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하늘은 높고

                                      

                                                           조옥동 (시인)


10월은 우아해지는 달이다. 며칠 몸살을 앓고 난 후 다리가 휘청거리고 힘이 없지만 조심조심 풀밭 언덕길을 오르다. 연구실 주위 풀밭에서 피어나는 야생화를 좋아해서 틈이 나면 그들을 찾는다. 잔디와 어울려 사는 노란 색 보라색 또는 빨간색 등 각가지 들꽃들과 눈을 맞추며 걸음을 옮기노라니 지난 며칠사이 그들의 웃음빛이 달라 보인다. 너울대며 흐드러졌던 모습이 아침저녁 찬바람에 스치며 그들은 매무새를 다듬은 양 우아해졌다. 계절의 변화에 하찮은 풀꽃이 보여주는 민감한 반응 앞에 무안만 해서는 안 되겠다. 머리를 드니 더 파랗고 높아진 하늘아래 서 있는 나를 발견하다.


10월은 멀리 떠났던 여행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귀소(歸巢)의 달이다. 맨살을 내놓고 모래사장을 뒹굴며 바다를 점령할 듯 온몸을 파도 속에 밀어 넣고 바닷바람을 휘젓던 그을린 양 어깨를 내려 보며 집으로 돌아와 모자들을 벗는다. 명산이나 암벽을 찾아 텐트를 세우고 트랙과 등산을 즐기며 호연지기를 외치던 산행에서 돌아와 사용했던 장비를 정돈하고 단련한 체험을 느긋이 묵상한다.


10월, 가을엔 가지치기를 한다. 가드너들은 봄부터 여름까지 풍성한 햇빛에 사방으로 웃자란 큰가지를 쳐내고 잔가지를 자른다. 초목이 겨울을 지난 후 새봄에 싹이 돋고 꽃 필 때 알맞은 수분과 영양을 받아 새로운 성장을 잘 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우리도 무더운 여름철을 지나는 동안 이리저리 흩어진 생각들을 버릴 것은 버리고 정리하며 지치고 늘어진 몸을 바로잡고 평상의 규칙적 생활에 충실하려 달력의 날자들을 체크한다. 머지않아 찾아 올 한해의 결산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10월은 생각하는 달이다. 봄부터 많은 계절의 변화와 특히 가뭄과 같은 갈증의 어려움을 견디어 생존한 모든 생명체는 호흡이 있음에 감사할 일이다. 내 나이에 은퇴하여 노년을 편히 지내지 않고 일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나 아직도 나를 꼭 필요로 하는 직장이 있다는 사실은 기쁘다. 지난 35년을 한 직장에서 더욱이나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겐 축복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의 환경을 좋아하여 더욱 감사한다.


샌퍼난도밸리 북서쪽 노즈 힐에 자리 잡은 세펄베다 재향군인 병원은 20여개의 건물들과 9홀을 가진 골프코스, 각종 운동시설 그리고 연구용 동물들의 사육장을 가진 친 자연환경으로 구성된 캠퍼스로 규모가 크고 너르다. 캠퍼스 안에 교회가 있고 지금은 운영하지 않지만 극장건물이 있고 건물과 건물사이엔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각종행사를 치루며, 5월부터 피기 시작하는 자카란다 꽃향기는 오고가는 발길을 즐겁게 한다.


원래 오렌지과원의 일부에 1971년 병원을 건축하였고, 1994년 노스리지 대지진에 6층 입원병동이 균열이 생겨 아주 허물고 사방이 유리로 된 3층 건물로 현재의 본관을 증축하였다. 3년이나 걸린 이 건물건축에 쏟아 부은 철재양만도 어마어마하여 아무리 큰 지진이 올지라도 안전하리라는 믿음도 부어주었다.

아래층의 드넓은 홀은 여름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과 겨울엔 따뜻한 곳을 찾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인다. 조국의 부름을 따라 전쟁터에 나가 국가를 위해 싸우다 육신의 일부를 잃은 상이군인들이 끝까지 계속 치료를 받고 언제든지 찾아와 쉴 곳이 있다는 현실이 참 다행스럽다. 역시 부유한 나라, 안정된 나라의 국민으로 태어남은 축복이다.


각 분야의 연구실이 있는 리서치 빌딩과 반 불럭거리에 있는 이 중앙건물에 용무가 있어 수시로 출입을 하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노병의 상이용사들을 만났다. 간혹 어느 상이용사는 "코리안 이지요?" 나에게 다가와 먼저 대화를 연다. 한국전에 참가했던 얘기를 들려주며 그 가난했던 한국이 현재 눈부시게 발전한 것을 기뻐하고 축하한다. 자신의 몸이 상한 것은 미뤄두고 기뻐하는 그 고마운 상이용사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너그럽고 착한 모습 앞에 머리를 숙인다. 육신은 불편한데 그들의 얼굴은 밝고 평화스럽다.


한국전쟁 참전 상이용사들의 값진 희생은 현재 한국의 발전과 부흥의 원동력이 되어 후세가 평화를 누리건만 의리를 쉽게 저버리고 잘못된 일부세력의 사상과 전반적으로 선진국 국민의 소양이 부족하여 한국은 다시 전쟁의 위험을 당하고 있다. 저들의 희생과 도움이 헛되지 않도록 새롭게 변해야 하겠다.

과연 저들의 무엇이 이처럼 평화를 만드나 생각을 하니 우아함이란 말을 그들에게 훈장처럼 달아주고 싶다. 희생과 용기, 화해와 절제, 베풂과 염치 그리고 진실과 배려는 "우아함"이란 화병에 꽂힐 꽃들이다. 풍요와 편리함만이 제일이라면 게으름과 안일함에 머물러 메마른 사막과 같은 사각지대를 만들어 간다. 국가의 보상을 옳게 사용하지 않고 마약과 일시적 향락에 소모하여 거리의 홈리스로 전락한 젊은 상이용사도 많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치른 베트남전쟁을 비롯하여 중동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은 수많은 상이군인들을 양산하고 천문학적 전비를 소모하느라 미국은 재정을 많이 축내어 사실상 과학을 비롯한 연구기금 공급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실제로 연구비를 수령하는데 이전 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전쟁이란 해도 안 해도 참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미국은 다른 학문도 비슷하나 의학은 세계의 최첨단을 이끌어 가고 있다.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의 모습은 진지하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여 풍요하고 편하게 잘 살아 보겠다는 바깥세상 일과는 무관한 듯이 자신의 연구과제에 온갖 열정을 쏟는다. 이런 모습들의 인재들이 상아탑 속에 존재하는 한 세상은 계속 발전하고 인류는 존속하리라는 믿음이 마음 깊이 무릎 꿇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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