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변산은 지금 설국

2005.12.28 11:36

송기옥 조회 수:113 추천:22

내 고향 변산은 지금 설국(雪國)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송기옥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보리풍년이 든다면서 서설(瑞雪)이라고 좋아하였다. 금년 첫눈은 개밥 퍼주듯 근래 보기 드물게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 창문 앞 동백나무에도 목화송이처럼 소담스럽게 눈꽃이 피었다.

  두 주일 째 내리는 눈은 폭설로 변하여 기와지붕 수막새를 감춰 버렸고, 지붕은 빙산처럼 무거운 눈덩이를 뒤집어쓰고 있다. 끝내는 눈 무게에 버티지 못한 비닐하우스와 양계장은 폭삭 주저앉아 시설채소를 망쳐 놓고 그도 부족하여 수천 마리의 닭과 가축을 떼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겨울이면 유달리 눈이 많이 오는 곳이 내 고향 변산이다. 아침부터 또 눈이 내린다. 우리 집에서 빤히 보이는 내변산 입구 우슬재(牛膝)에서 흰눈이 몰려오면 많은 눈이 내릴 징조다.
눈보라가 친다. 앞이 안 보인다. 눈감고도 다니던 길을 잃어 차가 눈 구덩이에 빠져 버렸다. 긴급 구호요청을 하여 1시간 동안 추위에 떨다가 겨우 빠져나와 정강이가 넘는 눈을 치우면서 겨우 차고에 주차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문틈사이로 고운 떡가루 같은 눈가루가 들어와 쌓인다. 마당에 쌓인 눈을 아침이면 힘겹게 쓸고 또 쓸어냈는데도 연일 내리는 눈에게 압도당했다. 눈에게 지쳐 그냥 내버려두었더니 허리까지 차 올랐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사랑채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동안 쌓인 눈이 무릎을 훨씬 넘는다. 지붕 위에서 곡예를 하듯 쌓인 눈을 한 삽씩 퍼내다 보니 반나절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내 생전 지붕 위에 올라가 눈을 퍼내기는 처음 일이다.

변산은 서해안에 돌출된 반도로써 여름에 비는 피해가고 겨울이면 눈은 쉬어간다는 말을 할아버지 때부터 들어왔었다. 지금 변산은 흰눈으로 뒤덮인 설국(雪國)이다. 이웃집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허리까지 차 오른 눈 속으로 터널을 뚫은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처럼 눈이 많이 오고 추웠다. 처마 끝에는 몇 자나 되는 긴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손발이 꽁꽁 얼어 빨갛게 되어도 두 손을 호호 불며 무엇이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던지 온종일 눈 위에서 강아지 마냥 뛰놀았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변산 월명암 낙조대 부근은 춘 3월이나 돼야 잔설이 녹는다. 짭조름한 해풍과 모진 눈보라에 시달리며 자란 소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좀이 안 먹어 궁재(宮材)와 배를 만드는 재목으로 썼다고 한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가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그렇게 기록해 놓았다. 변청(꿀)과 변산약초는 효험이 좋기로 이름이 났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고란이나 멧돼지가 인가 근처로 먹이를 찾아 내려온다. 외딴집 개들이 우르르 떼로 몰려나가 온 산이 떠나갈 듯 짖어대면 마을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나와 멧돼지를 잡아 통째로 이글거리는 통나무 불에 구워 갈빗대 하나씩을 뜯었다. 막걸리 한 사발씩 마셔대며 온 동네잔치가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변산은 장광(長廣) 팔 십리 겹산으로 되어 있어 마치 소의 천엽 속 같다는 표현을 하고있다. 직소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받아 봉래구곡으로 흐르는 눈 쌓인 경치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참으로 장관이다. 봉래구곡에서 월명암으로 가는 능선을 따라 가다 보면 내변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낙조대에 오르면 서해 바다가 발 밑에서 출렁인다. 피끓는 청년시절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 내린 변산의 설국을 몇 차례 가본 적이 있다. 늘 바라보는 변산이지만 내 마음은 어느새 저 눈보라를 뚫고 그곳에 가 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교육계에 몸담고 있다가 정년을 앞두고 있는 어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고향 변산을 가보지 못하여 아름다운 변산을 자랑할 수가 없으니 죄를 지은 것 같다면서 겨울 방학 때 고향에 내려 갈 테니 내변산의 절경을 같이 감상하자는 것이었다. 그 선배에게 눈에 묻힌 지금의 내 고향 변산을 보여주고 싶다.
                               (05.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