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김치 한 가닥

2004.03.09 13:11

정찬열 조회 수:420 추천:4

지난 11월 28일부터 열흘 간 이곳 L.A에 있는 대형 한인 마켓에서 '광주 김치 대축제'가 열렸다. 광주시와 광주김치협회가 미주시장 개척을 위해 순회 홍보전시, 판매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고향의 김치 맛이 생각나 집에서 한 시간 정도 자동차를 몰아 행사장에 가 보았다. 묵은 김치를 비롯한 도라지 김치, 깻잎 김치 등 30여 종류의 김치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관 부스에는 사진과 함께 갖가지 김치의 유래와 맛, 성분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었다.
묵은 김치 몇 포기와 갓김치 몇 봉지를 집에 가져와 저녁 식탁 앞에 앉았다. 아이들에게 묵은 김치는 해를 넘겨 익힌 '맛있는' 김치라고 설명해 주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은 눈치다.
묵은 김치 한 가닥을 밥에 얹어 먹으니 혀끝에 옛날의 맛이 되살아났다. 혀끝에 와 닿는 맛은 추억도 되살려 주는 것일까. 김치와 관련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추운 겨울 찹쌀죽을 쑤고 고추가루등 양념을 준비하여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김장을 담그시던 수건 쓴 어머니의 모습, 생글생글 웃으며 이웃집에 김치 심부름을 다니던 단발머리 여동생, 뒤뜰에 구덩이를 파고 김칫독을 묻으시던 아버지의 흐뭇한 표정이 떠올랐다.
양푼에 김장김치를 담아 둥그런 밥상에 빙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저녁밥을 먹던 김장하던 날의 우리식구 저녁식사 광경. 고봉밥 한 그릇을 묵은 김치 몇 가닥으로 뚝딱 해 치우곤 했던 한창때의 기억 등이 연이어 생각났다.
묵은 김치 맛을 본 아내도 20년 전의 그 맛이 아니냐며 사뭇 감격적인 탄성을 올린다. 묵은 김치만으로 저녁 한끼를 너끈히 마쳤다.
나처럼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들에게 묵은 김치는 반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어릴 적 입맛을 되살려 주는 그 음식을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고, 함께 먹던 식구들과 친구들, 고향과 고국을 떠올리게 된다.
해외 동포의 숫자가 6백 5십만이 넘는다 한다. 나라 밖에서 김치를 먹고사는 사람이 최소한 그만큼의 숫자가 된다는 의미이자, 그 사람들을 상대로 김치를 팔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물론 현지에서도 김치를 만들어 먹고는 있지만 이번에 먹어본 묵은 김치처럼 깊은 맛 나는 김치는 볼 수가 없다. 한국에서 나는 재료와 한국의 기후에서만 만들어 질 수 있는 독특함이 있기 때문이다.
김치는 이제 한국인만이 아닌 세계인이 좋아하는 음식이 되고 있다. 김치가 국제정치학 용어로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조니스 교수가 'The Kimchi Matters' 라는 사회과학서를 공저했다. '김치가 중요하다'정도로 해석되는 이 책에서 한국의 먹거리 김치는 한국이 지닌 역동성의 원천이며, 김치는 점차 세계화되는 추세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 성균관대학교에서 실시한 외국인 상대 설문조사에서도 한국 하면 떠오르는 것 중에 음식문화가 첫 번째라는 대답이 나왔다. 한국의 음식문화 중 김치는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힌다. 전라도에서 나는 각종 젓갈과 풍부한 양념으로 버무린 전라도식 김치야말로 김치문화를 선도하는 가장 맛깔스러운 김치라는데 많은 분들이 동의한다. 김치를 상품화하여 세계에 내다 팔 수 있는 최적지가 바로 전라도라 한다면 성급한 결론일까.
전라도 음식을 상품화하여 세계에 내 보내자는 뜻 있는 움직임이 있는 줄 안다. 광주매일 신문에서 '광주전남 강력하게-지역기업 키웁시다' 라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미국 달라스에서 '광주김치. 전남특산물전'을 열었던 일. 김재철 남도사랑 연구원장이 '남도 음식의 경쟁력'이란 칼럼을 통해 전라도 음식의 상품화 국제화를 주장한 것(11월7일03년 광주매일)은 좋은 예다.
광주에서 만들어 보내준 묵은 김치 한 가닥이 6백5십만 해외동포의 혀끝을 휘어 감고, 전라도에서 맹글어 보낸 감칠맛 나는 전라도 음식이 전 세계인의 입맛을 휘어잡는다? 신명나는 이야기 아닌가.
(2003년 12월 17일 광주매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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