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박태순|나누고 싶은 글


'독자가 누리는' 글쓰기로 부드러운 세상을 위하여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우선 세 가지 답안을 제출해 본다.
 
첫번째로는 ‘문학이 있으니까’이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는 알피니스트가 있었던 것처럼, 나 또한 문청 시절에 인간사회의 높은 봉우리로 문학이 솟구쳐 있는 것을 보았으니 올라가고 싶어했을 것이다.
 
두번째로는 '인생의 실현(The use of life)'이다. 암울했던 한국사회를 4ㆍ19 혁명이 적발해내던 1960년대 초반에 당세풍의 청춘들은 질풍노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예감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인생과 세상을 새롭게 만나게 해야 한다는 갖가지 설계들을 꾸며보고 있었을 것인데, 나는 문학으로 이를 실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전망을 가져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좀 고리타분한 답변이 될지 모르겠는데 일종의 소설사회학 탐구와 같은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근대화 과정에 돌입한 한국사회를 거대서사로 돌파해 내야 한다는 포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시민문학은 불가능했다. 탈농_이농_도시난민의 단계를 밟아 시민사회는 거칠게 펼쳐져 나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문학주의 문학으로서는 도저히 이를 담아낼 수 없어 차라리 피카레스크 소설이라든가 현장문학이 더 갈급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신림동 낙골이라는 난민촌에 잠입하여 ‘외촌동 사람들’이라는 연작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고상한 문학을 저속화시키고 있다는 핀잔도 주위로부터 들었다.
 
1970년대로 넘어와 ‘현실은 문학의 스승’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을 적에 이는 리얼리즘 문학론을 펼치려는 것만은 아니었을 일이었다. 소설 장르의 성역화, 소설 쓰기의 성직화와는 상반되는 출구가 곧 현실의 입구였다.
 
삶의 산문성에 희망의 폭을 넓히어 보다 나은 세상을 찾아가게 해야 한다는 소망이었겠는데, 나는 ‘작가기행’이라는 산문집의 서문에서 이렇게 쓴 일이 있었다. “우리 시대의 황홀은 힘을 필요로 하고, 문학은 문학 아닌 것이 없게 한다.”
 
요컨대 문학의 힘은 문학을 위해 소모되어서는 아니 되며 ‘세상을 향해 쏘아라’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당시에 ‘현실’은 이미 엄혹해지기 시작했었다. ‘10월유신’이라는 것을 강행하면서 국가사회가 시민사회를 어떻게 구박하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구태여 말할 나위조차 없는 일이었으니….
 
한국사회는 본격적으로 ‘후발 근대운동’의 격랑 속에 휘말려 있었거니와 이 당시 문인들이 언론운동을 일으키던 일선 기자들을 돕기 위한 격려광고를 통해 퍼뜨렸던 문구가 있었다.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자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는다.”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세상을 발전시키려 하는 것이 된다는 말을 문학이 어떻게 이해해야만 했던 것일까.
 
국가사회와 시민사회는 어차피 격돌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었다. 국가 프로젝트의 경제개발운동은 ‘압축성장’의 능률주의를 강행시키고 있었거니와 시민운동의 ‘압축성숙’을 이룩하게 할 수 있는 그러한 대도(大道)는 없었다.
 
후자의 ‘근대운동’은 오히려 ‘전근대적인’ 각 단계를 돌파해나가야 했고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어서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의 순결한 희생이 뒤따르게 되었던 것인가.
 
한국문학 전체가 동참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내세워 진정한 근대문학의 성취를 탐험하는 일에 함께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내 문학의 영광이었고 아울러 시련이기도 하였다.
 
1980년대를 권력과 욕망과 광기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노릇이지만, 시민사회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받게 되는 만큼만 역사의 교훈을 외면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것이다. 1987년에 시민사회는 6월 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근대와의 전투’에서 비로소 비로소 파시즘적인 근대를 퇴치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1960년의 4ㆍ19, 1980년의 5ㆍ18, 그리하여 마침내 1987년의 6월 항쟁이라는 ‘30년 전쟁’을 통해 시민사회는 국가사회의 굴레를 벗어나 경제근대화의 결실만 아니라 사회민주화를 일상생활 속에서 누려볼 능력과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던 것이지만, 이에 관한 문학보고서는 과연 어떠하였던지….
 
권력과 욕망과 광기는 독재 세력들이 드러내놓고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이른바 ‘민주 세력들’에게도 고스란히 내장되어 있었다는 사실부터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포함하여, 시민사회는 바야흐로 제2차 운동단계로 돌입하고 도약했어야 했는데 과연 그러할 수 있었는지….
 
30년 전쟁을 통해 언론자유운동과 문학실천운동은 사회중간지식인운동의 몫을 일정 부분 감당해왔던 것이지만 성숙된 시민사회의 대전환을 포착하는 코드를 과연 제대로 입력시키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주류 언론 중에서는 ‘언론 권력’의 기득권 챙기기로 보수화 현상을 보이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도 그러하려니와 문학시장주의에 편승하여 ‘문학 권력’이 행사되기도 한다는 평론마저 나오고 있는 사태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겠는지….
 
그리하여 한 시대가 지나갔지만 다른 시대는 또다른 방황과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진로를 찾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1990년대가 보여주고 있었다.
 
시대는 정치로부터 시작되어 문학으로 마감된다는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학으로 자기 시대를 건사해야 하는 일은 그리하여 다음 시대를 열게 해주겠지만 혹독한 배반을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되기도 할 것이다.
 
새로운 청춘들은 뒤쪽의 물레방아가 어떻게 돌아가게 되었던가를 돌아다볼 이유가 없는데, 앞으로 나타나고 있는 물레방아를 전심전력으로 돌려야 할 노릇에 미리부터 소용돌이를 쳐대어야 하기에 그러하다.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은 뒤로 처지게 마련이다. 문학은 전진하고 문인들은 퇴보하고 퇴장한다.
 
1990년대로부터 한국문단에 갑작스레 외래사조가 들이닥쳤다. 포스트모더니즘, 탈구조주의, 탈역사주의… 여기에 프랑스 기호학자가 제시한 명제를 하나 인용하고자 한다.
 
“작가의 죽음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독자의 탄생이어야 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이러한 언술이 ‘명제’인 까닭은 근대산업사회에서 탈근대 정보사회로 진입하는 문화변동의 대전환기에 나타나는 ‘권력의 이동’ 내지 ‘문화적 전복현상’을 그가 포착해놓고 있다는 판단 때문에서만은 아니다.
 
‘작가의 죽음’이란 코드는 곧 정치 권력주의만 아니라 모든 문화적 권위주의마저도 ‘청산’되어야 한다는 시민사회의 ‘제3의 승리’ 예고편일 수 있는 기호 체계일 수 있다. ‘독자의 탄생’이란 코드는 이미 인터넷문명을 통해 구텐베르그 문명이 누려온 ‘지식권력’의 이동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듯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컨셉임을 살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바르트가 말하는 ‘작가의 죽음’은 문학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독자의 탄생’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어야 하는 문학의 부활이자 새로운 르네상스인 것이다.
 
‘작가의 죽음’이 선언되고 있는 이 놀라운 신세계에서 작가라는 자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응답은 이러한 ‘선언’이 오히려 상쾌하게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을 ‘작가’라고 일깨워야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미련스럽게 고통스러워했던가 하는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다는 그런 억하심정에서가 아니다. 진정한 민주 세상은 모든 독자가 문학의 주체가 되어 ‘시민들의 생생한 표정이 살아서 흘러 넘치는 세상’을 이룩하려는 대합창일 것인데 작가의 기능이 이에 이바지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한국문학 환경은 지난 세월에 ‘바깥쪽으로부터’ 열악하였지만 오늘에 이르러서는 ‘안쪽으로부터’ 모든 문인들마다 자기 변혁운동을 일으켜야 할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제 마지막 답변을 해야 할 차례가 된 듯 하다. 문학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일깨우는 것이 있으니까 나는 문학을 한다. 지금의 젊은이들과 경쟁을 하는 그런 문학은 아니고 이미 나이 든 문인으로서 내가 해야 하는 (따라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해낼 수 없는) 그런 문학 일거리가 아직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한, 나는 문학을 할 수밖에는 없다.
 
‘독자를 위하여’라는 오만한 문학 아니라 ‘독자가 누려야 하는 문학’에 복무하는 그러한 문학, 그리하여 보다 진전된 민주세상이 어서 빨리 이 땅에 찾아오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그런 문학을…. 부드러운 세상을 새로운 글쓰기로 맞이하고 싶은 것이다.
 
 
 
• 1942년 황해도 신천 출생
• 1964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
• 1964년 단편소설 ‘공알앙당’이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당선 등단
•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에 참여
• 소설집 ‘무너진 극장’ ‘정든 땅 언덕 위’ ‘낯선 거리’ 장편소설 ‘낮에 나온 반달’ ‘가슴속에 남아 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 ‘어제 불던 바람’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 산문집 ‘작가기행’ ‘국토와 민중’ ‘1970년대의 사회운동’(공저) 등
• 한국일보문학상(1988) 신동엽창작기금(1988) 요산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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