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가을이었다

2007.05.03 06:58

배희경 조회 수:51

        그런 가을이었다            “미주문학”겨울호 2005년

   지난 많은 가을들을 돌아본다. 한 때는 이 계절이 빨리 지나가 주었으면 했다. 그리고 세상을 뜰 때는 가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갈대만 보아도 허허이 가슴이 비는데 죽음보다 더 허탈한 이 가을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었다.

   어느 한 가을 날, 가을 소풍을 가는 들에는 갈대가 한창이었다. 꽃 같이 화사하게 아름다웠다. 나는 갈대의 흰 털이 꽃인지, 꽃이 지고 난 후의 결실인지 몰라 친구에게도 묻고 선생님에게도 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랬는데 어째서일까. 갈대는 우리들 가는 길에 자꾸 자꾸 하얀 애상을 뿌리고 있었다. 꽃이 아니었다. 세상을 다 살고 가는 아픔이었다. 그 후 갈대는 내 추억의 풀대 줄에 슬픔을 안은 채 끼어들었다.

   높이 뜬 구름이 있는 들판이었다. 뜬금없이 지나는 바람소리에 놀라 가을을 만나는 그런 가을의 어느 날, 우리들은 기차를 타고 우리가 사는 북쪽 ‘주북’이라는 간이역에서 내렸다. 폐병으로 백지가 되어 누워있을 학급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천로 길은 아직 햇볕으로 뜨거웠고, 갈 길이 멀었던 길 가에는 갈대가 성성했다.
   과수원 집 딸인 친구가 그 가을을 넘기고 다음 가을에 하늘나라로 꺼났다던 날, 나는 친구보다 엄마를 생각해 더 울었다. 엄마가 되기 까마득한 전에 엄마의 아픔을 알고 울었다. 외동딸 하나 호롱불 같이 닦아 불 밝혔던 자기 분신을 보낸 엄마는 얼마나 슬펐을까.
   어느새 갈대도 지고 단풍이 후루루 노랑 비 같이 떨어질 때면 나는 굴뚝 뒤에 꼭 꼭 숨는 숨바꼭질을 하고 싶었다. 낙조 되어 떨어진 푸른 싹의 아픔이 물감으로 온통 번져서, 가슴 아리를 하며 자꾸 가을을 삼켰다.

   꽃 하나 가득 꺾어 가슴에 안겨주던 불청객의 출현도 가을의 아픔이었다. 그 아픔으로 나를 알게 하고 세상을 알게 했던 마로의 망서림에서 한층 키가 컸다. 나무가 둥근 둘레로 연륜을 쌓듯 사람도 이런 둘레가 돌아갈 때 마다 한 번씩 성장을 한다. 그 둘레가 환희의 찬미였든 안타까움의 절규였든 둘레는 자꾸 환을 돌아 많은 나이테를 그렸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그것도 다 지우고 원점으로 돌아가는 날은 가을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꿈을 꾸었다. 그 들판-. 소풍 가는 길에서 봤던 허탈의 들판. 철로 길 옆 갈대의 소요 속에서 술렁거리던 들판. 많이 봐 온 그런 들에서 나는 길을 잃고 해매고 있었다. 왜 길을 잃었을까. 어제 일이 벌써 낯설었을까. 그런 낯선 일들의 연속으로 오늘이라는 날이 내일이면 낯설고 내일이년 어제가 낯설어서,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고 새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어린 시절을 지난 오랜 후, 나는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는 것도 모르고, 땡볕의 메뚜기처럼 퍼적펄적 뛰며 산 때도 있었다. 땅에서 기는 아이, 겨우 걸음마를 배운 아이는 넘어져서 울고, 아들아이는 밖에서 목청을 다해 친구를 부른다. 줄넘기에 여념이 없는 큰 딸 아이는 어미의 채근도 들리지 않고...생이 넘쳤던 날들이었다. 바뀌는 계절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날들도 또 지나고 아이들이 다 장성한 어느 날, 나는 다시 옛적의 낯익었던 가을과 해후했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추석성묘를 간 미국 가을의 성성한 하늘 아래에서였다. 참 오랫  만이었다. 낯이 익으면서 설었다.

   가을이 왔다. 신문은 금주 말이 추석이라며 흥분하고 있다. 추석날의 즐거움은 일 년을 두고 기다리던 날이 아니었던가. 수레에 실은 제물들이 눈앞에 서물거리는데 길은 왜 그리도 멀었는지. 개울가에서 수 없이 수건을 적시고, 징검다리 여러 개를 건넜어도 산소가 보이지 않았던 추석날의 성묘 길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촐삭거리며 기쁘기만 했던 날들이 아늑한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나는 가을걷이의 수확의 환희를 잘 모른다. 도시에서 났고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 고장의 한가위 풍경은 어는 시골 못지않게 풍성했다. 그런 추석을 신문에서 떠들어서야 겨우 일깨워 지는 것은 여기서 너무 오래 산 탓일까. 한국 온 땅덩어리가 술렁거리는 명절인데 들뜸을 모르니 안타깝다. 이 날의 관습을 놓은 지가 한참 된 나는 이제 송편을 빚기는커녕, 사다 먹는 것도 잊었다. 이래서 약간의 가책들 느끼는 내게 또 산소에 가지 않는가 고 묻는 오빠의 말도 부담스럽다. 대 명절의 감회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달력 속의 날짜만 바라보며 지난날을 회고하고 있다.

   슬프다 하지 말아야지. 벌써 나는 어머니가 살고 간 나이도 훨씬 넘게 살았다. 많은 날들을 회한 없는 날로 살았다고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식들이 이제 이을 차례가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 아버지를 이십 년 기렸고, 대 가족 모임은 이제 끝났지만 내가 죽으면 또 시작하겠지. 이렇게 우리 풍습은 남아 미국 땅에서도 영원히 이어갈 것이다.
   가을의 아픔과 이별의 아픔이 나를 조이더라도, 메뚜기 풀대 꾀임줄 처럼 촘촘히 낀 많은 추억들이 나를 위로할 것이다 또 사랑의 줄을 엮으며 띄운 풍선이 나를 둥둥 뜨게 할지도 모른다. 이 화사한 옥색 하늘 아래에 살면서 왜 가을이라 마다할까. 어느 때고 떠날 수 있는 날로 살아 보자. 이제 기쁘게 날 수 있는 준비는 된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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