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인사회의 설날 풍경

2004.03.09 14:00

정찬열 조회 수:260 추천:6

설을 맞아 학교에서 설날 행사를 가졌다. 모처럼 한복을 차려입고 학교에 나갔다. 차에서 내려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미국인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한복 입은 사람을 처음 본 듯 바라본다.
교사 회의를 시작하기 전, 새해인사를 주고받은 다음 선생님들에게 세배 돈을 주었다. 전날 은행에서 바꿔둔 빳빳한 십 달러씩을 세배 값으로 드렸더니 모두들 환하게 웃는다. 우리 학교에 새로 오신 어느 선생님은 미국에 온 10년만에 처음으로 새배 돈을 받아본다고 한다. 작년에 세배 돈을 받았던 어떤 선생님은 그 빳빳한 돈을 행운의 표시로 지갑에 일년 내내 넣고 다녔다고 말하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과 나란히 앉아 학생들로부터 세배를 받았다. 준비해온 돈 일 달러씩을 아이들에게 세배 돈으로 주었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설날의 유래와 설날 놀이, 그리고 세배하는 방법까지를 교육받았겠지만 절하는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한 꼬마녀석은 세배돈을 받은 다음, "선생님, 이 돈 진짜 주는 거에요?" 하고 물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전체학생들에게 세배를 받고 나서 학급대항 윳놀이를 했다. 윳이야, 모야, 소리를 지르며 즐겁게 게임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윳놀이를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설날이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지만 미국에 살면서 설을 한국과 같은 정도의 큰 명절로 지내기란 쉽지가 않다. 바쁘고 힘든 이민생활이 주된 이유가 되겠지만 설을 동양 몇 나라의 전통명절 정도로 생각하는 현지 분위기도 한 이유가 된다.
` 1 아직은 이민 1세들이 중심이 되고있어 이곳 한인사회는 설날이 되면 떡국을 끊여먹고, 만나면 서로 새해 덕담을 나누는 등 제법 설 냄새가 난다. 고국의 부모님이나 친척한테 송금을 하고 설 인사도 드린다. 지난 설 때 L.A근교 한인들이 본국 친지 등에게 보낸 송금액수가 2천만 달러를 넘는다 했으니 이번 설에도 그 정도는 보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금년처럼 주중에 설이 낀 해는 평일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현지 생활을 무시하고 차분히 설을 챙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주말인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설을 쇠게 된다. 우리학교처럼 토요일에 설날 행사를 하는 곳이 많다. 한인회에서는 떡과 다과를 준비해서 노인아파트를 방문하고, 모 은행에서는 무료 떡국 행사를 가졌다. 어떤 마켓에서는 전 직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경로잔치를 개최, 지역주민을 불러 떡국과 떡, 다과를 나누며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호남향우회 에서는 매년 설날저녁 큰 잔치를 벌여 고향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명절을 즐기도록 흥겨운 시간을 마련한다. 교회나 성당, 절에서는 대부분 일요일날 설 행사를 가진다.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 설날 행사를 하는 곳이 한인사회 뿐만은 아니다. 중국타운의 춘절 행사나 월남타운의 텟 축제는 현지 메스콤의 주목을 받을 만큼 큰 연중행사이다. 한인사회도 설날에 맞추어 한국의 날 축제를 하자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도 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민 온 사람들의 마음도 고향으로 달려가기 마련이다.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고, 어른들을 찾아 뵙고 조상에게 성묘를 드리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해진다. 명절에 이루어지는 각종 의식과 놀이를 통해 가족이나 동족으로서의 일체감이 형성되고 고향과 고국을 향한 마음들이 더욱 단단해지는 성싶다. 일제가 설을 쇠지 못하게 했던 것도 결국 그런 현상을 막아보기 위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학교 설날 행사를 지켜본 어느 학부형이 설을 맞아 새배와 윳놀이라는 체험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통명절의 의미를 일깨워 주어 기쁘고 감사하다 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2세들에게 우리의 얼을 심어주고 싶은 어른들의 마음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궁금하다. 새배 돈을 받으며 환하게 웃던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2004년 1월 28일 광주매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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