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했어야 했는데

2004.03.09 13:19

정찬열 조회 수:163 추천:3

요즈음 대학간 딸아이가 겨울방학이라서 집에 와 있습니다. 집안이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납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한 동안 멈췄던 피아노 소리가 되살아나는가 하면, 남동생하고 장난을 하며 온 집안을 쿵탕거리며 뛰어 다니는 등, 모처럼 집안에 활기가 가득합니다.
지난 9월, 딸애를 학교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온 날 밤. 녀석이 없는 썰렁한 방을 들어가 보았습니다. 자라오면서 찍었던 각종 행사 사진이랑 상장 같은 게 한 쪽 벽을 꽉 채워 걸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행사 사진에 아빠 얼굴이 찍힌 게 없었습니다.
행사 때나 상장을 받을 때 아빠인 내가 몇 번이나 그곳에 함께 있었다던 가를 헤아려 보았습니다. 녀석이 정말로 아빠를 필요로 할 때 나는 그곳에 없었던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 오늘은 바쁘니 내일로 미루자.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아이는 어느덧 커버렸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관심을 가져주고 싶어도 이미 어린애가 아닙니다. 제 용돈은 스스로 벌며 학교를 다닐 만큼 어느새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빠 품에 안기고 싶고, 아빠의 등을 타고 오를 때 무심하게 뿌리치던 사람이, 대학생이 되어 돌아온 딸에게 새삼스럽게 무얼 해 준다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냥 마음속으로만 미안해 할 뿐입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미국사회의 단면을 상징하는 사진을 찍어 모으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늘 차에 싣고 다닙니다. 두 달 전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월남인들이 모여 사는 사이공거리를 지나다가 눈에 띄는 장면 하나를 보았습니다. 잘 생긴 백인 여인이 전통 월남 옷과 모자를 쓰고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숙자인 듯 싶었습니다.
잠시 차를 세우고 가까이 가서 셔터만 눌렀으면 좋은 사진 한 장 얻었을 것을, 다음에 오면 또 있겠지 싶어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몇 번이고 같은 장소를 가 보았지만 그 여인을 다시는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무엇을 하고 난 다음 후회했던 것보다는 하지 안 했기 때문에 안타까워했던 적이 훨씬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빠의 사랑이 필요할 때 잘 해주지 못하고 아이가 커버린 경우와 같이, 잠깐 멈추어 사진을 찍었더라면 좋은 장면을 얻을 뻔했던 것처럼, 해야 했던 것을 하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아픔이 되고 아쉬움이 됩니다.
이미 끝난 일을 가슴아파 하거나, 하는 일이 비뚤어질까 가슴 조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야 할 것은 마음속엔 있지만 아직 행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간단한 사실을 진즉 알았더라면 더 많은 시간을 딸과 함께 보냈을 것입니다. 딸아이에겐 더 좋은 아빠로 기억되었을 것이고, 아빠인 나의 아쉬움은 훨씬 줄어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딸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다가 자연스럽게 어머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께 전화를 드린지 꽤 오래된 성싶습니다. 바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돈 아깝게 전화는 먼 전화냐, 여그는 다 잘있응께 얼른 끊자" 하면서도 속으로 좋아하시는 어머니 마음이 전화선을 타고 가슴에 전해왔습니다. 핑계를 대서라도 자주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조금 모자라는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는 것을, 완벽한 조건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가를 체험을 통해 배워 가는 중입니다. 때를 놓치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12월 31일.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망설이다 행하지 못한 일, 그 때 했어야 했는데 하는 일들이 명년엔 줄어들 수 있게 하자고 다짐해봅니다. 이웃과 나누고 싶은 바램이기도 합니다. 새해는 모두에게 아쉬움이 적은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03년 12월 31일 광주매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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