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 임제 선생을 기리며

2018.10.28 06:05

김길남 조회 수:9

백호(白湖) 임제() 선생을 기리며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길남

 

 

 

 

 

 전남 나주 땅, 영산강가의 영모정(永慕亭)을 찾았다. 백호 임제 선생을 기리는 동산이다. 나주의 객사 금성관과 목 문화관, 향교와 목사내아를 둘러 본 뒤 곰탕 한 그릇으로 마음에 점을 찍고 찾으면 딱 맞는 곳이다.  

 영모정은 복암리 고분군을 찾아가는 큰길가에 있었다. 앞에는 영산강이 도도히 흐르고 황금들녘이 넓게 펼쳐져 경관이 빼어났다. 누구라도 여기에 오르면 시 한 수가 저절로 읊어져 나올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리니 물곡사비(勿哭辭碑)가 맞아 주었다. 백호 임제 선생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임종하는 자손들이 모두 우는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르기를 ‘너희들은 곡하지 마라.’하고 시를 지었는데 그게 물곡사다. ‘사이팔만 개호칭제(四夷八蠻 皆呼稱帝):사방팔방 오랑캐들은 저마다 황제라 칭하는데, 유독조선 입주중국(唯獨朝鮮 入主中國):오직 조선만 중국에 들어가 주인으로 섬기는데, 아생하위 아사하위(我生何爲 我死何爲):나 살면 무엇하고 죽은들 어떠하리. 물곡(勿哭):곡하지 마라.’ 우리 조선의 주체성 없음을 강하게 표현한 임종시(終詩).

 백호 선생은 기질이 호방하여 예속에 구속 받지 않으려 했다. 당쟁으로 혼란했던 시대를 비판하는 정신을 지녀 ‘풍류 기남아’라 일컬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고 그에 의지하여 나라를 이끌어왔다. 임금도 황제라 칭하지 못하고, 세자책봉이나 등극은 명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연호도 중국연호를 쓰고 비문의 첫머리도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고 시작했다. 모든 의례가 중국위주였다. 자주국가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이에 분개한 백호 선생은 임종 시에 물곡사로 표현한 것이다.

 뿌리 깊은 사대사상을 비판하고, 성리학에 의하여 사회풍속과 문화예술이 예속됨을 벗어나려 했다. 자유분방한 사상이 번뜩였다.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는 당쟁에 반항하는 정신 때문에 공부도 늦었고 과거합격과 벼슬길도 더뎠다. 34세의 나이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송도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그를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홍안은 어듸 두고 백골만 뭇쳣난다/ 잔잡아 권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청구영언 수록)이다. 당시는 양반으로서 천민 기생의 무덤에서 애도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파격적인 일이다. 이 사실이 들어나 병마절도사직에서 파직되었다 한다.

 물곡사와 황진이 애도시만 보더라고 백호 선생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활동하고 세속에 구속 받지 않으려 했는가를 능히 알 수 있다. 틀에 박혀 함부로 시도 짓지 못하고 그림도 구애를 받으며 음악도 규율에 매어 자기표현을 못했던 시대를 깨뜨리려 했다. 얽매이지 않고 시를 지어 3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천여 수의 작품을 남겼다.

 백호 선생은 자유인이고 한량(閑良)이었다. 전국의 명승지는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가는 곳마다 기생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평양기생 한우(寒雨)와 만나 첫눈에 들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우는 재색을 겸비하고 시서에 능했으며 거문고와 가야금이 뛰어났고 노래도 명창이었다. 그녀는 풍류남아 임제가 부르는 한우가(寒雨歌) 한 곡조에 마음의 빗장을 풀고 깊고도 불같은 정염의 밤을 보냈다. 임제가 먼저 거문고를 타며 한우가를 불렀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업시 길을 나니/ 산의는 눈이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마자시니 얼어잘가 하노라.’ 하니 한우가 받기를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 비취금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잘까 하노라“하고 답했다. 가야금 선율에 맞추어 부른 노래로 뜨겁고도 은근한 열정단심이 잘 드러나 있다. 기생 이름이 한우라 찬비로 비유한 것이다. 멋진 남녀의 정염이 넘치는 모습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나이라면 이런 로맨스 한 번 하고 싶지 않을까 싶다.

 

 예술은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기 떼문에 자유스럽게 표현해야 예술성 있는 작품이 나온다. 현대예술이야 모두 개방되어 자유스럽게 표현을 하지만 틀에 막혔던 조선조 전반에서 이런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라 할 수 있다. 조선 말기에 와서 실학 사상가들이 자유분방한 문학작품을 내기도 했지만 임제 선생은 앞서가는 선각자였다. 그런 사상이 이어져 후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임제 선생 같은 인물이 계속 나와 세상을 바꾸었다면 우리나라가 일찍 개화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도 청초우거진 골이 자꾸 떠올랐다.

                                            (2018.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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