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원고/ 엘에이 시문학의 내일을 위하여

                                           사회 : 나태주

참석시인: 김동찬, 김문희, 배정웅, 조옥동 시인(가나다 순)

나태주 : 안녕하십니까? 제가 이번에 엘에이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시 잡지인 <시와 시> 편집 주간인 이은봉 교수가 엘에이 시인분의 시 특집과 대담을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네 분, 시인 선생님들을 한 자리 모시게 되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기쁘고 반갑게 생각하면서 그러면 이 작품을 중심으로, 그리고 선생님들 문학적 활동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미국에 이민 오신 지가 오래 되시었지요? 처음 이민 와서 힘들게 사셨을 텐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민 와 지금까지 사신 기간과 처음 와 사시면서 겪었던 어려운 일, 에피소드, 재미난 이야기, 기념할만한 이야기,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서, 일상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좀 말씀해주시지요. 특히, 배정웅 선생님 같으신 분은 곧장 미국으로 오시지 않고 다른 나라를 돌아서 오시기도 하셨는데…

배정웅: 제 경우는 미국에 곧바로 오질 않고 볼리비아, 아르헨티나등지에서 이십 여 년 살다가 미국에 왔으니까 모두 삽 십 년 정도 떠돌아다닌 셈입니다. 글을 쓰는 약간의 재주밖에 없는데 낯선 땅에서 먹고 살려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볼리비아에서는 한국 신문이나 책이 전무했기 때문에 누가 책이 있으면 교포들끼리 돌려가며 읽곤 했습니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책을 내어 줄때는 내 여자를 남에게 내어주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주간신문을 카피형태로 만들었는데 여담입니다만 탤런트 최수종 씨의 아버지인 최석복 씨와 스페인어를 아는 교포 젊은이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문제 앞에서 내 시라든지 문학은 오지 산간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하는 게리라 같은 존재였습니다. 폴란드출신의 작가인 아이삭 바셰비스 싱거 같은 대가도 뉴욕으로 이민 와서 그런 문제로 여러 해 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김동찬: 저는 의류 도매상을 해왔는데 92년 엘에이 흑인 폭동 때, 제가 하던 점포가 폭동지역에 있어서 화장실 거울까지 다 떼어갈 정도로 빈털터리가 됐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 사업을 다시 일으켜서 성장시켰는데, 힘들긴 했지만 그런 폭동의 경험이 제게 미국에서의 사업 환경에 대한 이해와 인내심 같은 것을 심어주어 결과적으로는 보다 강한 이민자가 된 것 같습니다.

나태주: 아, 그러시군요. 그럼 김문희 선생님, 조옥동 말씀도 좀 차례로…
조옥동: 네, 저의 경우는 어린 아이 셋과 다섯 식구가 1976년 9월, 늦은 저녁에 LA공항에 내렸습니다. 최종 목적지인 미주리 주, 센트 루이스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기에 비행기 표를 보여주며 길을 물었지요. 탑승할 게이트로 어떻게 가라는 설명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만 기억하여 5분이면 갈 거리를 파킹장 건물을 오르내리며 길을 잘못 들어 30분 이상 헤맸습니다. 갈아 탈 비행기를 거의 놓질 뻔했습니다. 미주에 발을 디딘 첫날부터 당황하고 진땀을 뺐지요. 이민신청을 해놓고 종로영어학원에 몇 달 다녔는데도 막상 미국사람들을 만나서는 도무지 그들의 말을 알아듣기 어럽더라구요. 저는 운이 좋아 이민신청을 했을 때 미주리주 워싱턴대학교에 와 있던 대학교 선배의 배려로 의과대학 연구실에 이미 직장이 마련되어 오자마자 출근을 했습니다. 초기에 다른 일은 해결이 되는데 귀가 뜨이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더구나 첫해는 운전도 못하고 차도 없어 시내버스로 출퇴근 했는데 중부지방의 겨울은 유난히 추워 정류장에서 오래 버스를 기다리다 발에 동상 걸린 일도 있습니다.

김문희: 네, 저는 1980년도에 남편과 함께 부부유학생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밑에 있는 산호세에 정착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금년으로 30년이 되는군요. 그 당시 산호세에는 교민들이 많지 않았고 산호세 State University 근처에 있는 학생아파트에서 미국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유학생 생활이라 모든 것을 절약하면서 일자리가 어디 없을까 궁리하던 중에 마침 일자리가 생겼어요. 친구후배가 경영하고 있는 한국마켓의 캐쉬어 일이지요. 당시로서는 모든 것이 수동으로 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곡식 종류나 가루로 된 식품은 큰 통에서 꺼내어 일일이 저울에 달아서 작은 비닐봉투에 담아 가격을 붙여 놓는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한번은 고추 가루를 작은 비닐봉투에 담기 위해 창고에 들어가서 일을 하는데, 매운 고춧가루 때문에 눈물이 나와 코를 훌쩍이며 담다가 갑자기 제 설움에 눈물이 쏟아지는 거에요. 두고 온 어머니며 가족 생각이 나기 시작해서 그 자리에서 꺼이꺼이 한없이 울었던 기억입니다.

나태주: 솔직하고 담백한 말씀 감사합니다. 힘든 날들을 잘 견디시고 이민자로서 뿌리를 굳건히 내리신 것에 대해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왜 한국을 떠나 이민을 오시게 되었는지… 이런 거 질문하면 실례의 말씀이 될까요? 선생님이 이민 오실 때의 한국의 사정이나 개인 사정 가운데 밝혀도 좋으신 것은 좀…

김문희: 네, 남편이 박정희대통령 재임시절에 원자력연구소의 원자로 팀에 컴퓨터 요원으로 투입,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박사학위를 위해 해외에 나가려 해도 국내사정으로 미국대학에서 온 입학허가서를 제출해도 국내 쪽에서 계속 보류시키는 거였어요. 게다가 저는 인질처럼 국내에 남고 남편혼자만 유학하라는 최종통보를 받고서 따로따로 유학생으로 입학허가서를 제출하고 미국에 와서 다시 만났지요.

배정웅: 사실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술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홍보파트에서 일하면서 티브이 방송국에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했으니까 건강도 여의치 않고 가정생활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해서 어느 날 이 지구상의 이름 없는 오지에 가서 살다가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그냥 훌쩍 모든 것을 접고 남미로 갔습니다.

나태주: 허허, 그러셨군요. 배정웅 선생님은 한국에서 문단 연조가 저하고 비슷하신데… 그리고 조옥동, 김동찬 선생님은요?

조옥동: 1970년대 중반을 넘어 그 무렵 군사정권의 말기가 가까운 때라 그런지 사회적으로 늘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교직에 있으면서 결혼도 하고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남편도 비교적 좋은 직장에 있었지요. 그럼에도 결혼으로 유학의 꿈을 접었던 젊은 날의 계획이 언제나 미완의 희망으로 남아있을 뿐 아니라 세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미국 땅에 대한 동경심이 많았는데 마침 유학을 마치고 이곳에서 결혼 후 비즈니스를 하는 시누이로부터 원하면 형제초청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었습니다.  일 년쯤 후에 비자를 받자마자 학교에 사표를 쓰고 저를 기다리는 이곳 직장 때문에  일주일 만에 비행기를 탔습니다.

김동찬: 저는 주택은행 전산실에 프로그래머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좋은 직장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이민을 준비하면서 특별한 갈등은 없었어요. 아마 한국이 지금처럼 잘 살게 되기 직전인 1985년도라서 그랬기도 하겠지요. 먼저 오신 형님과 부모님이 저를 초청했는데, 오래 전부터 계획된 일이라 자연스럽게 이민절차를 밟았습니다. 미국 와서 스왑밋이라고 장돌뱅이 좌판장사도 하고, 점원으로도 일하고, 점포마다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등 힘든 일을 이민 초기에 했었는데, 이민 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한 번밖에 못 사는 건데, 두 나라에서 폭넓은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태주: 김동찬 선생님은 한국에서도 많이 활동하고 지면이 많은 젊은 층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저는 이번이 엘에이 방문 네 번째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문인들을 만나 보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분들을 만나오면서 왜 이분들이 이렇게 문학이란 표현양식에 매달리는가, 하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드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어권에 사시는 선생님들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요?

김동찬: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건 사람의 본성이기도 하기 때문에 말 다음으로 글을 쓰게 되고 자연스레 문학을 하게 되더군요. 이민 1세인 저에게는 당연히 모국어가 편안하고 그래서 한국문학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가끔 문학보다는 왜 내가 미술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하고 생각해볼 때도 있어요. 외국에 나와 사는 제게는 만국공용어인 그림이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구요. 하지만 물론 심각한 건 아닙니다. 영어처럼 제게는 그림이 어렵고 낯선 영역이니까요.  

조옥동: 비록 몸은 밖에 나와 있는 아웃사이더이나 심상은 저안에 두고 살면서 혹시라도 잊힐까 하는 두려움을 표현하는 곧 자신의 외침이랄까요. 주체가 될 수 없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남기 위한 본질적인 고뇌를 표현하는 디아스포라의 기행문같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길일 것입니다. 또한 미지의 세계에서 계속 부딪쳐야 했던 위기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상처받은 영혼이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찾아 가는 방법이라 할까요. 특히 제 경우는 평생 생화학 연구실에 살면서도 젊었을 때부터 가졌던 시인의 꿈을 이민 후에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김문희: 글을 쓰는 사람은 그 나라의 말을 지키고 정신을 가꾸어 나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을 떠나서 미국에 정착했지만 낯선 삶속에서 문화적 충격을 체험합니다. 나는 이 ‘문화적 충격’을 ‘문화상실’이란 말로 바꿔보았습니다. 문화적 충격이 뜻하는 미국문화의 충돌보다는 내가 향유하던 문화적 환경의 상실에서 오는 아픔이 더 컸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문학을 하는 것은 이민 환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민’이라는 아픈 삶을 살아가는 우리 핏줄들에게 보내는 위안이었고 이민 삶 속에서 상실되려는 우리 고유의 서정을 지켜내려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정웅: 시인은 누군가가 ‘말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새로운 언어와 사물을 접하게 되고 하고 싶은 얘기는 더  많아졌는데 제대로 되지는 않지만 시야말로  이를 표현하는 적절한 문학양식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고국이라는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는 순간부터 우리들의 시적영감은 메마르게 되고 시가 잘 쓰여지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도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정체성의 재확인 행위라고 할까요.

나태주: 그렇군요. 모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겠군요. 선생님들은 모두 이민 1세대들이신데 이민 1세대들에게 모국어, 즉 한국어는 어떠한 존재인가요? 어떠한 힘을 가졌는지? 영혼에서 울려나오는 깊은 말씀을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조옥동: 모국어가 없는 민족은 모든 것을 얻고도 모든 것을 잃은 자라고 봅니다. 비록 이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이민 1세나 2세도 조국과 선조를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덴티티를 상실하면 방황하게 되지요. 모국어를 모르면 역사의식도 없어집니다. 다행이 미주나 세계 모든 곳에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한민족은 점차 모국어에 관심과 배우려는 열망이 높아지고 있음이 현실입니다. 누군가 ‘시는 모국어의 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모유와 같은 모국어야 말로 글을 쓰는 작가가 최상의 작품을 꽃으로 피울 수 있는 그릇이고 필요한 모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문희: 국문학자 이희승 선생은 ‘한 민족이 쓰는 말은 그 민족의 사상과 감정의 투영’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이 사상과 정서의 표현이면서도 그 쓰는 언어에 의해서 사상과 정서가 고양되거나 부패되기도 하는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해외에 나와 있는 한국인들은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함에 있어서 바르게 사용하고, 아름답게 쓰려고 노력해야한다고 봅니다. 실로 한국어는 우리 민족정신이 집결되어 있는 한 민족의 얼이고 문화의 바탕이 되지요. 저 역시 주말 한국어학교 교장을 18년을 했는데요. 한국어 교육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가치를 확인할 수 있고 우리의 문학예술의 이해와 향유로 집약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해외에서의 한국문학은 언어의 소통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 한국문학의 제반 경향과 조류, 나아가서 한국문학의 예술성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도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배정웅: 이민 1세대인 우리에게 모국어는 고향이고 어머니고 살아가는 힘이요 영감의 뿌리입니다.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런 근원적인 것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것이죠.일찌기 마르틴 부버가 얘기했듯이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근원적인 관계성, 모국어는 내피의 흐름 같은 것이지요.

김동찬: 영어로 말하거나 글을 쓰면 꼭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진짜가 아닌 것 같아요. 미국사람과 사업을 할 때 미국 이름을 사용할 때가 있는데, 저를 '동찬'이라고 해야 저 같지 'Tony"라고 하면 'Tony' 스러워요. 하하… 결국 모국어가 '나'인 것 같아요. 내 생각, 내 아픔, 내 사랑, 그리고 내 삶을 담고 있는 거지요. 모국어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모국어가 저를 만들어주시고 자라게 해주신 것 같아요.  

나태주: 김동찬 시인님 미국명이 ‘토니“시군요. 좀 미안스런 말씀입니다만 엘에이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를 읽어보면 여러 가지 점에서 특별한 소감을 갖습니다. 그 첫째가 한국어 사용이 좀은 서툴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점은 한국에 이미 없어진 잔연이나 인간의 일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한 시점에 묶여 있다는 애기지요. 이 점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되는 문제인데 한국어로 시를 쓰시면서 언어 습관에 대한 갈증이랄지 미달감 같은 것은 없으셨는지요? 또한 선생님들의 경험 내용과 모국어와의 연결고리가 잘 맞지 않는 점은 없으셨는지요?

배정웅: 우리들의 시가 과거의 한 시점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가 있지요. 다른 세계의 시간과 경험에 매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시로 노래하지 못하고 있지요. 말하자면 두 상이한 세계의 충돌에서 과거의 것이 더 승하니까요. 이중 삼중의 언어권 속에서 모국어를 자꾸 잊어버리는 경향, 내 경우는 일종의 실어 증세를 겪고 있습니다. 시를 쓸 때 언어의 갈증과 미흡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김문희: 흔히 이민자들을 살펴보면 고국을 떠나온 시기가 그 사람을 지배하는 사고나 시대적 상황이 머릿속에 머물러 있고 오히려 애착과 향수까지 깃들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각자 지니고 있는 동질성, 말하자면 동향, 동창을 중심으로 한 모임으로 뭉치고 그에 따른 편향적인 삶으로 전개하다보니 생활패턴이 한정적인 경향도 배재할 수 없지요. 시는 정직합니다. 시인은 ‘홀로 독백하는 외로운 산책자’라 했는데 일상의 사소한 것, 친근한 것, 경험에 대한 미적향수자라 볼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가 접하고 있는 한인사회가 한정적이고 언어의 막힘도 찾아올 수 있겠지요.

조옥동: 이곳의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문제이고 허약한 부분을 바로 지적해 주셨습니다. 미주에만 300명이 넘는 문인들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미주의 문인들이 한국문학을 하지 못하고 한국어 문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들 연령층을 보면 50대 이후가 대부분이고 따라서 모국어를 말하고 읽기는 해도 쓰기를 할 기회가 부족하고 또한 개정된 맞춤법에 서툰 형편입니다. 이민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사고의 범주나 방법, 언어까지도 고착되어 이민 올 그 당시의 세계가 가장 잘 이해되고 그 환경에 멈춰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점차 왕래와 교류가 많아지고 또한 인터넷세상이 되었지만 너무 급속하게 진화하는 세계에 접속이 익숙지 않고 자기 것으로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작품을 쓰면서도 항상 두렵습니다. 또한 이곳의 작품을 표현하려면 때로는 한국어 보다 이곳의 언어가 적합함을 알고도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망설입니다. 궁극적으론 한국어 문학보다 한국작가가 미주의 문화를 현지의 언어로 쓰는 한국문학이 새로운 젊은 작가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앞날을 바라봅니다.  

김동찬: 언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미국에서 현재 쓰이고 있는 영어가 영국 본토의 현재 영어보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어에 더 가깝다고 하더군요. 영국의 영어가 변화해갈 때 미국으로 건너온 영어는 변화를 느리게 한 것이죠. 그래서 미국에 사시는 한국 분들이 영어도 잘 못하게 되고, 한국어도 잘 못하게 된다고 흔히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런 단점도 있지만 저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미주 한국문학의 한 특성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신에 한국에 사시는 분들에게는 낯선 단어나 표현 등이 미주 내 한국문학 작품에 많이 등장할 수 있겠죠. 미주의 한국문인들도 한국어의 변화에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아야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주한국문학이 한국문학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태주: 의외로 선생님들 자기 인식이 정확하고 매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몇 문인들과 대화 하면서 보니까, 엘에이 문인들은 한국어로 된 문학작품에 대한 정보가 피상적인 것을 느꼈습니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저널 쪽에서 알아주는 문인이나 작품들만 알고 있고 정작 자기 나름대로 기억하고 공부할 문인이나 작품에 대해서는 유용한 정보가 없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문학에 대한 알음알이가 피상적이고 유행에 치우치는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김동찬: 앞의 말씀의 연장선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종래에는 미국과 한국은 시간과 바다라는 장애물이 사이에 있어서 한국의 풍속이 미국에 전달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국의 정보에 뒤지거나 정보를 못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러나 이 점은 많이 개선되리라 생각합니다. 인터넷이 자꾸 활용되면서 한국의 전문 지식을 미주의 문인들이 노력만 하면 언제든 리얼타임으로 접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미주의 한국문인들이 더욱 노력해야겠죠.

나태주: 아, 인터넷이란 새롭고도 좋은 매체가 있군요.

조옥동: 본국을 떠나 문학을 하는 작가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 바로 자료와 정보를 얻는 일입니다.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좀 알려진 문예지를 통하여 정보를 얻거나 필요한 경우 한국에서 구입을 하는데 제한적이고 비용도 들고 시간이 걸리지요. 보다도 원하는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 방법조차 잘 모릅니다. 무엇보다 창작에 대한 열망은 있어도 체계적인 학습이 부족하고 배울 곳도 없어 한 번의 입상이나 등단 후에는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심지어는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문예지나 작품집 가운데 어느 것을 구입할 지조차 분별력이 부족하여 혼란스럽습니다. 그러기에 신문이나 방송을 타는 작가나 작품에 의존하는 경향이지요. 따라서 신인들은 선배 문인들이나 전문작가의 진정한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배정웅: 그것은 사실입니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시인들의 시작품을 선호해서 읽는 경향, 그것을 흉내 내려는 타자지향적인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그러다 보니 시의 개성, 자기 목소리가 미흡하다고 할까. 한국문학에 대한 지식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문희: 그렇습니다. 미주의 문인들은 고국문인들에 비해 고국의 문학경향이나 새로운 문예사조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수 있지요. 월간지를 통해 얻은 정보나 전문서적 등은 한국을 방문해서나 구할 수 있고, 열악한 생활환경과 바쁜 생활에 쫓기다보니 독서량의 부족으로 인해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떨어질 수도 있겠군요.

나태주: 좀은 자극적인 질문이 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렇다면 그러한 문학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의 빈곤은 어떻게 극복하시는지요? 간단하게 좀 말씀 부탁드립니다. 책을 구하는 방법이라든가 매체를 이용하는 방법 면에서…  

배정웅: 내 경우는 주로 책을 통해서 문학작품이나 작가정보를 얻는 편입니다..미국에 와서 비로소 한국에 시인 인구가 많아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낯선 시인들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들이 그들에게 낯선 시인이겠지만…. 시에 나이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기 때문에 시가 젊어지도록 노력은 하고 있지만 잘 안 되고 있습니다.

김문희: 저의 경우에는 몇 개의 한국에서 나오는 문학 월간지나 간혹 본국의 작가들이 LA 방문 시에 선물로 주시는 책들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곳 문인들은 고국 문인들처럼 문필에 전념한다든지 교직이나 출판 일에 종사하지 않고, 각자의 생활터전에서 Full Time으로 일하면서 그 외의 시간에 문학에 할애하기 때문에 문학에의 정보량이 열세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김동찬: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한국 문학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데 전과 같은 어려움이 지금은 없다고 봅니다. 인터넷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서점이 많아서 서점에 구비돼 있지 않은 책이라도 주문만 하면 일주일 이내에 들어오더군요. 단지 정보의 현실감, 생동감 같은 게 약하게 전달되지요. 정보에 대한 느낌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예를 들어 한국의 몇몇 시인들이 어떤 운동을 벌인다고 가정하면, 그 시인들의 주장이 하나의 뉴스 기사처럼 막연하게 들리는 겁니다. 그 시인들과 담론을 벌이고, 같이 고민하고, 같이 부닥친 적이 없으니까요.

조옥동: 저는 몇 종류의 문예지를 정기 구독하며 수시로 문제 작가의 작품집이나 전통 있는 문학상 수상집을 구해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한국의 문인이나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분에게 의뢰하여 추천할 작품집의 목록을 얻기도 하고 인터넷 속의 정보도 많이 이용합니다. 본국의 문예지를 만드는 편집진과 출판사를 선별하며 특히 이들 시전문지의 평론이나 작품집에 실린 작품 평을 주의 깊게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나태주: 네, 김동찬 시인님 같은 한국의 유수한 시 전문 잡지의 편집인이기도 하니 정보의 문제에서 많이 자유스러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문단, 특히 시단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오래전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해서 한 차례 말들이 있었고 최근엔 미래파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국 시단에 대한 소감이랄까 문제점 같은 것을 지적해 주십시오. 문학잡지가 갖는 여러 가지 영향에 대해서, 문학상이 운영되는 제반 행태에 대해서, 혹은 문학단체의 활동에 대해서도 좀 말씀해 주시어도 좋습니다. 부탁의 말씀도 좋고 충고의 말씀도 좋겠습니다.

배정웅: 한국문단 내지 시단은 불럭화현상이 심한 것 같습니다.해외에 잇는 우리들에게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들만의 불럭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말하면서도 일종의 쇄국적 자세를 고집하고 있는 셈이지요.

김문희: 요즈음 발표되는 시를 보면 산문체의 시가 많은 것이 특징인 것 같습니다. 어떤 시는 읽기에 지루하고 매말랐고 시가 가지고 있는 리듬이 없더군요. 물론 현대시의 변화는 노래하는 데서 사고하는 쪽으로, 영탄조에서 추구하고 변화하는 쪽으로 변화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만 시에 있어서 리듬은 힘이고, 삶의 원천이라는 점이 간과될 수는 없는 거지요. 시의 변화를 보면 80년대의 저항이나 해체시,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되면서 2000년대에 와서 생태시, 도시문명비판과 하이퍼시 등의 시도로 이어져 왔습니다. 유형무형의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이미지화한 문자의 그림이 독자의 것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실험에 머물고 말겠지요. 월간지를 몇 종류 받아보고 있는데 작품 발표되는 시인들이 잡지마다 거의 고정적이고 문학상도 그 영향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체별로 그 그룹별로 거의 섹트화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점점 더 벽이 높다는 것을 느낍니다.

조옥동: 한국의 현대시는 3·1운동 직후 신문학 운동의 전개부터 일제하에 있던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군사혁명과 군사독재 등으로 인한 변화와 부침이 심했던 한국현대사의 영향으로 외국의 경우보다 문예사조의 변화도 훨씬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이데올로기나 무슨 주의 같은 조류는 시대를 반영하기에 그 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은 몸으로 부딪치며 치열하게 문학으로 표현하지만 저희 같은 이민자들은 간접적인 경험에 의해 전달되므로 본국의 시인들보다 적극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시문학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순수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순수서정주위, 모더니즘 그리고 리얼리즘이 교차되어 표현되다 80년대 이후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던이즘으로 전개되었다고 봅니다. 기존의 시형식과 의미의 해체로 다양한 기법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편 70년대 이후 몇몇 시인들은 서정성을 고집하며 개성을 살려 자신의 시세계를 확대해 온 시인들도 있는데 정호승 ,송수권, 조창환, 이성선, 임영조 시인들과 이곳에 계신 나태주 선생님도 그중의 한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21세기 초에는 젊은 시인들이 미래파라는 말을 처음으로 쓰며 새로운 시 창작으로 고전주의 인문주의적 경향과 대립양상을 보여주며 일반 독자에겐 난해한 작품을 발표했는데 이도 주춤해지고 계속 전통적 서정을 바탕으로  21세기의 큰 흐름이 진행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최근 들어 본국문단에 대하여 회의와 조금은 실망을 느낍니다. 대부분의 문예지는 같은 장르끼리 서로 경쟁하다 그 경쟁의식이 상호비방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각 문예지는 포괄적으로 모든 작가에게 작품을 중심으로 지면을 허락해야 하거늘 자신들이 배출한 작가에게 지면을 허락하는 회원지나 또는 특수층이 선후배를 배려하는 동문지 같은 양상입니다. 문학상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상을 벗어나야 합니다. 또한 같은 이름의 문학상을 별도로 운영하는 일은 작가들을 혼동시키고 문학상의 권위를 잃게 합니다. 또 언급하고 싶은 것은 신춘문예 응모에는 연령이란 보이지 않는 규제가 있는지 입상자는 언제나 40대 전인 사람뿐입니다. 이 연령적 차별화는 해외의 응모자에겐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민 작가는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김동찬: 기본적으로 문학이 다양성,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편협해지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아요. 일제시대에 앞선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성을 바친 것까지는 좋은데 시조와 같은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까지 홀대해버린 건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실험이나 시도에 대해서도 내게 좀 안 맞는다 싶으면 ‘새로운 경향이구나, 내게는 낯설지만 그 사람들은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구나'하고 바라보아주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미주문학을 보는 시각도 그렇습니다. 미주에서 문학을 하시는 분들이 전업 작가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연세가 들어서 시작하신 분들이 많아 한국에서 젊어서부터 열심히 글을 쓰시고 연구하신 작가분들이 보면 상대적으로 문학적 완성도 같은 것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요. 그래서 미주문학에 대해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너무 도식적인 생각을 갖거나 그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홀대하면 한국문학에 큰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주의 한국 문학은 이민 백년을 지나면서 한국과는 좀 다른, 나름대로의 생각, 가치관, 소재, 어휘나 표현 등을 담고 성장하고 있는 생명체라고 보아주어야 할 것 같아요. 나태주 선생님이 온실에서 자란 화초보다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길가에 밟히면서 피어난 풀꽃들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포용과 애정이 결국 미주한국문학뿐만 아니라 전체 한국문학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태주: 아, 의외로 선생님들 진단이 정확하고 매섭다는 생각입니다. 전적으로 네 분 선생님들 말씀 에 동감입니다. 한국에서도 듣지 못하던 말씀들을 이곳에 와서 들으니 등골이 서늘하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들은 미국에서 활동하시지만 한국에도 일정부분 지면이 확보되어 있고 한국문인들과의 연결고리 같은 것이 견고하신 문인들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잡지에 작품 발표를 하시면서 가졌던 애로사항이나 소감 같은 것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지요.

김문희: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맥이나 지연을 통해서 발표지면을 얻거나 세미나 등에 참석할 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기획하거나 청탁 없이는 작품발표가 용이하지 않음이 아쉽군요.

조옥동: 10여년 전만해도 본국 문단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고 문학 전문지 발행에 대한 정보가 어두워서 문예지의 위상이나 등급에 개의치 않고 본국의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작품을 발표하고 싶은 문예지가 따로 있는데 이쪽 해외 문인들에게는 매우 인색하여 불만스럽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역시 창작환경이 본국이 월등히 좋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으로 문예창작을 대학이나 전문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어쩔 수 없이 밀린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미주에서 일 년에 몇 차례 본국의 괜찮은 문예지들로부터 작품청탁을 받게 됨은 다행이고 운이 좋은 편입니다. 외지에 있는 작가에게 좀 더 관심을 갖고 좋은 작가를 발굴하는데 눈을 돌려주시고 발표의 문을 넓혀주셨으면 합니다.

김동찬: 한국의 문예지에서 원고청탁이 들어오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무명의 작가에게 관심을 가져준 성의에 감사해서 최대한 청탁에 응하려고 노력은 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에게 자랑스럽게 내놓고 싶을 만큼 만족스런 작품이 제게 많지 않아서 그런 애로사항은 별로 겪지 못한 것 같아요. 바라는 것이 작아 실망도 작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정웅: 가끔 저도 고국의 문학지에 지면을 얻기는 합니다만 한정돼 있고 또 청탁이 없으면 보내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저와 마찬가지의 입장일 거 같습니다.

나태주: 배정웅 선생님은 이곳에서도 독창적으로 시 전문잡지를 운영하고 계신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로 엘에이에 계신 분들은 나름대로 현지에서 등단 기회가 있는 것 같은데 왜 굳이 한국의 잡지나 신문을 통해 등단하려고 하시는지?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었으면 좋겠고, 이런 문제를 놓고 고칠 점이나 부족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배정웅: 한국으로 머리를 두고 있는 이곳 문인들도 문제이지만 등단제도가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곳 등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런 등단제도가 이 미주 문단마저 편을 가르려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김동찬: 아무래도 한국어로 된 작품의 독자가 미국보다 한국에 절대적으로 많으니까요. 미주 한인이 이백만이라고 하지만 2세들은 영어권이고, 1세들 중 젊은 사람은 이민 와서 먹고 살기 바쁘니까 실제로 독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숫자는 미미하죠. 그래서 한국에 이름을 내고 싶고 한국과 연줄을 갖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등단보다 작품의 질이 더 중요하고, 좋은 작품을 쓰면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출판이나 발표가 가능해졌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의 발달로 미주에서 글을 쓰고도 한국의 독자를 가질 수 있게 됐으니 너무 한국 지향적인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등단이라든가 작품 외적인 면에 신경쓰다보면,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간판 따기 위해서 대학에 가는 학생처럼 정치적인 문인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겠지요.

조옥동: 미주문단이 형성된 것은 1982년 미주한국문인협회가 출범하고 이후 장르별 협회가 지역마다 생겨 현존하는 협회만도 10여개 됩니다. 차츰 연륜이 지나며 각 단체마다 신인상 제도가 생기고 또한 미주의 두 일간지에서 문예작품공모를 하여 매년 수 십 명의 신인이 나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일단 미주기관지를 통해서 신인이 된 다음에는 한국의 문예지나 신문 등에서 등단을 해야 작가로 인정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한국과 연결하여 등단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부작용을 일으키고 병폐가 되기도 하지요. 한국에서 시시로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잡지나 또는 인지도가 낮은 문예지들이 이를 이용하여 자질이 미흡한 신인들을 미주에 양산하는 일을 부추기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현지의 문학상 제도가 개선되고 권위 있는 심사방법이 적용될 때 본국문단에서도 인정할 훌륭한 문인들이 배출될 것입니다.

김문희: 한국의 현실이 중앙문단 체제로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등단과정을 거쳐야 한국의 문학단체 회원이 될 수 있고, 꼬리표처럼 문단약력에 등재해야 하는 문단의 현황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고국에 등록되어 있는 출판사에서 출판을 해야 책의 배포나 평론가들의 비평에 선보일 수 있다는 점이지요. LA에서 등단하고도 한국문단에 다시 등단해야 하는 이중고가 있는 게 현실입니다.

나태주: 내친 김에 그러면 책을 내시면서 힘들었거나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주시지요.

김문희: 저는 다행히도 좋은 선배들이 이끌어줌에 따라서 시집 5권과 수필집 4권을 낼 수 있었습니다.

김동찬: 책을 처음 낸 것은 산문집이었는데, 다 경험들 해보셨겠지만 참으로 감격스럽고 너무나 자랑스럽더군요. 인사말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지만 주위에서 호평도 들은 참이라,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보이는 것처럼 제 책이 무척이나 훌륭해 보여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이 안 팔려 내심 실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의 흥분과 쓰라림조차도 추억으로 남는군요.

조옥동: 이국에서 작가가 되는 일을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허영심을 조장하거나 먼저 등단한 선배중의 몇몇은 결여된 정보를 틈타 후진들을 잘못 인도하는 일도 있습니다. 한국의 모월간지에 등단하고 일 년이 되었을 때 그 때가 첫 시집을 내는 것이라고 권하여 문단에 어두웠던 저는 첫 시집을 서둘러 출판했습니다. 물론 출판사로부터 시집을 적어도 몇 권 이상 사야 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평생에 한 번 있는 첫 시집 출판을 너무 서둘렀다는 사실과 몇 년 후에야 그 문예지나 출판사가 제가 원하지도 않고 한국의 문인들조차 잘 모르는 그런 출판사임을 알았습니다. 생각하면 너무 무지하고 부끄럽고 속상했기에 새로운 각오로 제가 원하는 문예지로 재 등단을 했습니다. 두 번째 시집은 선생님께서도 추천하신 출판사에서 발행하였습니다.

배정웅: 대부분 출판비를 자기가 부담해서 출판하고 있습니다. 내 경우는 우리들의 시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시 전체를 영어로 번역해서 시지를 내고 있는데 참여하는 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호주머니를 털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동포재단 등의 기관에서 해외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 지원하는 그런 것이 시급하다고 할까요.

나태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주시지요. 계획이란 것이 늘 말한 대로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내일을 살아감에 있어 무언가 푯대 같은 것이 있어야 하겠기에 그런 말씀을 좀 해주시었으면 합니다.

조옥동: ‘문학은 인간학이다’라고 누가 그랬어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넓은 삶을 염원하여 스스로 택한 이국의 삶이 때로는 어둡고 불안한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얼마나 더 감내해야 할지 몰라도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어둠에서 발견했던 빛, 욕망을 버린 순간의 안정, 고통후의 회복 같은 복합성의 회전이 이민자의 삶에서는 짧은 주기로 그리고 훨씬 깊은 진폭으로 다가왔지요. 생각하고 기대했던 상상의 세계와 바로 이곳 현실과의 괴리감은 많은 감성을 깨웠습니다. 변방에 살면서 체험으로 읽어낸 생존의 처절한 단면과 인간의 이중성과 그 한계를 나의 부족한 시어이지만 모국어로 나타내는 일을  할 수 있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습니다. 제 문학의 심층에는 생화학의 오랜 전문적 연구생활에서 영향된 생명의 신비와 엄격한 규칙이 자연스럽게 반사경처럼 비춰지고 있습니다.

배정웅: 내개인적 계획이라면 내년 쯤 시집을 낼 까 합니다. 아마도 여섯 번째의 개인 시집이 되겠지요. 나태주 시인에 비하면 부끄럽지만 말입니다 또 현재의 미주시학을 연 2회 정도 발행하는 것으로 주변시인들과 논의 중 입니다. 본격적으로 해외한국시 운동 같은 것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버클리 대학에서 얼마 전 이상의 시 「거울」을 가르치는 등, 한국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버트 하스 같은 한국통 미국시인들과의 교류로 우리 시를 미 주류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도 해 볼까  합니다.

김문희: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글을 쓰는 문인들을 볼 때 이것은 분명 한국문학의 공간적 확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외에 사는 문인들 자신이 스스로 연구하고 노력하여 문학의 미래를 향해서 위상을 세워가야 되겠지요. 자기가 처하고 있는 상황이나 지역적인 특성을 살려서 개성 있는 작품을 창작하여 뿌리내릴 수 있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민초기 시절의 고국에 대한 향수나 두고 온 시절의 그리움을 배재하고 세계 속에서의 한국적인 가치나 다문화속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독특함을 살려서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한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동찬: 제가 운영하던 사업을 다른 경영자에게 맡기고 몇 년 동안 여행이나 다니며 보냈는데, 사업환경이 어려워져서 일선으로 복귀하게 됐습니다. 한 2년쯤 열심히 사업에 매진해야만 합니다. 아무래도 문학 활동은 좀 뜸해질 것 같습니다만 시에는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을 생각입니다. 너무 녹슬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태주: 오랜 시간 네 분 시인님들 진땀날 정도로 수고하시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을 열고 솔직한 말씀, 좋은 말씀 들려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부디 지상에 계시는 동안 건승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지시기를 빕니다. 뿐더러 빛나는 시,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도 많이 쓰시어 시인으로서도 크신 업적 남기시기 빕니다. 다시 뵙는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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