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구백 냥

2020.10.05 18:12

정남숙 조회 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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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구백 냥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이 위아래 두 개씩 겹쳐 보였다. 하루 동안 피로해서 그런 거니 하고 눈만 비비고 운전에 신경 쓰며 조심스럽게 신호등을 분별했었다.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었지만 내 시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줄 알았다. 나의 이런 모습을 먼저 알아차린 아이들은 나를 억지로 가까운 안과로 데리고 갔다. 나는 내 눈 상태가 궁금하기는 했어도 큰 병은 아니겠지 하고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그런데 막상 의사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어떻게 이런 상태로 생활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장 백내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잔뜩 겁을 주었다.



옛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에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 했는데 내 몸의 구백 냥짜리가 탈이 났다는 것이다. 나보다 아이들이 더 놀라 곧바로 아는 지인들의 찬스를 받고 백내장 수술 전문병원을 소개받아 예약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사실 나는 의학상식엔 문외한이지만 수술까지는 받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니 눈도 당연히 노안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막무가내다. 막상 끌려가듯 안과에 가보니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환자들이 바글바글하다. 하루건너 두 눈의 백내장 수술을 하고 시력에 맞춰 다초점렌즈 안경과 돋보기를 새로 맞췄다. 생각지도 못한 백내장 수술을 받고 나니 거짓말같이 세상이 달라 보였다. 흐릿하게 낀 안개가 걷힌 듯이 환하게 보이고, 그동안 바라보고 살았던 모든 것들이 총천연색으로 새롭게 보여 새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눈의 노화는 중년 이후 노인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백내장은 안구의 수정체에 어떤 원인이 발생하여 혼탁해져서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요즘엔 30대~40대에서도 스마트폰과 컴퓨터 등을 장시간 사용하며 몰입하는 상태여서, 눈물막이 증발하여 안구건조증이 생기기 때문에 눈의 노화를 재촉하는 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노인성 질환이 아니라 젊은이들까지도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질환이라 한다. 괜히 겁을 먹고 쫄았지만 백내장 수술을 잘했구나 하고 아이들이 서둘러 준 것이 고마웠다. 그러나 수술을 했으니 사후 관리는 그저 가끔 안과에 가서 검안하고, 처방된 안약과 인공눈물을 받아와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한두 달 간격으로 들리던 안과도 점점 더 길어지고, 인공눈물 넣는 것도 미루다보면 귀찮고 잊어버려 안 넣고 제멋대로 무성의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 요즘 내 눈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서울 올라가기 직전 몇 달 만에 안과에 들렀다. 눈이 침침하여 TV 화면의 작은 글자는 잘 보이지도 않고, 일회용 인공눈물은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도 사물이 겹쳐 보일 때도 있고, 눈이 뻑뻑해 자꾸 깜박이게 되었다. 책을 읽을 때나 모니터를 볼 때도 시야가 흐려진다고 증상을 말하니 의사는 눈꺼풀 수술을 해보자 했다. 내색하지 않고 있었는데, 큰 손녀가 교통사고 때 망가진 안경을 새로 맞춰서 들어오며 제 아비에게, ‘할머니 안경 맞춰 드린 지 오래됐을 것 같은데’ 한다. 내일 안과에 가자는 며느리에게 전주 의사의 말을 하니 쌍꺼풀 수술은 강남에 가서 해야 한다며 또 바쁘게 서둘렀다. 겨우 말려놓고 집 가까운 안과에 가기로 했다. 오전에 예약하고 엑스레이와 여러 검사를 다 하고 나서 하는 의사의 소견은 눈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눈꺼풀 수술을 권하지 않겠다고 했다.



안구 각막 건조증이 심해 눈꺼풀 수술을 하고 나면 건조증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한다. 급 처방은 치료제 연고와 일회용 인공눈물을 하루에 열 번 이상 넣고 당분간 컴퓨터는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너무 무식하게 관리한 탓에 그사이 내 귀한 눈이 성질을 부린 것 같았다. 치료제 연고와 인공눈물 한 박스만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당분간 서울에 있어야 할 형편이라 어제 사 온 약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다음날 아들과 같이 안과에 다시 들러서 내 사정을 말하고 많은 양의 처방전을 요구하니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의사는 어제 같이 온 젊은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어제는 며느리 오늘은 아들과 같이 왔노라 하니, 의사는 갑자기 껄껄 웃으며 요즘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 쌍꺼풀 수술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 줄 아느냐 고 했다. 어지간히 꼼꼼히 따지고 물었나 보다. 의사는 "요즘 그런 며느리 없습니다." 한다.



눈꺼풀 수술을 포기하고 인공눈물만 계속 넣고 있는 내게, 며느리는 제가 피로할 때 가끔 쓰던 것이라며 아이 마스크를 씌워주었다. 따뜻한 온열 찜질을 겸한 눈 보호대다. 집으로 내려올 땐 언제 사 왔는지 상자째 넣어주었다. 집으로 내려오기 전날 아들은 기어코 안경집으로 데려가 시력을 측정해 보자고 했다. 1년에 한 번 이상 눈 검진을 받아서 시력에 맞는 안경을 쓰는 것이 좋다며 최신형 안경을 새로 맞춰 택배로 보내주었다. 지금은 안경을 낀 사람들이 안 낀 사람보다 많지만 예전엔 안경 낀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왠지 안경 낀 사람이 지적으로 보여 시력이 좋은데도 안경을 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40대엔 맞보기라 하여 패션으로 안경을 끼었지만, 50대에는 진짜 노안인지 눈이 침침해 다초점렌즈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시력에 맞는 안경을 맞춰 쓰느라 그동안 쓰다만 안경은 버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또 큰손녀의 말 한마디에 아들은 또 새 안경을 맞춰 준다. 아직은 전에 쓰던 것을 끼고 있지만 내 핸드백 속에는 새 안경이 들어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23년)에 보면 정조는 본인의 눈에 이상이 있음을 알아 “몇 년 전부터 점점 눈이 어두워지니 올봄부터는 더욱 심해져 글자의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 없다. 안경을 끼고 조정에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니 6월에는 직접 나서서 나랏일을 처리하기가 어렵겠다. 내 시력이 점점 이전보다 못해져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 어렵지만, 안경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이다.”라 적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안경을 끼는 것이 거만하거나 이상해 보이는 현상이었나 보다. 기록으로 보면 모든 왕 중에서 제일 먼저 안경을 낀 것으로 나와 있고 정조의 연세가 48세임에도 노안이 온 것 같다.



내 눈의 병명인 '안구 각막 건조증'은 급격한 노화를 가져오며 많은 안질을 동반한다고 한다. 안질에 의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매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 조선 시대 선조 23년(1589년) 기축사옥의 주인공 정여립은, ‘같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하고,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혁신적인 사상을 펼치려다 역적으로 몰려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이때 정여립 옆에서 눈물을 흘려 정여립과 같이 역적을 꾀한다고 하여, 곤장을 맞다 숨진 김 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사실은 역적에 가담한 것이 아니고 노안이라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렀다고 한다.



요즘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내 눈으로 우리 집 아이들의 신경이 곤두 선 것 같다. 말하지 않아도 알듯이 큰 며느리는 눈 보호대인 자석 안대와 눈 영양제 루테인을 대량으로 보내왔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6살까지는 시력이 발달하고 6살부터 20세까지는 시력이 떨어지며, 40세 이후부터 노화가 찾아오는 시기라 한다. 얼굴의 노화가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과정같다. 마음의 창인 눈도 노화를 피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이 염려하지 않도록 내 눈의 건강을 위해 눈을 보호하는 일에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202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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