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더위 사가라
2006.02.10 22:48
내 더위 사가라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정현창 (118호 작)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옷을 대충 걸치고 대문을 나섰다. 한시가 급한 나에겐 옷차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직 어둑어둑한 시간인데도 나지막한 돌담이 많았던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잠이 덜 깨 부스스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겨우 대답을 하면 난 아주 큰소리로 “내 더위 사가라!”하고 외쳤다. 그리고 개선장군처럼 다음 집으로 달려갔었다. 해가 뜨기 전에 더위를 팔아야 한다고 해서 부지런히 동네를 돌았었다. 더위를 팔다가 해가 기린봉 위로 환한 얼굴을 내밀면 집으로 돌아왔다.
방안엔 벌써 어머니가 차려놓은 정월 대보름날 아침밥상이 차려져있었다. 찹쌀, 찰 수수, 찰 조, 검은콩, 붉은팥 등 5가지 곡식을 섞어 지은 오곡밥과 검은색이 나는 취, 박고지, 시래기, 고비, 고구마줄기, 가지, 그리고 흰색이 나는 콩나물, 도라지, 무나물 등 9가지 나물이 차려져 있었다. 어머니는 바짝 마른 나에게는 두부를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두부를 먹으면 살이 찌고 콩나물을 먹으면 키가 큰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어린 우리들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주시며 귀밝기 술이라며 마셔보라고 했다. 어른이 된 듯 기분은 좋았으나 그 맛은 별로였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머니는 땅콩과 호두를 한 주먹씩 나누어주시며 단번에 깨먹으라고 하셨다. 깨먹을 때에 “1년 동안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며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빌라고 하셨다. 점심때쯤 동네꼬마들은 손에 복조리 하나씩을 들고 정자나무 밑으로 모였다. 동네를 돌며 9집에서 오곡밥을 얻으러 다녔고, 아주머니들은 우리들에게 나누어줄 오곡밥과 나물들을 따로 준비해 두었다가 주곤 하셨다. 배가 부른 우리들은 제기차기와 연날리기를 하며 놀았다. 팽이싸움과 연줄싸움은 정말 신나는 놀이였다.
정월 대보름의 절정은 해가 지고 나서부터였다. 어른들은 낯부터 준비한 달집으로 모이고 우리들은 대못으로 구멍을 뚫어서 만든 깡통 하나씩을 들고 전주천변으로 모였다. 둥근 달이 기린봉 위로 그 해맑은 얼굴을 내밀면 풍물놀이를 하던 어른들은 나무로 틀을 엮고 짚을 씌운 달집에 불을 붙였다. 화재위험 때문에 전주천변에 만들어 놓은 달집이 탁탁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면 우리들도 나무를 잔뜩 넣고 불을 붙인 깡통을 힘껏 돌렸다. 순식간에 전주천변은 불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빙글빙글 돌려 만든 불 수레바퀴는 매일 아침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모는 태양마차가 되어 달렸고, 달집에서 타오르는 불기둥은 모세를 지켜주었던 불기둥이 되었다. 광란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들은 정월대보름의 마지막 순서인 다리 밟기를 위하여 도토리골 다리로 몰려갔다. 자기 나이만큼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나이가 홀수인 해는 짝수인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 다리를 건너오기도 하였다. 설이 지나고 재미없이 방학을 보내던 우리들은 정월대보름에 또 한 번 신나게 놀았었다.
정월 대보름은 음력 1월 15일로써 풍성한 먹을거리와 놀이가 있는 전통 축제일이다. 대보름은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문화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달은 생생력(生生力)을 바탕으로 한 풍요의 상징이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의하면 태양을 ‘양(陽)’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되고, 달은 음(陰)이라 하여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보면 달-여신-대지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서의 출산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적인 의미로 자리매김 한다.
정월 대보름을 보내면서 그 속에 녹아있는 선조들의 지혜를 본다. 9가지 나물을 먹는 것은 한여름 햇볕을 머금은 것들이니 겨울 막바지의 차고 넘치는 음기를 다스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묵은 나물, 말린 나물은 겨울에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무기질, 섬유질을 보충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부럼으로 먹었던 땅콩과 호두는 부족한 지방을 보충해주는 훌륭한 식물성지방이었다. 불을 놓는 이유는 쥐를 쫓아내고 마른 풀에 붙어 있는 해충의 알 등 모든 잡균들을 태워 없애며 새싹이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다리를 왔다갔다 건너면서 노는 답교놀이[踏僑戱]는 사람의 다리[脚]와 물 위의 다리[橋]가 같은 음을 지닌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다리를 밟으면 한 해 동안 다리의 병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을 이용하여 한겨울 농한기로 부족했던 다리운동을 하게 만들었다. 지신밟기와 달집태우기로 액운을 태워버리고 새로운 기원을 하게 하여 지난해의 고민들은 없애고 새로운 희망으로 한 해를 시작하라는 슬기로움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새봄이 시작되면 구례산수유축제를 비롯하여 각 지방마다 경쟁하듯 수많은 축제가 벌어진다. 지역주민들의 단합과 지역특산물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서로 경쟁하면서 맛과 흥이 있는 한 마당 잔치를 베푼다. 하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음식과 같은 행사들뿐이다. 남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이다. 이왕에 주민들을 위한 축제를 열려면 선조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정월대보름처럼 지역의 특성을 살리고 주민들에게 피와 살이 되는 지역 한 마당 축제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올해는 유별나게 휘영청 밝은 정월보름달을 쳐다보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해 본다.(2006. 2. 12.)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194 | 그리워지는 정월 대보름 풍습 | 이윤상 | 2006.02.12 | 346 |
| » | 내 더위 사가라 | 정현창 | 2006.02.10 | 280 |
| 192 | 올케의 등록금 | 이은재 | 2006.02.09 | 252 |
| 191 | 3가지 아름다운 소리 | 김영옥 | 2006.02.08 | 235 |
| 190 | 늙어서 설렁탕이라도 먹으려면 | 박정순 | 2006.02.06 | 262 |
| 189 | 밥 퍼주는 아이 | 이은재 | 2006.02.06 | 210 |
| 188 | 꿈에도 모른다 | 정현창 | 2006.02.03 | 179 |
| 187 | 이런 세상이 되었으면 | 김학 | 2006.01.31 | 218 |
| 186 | 시계 없는 세상 | 조종영 | 2006.01.31 | 168 |
| 185 | 복 주머니와 돈지갑 | 정현창 | 2006.01.26 | 186 |
| 184 | 자운영 꽃이 만발할 때 | 이은재 | 2006.01.15 | 211 |
| 183 | 가버린 한 해를 되돌아보며 | 김학 | 2006.01.15 | 473 |
| 182 | 2006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이주리 | 2006.01.02 | 447 |
| 181 |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 | 황현정 | 2006.01.01 | 814 |
| 180 | 동양일보 12회 신인문학상 수필 당선작 | 민경희 | 2005.12.29 | 315 |
| 179 | 2006 전북중앙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백금태/방파제> | 이종택 | 2005.12.29 | 179 |
| 178 | 2006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이종택 | 2005.12.29 | 137 |
| 177 | 2006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이종택 | 2005.12.29 | 177 |
| 176 | 내 고향 변산은 지금 설국 | 송기옥 | 2005.12.28 | 113 |
| 175 | 2006년 신춘문예 수필부문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반 두각 나타내 | 이종택 | 2005.12.26 | 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