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 초기

1976년 가을 어느 날

                                                                                                                       조옥동


  지난 40년 전을 찾아 세월의 계단을 거슬러 오른다. 무심히 병원 3층 연구실 창가에 서면 창밖 풍경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들이 늘어선 서울의 경복궁 거리를 바라보는 듯 이국에서의 가을은 낯설지 않았다. 휴식시간이면 자주 내려가 노란 은행나무 밑에 서서 고국의 가을을 연상하며, 지천으로 길가에 쌓여가는 노란 낙엽 속에 떨어지는 열매들과 함께 나도 말없이 묻히고 싶었다.


 1976년 9월3일, 미 대사관으로부터 일 년을 하루 같이 기다린 이민 허락 통지를 받았다. 미국에 입국이 늦어지면 나를 위한 일자리를 더 이상 붙잡고 기다릴 수 없다는 대학교 선배의 마지막 재촉 편지를 받고 한 달이 지나서였다. 즉시 재직하던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꼭 필요한 서류들만을 준비하여 다섯 식구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날은 9월 9일, 단 7일 만에 살림을 정리하고 이민 짐을 챙긴 것이다. 요행이라 할 만큼 고맙게 마련된 미국의 새 직장을 혹시라도 놓질 가 염려하여 오금이 저리도록 뛰어다닌 며칠은 내 평생의 달력에 초고속 열차보다 빠르게 움직인 기록적인 날들이다.

 

 김포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하와이 공항에 도착하여 미국 입국수속을 시켰다. 다시 우리를 태우고 L. A 국제 터미널에 내려놓고 목적지를 가려면 유나이티드 비행기 터널에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야 한다는 친절한 안내도 받았다. 올망졸망 어린 세 아이들을 거느리고, 우리내외는 짐 가방을 양손으로 무겁게 들고 서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유나이티드 터미널은 어디 있느냐?" 물었다. 앞에 있는 주차장 건물을 가리키며 저 너머에 있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주차장 건물을 올라가라는 말로 알아듣고 몇 층이나 되는 주차장 건물 속 밝지도 않은 수십 개의 층계를 오르고 또 내리며 한 시간이상 걸려서 겨우 도착했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간을 놓쳐 거의 터미널에서 자야할 뻔했다. 지금 생각하면 10 분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를 무거운 가방을 끌며 졸리 운 아이들을 앞세우고 한 시간을 헤맨 것이다.

비행기에 탑승한 후, 겨우 각자 자리에 앉고 나서 최종 목적지에 틀림없이 우리를 내려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었다. 안내원을 붙잡고 "우리를 미주리 주의 센트 루이스 공항에 내려주세요." 말을 하니 "어디? 어디요?" 몇 번이나 반복해도 알아듣지 못하여 영자로 "S, A, I, N, T L, O, U, I, S" 했을 때 그제야 "아, 쎈^루이스 말이군요."하며 알아들었다. 아이들의 아픈 다리를 손으로 만져주며 우유라도 주고 싶어 안내원에게 "밀크 좀 주세요." 해도 또 알아듣지 못했다. "M, I, L, K."했을 때 그제야 "아, 밀^크."하며 갖다 주었다. 이 땅에 내린 첫 날, 영어단어와 문장구조 공부엔 열심이었으나 억양과 악센트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영어실력은 대화를 할 때엔 매우 허약함을 실감했다. 마켓에 가서 “밀^크” 하고 주문할 때 혓바닥이 한참 천정에 붙어 있어야 점원은 알아듣고 우유팩을 내주었다. 미국이민을 위해 종로 영어 학원을 다니며 수 개 월 열심히 배운 회화 역시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다.


 일찍 유학생으로 건너와 학위를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한 연구실에서 그의 실력이 인정되어 선배는 주임교수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별로 연구실 경험이 없는 나 같은 후배를 위해 전임자가 떠난 빈자리를 일 년 이상 붙들고 있었다. 이민보따리를 다 풀기 전, 미국 땅에 떨어지고 닷새 만에 서둘러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 내분비과 연구실로 출근을 시작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정답게 말을 건네면 겨우 한 두 마디 응대를 하고는 빨리 길을 비켰다. 때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그들이 원망스럽고 짧은 내 회화 실력이 부끄럽고 답답했다. 간혹 "당신은 일본사람?" 아니라면 "아, 중국사람 이군요." "아니요,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 대답하면 그들 대부분은 "한국사람? 한국은 어디에 있는 나라예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낯선 동양여자를 만나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알면서 그 사이에 있는 코리아를 모르는 그들이 야속하여 속으로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얕잡아 생각다가 내 나라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서 열심히 설명을 하면 그들은 몇 마디 듣는 척하다 지나쳤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해외이민이 활발히 시작되고 많은 한인들이 주로 남미와 미국으로 이민을 하던 시절, 우리들끼리만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고 그의 후손이란 자긍심에 묻혀 바깥세상을 알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였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국 한국의 가을 하늘만 에메랄드 보석 같이 푸른 줄 알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렵 해외로 나간 한국인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모두가 임명장 없는 외교관들로 조국 한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손과 머리, 관찰과 분별력을 총동원해서 하루 빨리 배워야했던 연구실 일은 만만치 않았다. 매일 사용하는 실험기구와 기계는 한국에선 듣거나 본 일이 없는 새로운 것들 뿐, 사용하는 매뉴얼은 물론 진행되고 있는 연구와 관계되는 원서들을 집에까지 챙겨가 공부해야 했다. 처음 2-3개월은 피곤이 누적되고 시차를 이기지 못해 실험 중에 쏟아지는 졸음을 떨칠 수 없어 꾸벅거리다 스스로 깜짝 깜짝 놀라는 일이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서울에서 살면 오히려 잘 지낼 형편에 부모형제를 떠나 타국에 와서 고생을 자처한다는 후회가 어깨를 눌렀다. 대학졸업 후 곧 바로 시작한 16년간의 공든 교편생활을 단 번에 접고, 이 땅에 발이 닿자 쉴 틈 없이 다시 낯선 직장 문을 밀고 당기기를 시작한 내 자신이 직장 운과 일복만은 터지도록 타고 났다는 자위도 잠간 새로운 세계에서 직장 초년생이 갖는 불안으로 마음의 창문은 명암이 수시로 교차했다.


 1976년 9월의 미주리 주 워싱턴 대학교 넓은 정원은 한없이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소란한 가을빛으로 타고 있었다. 막 시작한 이민생활, 고국의 정든 가을을 옮겨온 노랑 은행나무 잎들만 가슴속에서 끓고 있는 막연한 불안감을 내대신 이리저리 흩날리며 사라졌다.

그 가을 어느 날, 나는 심리적 부담과 방황으로 맥이 풀리고 힘이 빠진 두 다리를 바로 세웠다. 저들이 내 말을 알아듣고 나를 알게 하려면, 내 뜻과 생각을 시원하게 그들과 나누려면, 저들을 이해하고 새로운 세상을 배우려면, 적극적인 태도로 먼저 그들 가까이 다가가야 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 했다. 두려운 꿈에서 깨어 난 나는 긴 호흡을 한 후 의자에서 곧게 일어섰다. 기회의 땅에서 어린 아이들의 미래와 우리의 꿈을 찾아 나서야 했다.


 연구실 일에 열심을 내며 차츰 적응 할 무렵, 올드미스 선배는 홀연히 나타난 멋있는 신랑감과 급행으로 진행된 결혼식을 마치고는 안타깝게 그의 일을 내게 떠맡긴 후 연구실을 떠났다.

이민초기 시작한 생명과학 연구실 일을 지금까지 40년간 놓지 않고 있다. 평생직장이 될 줄 몰랐다. 전공과 적성에 맞는 일터를 마련해준 그 선배는 내 안에 항상 함께 있다. 세상을 지나는 여정에서 만남은 우연히 다가온다 할지라도 무심코 지나쳐선 안 되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인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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