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2006.01.31 20:00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김 학
한국사람이 한복이라는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 입으면 뉴스거리가 된다. 이것은 흑인이나 백인이 사는 먼 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설날이나 추석날이면 신문·방송 카메라 기자들은 한복차림의 가족나들이 모습을 촬영하느라고 신바람이 난다. 교복 자율화 이후부터 한복차림의 여자 고등학교 졸업식 풍경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는 좋은 뉴스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춘향골 남원의 N여고생들은 수요일마다 한복차림으로 등교를 한다. 이 뉴스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소개되자, 뒤이어 J 일보도 사회면 머릿기사로 크게 다룬 적이 있었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뉴스다."
언론계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한국사람이 한복을 입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 나라 백성들에게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진 것은 1895년 (高宗 32)의 일. 그 때 우리 조상들은 두가단 발부단(頭可斷 髮不斷)을 웨치며 단발령에 항의하였노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작 10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둘레에서는 상투쟁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늙으나 젊으나 남성이라면 이발소를 여성이라면 미장원을 드나드는 게 예사롭다. 아니 요즘은 남성들도 미장원을 찾는다.
주택의 경우도 역시 변화무쌍이다. 전통가옥 한옥(韓屋)이 헐린 자리에 양옥(洋屋)이 우뚝 우뚝 치솟거나 아파트가 세워진다. 편리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가는 한옥의 슬픈 통곡이 들리는 성싶다.
우리네 식탁에도 변화의 회오리바람은 소용돌이치고 있다. 맛깔 좋은 전통음식은 서양식 요리에 밀려나기 바쁘다. 백인들에게 쫓겨나던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우리네의 의식주생활(衣食住生活)에도 서세동점현상(西勢東漸現像)은 빚어지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는 조상들의 슬기롭던 생활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민속촌을 찾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외국의 국가원수들이 번번이 우리나라를 찾아온다.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분들의 동정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소상하게 소개된다. 그분들 중 어떤 이는 그 나라 고유의상을 입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양복차림이다. 흔해 빠진 양복차림보다는 고유의상을 입은 지도자에게서 더 웅숭 깊은 친근감이 우러난다면 나의 편견일까.
미국주재 우리나라 초대 공사인 박정양(朴定陽)이 워싱턴에 부임한 것은 1887년의 일, 박 공사 일행의 옷차림이 미국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미국의 어린이들이 가장행렬 구경하듯 박 공사 일행을 뒤따라 다니며 낄낄거렸다는 일화는 한복으로 인한 민족적 우월감을 대변해 준 하나의 쾌거로 기억하고 싶다. 한복의 멋스러움이 빚어낸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이니 말이다.
몇 년 전 5월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통의상 차림은 너무나 우아했다. 백의(白衣)와 금빛 십자가의 조화는 눈부신 앙상블이었다. 그 분의 말씀과 표정은 감동의 물결을 일으킬 만 했었다. 공항에서 이 땅에 입맞추던 교황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국가원수 중에서도 스리랑카의 자예 와르데네 대통령과 카타르의 칼리파 국왕 그리고 갬비아의 자와라 대통령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자기네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이 날개라고 해서가 아니라, 정상외교 무대에 전통의상을 입고 나온 그분들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어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지구촌 124개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니 가슴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정상회담을 위하여 출국하는 우리의 대통령이나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한복을 입지 않아서다. 서양에서 건너 온 양복만을 입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장관 또는 외교관들이 옛날처럼 우아하게 멋스러운 관복(官服)을 입고 집무를 하면 어떨까?"
내가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서 궁중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사극(史劇)을 좋아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국무회의 분위기에 옛날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오버랩시켜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근래에 남북회담이 잇달아 열린다. 그런데, 남북회담의 양측 대표들의 옷차림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양복차림이다. 만약 남북회담에 임하는 양측 대표들이 민족 고유의상인 한복을 입는다면 회담 분위기가 달라지지는 않을까? 민족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는 않을까?
내게는 한복 두 벌이 있다. 오래 전 결혼할 때 처가에서 해 준 옷과 십여 년 전 어머니 고희 때 마련한 옷이다. 고작 일년에 한두 번 입는 정도이니 아직도 새 옷이다. 오랫동안 입어왔으면서도 나는 아직 대님이나 옷고름 매는 법을 몰라 쩔쩔맨다. 비단 나만 우둔해서 그럴까.
오색찬란한 전통관복 차림의 우리나라 대통령이 양복 입은 외국의 대통령과 당당하게 정상회담을 벌이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싶다. 세계 124개 나라에서 활동 중인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의젓한 한복차림을 보고 싶다. 크고 작은 겨레의 명절이나, 작고 큰 각 지방의 축제기간 만이라도 모두가 한복차림으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현대화라는 미명 하에 나날이 서구화되어 가는 우리네의 의식주와 사고방식의 변화가 걱정스럽다. 대님으로 바지가랑이 졸라매듯 변화의 굴렁쇠를 멈추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몇 해 전 재미동포 피터 현씨가 소련과 중공에 거주하는 우리동포들의 생활상을 촬영한 필름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새로워진다. 언어, 풍속, 생활관습 모두가 우리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는 데서 놀라움이 컸었다. 서구화로 치닫는 변화의 물결이 이대로 흐른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오염되지 않은 조상의 진짜 향내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청나라를 세워 중원천지를 주름잡던 만주족이 한족문화(漢族文化)에 동화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역사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김 학
한국사람이 한복이라는 전통의상을 곱게 차려 입으면 뉴스거리가 된다. 이것은 흑인이나 백인이 사는 먼 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설날이나 추석날이면 신문·방송 카메라 기자들은 한복차림의 가족나들이 모습을 촬영하느라고 신바람이 난다. 교복 자율화 이후부터 한복차림의 여자 고등학교 졸업식 풍경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는 좋은 뉴스거리로 등장하고 있다.
춘향골 남원의 N여고생들은 수요일마다 한복차림으로 등교를 한다. 이 뉴스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소개되자, 뒤이어 J 일보도 사회면 머릿기사로 크게 다룬 적이 있었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뉴스다."
언론계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한국사람이 한복을 입는 것이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이 나라 백성들에게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진 것은 1895년 (高宗 32)의 일. 그 때 우리 조상들은 두가단 발부단(頭可斷 髮不斷)을 웨치며 단발령에 항의하였노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작 10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둘레에서는 상투쟁이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늙으나 젊으나 남성이라면 이발소를 여성이라면 미장원을 드나드는 게 예사롭다. 아니 요즘은 남성들도 미장원을 찾는다.
주택의 경우도 역시 변화무쌍이다. 전통가옥 한옥(韓屋)이 헐린 자리에 양옥(洋屋)이 우뚝 우뚝 치솟거나 아파트가 세워진다. 편리라는 이름 아래 사라져 가는 한옥의 슬픈 통곡이 들리는 성싶다.
우리네 식탁에도 변화의 회오리바람은 소용돌이치고 있다. 맛깔 좋은 전통음식은 서양식 요리에 밀려나기 바쁘다. 백인들에게 쫓겨나던 아메리카 인디언처럼……. 우리네의 의식주생활(衣食住生活)에도 서세동점현상(西勢東漸現像)은 빚어지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는 조상들의 슬기롭던 생활상을 살펴보기 위하여 민속촌을 찾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외국의 국가원수들이 번번이 우리나라를 찾아온다. 이 나라에 머무는 동안 그분들의 동정은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소상하게 소개된다. 그분들 중 어떤 이는 그 나라 고유의상을 입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양복차림이다. 흔해 빠진 양복차림보다는 고유의상을 입은 지도자에게서 더 웅숭 깊은 친근감이 우러난다면 나의 편견일까.
미국주재 우리나라 초대 공사인 박정양(朴定陽)이 워싱턴에 부임한 것은 1887년의 일, 박 공사 일행의 옷차림이 미국인들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미국의 어린이들이 가장행렬 구경하듯 박 공사 일행을 뒤따라 다니며 낄낄거렸다는 일화는 한복으로 인한 민족적 우월감을 대변해 준 하나의 쾌거로 기억하고 싶다. 한복의 멋스러움이 빚어낸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이니 말이다.
몇 년 전 5월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전통의상 차림은 너무나 우아했다. 백의(白衣)와 금빛 십자가의 조화는 눈부신 앙상블이었다. 그 분의 말씀과 표정은 감동의 물결을 일으킬 만 했었다. 공항에서 이 땅에 입맞추던 교황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를 다녀간 국가원수 중에서도 스리랑카의 자예 와르데네 대통령과 카타르의 칼리파 국왕 그리고 갬비아의 자와라 대통령 또한 잊혀지지 않는다. 그분들은 한결같이 자기네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이 날개라고 해서가 아니라, 정상외교 무대에 전통의상을 입고 나온 그분들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어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지구촌 124개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니 가슴 뿌듯한 일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남는다. 정상회담을 위하여 출국하는 우리의 대통령이나 우리나라 외교관들이 한복을 입지 않아서다. 서양에서 건너 온 양복만을 입기 때문이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이나 장관 또는 외교관들이 옛날처럼 우아하게 멋스러운 관복(官服)을 입고 집무를 하면 어떨까?"
내가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서 궁중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은 사극(史劇)을 좋아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의 국무회의 분위기에 옛날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오버랩시켜 보는 것도 흥미롭다.
근래에 남북회담이 잇달아 열린다. 그런데, 남북회담의 양측 대표들의 옷차림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양복차림이다. 만약 남북회담에 임하는 양측 대표들이 민족 고유의상인 한복을 입는다면 회담 분위기가 달라지지는 않을까? 민족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는 않을까?
내게는 한복 두 벌이 있다. 오래 전 결혼할 때 처가에서 해 준 옷과 십여 년 전 어머니 고희 때 마련한 옷이다. 고작 일년에 한두 번 입는 정도이니 아직도 새 옷이다. 오랫동안 입어왔으면서도 나는 아직 대님이나 옷고름 매는 법을 몰라 쩔쩔맨다. 비단 나만 우둔해서 그럴까.
오색찬란한 전통관복 차림의 우리나라 대통령이 양복 입은 외국의 대통령과 당당하게 정상회담을 벌이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보고 싶다. 세계 124개 나라에서 활동 중인 우리나라 외교관들의 의젓한 한복차림을 보고 싶다. 크고 작은 겨레의 명절이나, 작고 큰 각 지방의 축제기간 만이라도 모두가 한복차림으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현대화라는 미명 하에 나날이 서구화되어 가는 우리네의 의식주와 사고방식의 변화가 걱정스럽다. 대님으로 바지가랑이 졸라매듯 변화의 굴렁쇠를 멈추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몇 해 전 재미동포 피터 현씨가 소련과 중공에 거주하는 우리동포들의 생활상을 촬영한 필름을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새로워진다. 언어, 풍속, 생활관습 모두가 우리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는 데서 놀라움이 컸었다. 서구화로 치닫는 변화의 물결이 이대로 흐른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오염되지 않은 조상의 진짜 향내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청나라를 세워 중원천지를 주름잡던 만주족이 한족문화(漢族文化)에 동화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역사의 교훈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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