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교수 평론 #2 / [여인등신불], 김승희

2012.04.29 00:22

강학희 조회 수:575 추천:12

성과 사랑 혹은 결혼과 출산

김승희, 「여인등신불-세브란스병원분만실에서」


김 홍 진


    여성주의 시는 80년대를 거쳐 90년대 들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여성시의 발전이 지난 연대의 민중시와 비견할 수 있는 세력의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음은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한 것이다. 여성주의 시는 역사와 사회에 대한 거대 담론을 앞세운 큰 목소리들이 퇴조한 90년대 이후 우리 문단의 자리에서 의미 있는 문학적 사건으로 떠오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주의 시는 여성 운동의 태동과 성장에 힘입은 바 크다. 여성 운동에 관한 이론은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는데, 여성 시인이나 작가들이 다루고 있는 여성 문제는 생물학적 성차에서 오는 성차별 의식에서 파생하는 여러 문제에 천착한다. 다시 말하면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물학적 성차와 억압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들만의 글쓰기 형식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의 신화에 따르면 선악과를 따 먹은 이브는 여호아로부터 두 가지 저주스러운 운명의 신탁을 받는다. 그녀는 아담을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죄로 평생 남편을 여호아처럼 받들고 섬겨야 하는 벌과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운명을 신탁 받는다. 이 안에 새로운 역사가 실려 있다. 이 섬김에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성립하며, 출산의 고통에는 성과 관련하여 여성성을 규정하는 여러 조건들을 파생시켰다. 남성은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와 같이 무소부재하는 존재로서 여성을 지배하게 된다. 분별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적 평등의 관계는 깨지고 마침내 남성 지배와 여성 억압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여성이 처한 상황의 핵심적 구조들인 생산ㆍ출산ㆍ성관계, 그리고 자녀 양육이라는 역할들이 결합함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확정짓게 된다. 김승희의 「여인 등신불-세브란스 병원 분만실에서」는 남성 지배와 여성 억압의 문화 속에서 여성의 출산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한 남자를 사랑했다고 하여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남자와 잠깐 쾌락을 같이 했다 하여

이런 원통한 아픔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인들이여, 울고 찢기고 흐느끼며 발광하는

여인들이여,

이 성스러운 하얀 굴 속에서

한 남자란 이제 지극히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짐승처럼 지금 우리가

온몸을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것은

스님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다비의 불바다 속으로 들어감과 같습니다

하얀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하여

불가마 속에 천하무비의 큰 불을

지피는 것과 같습니다

도살장에서 젊은 도수가 하염없이

나의 정수리에 도끼를 내리치는

것 같습니다

도끼날이 나의 숨골에 박힐 때마다

흰 불의 꽃송이가 하염없이 튀어올라

흩어지고 있습니다


만다라의 꽃잎입니다

자비의 세례입니다


그대 - 죄가 있었으면

죄를 태우십시오

그대 - 입이 남았으면

입을 태우십시오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찌

범패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범패보다 더 진한 막다른 소리들이

관처럼 하얀 방을 자욱히 매웁니다

오뇌와 비원의 처철한 촉수들이

찢어지는 살점을 쥐고 흔듭니다

쾌락처럼 그렇게 실신하면서

나는 천지 아득히 터지는 범종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 - 갓난동이의 첫 울음소리가

문득 하나의 太虛를 울리고

신탁처럼 장렬한 핏덩이 하나가

이제 삶 속에 우뚝 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하얀 잠이 가득히 와서

내 육체의 모든 문을 꼭꼭 여며주고 있습니다



    이 시는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인들의 고통을 찬양하는 시이다. “세브란스 병원 분만실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이 시는 매우 상징적인 암시를 준다. 화자는 분만실에서 산고를 겪는 여인을 등신불로 등가한다. 그리하여 등신불이 갖는 상징적 의미인 살신성인을 실천하는 구도와 구원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이러한 숭고미는 여성만이 갖는 특권인 생산의 신성성에 엄숙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전체 5연으로 구성된 이 시에서 화자는 “온몸을 물어뜯으며 울부짖는” 산고의 고통을 겪고 마침내 한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을 그린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생물학적으로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출산이라는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을 화자는 점층적 방식으로 전개한다. 즉 산고의 아픔을 점점 크고 깊게, 그리고 강하게 고조시켜 나가다 마침내 관 속의 죽음과도 같은 실신 끝에 한 생명이 탄생하는 “신탁처럼 장렬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효과적으로 노래한다. 이 때 “원통한 아픔”과 “짐승처럼” “온몸을 물어뜯는 울부짖는” 산고에서 “한 남자란 이제 지극히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으며, 여기에는 어떤 숭고하며 신성한 의미가 있음을 노래한다. 그 산고의 고통은 단지 “한 남자와 잠깐 쾌락을 같이 했다 하여” 겪는 “원통한 아픔”이 아니다. 여성이 경험하는 출산의 고통은 다름 아닌 “스님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다비의 불바다 속으로 들어감과 같”은 경험이며, “하얀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한 “불가마 속에 천하무비의 큰불을” “지피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화자는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이러한 산고의 고통 뒤에 있는 생명 탄생을 범례적인 통과제의적 원형 모델을 바탕으로 형상화한다.

    보통 아이를 낳는 것은 꽤 큰 고통, 즉 산고를 동반한다. 그런데 화자는 1연에서 우선 “하얀굴”이라는 원형적 이미지를 통해 생명 창조의 신성성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즉 “울고 찢기고 흐느끼며 발광하는” 분만실을 화자는 “성스런 하얀굴”로 비유하면서 생명 탄생의 통과제의적 장소로 상승시킨다. “하얀굴”은 화자의 진술 그대로 성스러운 공간이며 탄생을 준비하는 일종의 모태로서의 공간이다. 그곳은 단군 신화에서와 같은 동굴의 이미지로 입사식이 행해지는 장소이다. 입사식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다. 그것은 정신적 차원에서의 신비적 재생으로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이르는 길, 즉 새로운 성숙을 가져온다. 화자는 분만실의 출산이 주는 고통을 입사식으로 본다. 신성한 공간에서 통과제의적 고통을 겪는 여인을 화자는 계속해서 “스님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다비의 불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하여/불가마 속에 천하무비의 큰불을/지피”는 신성한 제의로 비유한다. 여기에는 새로운 탄생의 신성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

    2연에서는 분만실을 ‘도살장’으로 비유하면서 출산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을 점차 극대화한다. 산고는 ‘정수리’ ‘숨골’에 도끼날이 박히는 고통이며, 그때마다 튀어오르는 “흰불의 꽃송이”는 4연에 이르면 “만다라의 꽃잎”, “자비의 세례”로 종교적 법열의 세계로 승화한다. 고통의 극대화는 생명 창조 이전의 무형형과 혼돈 ― 새로운 생명 창조에 필수 불가결하게 나타나는 입문병의 범례적 상징을 통해 종교적 법열의 세계, 법열의 세계로 승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제의적 상징은 마지막 연의 ‘관’의 상징적 의미에서도 드러난다.

    마지막 연에 이르면 산고의 아픔은 극점에 달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생명이 탄생하는 “신탁처럼 장렬한” 장면을 노래한다. 보통 입문식은 새로운 탄생을 전제한다. 새로운 생명 탄생의 입문식은 의사 죽음의 형태 혹은 원초적 공허의 세계로 돌아가는 범례적 모델을 갖는다. 이러한 범례를 따라 마침내 ‘관’ 속에 “실신하면서 太虛를 울리는 범종소리를”, 아가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다. 화자는 원조적 공허, 원초적 시공에 마침내 울리는 “범종소리”로 비유된 아가의 “첫울음소리”, 생명 탄생의 장엄한 순간을 맞이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성인 생산‧출산‧성관계, 자녀 양육이라는 역할이 복합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진다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화자는 여성만이 지닌 이런 생물학적 특성을 여자의 극진한 아름다움으로 비유한다. 즉 진정한 여자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여성만이 지닌 생산성에 있다는 것이다. 여자가 한 생명을 잉태하고, 그 생명을 세상에 내어놓을 때, 여자만의 찬연한 미덕이 극에 달한다. 그래서 이 시는 전체적으로 ‘분만실에서’ 산고의 고통을 끝내 참아내고 아이를 출산하는 여인을 살신성인의 경지를 실천하는 ‘등신불’로 찬양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인 임신과 출산의 고통은 여성만이 떠맡아야 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여성은 역사 이래 남성 지배, 여성 예속의 사회적 억압이 뒤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화자는 성차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자유주의 혹은 급진적 여성 해방론자들과는 달리 차이를 긍정적 시선으로 인식한다. 화자는 남/녀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남성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그보다는 남성과 다른 여성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여성이 여성이고자 하는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의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이상화한다. 이런 점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피해 의식만을 노출하는 시들과는 일정한 변별적 특성을 지닌다.

(Berkeley 문학 5월 1일 2012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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