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세계 초대석                        


                  사막의 시인 황갑주 선생님을 만나다.

                         대담자: 조옥동 시인                          
      ※ 일시: 2013년 9월12일, 오후1:30-9:00, ※장소: 위티어 맥 카페에서

가까우면서 멀리 있는 작가, 마치 희미한 그림자로 가마득하게 멀어져 그를 쫓아가 돌이켜 세우고 싶었다.

1. 근황과 끝나지 않는 꿈

조옥동: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에 선생님을 뵙게 되어 반갑고 기쁩니다.

황갑주: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반갑습니다.

조옥동: 오늘은 황갑주 시인의 일생을 거꾸로 여행 떠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선생님의 친필로 보내주신 편지와 산문집과 시집을 읽고 저 혼자 기억하기엔 선생님의 시인으로서의 삶이 훌륭하고 그리고 인생 체험이 특별 하십니다. 이제부터 독자와 선생님을 좋아하는 문인들이 선생님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함께 떠나는 대담여행을 출발한다 할 가요. 미주에 이주하시고 30여 년 간 L. A. 교민으로 사시는 동안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는 물론 근래까지 전 미국을 구석구석 탐색하신 사막의 시인으로 알고 있는데 다시 이곳 L. A 위티어에 정착하신 지는 언제이고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을 알고 싶습니다.

황갑주: 미 서부에서 30년을 살다 2000년대 초 미 동부로 옮긴 것은 노스캐럴라이나에 사는 손주들을 봐주느라 아들집에 가 지내다 다시 샌버나디노로 와서 1년 살았고 이곳으로 온지는 5년 지났습니다. 어찌 보면 현대인은 모두 디아스포라 삶을 사는데  내 일생도 방황하는 나그네 팔자입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노인성 황반변성(macula)으로 거의 실명상태이고, 귀도 먹어 잘 안 들리고 이빨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등 말 더듬이 장애인으로 살고 있어요. 보조기 사용을 일절 거절하고 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소셜 연금으로 내외가 최저의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평화롭고, 안 듣고 안보고 말 안하고 무슨 득도의 삶을 즐기듯 살고 있어요. 이제부터 글을 쓰는 세계, 우주가 펼쳐질 구원의 착각을 많이 하지요. 내가 혼란스런 이 L. A. 도시 속에 살면서 신의 계시를 얻고 싶지만 속세의 미련을 벗지 못하여 자학하고 있는지, 아직도 詩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오직 진, 선, 미 탐구에 신들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회와 세계가 위협하는 生死의 공포로부터도 잔존하였으며, 내 생활과 인생도 내 분수를 넘어 있으니 이를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조옥동: 선생님께서 동부에 계시기보다는 저희들 가까이 캘리포니아 L. A.로 다시 오셔서 기쁩니다. 노년에 이르도록 현대 ‘노마드’의 특성인 공간적인 이동을 계속하며 창조적 역사를 기록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대화의 서두부터 선생님의 말씀에 송연해짐을 느낍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아직도 詩를 잘 모르신다 하니 저희 같은 작은 시인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계속 작품창작에 혼신을 바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선생님의 시혼이 언제부터 선생님가슴에 불을 지피게 하였는지 듣고 싶습니다.

황갑주: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남원 광한루 옆에서 한약방을 하시는 황매천의 아들집에 자주 갔습니다. 광한루는 옛날부터 황씨네 제각이었지요. 나는 방촌(황희정승)할아버지와 황매천 자랑만 듣고 자랐지요.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는 시인 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어요.
우리 집 담 너머가 당숙집인데 만 석 군이라 소문난 이 당숙의 외아들이 일제 때 보성전문출신으로 저와 나이가 10년 연상인데 저의 친 형처럼 친하게 지냈어요. 판사 법조인인데 다방면에 전문가였지요. 이 당숙의 사랑채에는 사방천정까지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문장(文章)”지가 있어서 내가 탐독을 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학문집안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했지요. 특히 저의 어머니는 부엌에서 부지 깨로 언문을 익혀서 동네 사돈서는 붓으로 다 써 주신 것을 옆에서 보고 제가 자랐습니다. 사실 어머니가 천사시인 같았다고 할가요.

조옥동: 선생님께서 황희정승의 후손이시라고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러면 선생님의 피 속엔 고려 말부터 이조초기에 걸쳐 청렴, 결백한 선비의 대명사로 불리시는 황희 정승의 피가 후대인 구한말 문장가 황현 선비를 통하여 대대로 이어졌다고 하겠습니다. 구한말 난세에 살면서 벼슬자리조차 천성이 허락지 않아 세류에 휩쓸리지 않고 고향에 내려가 고금의 서적 삼 천권을 쌓아 두고 두문불출 독서에만 힘을 쏟은 대 문장가 황현조부의 선비정신을 선생님에게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장안의 손꼽는 많은 문우들이 때때로 편지를 보내어 관계에 진출하여 출세할 것을 권했으나 매번 거절하셨다고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종 1년부터 융희 4년까지의 구한말의 역사책을 저술한 학자이며 문장가이셨다는 그분의 DNA 유전자를 선생님의 몸속에 지니고 계신 거군요.

황갑주: 글쎄요.(웃음) 제가 순창농림학교 3학년?인 가 김웅(남부군 빨치산의 김영 시인)선배가 한장 한장 등사판으로 밀어 만든 시동인지를 만들었는데, 시를 쓰라고 해서 썼어요. 의외로 선배들을 제치고 저의 시가 호평을 받아 은근히 우쭐해졌지요. 김웅 형은 문우가 단 한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천재요 신동이었어요. 그러나 그는 빨치산을 하느라고 제가 먼저 등단을 했는데 저보고 큰 시인이 된다고 믿고 있었어요. “너는 절대로 이런데 공산주의 물들지 마.” 그리고 “나는 인민 해방을 위해 투쟁하겠다.” 즉 “갑주는 살아라.” 했지요.
제가 동국대에 입학한 이유는 장학생 혜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김기림, 양주동, 조지훈, 서정주 시인들이 동국대 교수였기 때문에는 차선이었지요. 동국대에 입학한 첫 학기에 저는 뜻밖에도 한국문단에 입성한 셈이었어요. 천재시인이란 소문이 들렸습니다. 제가 영어가정교사를 하느라 동대문 옆 이대산부인과 병원을 드나드는데  하루는 서정주 교수께서 저를 공덕동 집에 데려오란다고 김재섭 선배가 찾아왔어요.
어찌 엄명을 거역합니까?  서정주 선생님 댁에 기거하면서 한국문단 저변을 꿰뚫어 보게 되었고 나의 꿈이었던 시인지망에 환멸을 느꼈고 그 후 문단과는 담을 쌓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너무 일찍 얻은 나의 문단정치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식이 나를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더 시에의 열망은 가슴속에서 꺼지지 못했지요. 시는 나의 시는 혼자였습니다. 무명의 김웅 시인처럼. 미국에 와서 나의 시는 살아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광활한 사막이 되는 것 같고 한국에는 없는 우리조상의 선사시대가 미국에 현존하고 있으니 참으로 경이로운 내 인생의 순례가 시작되었고 어떤 때는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고 구태여 시를 쓰려는 나의 미련이 불순스럽게도 갈등을 이르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왜 내가 부모형제를 버리고 이방 미국에서 살려고 조국을 배역하였는가. 나의 시는 간단치가 않는 숙명이지요.

조옥동: 선생님, 그러면 서정주 선생님과 명 강의로 유명하셨던 양주동 선생님의 수업을 받으셨겠네요. 그리고 교정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원 선생님을 만나보셨나요?
그때를 회고하시며 얽힌 얘기들을 좀 들려주세요.

황갑주: 전란의 수난 속에서 나도 생사를 헤엄치고 있을 당시, 내 인생에서 신념을 품고 우월감을 갖게 한 동기가 생겼어요. <東大時報> 복간 호에 '우물' 과 '미루나무가 서 있는 언덕' 이란 두 작품을 발표했는데 절찬을 받았어요. 서정주 선생님께서 저를 처음 안경테 너머로 뚫어지게 응시하시면서 "자네는 세르게이 예세닌을 닮았네 그려. 모두가 땅 속으로만 파고들어 가는데 자네는 하늘로만 솟는다." 하시더니 "나의 집에 들어 와 함께 있자."는 권유를 받고 공덕동 선생님 댁에 거주하게 되었지요.  
사모님께서 숯불 다림질을 하실 때 맞잡아 도와드리기도 하면서 지나다 보니 사모님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어요. 쉴 새 없이 찾아드는 시인들과 사회 인사들을 접대하시느라 궁색한 살림에 쪼들리는 모습이 안타까워 나 하나라도 끼니를 덜어드리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 댁을 나왔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 많은 시인들이 찾아오시는데 깨끗하지 못한 문단의 이면을 너무 일찍 알게 되어 실망도 했습니다.

아 참, 고원 선배는 교정에서는 만나지 못했고, 우쭐해진 나는 수소문하여 친한 단짝 조한길(전 인천신문, 경기도신문 편집국장)과 명동에 있는 유네스코 사무실에 일부러 찾아가 고원 선배에게 잠간 인사 했어요. 그때 선배는 이미 서구문학사조를 공부하여 한국문학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기수가 되고 계셨지요. 좀 후에 미국으로 가셨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2. 등단 시절과 교류한 시인들

조옥동: 1965년에 첫 시집「저 來年에라도」를 출판하시고 “어머님께 이 시집을 바칩니다.”는 글을 첫 폐지에서 읽었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詩를 씁니다
       그립고 보고져서,
       나의 노래와 눈물은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 詩 -歲月-에서)
          
선생님은 어머니의 말로 순수한 심정으로만 시를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집에 올린
      
       꽃밭만 남겨 주고/순이는/갔다.
      하냥 말이 없던/순이는/갔다.
       아침 저녁으로/거울을 대하듯/우물을 내려다보던/너의 얼굴이 없어……
       귀 익은 두레박 소리만 남아……
       우물 속엔/구름만 외로이/하늘빛에 멎었다간 흐르고,/
       이제 나는/혼자다.                    ( 詩 -우물- 의 전문)
          
'우물' 이란 시를 보면 아름다운 서정시의 순수한 멋을 느끼게 됩니다. 초기는 순 서정 시인으로 기억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집의 後記에서 다채롭고 오묘한 映像, 사색을 주는 시들을 열심히 읽으며 부러워한다고 쓰셨습니다. 1961년 서정주 선생님의 추천을 받으신「현대문학」등단 시절과, 교류하시며 선생님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준 시인과 문인들을 알고 싶습니다.

황갑주: 나의 50년대는 6.25 전쟁과 그 폐허 속에서 대학시절의 휴학과 복학의 반복연장 속에서의 습작기였고 60년대는 詩人이란 칭호를 얻고 試圖의 편력 이었으며, 70년대는 이민 길에 올라 세계 속의 방황 이었지요. 등단초기부터 조지훈, 김소월, 윤동주 그리고 함석헌 시인들의 작품을 좋아 했고, 정지용 선생님의 제자들 즉 청록파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시집을 탐독하였습니다. 제가 서정주 선생님 댁에 살면서 많은 선배시인들을 알게 되었고 특히 조지훈 선생 댁을 가끔 방문하였지요, 네가 순창이 고향이라니까 "순창고추장! 임금님께 바치는 ......" 하시기에 순창 고추장을 갖다 드렸지요. "시인이 산문을 쓰면 시를 버려."큰 교훈이 되었고 그건 박남수 시인이 귀감이지요. 박남수 시인과는 미국에서 절친해졌어요. 박남수 시집에 내 이름이 여기저기 나옵니다. "황갑주는 아무 아류도 아니다."라고 촌평하였고요.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가 60년대에 교류하며 우정이 두터워진 문우들과의 선의의 경쟁이 시의 발전을 위한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나는 미국이란 세계 속에서는 텍사스 주의 론 스타(LONE STAR)가 되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무명이기도 합니다.

3. 이민 초기, 이민문학 새 지평을 열다

"-꼼꼼하고 성실하고 착하디착한 서정시인,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여도 거짓말 한 마디 못하는 답답한 타고난 촌놈, -나와는 다른 국문과생이면서 영문과 강의실에서 맴돌며 문학을 하자면 외국어 하나쯤 숙달해야한다면서 그는 늘 문학얘기만 하고, 학비문제 등으로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아 서로 살길을 찾아 헤어졌다 10여 년 만에 서울에서 만나보니 완전히 소시민이 되었고, -시는 옛날처럼 여리고 약한 서정시를 쓰고 있었지만, -소시민으로 출세하는 길도 알고 있는 듯 정직한 봉급생활자의 전형 같은 느낌, 그런데 소시민의 정상궤도에서 벗어나 쫓기 듯 미국으로 같지만 소식으로는 그 곳에서 안정을 찾았다." (시집「광주의 하늘」의 신경림 시인 해설문에서 발췌했음.)

조옥동: 한 작가는 두려움을 누르고 모험을 이어가는 사람에겐 소멸의 의미가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생텍쥐페리는「야간비행」에 나오는 리비에르의 입을 통하여 과정이 아니고는 의미가 생겨나지 않는다고 일생을 통해 모험을 하라고 강조합니다. 선생님은 휴학기엔 고향의 모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시고 대학을 졸업한 다음 중앙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사업학과를 공부하셨고, 전란 후 한창 피폐한 환경을 돕는 외국 구호단체에서 책임자로 근무하며 영어에 능통하신 역량을 발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신경림 선생님은 미주로 이주하시기 직전의 그 당시의 선생님 모습을 위와 같이 묘사하셨는데요. 갑자기 이민을 떠나오신 연유가 있겠지만 선생님의 이민초기 모험시기를 들려주세요.

황갑주: 1970년 5월 미국 L. A.에 이주, 글렌데일 어드벤티스트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을 시작했어요. 5개월 후에 간호사인 아내의 직장을 따라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로 옮겼어요. 이곳에서 사막에 넋을 잃고 자연이 자연그대로 숨 쉬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반했지요. 한국인은 없고 인디언들을 보면 어머니들을 만난 듯 했어요. 그러다 그곳에서 호흡치료사의 자격증을 땄는데 아내가 외로워해서 일 년 후 친구들이 있는 이곳으로 돌아 왔습니다. 카이저병원에 직장을 얻고 이때부터 안정된 생활이 시작됐어요. 3년 후엔 플러턴 이웃 Brea시에 저택을 사서 4반세기를 이집에서 살면서 벽돌담을 내 손으로 쌓기 등 정성을 들이며 즐기고 살았습니다. 노동의 매력을 시로 썼지요.

조옥동: 선생님은 언제부터 미국문단을 알게 되어 활동하셨는지요? 1970년대 초에 선생님은 미주 한국시인들의 작품을 모아 「지평선」이란 시집을 내셨는데 이주초기에 문학 활동을 어떻게, 어떤 동기로 출발 하셨는지요?

황갑주: 뉴멕시코 주의 앨버커키에서 약 1년 사는 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또한 지역 주류사회 문인들의 순수성을 알게 된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미국의 시단을 알고 싶었어요. 도서실에 가서 책을 읽고 배운 것을 그대로 답사를 하며 그들에게 매료되었습니다.    
뉴멕시코에서의 생활은 내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계기가 됐습니다. 1971년 봄, 뉴멕시코 시인협회 월례행사에서 시인 낭송의 밤에 코리언으로 내 시를 소개하는 기회가 있었지요. 두어 달 후엔 100마일가량 떨어진 소로코시에서 한국의 날 행사를 갖고 주류사회에 한국문화를 소개하기도 했어요. 1년 후 다시 L, A.로 옮긴 나는 70년대 중반 까지는 미국의 시단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탐색하는데 보냈습니다. 어느 정도 파악한 다음엔 미국시단 내부의 얘기를 서울의 시전문지「시문학」에 30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어요.

조옥동: 선생님께서 글을 계속 써서 연재하시던 그때는 1960년대 전후 비트 운동(Beat Movement) 즉 보헤미아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새 혁신 문화풍조가 휩쓸고 있었던 무렵입니다.

황갑주: 그래요. 산타모니카 옆 베니스, 샌프란시스코의 노스비치 그리고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 등지에서 앨런 긴즈버그, 개리 스나이더, 잭 케루악들이 타이프를 쳐서 교회 소식지 같은 동인지를 만들었는데 그 속에 실린 시들이 미국 현대시의 대표작들이 되고, 이런 동인지를 대학 도서관 희귀본 칸에서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휴지조각 동인지가 집 몇 채 값에 호가 된답니다. 동인지를 만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 시작하였지요. 한글 타자기로 한자라도 오자가 되면 페이지 전체를 새로 쳐야 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교포문학의 지평을 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했어요. 원고모집기사를 신문에 내도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고 그래서 미주에 사는 한국 시인들의 연락처를 한국에 문의하여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원고를 모았습니다. 제호를 정할 때 뉴욕 고원선배에게 전화로 의논했더니 지평이란 말이 좋다고 하여「지평선」이란 이름으로 정한 기억이 납니다. 첫 재미 시 동인지가 진통 끝에 1973년 년 말에 탄생했는데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이선주 씨의 도움이 컸어요.
본국의 언론도 '우리문학사상 최초의 이민문학지'가 나왔다고 크게 소개 했습니다. 1호와 2호가 나오고 4호는 「在美詩人選集」, 3호는「지평선」여류시인 3인집을 끝으로 1970년대에 끝났습니다.

조옥동: 지평선 4호 곧「在美詩人選集」을 보면 선생님과 고원, 박영숙, 김시면, 김숙자, 마종기, 이창윤, 최연홍, 최선령, 김송희 시인들의 사진이 있어요. 고인이 되신 분도 있으나 대부분 현재도 활동하시는 선생님들의 젊었던 모습을 보게 되어 감격스러웠습니다. 또한1976년 11월에 처음으로 활자화되어 발행되었다는 「지평선」3호 즉 3인집은 박신애, 임서경 그리고 강옥구 주부시인만의 작품집이었어요. 특별한 기획이라 생각 합니다. 그 당시에 선생님은 주류문단과 교류도 활발히 하시며 로컬 방송에도 출연 하셨다고요.

황갑주: 1979년 10월에 LA시 200주년 문화예술제의 행사로 시낭송이 웨스턴에 있는 The Fifth Street Studio 극장에서 있었어요. 헝거리, 칠레, 알헨티나 등 근 100여개국의 대표시인들과 함께 나도 이세방 시인과 참석하였고 1981년 7월이라 기억하는데 소련 지하 운동가이며 망명시인으로 유명한 Lev. Mak도 출연했던 TV 방송국 KCET(PBS)의 'Avenue 28'이란 프로에 나가 나의 '민들레 꽃' 을 영역해서 낭송했어요.

조옥동: 1981년 할리우드에서 발행한 주간지 <DRAMA~LOGUE>에서 Terry Fisher기자가 "한국 시인이 미국의 주류TV방송에 나타난 것은 황갑주 시인이 처음이다." 라 쓴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KPFK(90.7FM)라디오 방송국은 THE Fifth Street Studio 극장에서 각국의 시인들이 출연하여 자작시를 낭송하는 프로그램이 전국으로 방영되었는데 1980년 11월엔 선생님의 2차 방송 출연이 있었구요. 아주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다는데 방송출연을 하신 선생님도 그 당시를 못 잊으실 것 같아요.

황갑주: 제 딴에는 이민문학의 대변자 역할을 하려했고 제가 스타가 되었지요. 2001년 6월에 중앙일보에서 코리아타운 30년을 기획한 특집기사에서 고영아(고 고원 선생님 부인) 출판팀장은 시인 황갑주 시인은 <이민문학 새 지평 연 '방랑시인> 이라는 제목으로 대담기사를 썼지요. 첫 교포문학지 '지평선'을 타자기로 쳐서 시집을 완성하여 해외 문인들에 희망 1호라고, 그리고 인디언과 돌에 푹 빠져 사막에서 시 쓰는 자연인이라고 소개 해 주었습니다.

조옥동: 그보다 더 일찍 1993년 4월 한국일보 미주종합면에는 <우리정신 살찌우고 마음 다사롭히는 한인 예술인들을 소개하는 '문화가 산책'>시리즈에서 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읽었습니다. 고 송상옥 편집위원(그 당시)은 시인 황갑주 씨를 "사막의「오두막」서 고독 즐기며 詩作"이란 제호로 89년 조기 은퇴, 모든 것 훌훌 털고 집필에 전념, 인디안 文化 심취, 자연의 품속서「자연」을 읊고 있다"고 소개 하셨어요. 지금부터 은퇴와 그 후의 창작 활동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4. 은퇴 그리고 사막의 가요데

……
사막엔
달이
뜨더라
언제나 떠 있어서
허공은
달로 차 있더라
인간을
외롭게 밀쳐 넣고
달이 뜨더라                             (시'사막엔 달이 뜨더라' 의 일부)

캘리포니아州를 사랑한다
애리조나州, 네바다州, 뉴멕시코州, 텍사스州도
사막이 열린 어느州의 하늘땅도 사랑하리라.
…… …… ……
나를
잃어서 비로소
사랑하리라.                               ('沙漠記'의 일부)

위의 시들은 1979년에 내놓은「沙漠記」와 1992년의「사막엔 달이 뜨더라」에 올려있다. 사막이란 단어가 계속 등장한다. 자연산 삼이 최고 절정에 이른 이상형을 천종이라 한다면 기약 없는 천종과의 조우를 위해 외롭고 고달픈 사막에서 시의 천종을 캐기 위해 이어가는 시인의 사막 행을 따라가고자 한다.

황갑주: 글은 쓸 에너지가 있고 글 쓸 의욕이 있을 때 글을 쓰지 않으면 영 글을 쓰지 못할 것이 두려웠습니다. 1989년 59세에 호흡치료사로 19년 다닌 직장에서 조기은퇴를 결행했습니다. 이유는 생활과 문학 중 택일을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여 결국 문학을 택했지요.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을 누비며 은퇴 후의 살 곳을 살피다가 애리조나 주의 세도나를 원했지만 여의치 않아 썬 시티로 결정하고 '서재용' 으로 조그만 집을 샀어요. L. A집과 이 집을 2년간 왕래하다 완전히 썬 시티 집으로 옮겼어요. 이웃인 피닉스와 뉴멕시코 주의 산타페는 인디안 문화의 중심지로 보석세공, 미술, 음악 등 세계적인 인디안 예술가들이 살고 있더라고요. 이들 인디안 예술가들은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들인데 참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부터 인디안 문화에 관심을 가져 연구를 하게 되었어요.

조옥동: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제가 중앙일보의 '이 아침에' 칼럼을 쓸 때 '사막엔 달이 뜨더라' 선생님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 인연이 되어 선생님을 만나고 그때 선생님은 '사막의 가요데'라 할 만큼 사막이란 특수지역을 한국의 선사시대를 흉내 내어 구석구석탐색하며 방랑하셨다고 했어요. 예를 들면 Creosote bush에 관한 지식에 놀랐습니다. '사막의 콘사이스'라 할 정도로 연구하시고 본인의 삶을 Creosote에 비유하셨습니다. 어쩐지 선생님의 사막기를 읽노라면 "나는 한 조각이면서 중요한 부분"이라 말한 ‘자연론’의 저자 19세기 미국의 철학자이며 시인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 생각납니다.

황갑주: 장구한 세월을 사는 고통과 인내로 점철된 그들의 생명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접목시키고 싶었습니다. 사막은 고통이요 아름다움의 절정이요 예술로 가득차서 황홀함에 취하게 되었지요. 나는 원주민 문화 탐방 자체가 미국의 역사 탐구라 생각하고 미국을 탐구하는 기록을 30회나 한국의 문예지에 발표했습니다. 때로는 한국에서 교수들 일행이 와서 사막여행을 수차례 안내하였고 그중에는 지금은 작고한「혼 불」작가 최명희 소설가도 있었어요. 인디언들에게는 원조가 필요해요. 술과 마약에 취해 사는 그들과 친구가 되기에는 애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 문화 탐구에 저는 제약을 받았고 그들에겐 보탬이 되지못해 미안했어요. 그러나 예를 들어 일본 문인들은 그들에게 많은 돈을 헌납하면서 연구에 도움을 받습니다. 인디안 문화의 상징이라는 터키석(turquoise)이 갖고 있는 옥빛에 반하여 6년 동안 보석세공을 했습니다. 터키석과 비취 오팔 등을 연마하는 과정은 시 쓰기보다 몇 배나 황홀하여 전국에 산재한 광산탐방이 시작되었지요. 돌을 찾아 떠나고, 보석연마에 전신 투구하여 재료 사는데 돈 많이 축냈습니다. 그러나 그 보석을 팔지 않고 신세진 친지들께 모두 다 나누어 줬어요. 내면적으로는 인디오화 되고 외면적으론 백인화 되면서 인디언과 백인 사회에서 생활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이미 벌려놓은 내 문학은 어쩌나 하고 정신을 차려 시인으로 돌아왔습니다.

조옥동: 선생님은 그렇게 얘기하셔도 1979년에 내놓으신「沙漠記」와 1992년의「사막엔 달이 뜨더라」나 2008년에 펴내신「산타페는 접시꽃」을 보면 수많은 작품들이 그 당시에 쓰였거나 기록하신 작품들이었습니다. 사막의 시라면 누구도 시인 황갑주 선생님을 따를 자가 없겠지요. 인디언들의 생활 그들의 진실한 분노와 사막의 숨소리들이 선생님 영혼의 필터에 여과되어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황갑주: 사실 평론가의 글보다 내 사막시편들을 읽고 독자가 감동했다는 독후감을 받았을 때가 더 기뻤어요. 한 번은 어떤 분이 신문구독을 거절하려고 했는데 신문에 실린 내 사막시를 읽고 감동하여 신문사에 구독을 재신청하며 감사편지를 보냈다는데 그 편지를 받아 읽었다고 편집국장(한국일보)이 말해줘서 알았어요.

조옥동: 한 소설가는 "영토 없는 왕은 왕이 아니요, 독자 없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다."라 말했습니다. 영토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한 왕만이 남을 수 있듯 독자를 위해 작가와 시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가요?

황갑주: 나는 문학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섣불리 하면 자기상실, 가정의 갈등 그리고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기교만으로 작품을 쓰지 말고 인생자체가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품하나 완성하는데 피 말리고 뼈를 깎는 작업인데 언제 남들을 도와줄 틈이 있어요? 무슨 단체를 만들고 발전을 위해 정열을 바치는 활동은 예술을 침해할 뿐 예술인이 하는 몫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시세계는 고달픈 삶의 앙금에서 하늘의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 그것처럼 모든 삶과 죽음의 만화경을 이룬다고 생각해요.

조옥동: 말씀은 그리 하셔도 1970년대 이민초기 미주문단 초석을 만드시는데 정렬을 쏟으셨습니다. 1992년「사막엔 달이 뜨더라」작품집으로 '미주문학상'을 받으신 후 선생님의 특집기사에서 본인은 "어쩌다 내가 사막을 떠나 도시에 들어가면 도시의 철옥에 갇혀버린 '사막 가요데'가 되어 숨을 헐떡거릴 것이다."라 술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막을 떠나서도 사막 전도사로 떠돌리라는 말과 문자의 시만 시인가 사막의 허무는 장엄한 시 세계 아니냐며 이런 혼란 속에서 시의 길을 잃고 있었다고 술회 하셨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선생님의 결벽증, 초연함, 초월주의 그리고 조금은 피해의식 등이 자신을 일부러 복잡한 생활 속에서 스스로를 소외 시키며 방랑자 또는 방황자로 만든 것이 아닌가요? 아니면 시가 있기에 전혀 외톨이로 생각지 않으시나요?

황갑주: 나에게는 시만이 나의 막힌 숨통을 열어주고 시는 나를 위로해주고 인간사회를 아름답게 정화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신나는 삶의 소일거리 입니다. 나는 시인 정서만 살고 싶고 정치도 사상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언어로 순수한 심정으로만 소설을 써서 모든 생각을 발표하고도 싶었어요. 나는 미주에 와 있는 1세 문인들과 거의 다 친교를 하며 사사로운 교류를 하며 우의를 다지고 지냈는데 많은 동료가 타계하여서 남은 내가 할일이 많아 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조옥동: 현 미주문단이나 후배문인들에게 꼭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실 것 같아요. 말씀해 주시지요.

황갑주: 나는 詩人이 詩를 쓴다고 생각해요. 이 말은 인간이 시인이어야 시를 쓴다는 말입니다. 이민 1세문인과 1.5세대나 2세대 사이의 갭 즉 골이 너무 깊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을 찾아야 해요. 1세대는 주로 시인들이 많았고 한국문단을 거쳐 온 한국문단에서도 이름이 있던 분이 많은데 그중에 여러분이 고인이 되거나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내가 이철범 선배 얘기를 했지요? 이 선배는 이곳에 와서 부인의 월급으로 생활하면서 글만 썼어요. 박남수, 김용팔, 황운헌, 김선현, 고원, 송상옥 위 분들은 타계하였고 또 생존한 연로 문인들 박영숙, 마종기, 이창윤, 최연홍, 김숙자 시인들이 있습니다. 많은 시인들이 미국 땅에서 창작활동을 하였는데 비하여 몇 분을 빼고는 이곳에서 만든 작품을 계속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 분들의 삶을 찾아 순수한 문학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이민 1세들의 문학선집을 만드는 것이 내 일생 숙원으로 좋은 편집자를 만나 성사시키기를 희망합니다. 자료를 모으기가 쉽지 않아 걱정입니다.

조옥동: 전에 뉴욕에서 가족끼리 청과물상을 아주 열심히 운영하시다가 작고하신 시인 박남수 선생님 얘기를 조금 해주셨어요. 작고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밤비행기를 타고 장례식에 가셨는데 문인은 선생님 오직 한 분이셨다고요. 이민을 오신 분들이 거의 다 고생을 하셨지만 박남수 선생님의 삶 자체가 특별히 훌륭하셨던 모습을 조명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5. 사막의 해바라기 그리고 끝나지 않는 통일 노래

1999년 8월에 펴낸 「조국아 너를 사랑한다」를 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님을 찾는 간절함의 통곡뿐,

“…… 사막의 어느 지평선 하늘 변경에서/노란 어느 꽃포기에 걸려 쇠잔히 숨거두어도/독수리 입부리에 찍혀 먹혀도/님의 덫이오니 내버려 두소서.”           (-시 ‘哀歌’ 에서-)

“……군인이 정치하거나 말거나/우리 고을에서/논에 농사꾼과 밭에 아낙네에게도/시를 쓰게 하여/내 고을 사람 모두를 시인으로 만들고 싶다……”          (-시 ‘다시 태어난다면’에서-)

극단적으로 돈 한 푼 드리지 않고 조국통일을 할 수 있는 길은 예술인 특히 시인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그를 1988년 펴낸「나성에서 본 光州의 하늘」의 해설을 쓴 신경림 시인은 말한다. “순박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그가 광주항쟁을 본 후엔 옛 껍질을 깨고 서정시인과는 크게 다르게 변모하여 미국에서 반군사독재운동에 참여했음을 알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님들의 선혈로 쓴 플래카드/님들의 선혈로 적신 깃발의 절규는/내 시의 붓대마저 떨구고/시위대열에 끼어들었는데/기어코 승리의 함성/온 하늘에 펄럭일 때, 아/그날부터 통곡하리다/그리고 시의 붓대를 다시 들리라.”           (-아직 쓰지 않는 진혼시-에서)

조옥동: 현재 뉴욕에서 투병생활을 하시는 박영숙 시인은「사막엔 달이 뜨더라」시집의 발문에서 선생님을 “천성의 휴먼이즘 시인”이라며 신생 중국이 탄생하는 전야에 해당되는 시기에 불의에 항거했던 중국 신문학의 창시자 루쉰(魯迅, 본명은 周樹人)에 비유하셨어요. 저는 서두에 언급하셨던 梅泉, 황현(黃玹)조부를 다시 떠 올리게 됩니다. 난세에 사는 문필가나 시인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선생님의 저항시, 통일시집들을 읽은 터라 직접 얘기로 듣고 싶었습니다.

황갑주: 조 시인이 왜 굳이 질문하는지를 알겠어요. 1980년 10월에 낸 재미한국시인 七人集「빛의 바다」는 光州를 뜻합니다. 일제 땐 독립운동의 발상지였고 군사독재의 투쟁에 앞장선 고장입니다. 이 항쟁문집을 만들기 위해 재미 한국 시인들이 5,18광주참상의 잔인성에 통분하여 5월, 6월, 7월중에 대부분 쓴 작품을 모아 8월중에 식자가 완료된 것을 10월에야 인쇄가 되었어요. 몸은 비록 이역 하늘 아래 있어도 그만큼 민족의 수난과 동족의 아픔을 누구보다 못지않게 고발하며 통곡하며 가엾은 無告之民의 넋을 달래주고 싶은 우리 시인들이었지요. 사실 나는 70년대와 80년대는 문학작업은 소흘히 하고 고국의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에 정신을 빼앗기고 살았다고 하겠어요. 내 개인적인 문학이냐 불의와의 싸움이냐 하는 갈등으로 문학의 절정기를 상실했습니다. 허나 어느 시대이건 불의와 싸우고 항거하는 용기와 양심적인 시인 작가는 살아 있어요. 시인 보들레르는 “시는 단지 확인하는 것만이 아니요, 뜯어 고치는 것, 새로 짓는 것이다. 시는 어디서나 불의의 부정이 된다.” 말했습니다.

조옥동: 사회정의와 역사의식 그리고 자유와 평등, 민족의 자존과 자긍심을 고취한 위인들 중엔 정치가, 철학자도 많지만 어떠한 위협과 고난에 부닥쳤을 때 소신과 신념을 지키며 붓을 꺾지 않고 용기를 돋아주며 선구자의 역할을 한 작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영원한 시인들, 헤르만 헷세, 보들레르, 푸시킨, 로르카 등 외국 시인들도 많고 우리나라의 이육사, 한용운 시인이나 심훈 같은 작가도 있어요.
선생님의 시집발행 연도로 가장 최근에 펴내신 2007년의「시인이 쓴 통일노래」와 2008년의「산타페는 접시꽃」시집에는 주로 통일시가 많이 수록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요즘도 통일시를 계속 쓰고 계신지요?

황갑주: 민주화 항쟁으로 군사독재정권이 끝나고 우리 조국도 경제적 정치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어 매우 반가우나 남한만 해도 아직 건널 수 없을 만큼 동서로 깊게 패인 감정의 골이 있고 경제적으론 경제대국에 진입했다 해도 빈부의 차가 심화되고 또한 무엇보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모두가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 하나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제 평생에 이런 날이 올지 모르지만 그 때까지 나의 노래는 호흡이 멈추는 그 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조옥동: 선생님 장시간 친절하게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 종일 선생님과 좋은 여행을 한 것 같아요. 더욱 건강하셔서 즐겁게 보내시며 계속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남기시기 바랍니다.




-황 갑주 시인의 자선 소 시 선집-

(사막의 노래)

-커피 두 잔이면-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남부 텍사스르 향하여
삼박사일 사막과 평원의 바다를 운전하는 동안
사 먹은 것이라곤 커피 두 잔 뿐이었다.

가스가 떨어져 갈 무렵에도
인간 하나 보일 전망은 전혀 없고
망망한 사막의 바다만
낮게 떠 있는 그 가냘픈 절망이 올 때
하나님이여, 겁이 새어날 그 지점에
몇 시간만인가
상자만한 가게가 붙은 주유소 움막 하나가
나타나곤 하였다.

그곳에서 기지개 펴고 사먹는
뜨거운 커피 맛은 시로 쓰지 않아도
더 기적에 남을 기적이었다.
코리안 모습의 인디안이 더욱 반가웠다.
어쩌면 내 인생의 시점에서처럼
그들도 연말연시가 없는
동반자 같아서 서글펐다.

폭풍을 만나거나 폭우를 만나거나
사막 복판에서 차가 몸살로 쓰러질 만일에도
걱정을 던다.
우장 슬리핑백, 털옷들
빵과 과일, 통조림, 음료수
모텔에서 밤을 지낼 때
전기솥에 밥 짓고 장조림 깻잎에 밥 먹고
그리고 커피를 끓여 마신다.
내 됫박만한 차속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운전이라야 앉아 있기만 하는
지구의 고개를 넘고 있을 때
끊임없이 입맛을 다시고 왔지
건포도 한 알로 열 번이나 입을 놀렸지.
갓난애 하나라도 옆에 있으면 싶은
언어라는 것도 필요 없으니
과일과 빵과 소다수 마셔가며

유행가와 가곡의 명창을 뽑아내기도 하고
지루하면 차문을 열고 숨이 끊기도록
사막의 공기를 깊이 들이키면
십 년도 더 장수할 것 같은
원초의 하늘 땅에 몇 천 년 거슬러 와
이승도 저승도 없는
찬란한 허공을 날고 있었지.

커피 두 잔이면
이 무변 천지에
만물의 영장 티끌인 채
영원으로 영원으로만
흐르고 있었으니...


-노스다코다주-
   閔暎에게
      
사람 하나 안 보이는
노란 초원의 광활한 대지
이것이 한 농가의 경작지란다.

마을 하나 안 보이는
망망한 풍요의 대지
한 농가가
온 하늘까지 소유하고 있단다.

노스다코다의 농투산이들은
산을 본 일이 없다.

이 스테이트의 나무가
뭔지 아는가 그대는?
땅과 하늘을 뒤덮은 해바라기 밭을
고속으로 한나절을 달렸지만
그 끝없는 황금빛에
기가 막혔다.

노스다코다주의 나무는
모두가 전신주다.

사람도 마을도
볼 수 없는 이 거친 땅에서
미국 촌놈들이
거부가 되어 살고 있다.

땡전 한 푼 없는
엉겅퀴처럼!


- Big Sky -

몬타나 주의 별명이
Big Sky 라기에
남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
유타, 와이오밍을 거쳐
먼 삼 일을 달려갔으나
택사스의 하늘보다도
적었다

놀랜 건 하늘을 노래하는
종달새 떼들한테
내 넋을 빼앗겼다
더 높지, 더 크지!
자랑의 비상이었다

광막한 황지 들판에
노루뿐인 텍사스는
몬타나의 하늘만
그리움이었다

옛 고향 옛 하늘이었다
몬타나의 Big Sky
땅도 하늘이라면
아무리 멀어도
하늘만은 어디나
내 마음이다


-텍사스 땅을 가면-

나는 먼 사막과 평원을 왕래하였지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를 거쳐서
그 넓은 천지 텍사스의 우주를 떠갈 때.

하늘 땅
해와 달
나 하나야 있는가 없는가

태고와 미래가 창연한
나야
있는지 없는지
영원만
아득하여도 청청하였지.

알고 보면 몇 푼 안 되는 것 갖고
누구나 결국 처자식 거느릴 것 뿐이면서
선한 희생자 앞에서나 재지 말고
서푼어치 뭐 알아 아는 체하지 말고
창피하지 않은가?

그네의 기쁜 계절이 오면
더욱 괴롭다.
이 스산한 겨울 한 고비를 비켜나기 위해서도
텍사스를 간다.

고향 같아라.


-유배 민들레-

내가 태어난
한국 순창 산골에서
태평양 하늘을 날아
이역만리 타국에서 산 만큼의
거리가
나의 세상은 잘못되어 있을 것이다.

이국의 사막 벌판에 핀
민들레야.
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유배(流配)로
때로는 아프게 산다.

태어난 곳이 본적이 되고
떠나서는 안 될 고향이라면
미국 원주민들의
선사(先史)인들
이 붉은 땅 나라도 아닌지 아는가.

인류도
바람의 애완이던가
구름인지 모른다.
민들레는
바람이 하늘의 손길이다.

그러나
나의 방황은
하늘의 뜻과는 달리
천지를 더 병들게 한
반역이 아닌가 몰라?

몬태나 주
헬리나 언덕에서
억만 개의 햇털을 반짝이며
일제히 하늘로
치솟는다.

하늘 눈치를 살필
일순은커녕
사막 바람이 고원에서
휘몰아쳤다.

하늘 가슴의
어디에 가서 씨를
뿌릴까
유배 민들레.


(통일노래)

-분단 일념-

통일 소리만 나면
돈타령
통일 소리만 나면
독일이다
서독이 이남
동독은 이북인가
그들은 38선을 넘나들며
자유 했는데
통일 소리만 하면
빨갱이다
38의 만리장성을 쌓아
세계 명승지가 소원인가
화내지 말라
너 나 없이
우리는 분단의 원흉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 조선

-미친 소린가-

돈 한 푼 없이도 통일합시다
이 초보적 의제
국민에게 한 번이나 물어 보았나
왜 일심동체 입 다물었나

온 정치가들
학자님들
매스컴도 합세하여
통일 소리 입 막고
민족을 천대만 일삼았나

늦었지만 짚고 넘어갑시다
돈 없이도 통일 할 수 있는
통일
전쟁보다 좋은 가난할 때
남과 북의 중지 모아서

이 첫발의 의제
돈 없이도 통일할 수 있는
통일
늦었지만 한 번이나
짚고 넘어갑시다

-이북의 통일 세-

중국이 흥하고
러시아, 이북이 업혀서 흥하면
이남의 통일 세는
이북에 가서
경제전의 대승이리까

통일비용 떠맡기면
북측이 반통일
그때는
남쪽의 천안함
주고 받는
연평도인가

오직 공산통일
민주통일 만 결사한다면
누가 이길까
전쟁만이 안다의 답은
100점, 만점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을
영구분단이
세계화에 입맞출까

세계는 우릴 보고
답답다 못해 화 치미는 조롱인데
삼국역사 그리우며
코리아 만 기고만장이다

-나의 동화(童話)-

나는 한 평생
장난감 권총도 만져 보지 못했다
나는 총을 몰라서 항상
나의 안전한 방패였다

몇 자루 총기 없이는
잠을 못 이룬 카우보이
텍사스 스테이크를 찜찜이
나도 먹기도 한다

내가 전쟁터에 끌려갔다면
자폭했을까 우리는
사람을 해치지 못한
우리 어머니의 아가이다

-심판대-
언젠가 후년에
통일이 되면
당신은 분단시기에
통일을 위해
무슨 짓을 했는가
심판 받을 때
친일 만인가
친미 만인가
친중, 친노 만이 아닌
안전지대
아무 기록도 없이
심판대에 오를 때
당신들의 십자가를
후대에 대속하리까
잔인한 선친
후세로 유산하리까


(항쟁의 노래)

-아직 쓰지 않는 진혼 시-

유월도 하순에 접어들면
벌써 첫 삭망이 되건만
나는 아직 진혼 시를 쓰지 못했다
아, 실로 그 날 그 이후
그들의 원혼이 애타게 외치는 비통
그 원정을 위하여
시의 붓대를 던져논 것이
아, 벌써 첫 삭망이 되는구나

세계는 하루로 좁혀졌고
지금은 출전 전야
죽음의 도시로 폐허가 된
미국의 배반을 규탄하기 위하여
해외 동포는 더욱 분노로 일어섰다

카터에게 전문을 쏘아대고
편지로 거듭 포문을 당기고
백악관에서
이국의 어느 대도시 복판마다
우리는 플레카드를 불끈 들고
세계 시민들께 호소한다

그러나 유월도 지나면
던져 논 붓대, 쓰지 않은 진혼 시는
오히려 머리통을 치고
문득문득 가슴을 저민다
행여 그대들 버림받는가
외로워할까
유월은 더 비장하고 서럽고
다급한 달

원혼들께 바칠 헌시야
일 년도 이 년 훗날도 늦지 않으리
그 장한 아들아 딸들아
영웅적인 시민의 사랑들아

태어난 몫을 천 배도 더하고
조국의 꽃들
태어난 목숨 천 번도 던져서
영원한 꽃들
태어난 값을 천 배도 더하고
조국의 꽃들

님들께 바칠 헌시야
우리 평생의 노래 되리니
새 역사 새 겨레의
영원한 노래 되리니
우리 승리는 더욱 이제부터고
더욱 살아계신 그대들을
어이 진혼하리까

님들의 선혈로 쓴 플래카드
님들의 선혈로 적신 깃발의 절규
내 시의 붓대마저 떨구고
시위 대열에 끼어들었는데
기어코 승리의 함성
온 하늘에 펄럭일 때 아,
그날부터 통곡하리라
그리고 시의 붓대를 다시 들리라

-흐느끼는 5월-

사내들이라면
너도 나도
5월의 광주를
제 것이라고 우긴다

80년 5월에 만난
그 빛나는 처녀와
저마다 잠자리를 함께 했노라 입증하며
10년을 보냈다

그 아름다운 처녀가
누구에게 수청 들었는가?
그 순결한 아가씨를
어느 누가 차지했단 말인가?

사내들이여
그 여자가 능욕당할 때는
몸을 피하여
겁에 질린 눈으로
숨어 다니던 비겁한 사내들이여!
귀촉도 피울음을 들려준들
들릴 리 있겠는가?

비단 이것은 적의 무리뿐만 아니다
저마다 합리적으로 배신하고
사기 치는 잔치만으로
짓밟고 뭉갰으니
광주처녀는 아픔과 슬픔을
알 리 없다.

지척에서 변방으로 숨어서
잔치에나 모여들어
손잡고 맹서하지만
피투성이가 되어 숨진 한은
허공뿐이다

누가 배신 했는가?
비겁한 무리들은 떠나버리고
5월의 광주를
숨어서 지쳐보던 사내들
진실이 드러날까 겁먹고
사시나무 떨듯하며
방황하던 그 사내들.

그러나 우리 광주의 사랑은
금남로에서 충장로에서
도청 언저리에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광주의 거친 들판에서
하늘 품에 안겨
수절하고 있다.

광주의 거친 들판
하늘 품에 안겼다가
광주의 처녀는
흰옷 입고 우는 5월에
천사 되어
수절하고 있는데...

-광주-

광주를
고향삼는 이가
줄지어 간다

천지 어둠을
번갯불로 갈라 놓고
광주는
불끓는 화산 되더니

광주를
고향으로 결의한 이가
줄지어 간다

광주야
그대는 부슨 불뿜는
마녀 같구나
모두가 그대만 열애하는구나

이국 만리
낯선 땅에서도
광주로
광주로만 줄지어 간다

봄이 오면
쑥국 끓여 더욱 향기롭겠지
팅팅한 살집 아낙네들아
광주는
겨레의 사랑 되었지

이국 땅에도
너나없이
광주만
광주만을
열애하며
줄지어 간다.


(그리움)

-상사리-
어머님 전

나뭇잎을 흔드는
바란의 감촉으로도
비가 내릴 것을 알 수 있도록
저는 자랐습니다.

흐르는 은하를 보시고
이튿날, 당산등 양지에 널어놓은
목화를 부지런히 따시던 어머님을
어려서는 몰랐었지요.

뒷산에 노루 울고
먼 기적이 비안봉(飛雁峯)을 스쳐 오면
황새는 송목(松木)에 날아들고
비가 내리던... 제 어린 기억도 있습니다.

아줌마들 옷무늬로 시골 단풍을 구경하는
이곳 서울 거리
하늘을 우러러 계절을 분별하고
학교길 여학생들의 음성으로
가을이 오고감을
어머님 저는 알 수 있사옵니다.

세월이 가는 동안 이곳도 정들어
층층이 높은 건물에 묻혀가면
산중 숲속을 찾아든 듯 서울 골목길
번화한 가로(街路)도
그득한 들길을 거니는 듯
이젠 서울 장안도
제 고향산천이 되었습니다.

근심 놓으십시오.
타관 물맛은 달라도 저는 몸 건강하옵고
새벽마다 옛이야기 들려주시던
아들의 꿈은 자라고 있사오니
초록옷 입고 어머님 어머님께 가오리다.

-포플러-

강 같은 세종로를 건너
종로 1가 포플러 길은
내가 시인 되어 살고 싶은 언덕

포플러가 늘어선 이 가로는
시골 어머님을 떠나 이곳 초행길로 와서
나 혼자 여러 번 서서 울었던 것 같다.

포플러는 고향이 그리웁다.
나 정신없이 서울 생활만 하느라
고향도 잊었다간
여기 가로수 밑을 걸어가며
시골 어머님을 너무 소홀히 한 것을 깨닫는다.

전쟁과 벼슬 핑계로
나 혼자 살 길을 찾아 이곳 어머님의 이역
아들의 나이는 어느새 많고
서울은 내가 자란 전원 같은 도시

효도는 못 올려도 성공이나 전해지면
눈물을 거두실까
수없는 결의, 전쟁인양 피로 뿌려졌지만
어머님께 사뢸 기쁜 소식은
아직도 아득하다.

밀려오고 밀려간 인파속에
생각하며 한숨쉬는 거리마다
포플러는 다시 서서 있고
나는 시골 어머님만 그리울 때
시(詩) 생각하며 시(詩) 생각하면 눈물이 돈다.


-어머님이 하신 대로-

애리조나 사막집의 뒤뜰
돌에 앉아서 쌀을 행구다
물에 씻긴 쌀을 줍는다
불은 쌀이라 족집게로 집어도 바스라져요

밥솥에 전기 누르고
아침 햇볕에 쌀이 마르기를 기다렸지요
발 빠른 퀘일새가 어느새 들어와서
신기한 듯 갸우뚱 쌀을 쪼아 먹어요

수줍고 언제나 부지런히 쌔끼 위해서만 사는
어머니를 닮은 퀘일새
언 듯 당신 뵈온 듯 설레이내요

어머님
저도 항상 뒤뜰에 나가
돌 위에 대야를 놓고 얼굴 씻고
선인장 나무 밑에 세숫물을 붓지요

빨래도 손으로 빨고 헹구고
빨랫줄에 널어요
세탁기와 건조기는 쓰지도 않고
옛 주인의 새것 그대로여요

어머님 하신 대로
도랑에 흐르는 물 쓰듯 아침이 오고
뒤뜰에 수돗물로
낮엔 사막 더위를 멱감고 식히지요

애리조나 사막 나의 뒤뜰은
어머니의 넓은 저승
큰 하늘이 떠서 나는
언제나 어머님을 이승 사막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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