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윤재천

2011.06.09 06:25

조만연.조옥동 조회 수:549 추천:43

좋은 수필
                                                                                                                               윤재천



범박하게 말해 인간 내면의 심적 나상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그려내는 한폭의 수채화다. 한 편의 수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유, 현재와 과거의 행적, 미래를 예시하기 위해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좋은 수필의 작법에 대한 논의는 계속 이어져 왔다. 항상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지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수필작법이며 좋은 수필의 요건이다.


수필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듬는 것이다.


함축과 묘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적절한 예시를 들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수필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회 속에 속한 사회인으로서, 시대의 허리를 받치는 중추로서, 작가적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시대를 외면한 글은 천상의 음풍농월이며 궤도를 잃어버린 놀이공원의 유희기구로 전락한다.


수필은 글 속에 저절로 녹아드는 자신의 분명한 철학 - 글에 일관성 있게 흐른 주제 의식이 담겨 있어야 한다. 그 주제 의식은 논설이나 훈계조의 직설화법이 아니라, 정서가 흥건하게 배어 있는 음유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시대를 외면한 글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때문에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 놓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예전에는 옳다고 생각한 가치가 더 이상 진실이 되지 못하고, 그 반대일 수 있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간파하며, 독창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만의 신선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읽는 눈은 열린 사고에서 나온다.


수필의 주제는 제한되지 않고 무엇이나 그 대상으로 삼을 수 있으며, 소재 또한 다양하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지만, 때에 따라서는 표현상 시의 적절한 것을 취택해야 한다. 시대감각을 무시한 채 단순한 과거 회상이나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 글은 객관성을 잃게 된다.


수필은 ‘나’를 통한 ‘우리’의 고찰이고, 과거를 비춘 미래의 통로이다.


시계추가 끊임없이 양쪽으로 흔들리지만 지지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보편적 기준으로 보려면 흔들리지 않는 주관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컵에 물이 반쯤 담겨 있을 때,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급해 하는 것과,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사회를 어둡게 하는 소식보다 숨겨진 미담이 많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 축적과 소양을 기르는 데 힘써야 한다.


작가는 얇게 넓게 알아야 한다. 많은 것을 알아야 적절하게 글을 조립할 수 있다. 세상은 상하의 수직관계보다는 상호의 수평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자칫 잣대를 잘못 대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글이 되면 자기과시로 흐르게 되고, 지나치게 겸손하면 자기비하로 여겨진다. 작가와 독자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흥겨운 춤사위처럼, 수필은 같은 눈높이에서 내다보는 또 다른 세상 읽기이다.


조금 거칠더라도 분명하게 자기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 글이 환영받는다.


차별성 있는 소재로 글감을 다루고, 남과 다른 목소리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소재를 선택할 때도 자신의 일상에만 머물게 되면 식상하기 쉽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들이지만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그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다양한 경험과 창의적인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문학은 상상력의 폭만큼 감동이 증폭한다.


허구와 상상의 구분은 이미 논의할 가치도 없다. 객관적 사실을 뒤집는 거짓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 행복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은 개인이 겪은 사실의 가감 없는 전달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산되는 창의적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단락의 문학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이다. 작가는 거칠지 않고, 가볍지 않으며,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튀지 않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 월드컵대회 때 히딩크가 선수들을 조련하는 방법을 배우자고 했고, WBC 배 야구시합 때 김인식 감독의 믿음의 관리학을 본받자고 했다.


경제를 알아야 정치를 할 수 있고 경영인도 문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내듯이, 문학도 홀로 외롭게 수문장 역할을 할 것이 아니라, 대중과 독자 속으로 파고들어 두 발을 담글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중심의 가치관을 뿌리 삼아 가지를 사방으로 뻗치고 서 있는 큰 나무처럼, 세상 온갖 것을 빨아들여 수용하고 그것을 푸른빛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미문은 진실을 호도할 위험을 내포한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주장, 맛깔나지만 난삽하지 않는 언어의 선택, 물 흐르듯 자연스런 문맥의 흐름을 통해 다 읽고나서도 왠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여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비빔밥에 마지막 넣는 한 방울의 참기름처럼,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맛을 내기 위해서는 각고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


삶에서 빚어지는 슬픔과 외로움을 자기 자신의 체험을 통해 진실하게 그려낸 글만이 감동과 공감을 획득한다. 내면의 깊은 감성을 건드리면서 냉철한 이론의 합일을 이룬다 해도 진실하지 않으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글은 번쩍거리지만, 가치 없는 이미테이션과 다르지 않다. 당장은 화려함에 눈길을 받게 되지만, 곧이어 외면당하게 된다.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진실’이라는 보석이다.


자기만의 빛깔과 향취를 품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한 고뇌는 수필 작가의 소명이고 시대를 밝히는 소임이다.


난을 치는 사람에게는 신의 손짓으로 불리고 있는 ‘석파란’이라는 것이 있다.


흥선 대원군이 난을 능란하게 그렸다 해서 그의 호를 따라 ‘석파란’으로 불리고 있는 이 기법은 ‘좌란 삼십 년, 우란 삼십 년’의 각고의 세월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한평생을 바쳐야 이를 수 있는 경지이기에, 범인(凡人)은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삼전지묘(三傳至妙)’의 기법이다.


난 잎이 세 번 자연스럽게 휘어져 돌아가는 모습을 붓으로 묘사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다고 해도 ‘삼전지묘’가 되지 않으면, 난 잎이 아니라 풀잎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필도 자신의 기량을 기교로만 연마하려고 하면, ‘난을 그리려다 풀잎을 그리는 격’이 된다. 완전한 글은 기교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심해서 쓴 글은 독자에게 쉽게 읽혀지고, 쉽게 쓰여 진 글은 뜻도 애매해 어려운 글이 되어버리는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글은 평이하게 읽히는 글이다.


현학적인 수사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관념들을 거르지 않은 채 쏟아놓은 글은, 밤에 쓴 연애편지처럼 조악하고 애상으로 흐르게 된다. 수필은 객관적인 입증을 거쳐 명확함으로 고증되어야 하고, 뜻이 애매하지 않아야 되며, 일관된 주장으로 촌철살인의 명쾌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일련의 과정은 끊임없는 훈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개울에 물이 있을 때와 물이 흐르지 않을 때의 모습은 천지 차이다.


항상 가슴 속에 맑은 물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심신을 갈고 닦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러한 훈련을 거듭할 때 자기 수양과 인격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 남과 공유하는 것이므로,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폭넓은 사유와 멈추지 않는 자기 성찰이 있을 때, 좋은 글은 저절로 다가오게 된다.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작가적인 창의력이 필수요건이다.


글쓰기는 누구나 훈련에 의해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창작은 떠오르는 영감 없이는 불가능하다. 늘 멈추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잠자고 있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흥이 배가되어야 창조의 에너지가 나온다.


세태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한다는 사실만이 진실이다.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폭력적이고 조직적인 변화의 시도는 고무적이다. 놀이도 세월 따라 변하게 되고, 어제의 사고가 오늘을 이끌어갈 수 없듯, 변화하는 세상에 혼자 고답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대중가수인 나훈아나 조용필이 나이가 들어도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하루 6,7시간 피아노 앞에서 연습을 한다. 작가도 작은 책상과 노트를 마련해 하루에 한 장씩이라도 글을 쓰며 자신을 연마하지 않으면, 좋은 글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창작의 기쁨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수필은 비유와 유추의 문학이다.


시가 은유의 메타포라면 수필은 함축의 묘미가 있어야 하기에,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여내야 한다. 오랜 시간 고아낸 곰국이 진한 국물을 우려내듯, 함축은 자르기가 아니라 전체를 졸여내는 과정이다. 화려한 수사는 오히려 글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꼭 거기에 맞는 묘사를 해주어야 뜻이 정확하게 전달된다. 비유와 시적 수사를 원용한다. 형용사와 부사가 넘치는 글은 자칫하면, 집은 없는데 방만 오밀조밀 꾸미고 있는 것처럼 허세로 보일 수 있다.


사실 설명을 시간의 순서대로 하게 되면 A4 용지로 1장 분량이 되는 것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우회적 표현을 하면 한 문단으로 줄여낼 수 있다. 한 문단으로 설명할 것도 간접묘사를 통해 한 문장으로 줄이고, 한 문장은 적확한 은유 하나로도 감동과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은유의 범위를 확대하면 문장이 깔끔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시적 문장으로서의 힘을 지니게 된다.


수필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급하게 돌아가는 세태에 맞춘 자연스런 현상이다. 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함축을 포함한다.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고 해서 갖고 있는 긴 치마의 길이를 싹둑 잘라 입고 나갈 수는 없듯, 짧은 글 안에는 더 많은 은유와 상징을 통한 진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을 음식으로 섭취하려면 위장이 포화상태가 되기 때문에 농축된 엑기스를 먹게 된다. 짧은 글 안에 불필요한 말들을 나열하게 되면 짧은 수필의 창작 의도에 위배된다.


글을 쓰다보면 자신에게 맞는 길이가 어느 정도인가, 감을 느끼게 된다.


모두가 짧게 입는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미니스커트를 입을 것인지, 자신의 실루엣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긴 치마를 고집할 것인지는 각자 개성의 문제다. 때로는 짧은 글로 생각을 담뿍 담아낼 수도 있고, 몇 십 장 되는 장편으로 소회를 풀어내야 할 때도 있다. 수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너비가 관건이 된다. 내가 입은 긴 치마가 부끄럽지 않고, 남이 걸친 짧은 치마도 멋스럽게 봐줄 수 있는 운용의 묘미가 필요할 때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모든 고전이 나름대로의 전범이 된다. 전통을 무시한 현재는 껍데기가 된다. 고전은 공부하고 신간은 섭렵해야 한다. 고전을 통해 숨은 힘을 기르고 신간에서 새로운 힌트를 얻어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용이나 도용이 아닌, 육화되고 체화된 다양한 지식과 지혜는 작가의 심성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두루 섭렵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격조 높은 글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격조 높은 글을 많이 읽고나면 저속한 글이 구별된다. 나에게 맞는 글, 내게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글, 책을 덮고도 한참을 머릿속에서 경구가 떠나지 않는 글이 내게 맞는 - 좋은 글이 된다.


양서는 권장 받는 것이 아니다.


많이 읽어서 스스로 좋은 글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권장도서의 의미는 보편적인 것이지만, 보편적인 것이 반드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좋아도 내게 맞지 않으면 그것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스승이 있다. 쏟아지는 물처럼 많은 지식과 지혜를 흡수해도 성장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여과하는 콩나물처럼, 내 안의 정화장치를 통해 스스로를 지켜갈 때 다양한 독서는 자양분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에서 출발한 시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수필도, 좋은 수필이란 어떤 것이라고 수없이 정의되어 왔다. 하지만 자신만의 수필론이 확립되고 다른 사람의 이론도 존중할 안목이 키워질 때까지 끊임없이 논의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수필의 얼굴은 다양다기하다.


네모와 동그란 것들의 집합체이다. 뾰족한 송곳으로 뭉툭한 자물쇠를 열 수 없고 남의 방 열쇠로 내 방문을 열 수 없다. 모든 문에 통용되는 마스터키 같은 글의 왕도는 없다.


21세기는 수필의 시대다.


모든 장르를 함의한 수필로서의 포용력을 지니려면 융합적 사고로 종합예술로서의 당당함을 지녀야 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세상을 받아들이려고 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게로 온다. 담을 허물면 내 울안을 침범당하는 것이 아니라, 담 바깥까지 내 마당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글도 남의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더 풍성한 글 세계를 이룰 수 있다. 자기 주견(主見)이 있는 사람일수록 남의 주장을 인정할 줄 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교양이고 인격이다.


변화하는 것은 발전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 새로운 나만의 글 세계를 열어가야 한다. 진실을 잃지 않는 발전적 변화의 모색은 수필가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아포리즘이다


좋은 수필에 관한 한 완성은 없다.

완성을 향해 가는 노정(路程)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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