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없는 세상

2006.01.31 05:47

조종영 조회 수:168 추천:50




시계 없는 세상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조종영



손목시계를 넣어 둔 책장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내 삶의 흔적처럼 남아 있는 여러 개의 기념 시계들이 있다. 오래된 시계들이라 시간은 멈추었지만, 배터리만 갈아주면 다시 돌아가는 것들이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산뜻하고 예쁜 모양의 시계 하나를 골랐다. 시계 바탕과 줄이 파란색으로 깔끔한 것이 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이 요즘 내가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인데 결정적으로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시계바탕이 짙은 청색이라서 조금만 어두워도 시계바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 불편함을 알면서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백수의 여유시간 만큼이나 세상에 흔한 것이 시계라서, 꼭 내 시계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의 맏형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중학생이었다. 그때 우리 집은 시골이었고 형님은 백 여리나 되는 대전의 중학교로 기차 통학을 했다. 우리 동네는 경부선 철로에서 가깝지만, 기차역은 4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저녁이면 항상 형을 기다리며 마당을 서성이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시절에 시계는 시골에서 귀한 물건이었는데,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래도 늦지 않고 그 먼 곳으로 기차통학을 했으니, 지금의 생활 방식으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을 일이다. 아마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새벽에 형을 보내야하는 어머니는, 주무시다가 몇 번인가를 일어나 방문을 열고 하늘을 보셨다. 계절과 날짜에 맞추어 서쪽하늘에 삼태성(三台星)을 보고 시간을 가늠하시는 것이었다. 또 달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다가 별도 달도 없는 날에는 아예 일찍 역에 가서 기차를 기다리게 하셨다. 시계가 귀한 그 때의 세상에서는 해와 달, 그리고 별과 같은 자연현상이 시계의 역할을 대신해 주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 귀한 시계 하나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지금도 조끼 호주머니에 은색의 예쁜 줄이 달린 회중시계를 넣고 뽐내던 동네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시계가 귀한 대신에 정오와 자정을 알리던 긴 사이렌 소리의 여운이 아직도 아련하게 남아있다. 그 여운의 끝으로, 새벽 기차를 타야하는 형을 깨우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오늘 아침의 일처럼 귓가를 맴돌며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과거 우리사회는 농경사회였다. 그때는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제일 급한 시대였다. 농업은 국가의 주된 생산 활동이었고, 천하의 근본이라 하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했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해도 하루 세끼를 먹기가 어려웠고, 매년 봄이면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농경시대에 시간의 개념은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았다. 다만 들에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중요했다. 해가 뜨고 지는 광명조건이 농사일을 하는 시간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약속도 아침, 점심때. 저녁때, 또는 점심 먹은 후와 같이, 공통적인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큰 문제가 없었다. 조금 이르고 늦는 기다림 정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서로간의 이해로 살아왔다. 그래서 자연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는 대략적인 시간으로도 불편 없이 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빈궁한 생활 속에도 마음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있었고, 이웃 간에 훈훈한 정으로 살던 시대가 아니었나 싶다.


요즈음 생활문명이 변화하는 속도를 보면 두려운 생각마저 든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나와 변화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내가 항상 사용하는 컴퓨터만 해도 그 기능이 얼마나 다양하고 정밀한지 그야말로 경이적이다. 그러나 나는 간신히 컴맹을 면한 수준이다. 나는 컴퓨터의 그 많은 기능을 다 알지도 못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기초적인 몇 가지에 불과하다. 그래도 얼마나 편리하고 능률적인지 컴퓨터가 없을 때에는 어떻게 살았나 싶다. 나의 어린 시절은 연필과 잉크시대였고, 타자기시대를 거쳐서 컴퓨터시대로 들어섰다. 이 컴퓨터가 문서하나를 작성하는데, 하루에도 못하던 일을 아주 짧은 시간에 해 낸다. 그것도 자료의 저장, 인쇄, 복사, 그리고 필요한 곳으로 전송까지 할 수가 있다. 이것이 불과 수십 년 이내의 변화이니, 농경시대 문화권에서 태어난 내가 새로운 변화에 맞추어 변신을 한다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우리사회는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위주로 하는 산업구조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과거의 생활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 속에 시간은,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세계가 동일권이 된 현대에서는 1초의 시간을 다투며 사는 세상이 되었다. 농경사회의 여유로운 삶에서, 시간으로 살아가는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30년 전에는‘코리안 타임’이라는 것이 있었다. 약속시간을 안 지키는 한국 사람을 빗대어 나온 말이다. 그 당시에는 농경사회의 전통이 남아 있어, 웬만큼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행동이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무책임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산업구조와 생활 방식의 변화는 자연스럽게 코리안 타임의 의식을 바꾸어 놓았다. 변화되지 않고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코리안 타임이란, 생소한 용어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시간의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도 되어, 매우 다행스럽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에는‘국회타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국회가 항상 정시에 개회하지 않는 것을 꼬집는 말이다. 그것을 보면 우리사회 어딘가는 아직도 코리안 타임의 전통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만약에 이 세상에 시계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모든 기준이 시간으로 맞추어진 현대의 산업과 시설, 기계, 그리고 모든 기술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시간은 있으나 사용의 기준이 없으니 제대로 쓸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되면 시간의 계측은 예전처럼 해와 달, 별 등의 자연현상에 의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먼 예전의 농경시대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측정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 하지만, 그 시계의 역할과 영향은 시대를 변화시킬 만큼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 지금의 첨단 기술의 발전도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시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에 과거 농경시대의 문화로 뒤 돌아간다면, 과연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현대문명의 편리함을 누려온 생활 습관이, 과거의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그런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 과학 문명의 놀라운 기계들을 손에 쥐고도, 사용할 능력이 모자라서 그 혜택을 다 누리지 못하고 있다. 나의 생활 가까이 있는 전화기며 핸드폰, 컴퓨터 등등의 기기들을, 그 기능의 십분의 일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새로운 변화에 접근하는 노력에는 너무 인색하다. 아마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끄듯이,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아예 접근하기를 포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직도 내 습관에 남아 있는 농경문화의 잔재일까, 새로운 변화에 대한 도전의 두려움일까, 아니면 나이를 핑계삼은 나의 현실 안주(安住)인가? 다만 그것이 내 생활에서 시간이 부족한 원인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전장(戰場)에서 시간이 생명이라면, 경제활동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그리고 국제 사회나 인간관계에서의 시간은 신뢰(信賴)의 바탕이다. 현대인은 시간과의 전쟁을 치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계는 우리생활의 가장 중요한 절대적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현대를 살면서 시간의 귀중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대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앞으로 남은 생애를 어떤 시대의 삶을 살 것인가? 아마 세상변화에 따라잡기 노력을 게을리 할수록, 나는 현대문명의 혜택을 멀리하고 항상 뒤쳐진 마이너스 시대를 살아야 할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현대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쉼 없이 돌고 있는 시계로, 나의 생활을 다시 투영(透映)해봐야 할 것 같다. 21세기 첨단기술문명의 풍요한 바다 한가운데에서,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앉아 농경시대 문화의 삶을 살수는 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