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빠셔진" 시비

2004.10.05 08:26

정찬열 조회 수:374 추천:20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온 중학교 일 학년 남학생이 역사시험에 백 점을 맞았다. 유학 온지 일년도 채 못된 아이가 만점을 맞은 걸보고 "미국 아이들도 어려워하는 역사시험에 어떻게 만점을 맞을 수 있었느냐"고 선생님이 칭찬을 했다. 그랬더니 이 학생이 " 5천년 가까운 한국역사 시험도 80점 이상 너끈히 맞았는데 2백년 밖에 안 되는 미국역사시험에 백 점을 맞은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고 대답을 했다.
  지난 달, 어떤 분의 문병을 갔던 자리에서 볼티모어에 살다가 이쪽으로 이사 온 이 선생이 한 말이다. 어린 중학생의 깜찍한 이야기는 볼티모어 한인사회에서 한 동안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요즈음 중국의 고구려 역사왜곡에 대한 이야기가 메스콤에 보도가 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꽤 오래 전부터 이곳 미국에서 한반도 통일이 되기 전에 중국이 북한을 삼키려 한다는 근거 없는 얘기가 떠돌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웃어버리곤 했었다. 헌데 요즈음 중국학자들의 주장이나 중국관계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필자가 중국 여행 중에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2년 전 필자가 중국 연변을 여행하던 때였다. 선구자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을 찾아보기 위해 연변 부근에 있는 용정을 방문했다. 산꼭대기에 '일송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었고 그 곁엔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정자에 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국을 찾고자 말밥굽을 울리며 벌판을 내달리던 선인들의 모습이 환히 보이는 듯 했다. 노래 말이 큰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용두레 우물과 용문다리도 둘러보았다.
  함께 간 친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윤동주 시비를 찾아갔다. 그런데 몇 개월 전까지 분명 그 곳에 있었다는 시비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괭이를 둘러메고 지나가던 동포인 듯 싶은 남자에게 물어보니 "빠셔버렸시요" 하고 퉁명하게 대답했다. 사연인 즉, 얼마 전 한국에서 온 교수들과 연변쪽 동포학자들이 함께 역사세미나를 개최했단다. 그런데 이 부근 연변 지역이 고구려의 옛 땅이라는 학술발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된 다음날 중국군인들이 몰려와 시비를 부셔버렸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시비가 서있던 자리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마치 우리의 혼을 도둑맞은 것 같은 아픔이 몰려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이미 고구려 역사왜곡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소문처럼 한반도 북녘 땅을 접수하려는 목적에서였을까. 통일이후 고구려 고토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이유야 어떻든 정치적 목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사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역사는 우리 민족의 뿌리다. 뿌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문제는 민족의 존립에 관한 일이다. 5천년을 견뎌온 큰 나무라 하더라도 뿌리가 시들면 시나브로 말라죽게 된다.
  역사왜곡에 대한 국내외 비판과 한국정부의 대처로 인해 이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이번 일이 우리 스스로 역사교육을 소흘하지 않았는지 반성과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외국의 역사교육 현장도 참고하면 어떨까.    
  사건 이후 이곳 미국에서도 미국 교과서 속의 한국역사에 관계된 잘 못된 내용을 고쳐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세계 도처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우리의 역사를 바로 전하는 일에 동참했으면 좋겠다.  
   5천년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똑똑한 중학교 일 학년 학생의 얘기는 우리에게 미소를 짓게 한다. 중국 군인들이 시비를 부숴 버린 것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내 비추던, 중국동포가 퉁명스럽게 던진 한 마디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 빠셔버렸시요"   <2004년 10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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