있었다. 이곳 오렌지카운티 한 호텔에서 개최된 올해 일곱 번째를 맞는 이 행사는 13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리에 끝났다. 이번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뿌리교육에 대한 동포들의 성원은 물론, 행사를 맡아 진행한 이곳 로스엔젤레스 서울방송 노형건씨의 인기가 한 몫을 했다.
노형건씨는 성악가로, 그리고 10년 가까이 방송되고있는 인기 프로그램 '홈 스위트 홈'의 진행자로 미국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진 분이다. 아름다운 노래와 함께 물 흐르듯 진행해 나가는 말솜씨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런 그가 얘기도중 자신이 말더듬이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자신의 두 형제 중 두 형이 말더듬이며, 본인도 심한 말더듬이였기에 그것을 고치기 위해 성악을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 서울에서 택시를 탔는데 장위동 가자는 말이 안나와 종이에 '장위동 갑시다' 하고 운전사에게 적어준 다음, 마음이 진정된 다음에 말을 건네자 자신이 벙어리인줄 알았노라고 운전사가 말하더라는 이야기. 교회 청년부에서 기도 순서가 돌와왔는데 말문이 터지지 않아 결국 기도를 못하고 내려왔을 때의 참담했던 심정 등을 고백했다. 긴장을 하면 말이 나오지 않고 특히 첫말이 막혀 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결국 신앙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했으며, 그러나 지금도 자신이 교만에 빠질 때면 여지없이 그 말더듬이 병이 도진다는 사실, 방송 중 그런 일이 일어나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는 얘기를 곁들이며 오롯한 삶을 산다는 게 참으로 힘들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렇게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는 사람이 말더듬이였다니 그럴 만도 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극복되었다고 가볍게 표현했지만 노력 없이 은총만으로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피나는 노력 없이는 말더듬이에서 아나운서로 거듭날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왜냐하면 필자도 한때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말을 더듬게 되었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 말더듬이가 되어갔다. 수업 중 선생님의 눈을 마주치는 게 겁이 났고, 답을 빤히 알면서도 선생님의 질문에 손들어 말 할 수 없을 땐 눈물 그렁한 눈으로 먼 산만 바라보았다. 답답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더듬에 관한 책을 보며 방법을 찾았다. 큰 소리로 책을 읽거나 산에 올라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자원하여 웅변대회에 출전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거나 독백을 하는 등, 누가 보면 미쳤다 한 만큼 끊임없이 노력했다.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어느새 말더듬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딸아이가 다섯 살 때였다. 녀석이 하도 울어대어 심하게 호통을 쳤다. 울음을 뚝 그쳤다. 그런데 말을 더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말더듬이가 되는지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걱정이 되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었더니 한 달 여만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크고 작은 모임의 리더로서 활발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딸아이를 볼 때면 한 순간 부모의 잘못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잇는가를 되새겨 보곤 한다.
말더듬은 노력하면 고칠 수 있는 습관에 불과하며 선천적인 질병이 아니다. 말더듬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 말더듬이 아이를 가진 많은 부모님들께 노형건 아나운서의 얘기를 전해주고 싶다.
우리나라의 말더듬이가 백만을 넘는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람까지를 포함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말더듬이 아나운서와 말더듬이 교장이 손잡고 말더듬은 고찰 수 있다는 순회강연이라도 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04년 2월 25일 광주매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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