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제 1 동화집)

2007.02.23 12:40

홍영순 조회 수:1108 추천:145

                  코리안 아메리칸


                                            


아버지 엄마가 요즈음처럼 말을 많이 하는 건 아주 드문 일입니다.
평소에는 조용한 분들이 웃고 떠들고 걸음걸이까지 활기차졌습니다.
아버지 엄마가 이렇게 신명난 건 복권이 당첨 되어서도 아니고, 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해서도 아닙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서 열리는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문입니다.
애너하임은 우리 집이 있는 오션사이드에서 차로 한 시간 반만 가면 됩니다.
아무튼 아버지 엄마는 날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야기뿐입니다
“한국이 1라운드에서 세 경기를 다 이겼대요.”
“아시아에서 최고라던 일본도 이기고 조 1위래.”
“일본하고는 미국에서 또 경기를 해야 한대요.”
“또 이기면 되지 뭐.”
“가까운데서 경기를 하니 더 실감나네요.”
“우리도 직접 경기를 보러 갈까?”
“결승과 준결승은 샌디에이고에서 한다니 그때 가요.”
“그럼 미리 입장권을 사야지.”
아버지 엄마는 직접 태극기를 만든다, 티셔츠와 모자를 사들인다, 날마다 아이들처럼 좋아했습니다.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라운드인 8강전이 시작되었습니다.
2006년 3월 13일, 한국이 멕시코와 8강전 첫 경기를 하는 날입니다.
아버지 엄마는 갈비를 굽고 큰집식구들을 불렀어요. 우리 텔레비전이 큰집 것보다 크기도 하지만 응원은 모여서 해야 힘이 난다고 부른 것입니다.
나는 빨갛게 염색한 머리를 빳빳하게 세운 사촌형 제임스가 들어오자 눈이 휘둥그레 졌어요. 제임스 형도 나를 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씩 웃었어요. 나는 슬쩍 형에게 다가가며 물었어요.
“언제 또 염색했어?”
“어제 했어. 어때, 빨간 머리도 괜찮지?”
“야단 안 맞았어?”
“아니. 우리 엄마 아빠는 이젠 나를 포기했나봐.”
“먼저 번 노랑머리도 괜찮았는데 왜 또 염색했어?”
“그냥 바꿔보고 싶었어. 야, 네 방으로 가자. 내가 네 선물 사왔어.”
제임스 형이 준 선물은 노란 염색약과 무스였어요.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얼른 옷장 구석에다 감췄어요. 엄마한테 들키면 염색도 못하고 야단만 맞을 테니까요.

한 달 전이었습니다.
“엄마, 나 염색하면 안돼요? 빨갛고 파랗게 하지 않고 금발머리로 할게요.”
내가 염색하고 싶다고 말하자, 엄마는 나를 똑바로 앉히더니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하나님은 사람들 피부색에 어울리는 머리칼을 만드셨어. 우리처럼 황색피부엔 까만 머리가 어울리고, 백인에게는 노랑머리가 잘 어울리는 거야.”
“제임스 형은 노랗게 염색했는데도 멋있잖아요.”
“얼굴색이 더 노래 보이던데 뭐가 멋있니? 거기다 머리는 노랗고 눈썹과 눈동자는 까마니까 어색하고 이상하더라.”
“그럼 눈썹까지 노랗게 염색하면 되잖아요.”
“그럼 너 눈동자도 파랗게 염색 할 거니?”
“파란색 렌즈를 해주시면 더 좋죠.”
“뭐라고? 너 솔직히 말해봐. 너 코리안 아메리칸이 창피한 거니? 그래서 백인처럼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싶은 거야?”
“......”
난 더 이상 말 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 말이 맞거든요. 난 할 수 있다면 백인 친구들처럼 되고 싶으니까요. 그렇지만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와 엄마는 좀 유별나거든요.
이름만 해도 그래요.  
큰 아버지는 미국식 이름이 부르기 좋고 거부감 없다고 사촌들 이름을 제임스 와 쟌 으로 지었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엄마는 내 이름을 돌림자까지 넣어 이상훈이라고 지었어요. 나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사람이고 앞으로도 미국에 살아야 하는데 한국 이름을 지어준 겁니다.
선생님은 성까지 불러서 ‘쌩 리’라 부르고, 친구들은 이름만 ‘쌩’이라고 부릅니다. 돌림자라고 넣은 ‘훈’은 아예 부르지도 않고, 쓸 때도 H. 라고만 씁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준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하여튼 이렇게 철저한 한국식 아버지 엄마에게 머리 염색이야기를 다시 할 수 없었어요.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어요.
드디어 한국 대 멕시코의 경기가 시작되었어요.  
에인절스 스타디움 관중석은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어요. 그중에 파란색 모자를 썼거나 파란색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훨씬 많았어요. 그들은 태극기를 흔들거나, KOREA라고 쓴 파란색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열심히 응원했어요. 자세히 보니 그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까맣고 눈동자가 까만 한국 사람들이었어요. 어디서 그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왔는지 놀라운 일이었어요.
우리 집 거실에서도 응원이 시작되었어요.
어른들이 큰 소리로 응원하자 제임스 형이 슬며시 일어나며 말했어요.
“우린 상훈이 방에 가서 놀래요.”
나는 야구경기를 보고 싶었지만 제임스 형과 사촌 동생 쟌을 데리고 내 방으로 갔어요. 제임스 형은 해리포터를 보자고 했어요. 난 이미 다섯 번이나 봤지만 형 말을 거절할 수 없어 또 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내 귀는 거실로 안테나를 맞춰놓은 것처럼 응원 소리가 들렸어요.  
요란한 응원소리와 함께 “대-한 민국 ” 소리가 들렸어요.
“어~휴!”
한숨 소리가 나더니, “괜찮아, 괜찮아!” 하는 소리도 들렸어요. 아마 우리나라 투수가 힘들게 공을 던지고 있나봅니다.
다시 꽹과리 소리가 들리고 “와아, 와아!” 소리가 들렸어요. 아마 한국 선수가 안타를 쳤나봅니다.
응원 소리가 계속 들리더니 갑자기 큰 함성이 들렸어요.
“홈런! 홈-런!”  
쟌이 후닥닥 뛰어 나가더니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어요.
“이승엽 선수가 2점 홈런을 쳐서 코리아가 2: 0으로 이기고 있어.”
쟌이 신나게 떠들자 제임스 형이 비웃듯 말했어요.
“야, 우린 아메리칸 이야! 너 그러다간 내일도 아메리카 응원 안하고 코리아 응원하겠다.”
쟌은 머쓱해지며 입을 다물고 다시 해리포터를 봤어요.
거실에선 쉴 사이 없이 응원이 계속되더니 다시 환호성이 터졌어요.
“와아, 와아! 이겼다. 이겼다!”
쟌과 나는 노루새끼처럼 재빨리 뛰어나갔어요.
거실에서는 어른 넷이 함성을 지르고, 텔레비전에선 한국 관중들이 태극기와 파란 막대풍선을 흔들며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어요.
한국이 2:1로 멕시코를 이겼어요.
내 가슴도 기쁨이 넘쳐서 제임스 형이 보던 말든 웃음이 저절로 나왔어요.
큰집식구들이 집에 가려고 일어나자 아버지가 말했어요.
“형님! 내일 미국과 경기할 때도 오세요. 같이 응원하니 참 좋은데요.”
“우린 내일 직접 가서 응원 하려는데 표를 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우린 샌디에이고에서 하는 결승전에 갈려고 입장권을 구했어요.”
“미리 사길 잘했지. 지금은 몇 배를 줘도 표를 구할 수 없대.”
“그럼 내일 잘 다녀오세요. 만일 아이들 맡기려면 데려다 놓고 가세요.”
“내일 연락 없으면 아이들도 같이 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마.”

다음 날, 한국이 미국과 경기 하는 날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외삼촌이 외할머니와 왔어요. 저녁을 먹고 TV앞에 모여 앉자 외삼촌이 나에게 물었어요.
“상훈아, 넌 어느 나라 응원할거니?”
나는 식구들을 둘러보면서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어요.
“아메리카요. 난 미국사람이잖아요.”
식구들이 나를 보며 웃자, 이번엔 외삼촌이 할머니에게 물었어요.
“엄마도 미국시민권자인데 어느 나라 응원하실 거예요?”
외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어요.
“난 코리안 아메리칸 이다. 미국사람이지만 나의 조국은 대한민국이야. 그래서 오늘은 한국을 응원하고, 미국이 다른 나라와 경기 할 땐 미국을 응원할거다.”
나는 조국이란 말은 잘 이해할 수 없지만, 할머니는 미국보다 한국을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야구경기가 시작되자 우리식구들 응원도 시작됐어요.
에인절스 야구장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대형 태극기가 보였어요. 관중석에는 파란모자, 파란 머리띠, 파란티셔츠와 파란막대풍선이 많았어요. 꽹과리 소리와 “대-한 민국!” 소리도 힘차게 들렸어요.
관중석은 미국사람들 보다 한국 사람들이 훨씬 많아보였어요. 또다시 놀랍고 감격스러운 응원이 시작되었어요.
1회 말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치자 아버지와 삼춘이 벌떡 일어났어요.
“와아, 홈런이다. 홈런!”      
엄마와 할머니도 “홈런!”을 외치며 기뻐했어요. 평소에는 말도 크게 안하던 외할머니가 그렇게 좋아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보다 더 이상한 건 나 자신이었어요. 이승엽 선수가 홈런을 치자 내 가슴이 기쁨으로 뛰었어요. 분명 나는 미국을 응원한다고 생각했는데 내 가슴은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나봅니다.
진짜 깜짝 놀랄 일은 4회 말에 일어났어요.
최희섭 선수가 3점 홈런을 치자 함성으로 거실이 떠나갈 것 같았어요. 에인절스 야구장 관중석에도 한국 사람들이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어요.
카메라를 따라 열광하는 관중석을 둘러보던 나는 내 눈을 의심했어요.
“어? 제임스 형이잖아!”  
분명 제임스와 쟌은 태극기를 흔들고, 큰아버지와 큰엄마는 파란색 막대풍선을 두드리며 환호하고 있었어요.
“정말 저기 형님네 식구들이 있네!”
아버지 엄마도 큰집 식구들을 보자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어요.
나는 태극기를 흔들던 제임스 형을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났어요.
역시 제임스 형도 코리안 아메리칸 이었어요.
한국이 7:3으로 미국을 이기자 외할머니가 웃으며 말했어요.
“상훈아, 내일은 할머니도 미국을 응원할거다.”
    
그날 밤 나는 제임스 형이 사다준 노란 염색약을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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