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에 김치 싸 주세요

2004.08.02 13:49

정찬열 조회 수:621 추천:16


  "속이 느글느글한데 김치 한 가닥 먹었으면 딱 좋겄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난 뒤 친구가 한 말이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은근히 하던 참이어서 속으로 웃었다. 미국에서 20년을 살아왔지만 우린 어쩔 수 없는 단군의 자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 7월 한 달간 80여명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아침 교사회의 중 한 선생님이 김치 얘기를 꺼냈다. 자기 학급의 애니라는 아이가 "다른 아이들은 김치를 점심에 싸 오는데 나는 왜 싸주지 않느냐"고 엄마한테 항의를 하더란다. 아홉 살 먹은 그 여학생은 엄마가 한국인이지만 아빠는 백인이다. 평소 양식을 주로 먹고 점심도 미국음식을 싸 주었다 한다. 그런데 한국 애들만 모여 공부하는 학교라 점심에 김치를 싸와서 맛있게 먹는 아이들이 부러웠던지 자기도 싸 달라고 엄마한테 조르더라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에 김치, 무말랭이, 김밥 등, 한국음식을 펼쳐놓고 즐겁게 점심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핏줄이란 게 무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솥밥을 먹고 자란 형제가 우애가 깊은 것처럼 저렇게 같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동포의식이 싹트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곳 우리 아이들은 김치를 먹을 때 조심스러워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다. 냄새 때문이다. 한국인 끼리야 냄새를 못 느끼지만 김치가 얼마나 냄새를 풍기는 음식인가.
  김치냄새와 관련된 몇 년 전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한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한 남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건너왔다. 어느 날 그는 엄마가 정성껏 끓여준 김치찌개를 먹고 학교에 갔다. 그런데 옆에 앉은 미국친구가 냄새가 난다고 무안을 주었다. 혈기 왕성한 나이라 이를 참지 못하고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다음날 이 소식을 들은 한국아이들이 모이게되고 급기야 편싸움으로 번졌다. 그 학생은 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아이의 장래는 그 사건을 시작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청운의 꿈을 품고 유학 온 젊은이가 김치 사건으로 인해 결국 엉뚱한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작고 사소한 일 같지만 문화의 차이를 극복한다는 게 이렇게 어렵다.
  허지만 이 미세한 차이를 뛰어 넘어야 비로소 큰 세계에 이를 수 있다. 멕시코사람이 사는 동네엔 부리토와 타코 가게가 있고 이태리인은 피자와 스파게티를 잘 만든다. 나도 이따끔 사 먹지만 참 맛있다. 그것들은 세계인이 좋아하는 음식이 되고있다.
  한국인이 사는 곳엔 김치가 있다. 올해 대학에 들어간 필자의 딸 수지도 어릴 땐 한국음식을 싫어하더니 요즘은 김치를 찾는다. 지난 년 말에 이곳에서 열렸던 '광주 김치대축제'에서 사뒀던 묵은 김치를 아내가 냉동실에 넣어 두었는데, 그 김치와 김을 밥에 싸 먹으면 맛있다고 했다. 기숙사 미국인 친구한테도 먹어보도록 권해볼 작정이란다. 이렇듯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고있는 6백만이 넘는 동포로 인해 김치는 국제적인 음식이 되어가고 있다. 사스 예방에 김치가 좋다는 뉴스는 김치가 세계의 관심을 끌게 된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인지 김치수출이 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듣고 있다.
  그러나 김치가 세계적인 음식이 되기 위해선 한국인의 입맛을 뛰어넘어 외국인의 입맛에 고루 맞는, 독특한 맛을 간직하면서도 덜 맵고, 덜 냄새나는 김치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아울러 김치는 냄새가 지독한 식품이라는 인식을 바꾸어 줄 필요도 있다.
  해외여행 시 호텔에서 김치를 몰래먹다가 쫒겨 날 뻔했다는 얘기를 무용담처럼 하는 사람을 보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공중질서를 지키는 것은 기본이다. 내가 좋아 먹은 음식인데 냄새 좀 풍기는 게 뭐 그리 문제냐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딱하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김치, 대를 이어 먹게 되는 우리 김치가 세계인으로부터 환영받는 음식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코 큰 아저씨들이 "하이, 속이 느클느클한데 김치 머구러 한쿡 집 갑시다"고 말할 때가 오긴 올까.
<2004-7-29>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0
어제:
0
전체:
30,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