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다알

2007.05.01 04:36

배희경 조회 수:46

  
   달과 다알                   “문학세계" 게재 2007              

   달 예찬을 위해 붓을 든 것이 아니라고 하면 모두 나를 경멸할 것이다. 이태백서 부터 읊어왔던 달을, 나는 다만 스냅사진 한 장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다알 불감증 환자이다. 한 여름 밤 소나무 가지에 걸린 달은 질시에 몸을 사리고, 초가지붕 위 호적히 떴던 달은 드디어 사막을 비추다 고아가 되었다. 출렁이는 시커먼 바다를, 달은 안간 힘을 다해 품어 보지만, 그 냉냉함에 목을 놓고 울고 만다. 달은 뜨고 지면서 사람들 마음속에 그리움이 되고, 도피처가 되었다.  
   이른 봄, 갓 돋아난 풀잎의 내음이 쌉살히 가슴에 스미고, 체신없이 흐르는 자갈돌 물소리가 정겹다. 연연한 산맥 위에 길게 누운 구름은 사람의 마음을 쓸고, 삶에 지쳐 세상까지 노랗게 만든 단풍은 천년만년 보아도 새 나지 않을 감동이다. 그러나 달은 아니다. 내게서 너무 먼곳에 떨어져 나갔다. 왜 그럴까. 또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가 있다. 나는 밤을 싫어했다. 아니 증오했다. 이차대전 말기 일제 강점기였다. B29 폭격기가 상공을 뜨기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삶은 더욱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 비행기에서 폭격을 맞지 않으려면 까만 종이로 창문을 가리고 전기 불을 꺼야 했다. 만 피트 높은 상공에서 어떻게 그런 조그만 빛을 볼 수 있을까만, 그들은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그들의 말을 따랐다. 내 나이 열다섯 살 때였다.
   밤이면 불을 차단한 암흑 속에서 나는 빛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가 바늘 구멍만한 짬에서 바깥 빛이 새어들면 기뻐서, 그 빛을 보고 잠이 들었다. 벽에 걸린 옷이 흰 유령으로 둔갑할 때는 밤이 더 저주스럽고 싫었다. 밤에 대한 낭만이 없다는 것은 이런 일들에서 연류된 것이 확실하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 그런 것들을 잊을 때가 되었는데도 아직 밤과 달에 대한 정감은 일지 않는다. 이래서 모든 감성은 어릴 적에 형성된다고 나는 굳게 믿게 되었다.

   그렇게도 싫었던 밤 때문에 새날의 밝음은 나를 몇 갑절 더 느끼게 하고 생각하게 했다. 밤에 닫쳤던 마음은 온 문을 열고 낮의 기쁨을 맞아드렸다. 풀잎을 보고, 모래를 만지고, 바람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은 항상 설레었다. 무서운 밤에서 벗어난 해방감은 나를 넘치게 감성적인 소녀로 만들었지만, 한편 달의 정서를 모르는 절름발이로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달에 대한 감흥이 없다는 것은 인생의 반을 모르고 산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남편은 달을 무척 좋아했다. 아니 무척이라는 표현보다 아이들의 말을 빌어 아주아주 좋아했다. 달밤이면 마당에 나와 정좌한 채로 앉아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만류만 하지 않는다면 온 밤이라도 즐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같이 술상 옆에 않아 있는 나는 여전히 다알 맹(盲)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옆에 있는 것으로 기쁘고 행복했다.
   왜 그 사람은 달을 그다지도 좋아했을까. 까만 하늘 위 달과 별을 끔찍이도 좋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퍽 고독했었구나 하고 말이다. 이십 여리 되는 시골 길을 폐병을 않으면서 통학했다. 학교성적이 좋지 않아 항상 꾸중만 듣던 아픈 마음과, 피곤한 몸은 달빛과 별들이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전기 불 없는 시골에서 달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요, 기쁨이고, 벗이었다. 그는 온 몸 속에서 밤과 달을 예찬했고, 나는 한사코 밤과 달을 몰아냈다.

   이래서 달은 내게 수필 감이 될 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달” 숙제를 받아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쓸 수 있을까. “봄”하면 벌써 봄의 영상이 번진다. 글자 하나로도 내 오감은 발동한다. 그러나 “달”이라고 했을 때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몇 부분을 잃은 아픔이 있다. 어릴 적 그 검은 종이의 암영이 지금까지 따라온다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슬픈 일이다.
   나는 내 속에 남의 달이라도 끌어들이기 전에는 수필을 쓸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항상 그의 고향과 함께 따라다녔던 남편의 달을 끌어안았다. 따듯한 달이었다. 가슴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그의 애절한 달이 전신으로 느껴왔다.
   별이 총총한 한여름 달밤이었다. 모깃불을 피워 놓고, 아들 넷에 둘러싸여 옛 얘기로 지샜던, 그 후 영영 다시 갖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와의 날들이 뚜렷이 내게 보였다. 그의 간절했던 그리움은 숨을 걷는 순간까지 따라다녔다.

   어둠과 철천지 원쑤를 진 나는 썬그래스도 절대 쓰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세상이 컴컴해 보이는 것이 싫다. 또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싫다. 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비 오는 날도 좋아했다. 아주 좋아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또 생각한다. 비는 멀리 것을 차단하고, 가슴 속 아늑하게 나만의 세계로 되는 정서를 가져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먼 옛날 어릴 적, 비가 오면 밭갈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 때의 안도감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빗속에서 어떤 낭만이라도 가졌단 말인가. 그는 비도 무척 좋아했다.
  
   다시 한 번 나와 그의 달을 생각한다. 그 사람은 많이 고독했다. 고독이 깊을수록  달은 더 가까이 와 닿았다. 그다지도 달을 아꼈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속에서 보인 시인의 자취이지 않았을까. 그는 시인이었다. 그것을 이 글을 쓰면서야 알았으니 나는 죽어도 시인이 될 수 없는 시맹이다. 스냅 사진으로 다알을 담으면 끝났다고 생각하는 나는 달에 대해 쓸 자격이 없지만, 그러나 확실히 달 숙제는 끝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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