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문도文徒의 땅이 있다

                                 -박양근
 
첫째 마장입니다.

그는 길을 걷습니다.
그는 문학의 숲길을 걷는 순례자입니다.
그의 육신은 달팽이처럼 여리지만 우주의 숨소리를 듣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지나쳐도 될 것을 붙들고, 잊어도 될 일을 기억하고, 일면식도 없는 이웃의 마음마저 헤아려 줍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의 곁 삶을 더 이어갈 수 있습니다.
삶을 생각하고 말하고 실천할 수 있는 방도는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일순간이라도 편하게 살려는 사람은, 애당초 그 길이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숫제 그 길을 바라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글이라는 정원을 가꿀 의욕도, 그 정원을 지킬 의지도 없는 게지요.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안갯속에 갇히고, 폭우 속에서는 헤매고, 폭설에 갇힌다 할지라도, 만상과 만인을 위해 꺼지지 않을 횃불을 피우려 합니다.

문학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신이 부여한 생명보다 고결하고 더욱 겸허하여, 인간다운 인간임을 입증하는 꽃을 피웁니다. 어둠을 밝히는 불꽃 말입니다. 그것은 잉걸불이 아니라, 밤새도록 자신을 관솔로 태워서, 희생과 열정의 광채를 사방에 뿜어냅니다. 참된 문인만이 지필 수 있는 삶의 횃불입니다. 제 심장을 화로 삼아, 제 몸을 기름 삼아 뒤따를 사람들을 위한 봉홧불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가 아니면, 누가 지도도 없는 숲 속에서 길을 만들겠습니까. 그가 아니면, 누가 폭우로 팬 길을 메우고, 굴러 떨어진 흙더미를 치우겠습니까. 그가 아니면, 누가 길손을 위해 길을 곧게 고치겠습니까. 그가 아니면, 누가 정원을 가꾸기 위해 쟁기를 들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있지 아니하면, 어찌 사람들이 낯선 길을 걸어올 수 있을 겁니까. 그들이 삶이라는 숲에서, 글이라는 정원을 가꾸어가기 때문입니다.

문인은 스스로를 추방합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비춰주는 불빛도 없이 산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리는 오지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오직 한 편의 글 꽃을 피우는 것을 평생의 염원으로 삼아 어떤 마음고생도 감내하려 합니다. 글은 사상의 열매이며, 고독의 이슬이며 소통의 단풍이므로, 홀로 숲을 거닐고, 호젓한 샛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문인의 삶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이므로 가벼운 행낭만 지고 사색의 산과 명상의 숲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소풍을 나서듯 숲으로 들어간 사람만이 글을 쓴다는 말은 자연에 귀를 기울이고 이웃의 삶에서 자연스러움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산과 들판이 소리 없는 절규를 부르짖으며 들어달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인은 겸손합니다.

  글은 지구에서 바라보는 작은 항성과 같습니다. 우주에 떠돌아다니는 그 항성은 너무나 작고 가벼워 한 손으로 들릴 것만 같고, 한 번의 숨결만으로도 멀리 날아가 버릴 듯 가벼워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선을 타고 다가갈수록 그 항성은 커져 우주선은 모래알처럼 작아지고 항성은 꿈쩍도 않을 질량을 지닌 거대한 존재로 확대됩니다. 사실은 그가 다가가는 것인데 항성이 반겨주는 형국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지표면에 착륙하여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에 쥐는 것은 수천억 분의 일에 불과한 한 조각 암석뿐입니다.

그래도 문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개길 저편에 무엇인가 보입니다. 그들을 위해 세워진 안내판입니다. 안내판의 기둥에는 주렴이 달려있고, 기둥에는 가슴을 두드리는 명구가 선혈로 새겨져 있으며, 주춧돌에는 고백의 언어가 징으로 쪼여 있습니다. 선각자들이 피땀으로 쓰인 문구가 패스포트가 되어 내 손에 쥐어졌는데 글의 정원을 앞두고, 지척지간에서 멈출 수 없습니다. 영원한 숨바꼭질에 빠질지라도, 잃어버린 성배를 찾듯이, 원시림에 묻혀버린 황금사원을 찾듯이, 아니면 바다 밑에 잠겨버린 아틀란티스를 찾는 집념으로 계속 나아갈 것입니다.

비록 마음에 상처를 입고 발과 손에 물집이 생겨도 그는 쉬지 않을 겁니다. 잠시 몸을 누인다하더라도 내일 깨어남을 확신하므로, 내일 다시 걸어야 한다는 의지가 쇠락하지 않으므로, 하룻밤의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무릇 문학의 길을 가려는 분들은 세 번의 다짐이 필요합니다.
“이 길을 가야만 하는가. 나 아니면 누가 갈 것인가?”

둘째 마장입니다.

어느덧 돌아갈 수 없는 경계를 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활보하며 걷는 편한 길이입니다만 앞길은 기고 엎어지고 넘어지고 해야 할 듯합니다. 멈출 수가 없다는 의지만이 우리를 서 있게 하고 죽도록 걷게 했고 넘어져도 일어서게 합니다. 문학은 외로운 수행이며 고행입니다. 하지만 문인 외에 다른 이름표를 원하지 않으므로, 일생의 내공을 여기에 바치는 것입니다.

떠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몇 가지 질문을 해봅시다. 그것은 자신에게 향한 질문입니다. 우선 삶은 무엇인가. 그리고 문학이 왜 있으며 누구를 위해 글을 읽고 쓰는지, 미적 감동은 어디서 비롯하며, 인식과 자각은 무엇에서 생겨나는가, 그리고 미래의 글은 무슨 모습일까. 이렇게 “왜”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문학의 원주인이 귀를 기울이고 응답을 보내줍니다. 그 목소리는 한 조각 노을빛으로, 한 잎 낙엽으로, 한 방울의 이슬로 전해질 것입니다. 염화시중의 미소이고 선지자의 손짓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그 계시를 놓쳐버리거나, 계시의 징조마저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좌절할 일은 아닙니다. 원래 문학적 질문은 해답이 주어지는가, 아닌가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스스로 선택하였으므로 돌아오지 못할 경계를 넘은 것입니다. 그가 숲 속의 사냥꾼이며, 숲길을 지키는 파수꾼이며, 묵정밭을 다시 가는 농사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딛는 발길을 따라 글의 꽃이 피어나고, 그가 지친 몸을 누이는 길섶에서 영감의 나비가 날아오르는 연유이기도 합니다.

글은 삶을 이어주는 신비스런 통로입니다. 문인의 소명은 그런 것이니 겸손하지 않고서 어찌 문학정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을 수 있습니까. 신을 맞이하기 위해 신의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이치라면 내가 글을 품어 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글에 안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명예라는 유산보다는 수난이라는 훈장을 더 자랑스럽게 여기는 무관(無冠)이 될 수 있습니다. 글을 맞이하는 참 자세이며 참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밖에 있지 않습니다. 안에, 그리고 곁에 있습니다. 체험 안에 있으며 역사 속에 있으며 사물과 붙어 있습니다. 건강한 문학은 생로병사에 대한 군소리가 아니라 우주의 이치를 불변의 감성으로 상상하고 적절한 문체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사와 서정이 이중화음으로 어울릴 때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미래의 문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생각을 하니, 놀라운 광경이 보입니다. 아침 해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새벽 숲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컴컴한 밤 동안, 오직 나만 걷는가 두려웠는데, 알고 보니 숲이 걷고 있습니다. 환상도 환시도 아니며, 숲의 요정과 나무의 정령들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문학의 숲은 느리지만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이 신화의 신비성과 전설의 향토성을 지닌다더니, 지금 돌아본 숲의 나무들은 서 있는 순례자이고 같은 길을 가는 동행자들입니다. 다만 어두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지레 혼자인가 단념했을 따름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홀로 밤길을 걸어도 즐겁고 신명이 납니다. 오직 사랑과 우정 어린 손을 잡되 낮춘 마음으로 길을 계속 가고, 낮춘 몸이 벌레 소리를 해석하고 풀잎의 파장을 해독하고, 이름 모를 산 풀의 향기를 해부하기를 바랍니다. 낮은 몸으로 하늘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낮은 마음으로 이웃의 가슴을 열고, 문학을 향한 행진을 계속하기를 원합니다.
무릇 문학의 길을 가려는 분들은 하나의 단검을 품어야 합니다.
“이 길을 계속 가려는가, 왜 문학을 지키려는가?”

셋째 마장입니다.

아침에 바라본 수필은 아직 처녀지입니다. 농부가 했을 쟁기질의 흔적이 없고 어부가 그물을 채 드리우지 않은 원양이며, 여전히 이름도 붙이지 않은 동식물들이 서식하는 야생지입니다. 곳곳에서 신선한 흙냄새가 피어오르고 지천으로 자라는 무명의 풀꽃들이 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거듭 말하면 검객 같고 풍객(風客) 같은 문사(文士)를 기다리는 강호이자 영토입니다.

눈을 뜨시고 둘러봐 주시기 바랍니다. 시와 소설과 희곡이라는 나라에 비하면 수필세계는 아직도 신천지입니다. 시의 영지는 갈가리 찢겨버렸고 소설의 봉토는 잡풀만이 무성하고, 희곡이라는 구역은 영상문화에 점령되었습니다. 평론은 여전히 문학의 시녀라고들 하지요. 그러다 보니 그곳에 살던 문학주민들이 수필이라는 미답의 땅, 신개척지로 이주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노회하고 노련하고 노숙하여 세상이 돌아가는 물정을 잘 압니다. 참으로 슬프지만 수필문도 중에는 그네들의 땅으로 가출하고 외지인에게 몸을 숙이려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 중에는 수필에 호감을 갖고 아껴주는 분들도 계시지만 진실이 아닌 허구로, 감동이 아닌 충동으로, 서정이 아닌 헤픈 눈물로, 유머가 아닌 흥미라는 신기술로 수필가의 인기를 사려거나 십일조를 모으려 합니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숲을 하루라도 빨리 개간하면 글이 윤택해진다는 감언이설로 수필가를 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수필은 21세기 문학의 마지막 땅이라고 합니다.
모든 문인들이 문학의 생명을 지켜나가야 할 생태구역이며 문명의 독소에 마비된 독자들이 피난할 마지막 녹지입니다. 그러니 사색이라는 거름을 뿌리고 새로운 관찰이라는 연장으로 미래수필을 소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길을 떠난 이유이며 이곳에 다다른 까닭이며 다음에 오실 분들을 위하여 수필정원을 가꾸어야 하는 명분입니다.

수필은 의미의 그물망입니다. 그물을 짜고 고기를 잡는 어부는 한결같이 바다를 사랑하고 지킵니다. 서툰 낚시꾼의 바다에는 고기가 드물지만 노련한 어부는 고기가 있는 것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이것이 적시적소입니다. 작가도 함부로 언어를 방출하지 않아야 합니다. 삶의 숲으로 글 사냥을 나선 작가에게 주어지는 화살은 너무나 적습니다. 유능한 어부나 사냥꾼이 적은 도구로 물고기와 짐승을 낚듯이 문학가는 몇 마디 말로써 삶의 진수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왜 수필을 여백의 문학이라고 부릅니까. 여백은 그냥 비어 있지 않고 그물코처럼 영감과 상상이 자유스럽게 흘러내리는 ‘틈새’이고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함축과 응축이 수필의 생명이며 절약과 절제가 수필의 겸손이며 축약과 압축이 수필문의 경제원리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빈틈없이 계산된 구성과 정선된 언어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역사에 대한 진실이 달빛처럼 쏟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 설명과 대사를 최소화하고 단락과 단락을 단아하게 묶으시고 여백에는 가능한 산사의 종소리 같은 여운을 숨겨 두십시오.

이제 분별성과 감수성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수필집이 두꺼워도 가벼워 보이고, 부피가 있어도 얇아 보이는 까닭은 바람 먹은 무처럼 글 속이 비어서입니다. 영성과 내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작가는 지식과 경험과 정감을 총동원하여 밤이 새도록 상상의 풀무질을 한 끝에 마침내 찬연한 순색의 언어를 얻어야 합니다. 응축된 감수성이 울림의 파장을 키우는 만큼 좋은 글감을 찾고 짜고 묶는 장인정신은 말처럼 쉽지 않을지라도 노력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취될 겁니다.

진정한 수필가는 우주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작가는 광부이고 어부이고 석공이고 직공입니다. 광부처럼 사물의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어부처럼 의미를 거두어들이고, 석공처럼 의미를 낱낱으로 쪼고, 도공처럼 흠 없이 빚고, 마지막으로 직공(織工)이 되어 날줄 씨줄로 글을 엮어야 합니다. 그럴 때 독자는 작가의 짭짤한 눈물과 끈적거리는 땀과 비릿한 선혈을 사랑하고 글쓰기 자체에 경탄하면서 장인정신에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딱히 그것을 기대해서 글을 쓰지 않지만 장인정신은 우리의 몸에 박힌 낙인입니다. 문학은 저주이자 축복입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지 못한 내 작은 수필을 볼 때마다 부끄러워집니다. 그래도 그것을 혹시나 잃을까, 가슴에 꼭 품기도 하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훔쳐가지 못하도록 차라리 무덤 속에 함께 묻히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무릇 수필의 길을 계속 가는 분은 세 번째 밀서를 품어야 합니다.
“그냥 가려는가, 아니면 흔적을 남길 한 발을 딛으려는가?”

넷째 마장입니다.

어제보다 더욱 길이 험하고 안개마저 짙습니다. 숲 속에 더 깊게 들어선 까닭이고 동행이 더욱 적어진 탓입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시면 수필정원에 다다르니 마지막 힘을 내시도록 문학의 묘약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상상은 창작 자체입니다. 상상력이라는 약은 몸과 마음을 화(火)로 화(和)하여 화(畵)를 그려내는 화(化)를 일으킵니다. 달리 말하면 만물의 의미와 언어의 이미지와 우주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힘 입니다. 이 말이 어려우시면 농부의 트랙터나 어부의 동력선을 생각하십시오. 얼마나 거친 밭을 갈 수 있으며 거친 풍랑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에 따라 거두는 소출과 벌 수 있는 소득이 달라지게 됩니다.

검이 짧으면 한걸음 나아가라는 말이 있더군요. 역량이 부족하면 몸으로 때워보라는 말인 듯합니다. 수필은 인간의 삶이라는 소우주와 대자연이라는 우주를 결합하는 일이므로 발이 닳도록 걷고 눈이 충혈되도록 응시하고 가슴이 아프도록 느끼고,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하는 외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그 연후에, 손이 아프도록 글을 쓰는 것입니다. 작가를 수행자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꼬집어 말씀드리면 글 나그네는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초행길을 만드는 개척자입니다.

수필은 숲 속 정원입니다. 그 정원에는 고요한 명상의 시간과 따뜻한 정리(情理)가 흐르는 계곡이 있으며 개인의 삶이 역사의 증언으로 변한 길이 숲으로 뻗어있으며 숲에는 품격과 풍류와 맛멋이 사이사이로 갈라져 있습니다. 이러한 마력과 매력을 지닌 수필을 마구, 그냥, 함부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수필은 언어로 세워지는 바벨탑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기교로 독자를 현혹하는 마술이 아니며, 인기의 스키를 타고 설원을 질주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굳이 무엇인가 물으면 처음 말씀드렸듯이 영성과 영감과 영혼이라는 용천수가 뿜어 나오는 정원을 가꾸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수필은 인생의 거울이면서 사회의 종입니다. 거울에서 비치는 빛과 종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삶의 리얼리티를 보여줍니다. 삶의 여과지가 아니라 삶이 녹아있는 약탕관이라는 겁니다. 부지런히 심미안을 높이고 오감을 갈고 상상력을 높여주십시오. 발품과 눈 품과 손품을 파십시오. 원석에 숨은 광물이라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가난과 수난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삭막하고 거친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작으나 진실 된 삶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부서진 낙엽, 떨어진 밥풀, 낡은 휴대전화, 농 밑의 먼지, 발밑 조약돌을 실존의 존재로 승격시켜 주십시오. 귀천의 진폭이 클수록 인식과 충격의 파장은 멀리까지 뻗쳐갑니다. 이것이야말로 실험성과 현대성과 개성을 지닌 수필가의 본분이라고 여깁니다.

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문학철학자입니다. 그 이름을 얻으려면 진실이라는 덕목을 지켜야합니다. “삶의 의미나 가치를 재발견케 하는 것이면 좋은 수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필이 어떤 글인가를 모르면 수필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고, 수필의 진수(眞髓)를 알면 수필처럼 어려운 글이 없다는 근원(近園)선생님의 말씀은 좋은 수필은 고행에 가까운 창작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수필가는 숲 속 정원을 찾으시려는 분이니, 대량생산하는 글쓰기의 습관을 버리고 한 편일지라도 치열하게 쓰시는 노력이 바람직합니다.

좀스러운 일화를 꾸미려 하지 마십시오, 헤픈 글은 피와 땀이 배지 않는 글에 불과합니다. 까다로움은 유식이 아니라 겉멋에 불과합니다. 인기라는 기첩을 가까이한다면 수필가라는 이름은 시궁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수필 도량으로 오십시오. 튼튼한 발걸음만 가지신 분이면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이곳에 오셨으니 무슨 나무를 어떻게 심을까 생각하십시오. 영감을 재충전하고 감성과 감수성의 열량이 높은 언어를 거두도록 하십시오. 진실한 자기 체험이 어울린,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이야기를 독자 앞에 풀어놓으십시오. 그러면 함께 하는 좋은 수필이 탄생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수필보다 더 진정한 길나들이가 달리 어디 있겠습니까?

무릇 수필의 길을 계속 가는 분은 넷째 밀서를 품어야 합니다.
“문학을 통해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시에 매달리십시오. 인기를 얻고 싶습니까? 그러면 소설을 써보도록 하십시오. 신뢰를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수필을 간택하십시오.”
수필을 쓰되 아무나 쓸 수 없고 누군가 써야 하는 경지를 지향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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