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평론 #6 / 빛이 산란한 씨알의 시학
2012.06.23 23:11
버클리 문우들께!
지난 4월 초에 시작한 버클리 문학강좌 2012년 전반기 강의가 이번 6월 말로 끝납니다. 다음 모임은 아래와 같습니다.
6월 26일 (화) 오후 6시 수라한식당
김홍진 교수의 "손종호 시인의 시"
남상신님의 습작시에 대한 소감
7월 8일 (일) 오후 6시 - 이종혁님의 출판기념회
그리고 이번 8월 4일 - 13일까지 김완하교수님과 일행 들이 북가주를 방문 하게 됩니다. 체류하실 동안 다음 일정이 잡혀있습니다.
8월 6일 (월) 오후 6시, 수라 - 김완하교수및 동행 문인들의 특강
8월 11일 (토) 오전 10시 - 유진 오닐 하우스 문학기행 (댄빌)
8월 11일 (토) 오후 6시 - 유봉희 시인 시출판기념 모임 (하종순님 댁 - 월낫크릭)
6월 26일 (화) 모임때 자세히 의논하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호세 등지에서 그동안 나오시지 못하셨던 문우님들, 8/6일 특강과 8/11일 모임에는 꼭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6월의 마지막 주일!
김희봉드림
빛이 산란한 씨알의 시학
- 손종호의 시 -
김홍진
재작년 겨울 손종호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새들의 현관』(시와에세이, 2006)에 대한 서평의 자리에서 시인의 시정신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유한성을 극복하고 절대를 지향하는 강인하고 투명하며 견고하고 순열한 구도의 정신 세계라고 썼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시인의 시는 정신주의적 경향을 지니며, 강인한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룬다고 파악했다. 신작시 다섯 편은 그러한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손종호 시인의 시는 역시 투명하며, 어둠 속에서 강열한 빛을 발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손종호 시의 강렬한 빛을 발하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들의 현관』은 이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이 시집은 근자의 손종호 시인의 시적 출사표나 다름없는 가편들로 엮여 있으며, 따라서 시인의 신작시를 읽는 데도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기능을 한다. 먼저 다음과 같은 작품을 언급하면서 글의 실마리를 푼다.
공중에는 길이 없다.
사면은 차라리 견고한 벽
물먹은 별들이 천장 위에 빛난다.
창은 어디에 있는가.
누 천년의 빛 아래 아래에도
드러나지 않는 고통의
견고한 뿌리.
이슬 빛나는 새벽길은
어디선가
제 홀로 맑고
제 홀로 깊어가고 있을 것을.
「새들의 현관ㆍ1」 전문
위의 작품은 시집의 표제 시인데, 손종호 시의 시적 소명이 “제 홀로 맑고/제 홀로 깊어가고 있”는 “이슬 빛나는 새벽길”의 ‘빛’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출발하며, 강렬한 ‘빛’의 이미지에 의해 시적 동력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자는 “물먹은 별들이 천장 위에 빛”나는 어떤 ‘빛’의 세계를 강렬하게 갈구하고 희원한다. 그러나 그 천상의 ‘빛’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고, “사면은 차라리 견고한 벽”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다. 이와 같이 “견고한 벽” 안에 고립된 상황은 화자에게 “창은 어디에 있는가” 탄식하며 고통스러운 자문을 하게 만들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견고한 뿌리”의 존재론적 고통을 견디어 “이슬 빛나는 새벽길”로 상징되는 궁극의 길에 진입하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사면의 “견고한 벽”에 갇힌 화자로 하여금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창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고통의/견고한 뿌리”가 운명적으로 너무 깊기 때문이다. 화자는 고립되어 있고 존재의 고통은 운명처럼 뿌리가 깊다. 이러한 존재론적 고통이 크면 클수록,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빛에 대한 희원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견고한 벽”에 갇히고 “견고한 뿌리”로 깊숙이 박힌 고통에서 화자는 빛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한계와 구속을 일거에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을 은밀히 표출한다.
‘빛’은 손종호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모티프이다. 그러나 그가 강렬하게 찾아 헤매는, 그가 강렬하게 희원하고 갈구하며 궁극적으로 이르려는 ‘빛’은 실재하는 빛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빛, 영성적인 빛, 생명의 빛,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피안의 빛이다. 운명의 향방을 결정짓는 지침 같은 ‘빛’은 부재 속에 현존하는 빛, 약간의 어색함을 감수한다면 어떤 초월적인 궁극의 빛, 구원의 빛, 영적 가치를 지닌 광휘의 빛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세속적 때를 벗어버린 “만년설의 웅혼한 힘”(「불의 산정에서」)이 발산하는 흰빛, “허공에서 씨를 얻는” ‘열매’(「공중에서부터 집짓기ㆍ2」)로서의 태양 빛이며, “캄캄한 천공에서” “빛나는/별”(「도강」)의 푸른빛이다.
그런데 그 빛은 곧잘 빛(불)과 대립되는 물(구름, 얼음, 눈)과 어둠(갇힘, 유폐, 묶임, 미망)의 이미지를 함께 동반한다. 그것이 “물먹은 별” 빛이나 “이슬 빛나는 새벽길”에서처럼 물의 모성성과 빛의 부성성이 결합할 때 그것은 “태초의/그 무궁한 온유”인 “어머니의 바다”(「공중에서부터 집짓기ㆍ1」)처럼 생명과 창조의 우주적 원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는 시인이 추구해야 할 영적 가치, 내재적 초월, 웅혼한 정신의 궁극을 의미한다. 그러나 빛과 대립되는 어둠과 갇힘은 고통의 심연을 통과하면서 거쳐야 할 빛의 시련, 고행의 길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시는 다소 추상화해 말하자면 존재론적 어둠의 고통과 시련의 심연을 통과하면서 다시금 새롭게 본래의 근본 혹은 기원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취한다. 즉 “어둠은 곧 빛의 자궁”(「마지막 假宿에서ㆍ3」)이라는 태양의 밝은 흔적, 생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손종호의 시는 별과 빛, 천체, 결빙(얼음)의 산정, 물, 새벽의 이미지 등이 겨울과 어둠, 고립과 유폐, 고통과 시련, 극한의 상황 등과 대비적으로 설정되면서 후자가 갖는 부정성을 부성성으로 상징되는 빛(별빛, 햇빛)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의 상향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수직상승의 의지를 표출하기도 하며, 모성적인 가치로서의 물의 이미지를 동반하여 생명과 창조의 수평적 확산을 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초월하여 우주의 비의, 존재성의 원리에 접근한다. 그의 시는 “어둠의 심오한/심연” 속에서 그것을 뚫고 나갈 빛의 ‘문’(「門」)을 찾아가는 순례의 도정에 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왕대산에 올랐으나
비탈진 왼쪽 숲은
뒤틀린 욕망의 가지들과
고개를 치켜세운 잎새들로 어지러웠다.
흰 눈발이 짧은 회한처럼 볼을 스치는
숲길을 걷다보니/나무들의 요약된 골격 사이
왼쪽 산비알 아래쪽에
문득 큰 얼음장 몇 개가 빛나는 연못이
청동기의 거울처럼 떠올랐고
아침 햇살을 입에 문 새들이
줄줄이 하강하고 있었다.
내 안에도
갈 길에 지친 날개들이 잠시 깃드는
푸르름이 숨어 있을 줄이야
잎들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심연
나뭇가지 사이로
한층
하늘이 높아였다.
「병(病)ㆍ2」 전문
손종호 시인이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와 고통의 극복을 위한 전략은 상향적 의식과 정신적인 힘에의 의지이다. 위의 시는 감각을 단일하게 응축시켜 정신에 접맥시킴으로써 정신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아의 한계와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정신의 핵심에 이르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그는 그가 관찰하고 경험하는 사물 속에서 강인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재화한다. 그렇다면 정신의 핵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득 큰 얼음장 몇 개가 빛나는 연못이/청동기의 거울처럼 떠”오르는 고요함이며, “내 안에도/갈 길에 지친 날개들이 잠시 깃드는/푸르름이 있을 줄이야”라고 성찰하는, 그러니까 산을 오르는 각고의 점진적 과정을 거쳐 어느 순간 이루어지는 찰나적인 직관과 통찰의 내적 깨달음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구성되는 정신의 명징함이다.
화자는 지금 산에 오르고 있다. 산에 오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어떤 정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역동적 상향의식의 정신이다. 어떤 정신의 극점을 향해 나아가면도 화자를 사로잡는 것은 “뒤틀린 욕망”과 “고개를 치켜세운 잎새들”의 세속적 오만함이다. 화자는 산을 오르는 등반을 통해 이러한 세속적이며 지상적 욕망과 갈등을 정화한다. 산은 세속과 초월, 속(俗)과 성(聖), 현실과 영원, 지상과 천상의 질서가 엇갈리는 공간이다. 산은 하늘을 향해 비상함으로 천상의 빛에 접근해 있으며, 계시와 영생의 신성한 공간이다. 따라서 화자에게 산을 오르는 등반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우주적인 정화나 영성의 추구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행위는 세속적 욕망과 가치를 버리는 역동적인인 상승인 동시에 중심으로의 회귀이며,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로의 접근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다고 화자는 수직 상승의 가치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로의 다가섬은 잎을 버린 “나무들의 요약된 굴격”이나, “산비알 아래쪽”의 얼음장 연못이나, 낮은 지상으로 “줄줄이 하강”하는 새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묵묵한 침묵, 그러니까 버리고 얼어붙고 하강하는 죽음의 묵언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빛나는 정신이 발견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는다. 그가 지닌 역동적 상향의식은 일방적으로 높음이라는 정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잎새들의 추락과 아래쪽의 얼음장 연못과 새들의 하강이라는 비움에 대한, 가혹한 결빙의 시련에 대한, 지상의 낮음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는 세속적 욕망과 한계가 도사리고 있고, 따라서 등반은 이러한 지상적 욕망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정신적 날을 세우는 고통의 통과제의이다. 정신의 날을 세우는, 자신의 정신을 단련하는 작업이 “뒤틀린 욕망”과 “고개를 치켜세운” 세속적 욕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좌절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역동적 상향의식을 지닌 것이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높은 이치에 화자는 순화된다. 말하자면 “요약된 골격의 나뭇가지”, ‘얼음장 연못’, ‘새들의 하강’은 정신의 강열한 경지를 결합시켜 놓은 결정체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주체의 의식 속에 결집되고 응축되고 집중된 정신의 비유물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행위는 “고개를 치켜 세운” 지상의 세속적 욕망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한 정신적 ‘병’을 다스리고 치유하여 순열한 정신의 정점을 향한 일종의 의례처럼 보인다.
누군가 내 안에 길을 내고 있다
반쯤 묻혀 있던 큰 돌 캐어지고
덩치 큰 갈참나무가 쓰러지고
홀로 숨어 살던 늙은 쥐와
몇 마리의 바퀴벌레가 황급히 도망친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금빛 독수리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선회한다.
마침내 굳게 못질된
숲 속의 헛간마저 무너지고
풀풀거리며 먼지가 인다. 비닐에 싸여 버려진
목 없는 오욕, 피 묻은 침묵
얼굴 없는 비수에 등을 찔린 날선 분노,
대체 넌 어떻게 살아온 거니?
길을 내고 있는
장엄한 새벽놀 같은 음성이 내게 물었다.
「새벽 두 시의 비망(備忘)」 전문
예부터 현자들은 어둠의 심연 속에서 빛이 발현하는 삶의 원리에 대해 말해 왔다. 인용 시는 어둠의 심연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그러니까 실존적 미망의 암흑 속에서 “장엄한 새벽놀 같은 음성”이라는 거룩하고 엄숙한 계시를 얻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앞서 ‘빛’은 손종호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모티프라 말했다. 이때 그 빛은 햇빛이기도 하지만 주로 “새벽별의/찬연한”(「새들의 현관ㆍ2」,『새들의 현관』) 푸른빛을 띠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그의 시에서 별(빛), 새벽, 하늘의 이미지는 어둠과 밤 등의 이미지와 대칭적으로 위치하면서 그 부정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수직 상승의 상향적 지향을 드러내는 정신의 등가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빛은 원형적으로 정신적이며 영적인 신성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손종호 시에 빈번히 출몰하는 빛의 이미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손종호 시인의 상향의식은 “뒤틀린 욕망”과 “고개를 치켜세운” 지상의 세속적 가치에 의하여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하며, 고통받고 좌절당하는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시인의 도정은 그러한 실존적 갈등과 고통을 넘어서 어떤 정신의 핵심에 이르려는 것이다. 앞의 작품 「병(病)ㆍ2」에서 산을 오르는 행위도 그 일례라 하겠다. 그것은 일종의 “나를 결박한 어둠의 사슬”과 “모진 채찍”(「도강」, 『새들의 현관』)을 뛰어넘어 정신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존재 영역을 확장해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의지의 표현은 인용 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 화자의 내면에 “길을 내고 있”는 이는 새벽놀과 같은 푸른빛의 음성이다. 화자의 내면은 “큰 돌”과 “큰 갈참나무”와 “늙은 쥐”와 “바퀴벌레”가 살고 있으며, “새벽놀”은 그것을 물리치는 계시와 같은 힘이다. 그 빛은 그러한 내 안의 어둠을 뚫고 “길을 내”는 계시의 등불이다. 계시의 빛은 “목 없는 오욕, 피 묻은 침묵”과 “비수에 등을 찔린 날선 분노”의 헛간 같은 자신에 대해 “대체 넌 어떻게 살아온 거니?” 자문하게 하며, 이러한 자문과 반성적 성찰을 통해 화자는 자신의 정신적 날을 보다 날카롭게 갈아세운다.
인용 시는 화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다. 일종의 자신의 내면 응시를 통한 성찰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은 손종호 시의 한 특징이다. 그의 시에서 모든 고통과 비판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자신에 시선을 던지는 이유는 정신의 정직함과 치열함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한계나 실존적 고통은 다른 대상으로 이입되지 않음으로써 희석되지 않고 치밀한 밀도로 응축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면서 자신의 정신적 날을 날카롭게 벼른다. 정신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시인은 지상적 욕망과 어둠의 미망으로부터 탈출하여 ‘빛’의 세계, 좀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절대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날카롭게 벼려진 고양된 정신은 인간의 실존적 욕망과 고통, 지상의 세속적 가치와 삶의 크기를 왜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강인한 힘에 의해 응축되고 집중된 정신에는 세속적 가치나 삶의 자잘하고 다양한 무늬가 틈입할 여지가 없다. 설령 그것이 개입할지라도 그것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것이며,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다. 그것들이 왜소해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은 고요해진다. 아래의 시는 그러한 점을 잘 웅변해준다. 자연의 이치가 삶의 왜소한 가치를 버리라고, 세속을 초월하라고, 마음을 비우라고, 그리하여 더 큰 무엇을 보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가 인간적 삶이나 실존적 고통이나 절망은 별다른 갈등 없이 자연의 이치에 쉽게 포섭되어 무마되거나 순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삶의 구체적인 고통의 해결 과정이 은폐될 수밖에 없고, 시인을 세속적 가치가 아닌 보다 높은 경지의 우주적 원리로 이끌어버린다.
아침나절 눈 큰 여치 한 마리
더 큰 눈의 개구리에게 잡아먹힌 풀밭 위에
까치독사 한 마리 한낮을 즐기고 있다.
햇빛은 그 곁에서
힘겹게 풀잎을 타고 오르는
진드기 한 마리의 등을 토닥이며 있고.
「무심(無心)」 전문
날카롭게 벼려진 정신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만물이 저절로 광대무변한 생명의 시원을 향해 열려나가는 원리를 가늠케 한다. 우로보로스((Ouroboros)의 뱀을 연상하게 하는 위의 시는 그러한 점을 웅변해 준다. 인용 시에서 화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정신의 핵심은 침묵의 고요, 무념무상의 무심(無心)한 지경이다. 도가적 문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비운 것으로 가득 찬 허심(虛心)의 상태이다. 화자는 그 허심의 침묵이 품은 밀도 높은 고요의 파동, 어떤 영원한 시간의 운동 속에 포함된 우주적 원리를 느낀다. 즉 무심은 마치 침묵 속에 내재하는 무한한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소멸과 재생이라는 시간의 반복과 생멸을 거듭하는 파동을 감지한다. 화자는 “여치 한 마리”가 “더 큰 눈의 개구리에게 잡아먹히”고 그 개구리를 잡아먹은 “까치독사 한 마리”가 “풀밭 위에”서 “한낮을 즐기”는 현상을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무한한 시간의 원리로 받아들인다.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따라서 무심은 고요한 침묵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끊임없이 탄생과 죽음, 생과 멸, 소멸과 재생이라는 우주적 원리의 주재자는 ‘햇빛’이다. 이를 화자는 햇빛이 “풀잎을 타고 오르는/진드기 한 마리의 등을 토닥”인다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빛은 절대자의 은총과 같아서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등가물이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다. 햇빛은 풀잎을 생장시키고, 풀잎은 가장 작은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진드기’를 키우고, 그것은 여치, 개구리, 뱀으로 순환하는 연쇄적 사슬의 먹고 먹히는 관계성으로 말미암은, 그러니까 무한한 우주적 원리로 퍼져나가는 생명의 원리이다. 따라서 이러한 무심한 듯한 현상은 모든 것을 무(無)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 섭리에의 눈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소멸을 딛고 영속하는 우주의 섭리에 대한 외경이 드러난다. 이러한 외경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도 무심한 듯한 햇빛과 풀잎, 진드기와 같은 아주 작은 원인에 의해 발달된다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것이다. 마치 씨알의 원리처럼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과 같은 원인 속에 출발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생명은 길이다. 달이 몸을 바꾸는 것도, 저 바다가 절도 있는 선비의 발걸음처럼 때 맞춰 들고 나는 것도, 내 아버지가 흙으로 가신 것도 그것이 길이기 때문이다.
눈보라에 깃든 물의 정령이 흙 속의 봄을 깨우듯 내 어머니에게 깃든 소금기 많은 바람은 나를 키웠고 별빛을 품은 이슬은 잎새에 깃들어 열매의 꿈을 이룬다.
바위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백화산에서였다. 한낮의 물가에 섰던 바위가 첨벙 발을 뻗자 몇 마리의 지느러미가 흰 거품과 함께 검은 허벅지를 타고 올랐다.
나는 그 날 이후 바위가 알을 낳는 것을 보았다. 무한 천공을 가로질러와 죽음보다 차가운 수면 위로 하나 둘 떠오르더니 홀연 빛을 뿌리는 저 별무리의 산란.
「숨」 전문
손종호 시인이 추구하는 정신의 힘은 상승 의지와 결속되어 있으며, 상승은 “천상의 길”(「공중에서부터 집짓기ㆍ1」, 『새들의 현관』)로 대표되는 투명한 빛을 지향한다. 인용 시에서도 우리는 역시 무한 공간의 열림으로 뻗어나가는 빛의 현현, 투명하고 찬란한 “별무리의 산란”을 만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천체의 이미지인 별이나 해, 그리고 그것들이 발산하는 빛은 그의 시에 유난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빛은 시인 내면의 감상적 자기노출로 반영이 아니다. 그 빛들은 태양과 같이 강렬한 햇빛으로 뭇 생명을 기르거나, 세속적 때를 씻어줄 수 있는 정제된 빛이고, 새벽빛처럼 어둠을 살라 존재를 탈각시켜 구원하는 영성의 빛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주적이며 종교적 차원의 성격을 갖는 빛이다. 이러한 빛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벼려진 정신만이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역동적 상향의식이 무한한 초월성을 향해 상승할 때 만나는 신비주의적인 빛이다.
인용 시에서 벼려진 정신이 포착한 것은 만물에 씨앗처럼 깃들어 있는 “생명의 길이다.” 이때 생명은 한시적인 물질적 육체성을 초극한 무한한 우주적 질서의 원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우주적 인식에는 만물은 광대무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발적인 생명활동을 쉼 없이 진행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쉼 없이 “달이 몸을 바꾸는 것도”, 바다가 “때 맞춰 들고 나는 것도”, “아버지가 흙으로 가신 것도” 모두 그것이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우주성에 기반한 거대한 생명의 순환법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은 곧 현재의 시간 속에 내재해 있는 모든 존재의 역사와 생명의 원리를 보려는 시도이다. 만물에 깃든 씨알의 원리는 곧 생명의 길, 우주성의 원리이다. 그래서 화자는 “눈보라에 깃든 물의 정령이 흙 속의 봄을 깨우”고 “어머니에게 깃든 소금기 많은 바람은 나를 키웠”으며 “별빛을 품은 이슬은 잎새에 깃들어 열매의 꿈을 이룬다.”고 말한다. 우주의 유기체론적 연기(緣起)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모든 존재태가 지닌 근원적 본성이며, 이것이 만유로 뻗어나가는 생명의 길이라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바위가 숨을 쉬”고 “알을 낳는”다는, 말하자면 현상계의 모든 존재태가 ‘숨’을 쉬고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인식은 모든 사물에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우주성이 깃들어 있으며 모든 생명은 만유에 열려 있다는 유기체론적 인식의 발로이다. 모든 현상계의 사물에는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이러한 시적 인식은 우주적 통일체로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 천공”의 우주적의 원리 앞에 선 화자는 예언자적 목소리로 만물에 깃든 생명의 숨소리, 생명의 씨앗이 내뿜는 숨결을 감지한다. 생명의 “빛을 뿌리는” “별무리의 산란”을 바라보는 화자의 의식은 내적 충일감으로 일렁인다. “무한 천공”에 “빛을 뿌리는” “별무리의 산란”은 무한한 생명에로의 열림을 지향하면서 마치 씨알의 원리처럼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과 같은 원인 속에서 출발한다는 전언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빛은 생명의 시원에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화자로 하여금 “바위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듣고 “바위가 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준다. 이때 “별무리의 산란”은 생명을 잉태한 빛이 되며, 화자는 여기에서 영속하는 생명의 근본 원리를 발견한다.
사람이 하늘임을 잊고 사는
우리의 업보는 산을 이뤄
어느 시대를 이고 갈지라도
빛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명운의 어둠은 죽음 너머까지 구비쳐
갈대들 흰 머리 푸는 낙동강 하단 지나
너른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출 것인가.
모진 겨울의 피고름 같은 봄비에
용담(龍潭)이 젖어 댓잎 푸르러 오면 알리.
높은 절망에서 낮은 희망
퇴락한 처마에서 오동나무 윗가지를 잇는
거미줄의 중심처럼
우리의 눈과 슬픔이 투명할 수 있다면
허공에라도 제 홀로 집을 짓고
사랑은 별이 되어
이미 내 안의 조선의 머리맡을 밝혔을 것을
「최제우(崔濟愚)의 편지」 중에서
모든 인간과 사물에는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시적 인식은 우주적 통일체로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인용 시는 이와 같은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짙은 어둠과 고뇌, 겨울과 죽음, 구름과 “피고름 같은 봄비”가 예비한 끝에 열리는 하늘과 희망, 사랑의 별에 대해 쓰고 있다. 즉 화자는 “사람이 하늘임을 잊고 사는”, 그러니까 인간이 소우주라는, 최제우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곧 하느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라는 이치를 잊고 사는 “우리의 업보”에 대한 고뇌 끝에서 발견하는 ‘내 안의 하늘’을 노래한다. ‘내 안의 하늘’을 발견하기 전까지의 세계는 ‘모진 겨울, 구름, 어둠, 죽음, 절망’으로 암흑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어둠과 겨울, 죽음과 절망의 소산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하늘임을 잊고 사는” “우리의 업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어둠과 겨울, 죽음과 절망, 혼돈과 미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적 고투의 과정에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심연 끝에서, 말하자면 “절망에서 낮은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며, 투명한 눈과 슬픔을 간직한 사랑의 “별이 되”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이 때 별은 손종호 시인의 시에서 끊임없이 변주 반복되는 천상적 가치로서의 별의 이미지이며, 만유의 우주 속에 깃든 신성의 빛이다. 그 별은 따라서 지상의 존재가 갈망하는 천상의 세계이며,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고, 인간에게 깃든 어둠과 상처를 거두고 치유하게 하는 희망의 별이다. 그리고 그 별이 뿜어내는 푸른 빛은 자아 상승의 지표로 기능한다.
손종호 시인의 시는 강인한 구도의 정신을 포함하는 동시에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부드럽고 여린 모성적 힘을 지니고 있다. 빛과 어둠, 천상과 지상,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적 통일의 관계로 나아가는 그의 시는 강건한 정신적 힘과 포근하게 생명을 감싸 안는 부드러움이 내재해 있다. 그의 시는 존재의 미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떤 순수하고 지고한 절대의 세계로 나아가려 자신의 정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는 과정의 산물이며, 자신을 비우고 우주의 높은 정신에 순화되거나 거기에 귀의처를 마련하기 위한 도정의 소산이다. 그의 시는 이러한 가열하고 응축된 정신의 집중으로 빛난다. 캄캄한 “무한 천공” “별무리의 산란”(「숨」)처럼.
지난 4월 초에 시작한 버클리 문학강좌 2012년 전반기 강의가 이번 6월 말로 끝납니다. 다음 모임은 아래와 같습니다.
6월 26일 (화) 오후 6시 수라한식당
김홍진 교수의 "손종호 시인의 시"
남상신님의 습작시에 대한 소감
7월 8일 (일) 오후 6시 - 이종혁님의 출판기념회
그리고 이번 8월 4일 - 13일까지 김완하교수님과 일행 들이 북가주를 방문 하게 됩니다. 체류하실 동안 다음 일정이 잡혀있습니다.
8월 6일 (월) 오후 6시, 수라 - 김완하교수및 동행 문인들의 특강
8월 11일 (토) 오전 10시 - 유진 오닐 하우스 문학기행 (댄빌)
8월 11일 (토) 오후 6시 - 유봉희 시인 시출판기념 모임 (하종순님 댁 - 월낫크릭)
6월 26일 (화) 모임때 자세히 의논하게 되겠습니다. 그리고 산호세 등지에서 그동안 나오시지 못하셨던 문우님들, 8/6일 특강과 8/11일 모임에는 꼭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행복한 6월의 마지막 주일!
김희봉드림
빛이 산란한 씨알의 시학
- 손종호의 시 -
김홍진
재작년 겨울 손종호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새들의 현관』(시와에세이, 2006)에 대한 서평의 자리에서 시인의 시정신은 유한한 존재이지만 그 유한성을 극복하고 절대를 지향하는 강인하고 투명하며 견고하고 순열한 구도의 정신 세계라고 썼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시인의 시는 정신주의적 경향을 지니며, 강인한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룬다고 파악했다. 신작시 다섯 편은 그러한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이다. 손종호 시인의 시는 역시 투명하며, 어둠 속에서 강열한 빛을 발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손종호 시의 강렬한 빛을 발하는 힘의 근원은 무엇인가. 『새들의 현관』은 이에 대한 대답을 들려준다. 이 시집은 근자의 손종호 시인의 시적 출사표나 다름없는 가편들로 엮여 있으며, 따라서 시인의 신작시를 읽는 데도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기능을 한다. 먼저 다음과 같은 작품을 언급하면서 글의 실마리를 푼다.
공중에는 길이 없다.
사면은 차라리 견고한 벽
물먹은 별들이 천장 위에 빛난다.
창은 어디에 있는가.
누 천년의 빛 아래 아래에도
드러나지 않는 고통의
견고한 뿌리.
이슬 빛나는 새벽길은
어디선가
제 홀로 맑고
제 홀로 깊어가고 있을 것을.
「새들의 현관ㆍ1」 전문
위의 작품은 시집의 표제 시인데, 손종호 시의 시적 소명이 “제 홀로 맑고/제 홀로 깊어가고 있”는 “이슬 빛나는 새벽길”의 ‘빛’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출발하며, 강렬한 ‘빛’의 이미지에 의해 시적 동력을 얻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자는 “물먹은 별들이 천장 위에 빛”나는 어떤 ‘빛’의 세계를 강렬하게 갈구하고 희원한다. 그러나 그 천상의 ‘빛’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고, “사면은 차라리 견고한 벽”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다. 이와 같이 “견고한 벽” 안에 고립된 상황은 화자에게 “창은 어디에 있는가” 탄식하며 고통스러운 자문을 하게 만들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견고한 뿌리”의 존재론적 고통을 견디어 “이슬 빛나는 새벽길”로 상징되는 궁극의 길에 진입하려는 화자의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사면의 “견고한 벽”에 갇힌 화자로 하여금 빛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창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고통의/견고한 뿌리”가 운명적으로 너무 깊기 때문이다. 화자는 고립되어 있고 존재의 고통은 운명처럼 뿌리가 깊다. 이러한 존재론적 고통이 크면 클수록,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빛에 대한 희원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견고한 벽”에 갇히고 “견고한 뿌리”로 깊숙이 박힌 고통에서 화자는 빛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론적 한계와 구속을 일거에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을 은밀히 표출한다.
‘빛’은 손종호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모티프이다. 그러나 그가 강렬하게 찾아 헤매는, 그가 강렬하게 희원하고 갈구하며 궁극적으로 이르려는 ‘빛’은 실재하는 빛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빛, 영성적인 빛, 생명의 빛,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피안의 빛이다. 운명의 향방을 결정짓는 지침 같은 ‘빛’은 부재 속에 현존하는 빛, 약간의 어색함을 감수한다면 어떤 초월적인 궁극의 빛, 구원의 빛, 영적 가치를 지닌 광휘의 빛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체의 세속적 때를 벗어버린 “만년설의 웅혼한 힘”(「불의 산정에서」)이 발산하는 흰빛, “허공에서 씨를 얻는” ‘열매’(「공중에서부터 집짓기ㆍ2」)로서의 태양 빛이며, “캄캄한 천공에서” “빛나는/별”(「도강」)의 푸른빛이다.
그런데 그 빛은 곧잘 빛(불)과 대립되는 물(구름, 얼음, 눈)과 어둠(갇힘, 유폐, 묶임, 미망)의 이미지를 함께 동반한다. 그것이 “물먹은 별” 빛이나 “이슬 빛나는 새벽길”에서처럼 물의 모성성과 빛의 부성성이 결합할 때 그것은 “태초의/그 무궁한 온유”인 “어머니의 바다”(「공중에서부터 집짓기ㆍ1」)처럼 생명과 창조의 우주적 원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는 시인이 추구해야 할 영적 가치, 내재적 초월, 웅혼한 정신의 궁극을 의미한다. 그러나 빛과 대립되는 어둠과 갇힘은 고통의 심연을 통과하면서 거쳐야 할 빛의 시련, 고행의 길을 의미한다. 때문에 그의 시는 다소 추상화해 말하자면 존재론적 어둠의 고통과 시련의 심연을 통과하면서 다시금 새롭게 본래의 근본 혹은 기원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취한다. 즉 “어둠은 곧 빛의 자궁”(「마지막 假宿에서ㆍ3」)이라는 태양의 밝은 흔적, 생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손종호의 시는 별과 빛, 천체, 결빙(얼음)의 산정, 물, 새벽의 이미지 등이 겨울과 어둠, 고립과 유폐, 고통과 시련, 극한의 상황 등과 대비적으로 설정되면서 후자가 갖는 부정성을 부성성으로 상징되는 빛(별빛, 햇빛)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의 상향의식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수직상승의 의지를 표출하기도 하며, 모성적인 가치로서의 물의 이미지를 동반하여 생명과 창조의 수평적 확산을 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초월하여 우주의 비의, 존재성의 원리에 접근한다. 그의 시는 “어둠의 심오한/심연” 속에서 그것을 뚫고 나갈 빛의 ‘문’(「門」)을 찾아가는 순례의 도정에 있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왕대산에 올랐으나
비탈진 왼쪽 숲은
뒤틀린 욕망의 가지들과
고개를 치켜세운 잎새들로 어지러웠다.
흰 눈발이 짧은 회한처럼 볼을 스치는
숲길을 걷다보니/나무들의 요약된 골격 사이
왼쪽 산비알 아래쪽에
문득 큰 얼음장 몇 개가 빛나는 연못이
청동기의 거울처럼 떠올랐고
아침 햇살을 입에 문 새들이
줄줄이 하강하고 있었다.
내 안에도
갈 길에 지친 날개들이 잠시 깃드는
푸르름이 숨어 있을 줄이야
잎들을 버리고서야 비로소
떠오르는 심연
나뭇가지 사이로
한층
하늘이 높아였다.
「병(病)ㆍ2」 전문
손종호 시인이 유한한 존재로서의 한계와 고통의 극복을 위한 전략은 상향적 의식과 정신적인 힘에의 의지이다. 위의 시는 감각을 단일하게 응축시켜 정신에 접맥시킴으로써 정신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아의 한계와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정신의 핵심에 이르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그는 그가 관찰하고 경험하는 사물 속에서 강인한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내재화한다. 그렇다면 정신의 핵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득 큰 얼음장 몇 개가 빛나는 연못이/청동기의 거울처럼 떠”오르는 고요함이며, “내 안에도/갈 길에 지친 날개들이 잠시 깃드는/푸르름이 있을 줄이야”라고 성찰하는, 그러니까 산을 오르는 각고의 점진적 과정을 거쳐 어느 순간 이루어지는 찰나적인 직관과 통찰의 내적 깨달음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구성되는 정신의 명징함이다.
화자는 지금 산에 오르고 있다. 산에 오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어떤 정점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역동적 상향의식의 정신이다. 어떤 정신의 극점을 향해 나아가면도 화자를 사로잡는 것은 “뒤틀린 욕망”과 “고개를 치켜세운 잎새들”의 세속적 오만함이다. 화자는 산을 오르는 등반을 통해 이러한 세속적이며 지상적 욕망과 갈등을 정화한다. 산은 세속과 초월, 속(俗)과 성(聖), 현실과 영원, 지상과 천상의 질서가 엇갈리는 공간이다. 산은 하늘을 향해 비상함으로 천상의 빛에 접근해 있으며, 계시와 영생의 신성한 공간이다. 따라서 화자에게 산을 오르는 등반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우주적인 정화나 영성의 추구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행위는 세속적 욕망과 가치를 버리는 역동적인인 상승인 동시에 중심으로의 회귀이며,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로의 접근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다고 화자는 수직 상승의 가치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로의 다가섬은 잎을 버린 “나무들의 요약된 굴격”이나, “산비알 아래쪽”의 얼음장 연못이나, 낮은 지상으로 “줄줄이 하강”하는 새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자연의 묵묵한 침묵, 그러니까 버리고 얼어붙고 하강하는 죽음의 묵언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빛나는 정신이 발견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는다. 그가 지닌 역동적 상향의식은 일방적으로 높음이라는 정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잎새들의 추락과 아래쪽의 얼음장 연못과 새들의 하강이라는 비움에 대한, 가혹한 결빙의 시련에 대한, 지상의 낮음에 대한 사유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는 세속적 욕망과 한계가 도사리고 있고, 따라서 등반은 이러한 지상적 욕망과 한계를 극복하고자 정신적 날을 세우는 고통의 통과제의이다. 정신의 날을 세우는, 자신의 정신을 단련하는 작업이 “뒤틀린 욕망”과 “고개를 치켜세운” 세속적 욕망에 의해서 끊임없이 고통받고 좌절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역동적 상향의식을 지닌 것이다. 이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자연의 높은 이치에 화자는 순화된다. 말하자면 “요약된 골격의 나뭇가지”, ‘얼음장 연못’, ‘새들의 하강’은 정신의 강열한 경지를 결합시켜 놓은 결정체로 볼 수 있다. 그것들은 주체의 의식 속에 결집되고 응축되고 집중된 정신의 비유물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행위는 “고개를 치켜 세운” 지상의 세속적 욕망과 그것으로부터 연유한 정신적 ‘병’을 다스리고 치유하여 순열한 정신의 정점을 향한 일종의 의례처럼 보인다.
누군가 내 안에 길을 내고 있다
반쯤 묻혀 있던 큰 돌 캐어지고
덩치 큰 갈참나무가 쓰러지고
홀로 숨어 살던 늙은 쥐와
몇 마리의 바퀴벌레가 황급히 도망친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금빛 독수리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선회한다.
마침내 굳게 못질된
숲 속의 헛간마저 무너지고
풀풀거리며 먼지가 인다. 비닐에 싸여 버려진
목 없는 오욕, 피 묻은 침묵
얼굴 없는 비수에 등을 찔린 날선 분노,
대체 넌 어떻게 살아온 거니?
길을 내고 있는
장엄한 새벽놀 같은 음성이 내게 물었다.
「새벽 두 시의 비망(備忘)」 전문
예부터 현자들은 어둠의 심연 속에서 빛이 발현하는 삶의 원리에 대해 말해 왔다. 인용 시는 어둠의 심연 속에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그러니까 실존적 미망의 암흑 속에서 “장엄한 새벽놀 같은 음성”이라는 거룩하고 엄숙한 계시를 얻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앞서 ‘빛’은 손종호의 시세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 모티프라 말했다. 이때 그 빛은 햇빛이기도 하지만 주로 “새벽별의/찬연한”(「새들의 현관ㆍ2」,『새들의 현관』) 푸른빛을 띠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그의 시에서 별(빛), 새벽, 하늘의 이미지는 어둠과 밤 등의 이미지와 대칭적으로 위치하면서 그 부정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수직 상승의 상향적 지향을 드러내는 정신의 등가물로 기능한다. 왜냐하면 빛은 원형적으로 정신적이며 영적인 신성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손종호 시에 빈번히 출몰하는 빛의 이미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손종호 시인의 상향의식은 “뒤틀린 욕망”과 “고개를 치켜세운” 지상의 세속적 가치에 의하여 끊임없이 갈등하고 번뇌하며, 고통받고 좌절당하는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시인의 도정은 그러한 실존적 갈등과 고통을 넘어서 어떤 정신의 핵심에 이르려는 것이다. 앞의 작품 「병(病)ㆍ2」에서 산을 오르는 행위도 그 일례라 하겠다. 그것은 일종의 “나를 결박한 어둠의 사슬”과 “모진 채찍”(「도강」, 『새들의 현관』)을 뛰어넘어 정신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존재 영역을 확장해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의지의 표현은 인용 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바, 화자의 내면에 “길을 내고 있”는 이는 새벽놀과 같은 푸른빛의 음성이다. 화자의 내면은 “큰 돌”과 “큰 갈참나무”와 “늙은 쥐”와 “바퀴벌레”가 살고 있으며, “새벽놀”은 그것을 물리치는 계시와 같은 힘이다. 그 빛은 그러한 내 안의 어둠을 뚫고 “길을 내”는 계시의 등불이다. 계시의 빛은 “목 없는 오욕, 피 묻은 침묵”과 “비수에 등을 찔린 날선 분노”의 헛간 같은 자신에 대해 “대체 넌 어떻게 살아온 거니?” 자문하게 하며, 이러한 자문과 반성적 성찰을 통해 화자는 자신의 정신적 날을 보다 날카롭게 갈아세운다.
인용 시는 화자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다. 일종의 자신의 내면 응시를 통한 성찰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관찰은 손종호 시의 한 특징이다. 그의 시에서 모든 고통과 비판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된다. 자기 자신에 시선을 던지는 이유는 정신의 정직함과 치열함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한계나 실존적 고통은 다른 대상으로 이입되지 않음으로써 희석되지 않고 치밀한 밀도로 응축되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러면서 자신의 정신적 날을 날카롭게 벼른다. 정신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시인은 지상적 욕망과 어둠의 미망으로부터 탈출하여 ‘빛’의 세계, 좀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절대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런데 날카롭게 벼려진 고양된 정신은 인간의 실존적 욕망과 고통, 지상의 세속적 가치와 삶의 크기를 왜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강인한 힘에 의해 응축되고 집중된 정신에는 세속적 가치나 삶의 자잘하고 다양한 무늬가 틈입할 여지가 없다. 설령 그것이 개입할지라도 그것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것이며,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이다. 그것들이 왜소해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은 고요해진다. 아래의 시는 그러한 점을 잘 웅변해준다. 자연의 이치가 삶의 왜소한 가치를 버리라고, 세속을 초월하라고, 마음을 비우라고, 그리하여 더 큰 무엇을 보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가 인간적 삶이나 실존적 고통이나 절망은 별다른 갈등 없이 자연의 이치에 쉽게 포섭되어 무마되거나 순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삶의 구체적인 고통의 해결 과정이 은폐될 수밖에 없고, 시인을 세속적 가치가 아닌 보다 높은 경지의 우주적 원리로 이끌어버린다.
아침나절 눈 큰 여치 한 마리
더 큰 눈의 개구리에게 잡아먹힌 풀밭 위에
까치독사 한 마리 한낮을 즐기고 있다.
햇빛은 그 곁에서
힘겹게 풀잎을 타고 오르는
진드기 한 마리의 등을 토닥이며 있고.
「무심(無心)」 전문
날카롭게 벼려진 정신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만물이 저절로 광대무변한 생명의 시원을 향해 열려나가는 원리를 가늠케 한다. 우로보로스((Ouroboros)의 뱀을 연상하게 하는 위의 시는 그러한 점을 웅변해 준다. 인용 시에서 화자가 도달하고자 하는 정신의 핵심은 침묵의 고요, 무념무상의 무심(無心)한 지경이다. 도가적 문맥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비운 것으로 가득 찬 허심(虛心)의 상태이다. 화자는 그 허심의 침묵이 품은 밀도 높은 고요의 파동, 어떤 영원한 시간의 운동 속에 포함된 우주적 원리를 느낀다. 즉 무심은 마치 침묵 속에 내재하는 무한한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 소멸과 재생이라는 시간의 반복과 생멸을 거듭하는 파동을 감지한다. 화자는 “여치 한 마리”가 “더 큰 눈의 개구리에게 잡아먹히”고 그 개구리를 잡아먹은 “까치독사 한 마리”가 “풀밭 위에”서 “한낮을 즐기”는 현상을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무한한 시간의 원리로 받아들인다.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따라서 무심은 고요한 침묵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끊임없이 탄생과 죽음, 생과 멸, 소멸과 재생이라는 우주적 원리의 주재자는 ‘햇빛’이다. 이를 화자는 햇빛이 “풀잎을 타고 오르는/진드기 한 마리의 등을 토닥”인다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빛은 절대자의 은총과 같아서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등가물이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다. 햇빛은 풀잎을 생장시키고, 풀잎은 가장 작은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진드기’를 키우고, 그것은 여치, 개구리, 뱀으로 순환하는 연쇄적 사슬의 먹고 먹히는 관계성으로 말미암은, 그러니까 무한한 우주적 원리로 퍼져나가는 생명의 원리이다. 따라서 이러한 무심한 듯한 현상은 모든 것을 무(無)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 섭리에의 눈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소멸을 딛고 영속하는 우주의 섭리에 대한 외경이 드러난다. 이러한 외경은 거대한 우주의 질서도 무심한 듯한 햇빛과 풀잎, 진드기와 같은 아주 작은 원인에 의해 발달된다는 깨달음을 동반하는 것이다. 마치 씨알의 원리처럼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과 같은 원인 속에 출발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생명은 길이다. 달이 몸을 바꾸는 것도, 저 바다가 절도 있는 선비의 발걸음처럼 때 맞춰 들고 나는 것도, 내 아버지가 흙으로 가신 것도 그것이 길이기 때문이다.
눈보라에 깃든 물의 정령이 흙 속의 봄을 깨우듯 내 어머니에게 깃든 소금기 많은 바람은 나를 키웠고 별빛을 품은 이슬은 잎새에 깃들어 열매의 꿈을 이룬다.
바위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백화산에서였다. 한낮의 물가에 섰던 바위가 첨벙 발을 뻗자 몇 마리의 지느러미가 흰 거품과 함께 검은 허벅지를 타고 올랐다.
나는 그 날 이후 바위가 알을 낳는 것을 보았다. 무한 천공을 가로질러와 죽음보다 차가운 수면 위로 하나 둘 떠오르더니 홀연 빛을 뿌리는 저 별무리의 산란.
「숨」 전문
손종호 시인이 추구하는 정신의 힘은 상승 의지와 결속되어 있으며, 상승은 “천상의 길”(「공중에서부터 집짓기ㆍ1」, 『새들의 현관』)로 대표되는 투명한 빛을 지향한다. 인용 시에서도 우리는 역시 무한 공간의 열림으로 뻗어나가는 빛의 현현, 투명하고 찬란한 “별무리의 산란”을 만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던 천체의 이미지인 별이나 해, 그리고 그것들이 발산하는 빛은 그의 시에 유난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빛은 시인 내면의 감상적 자기노출로 반영이 아니다. 그 빛들은 태양과 같이 강렬한 햇빛으로 뭇 생명을 기르거나, 세속적 때를 씻어줄 수 있는 정제된 빛이고, 새벽빛처럼 어둠을 살라 존재를 탈각시켜 구원하는 영성의 빛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주적이며 종교적 차원의 성격을 갖는 빛이다. 이러한 빛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벼려진 정신만이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역동적 상향의식이 무한한 초월성을 향해 상승할 때 만나는 신비주의적인 빛이다.
인용 시에서 벼려진 정신이 포착한 것은 만물에 씨앗처럼 깃들어 있는 “생명의 길이다.” 이때 생명은 한시적인 물질적 육체성을 초극한 무한한 우주적 질서의 원리로 나타난다. 이러한 우주적 인식에는 만물은 광대무변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발적인 생명활동을 쉼 없이 진행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쉼 없이 “달이 몸을 바꾸는 것도”, 바다가 “때 맞춰 들고 나는 것도”, “아버지가 흙으로 가신 것도” 모두 그것이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우주성에 기반한 거대한 생명의 순환법칙을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은 곧 현재의 시간 속에 내재해 있는 모든 존재의 역사와 생명의 원리를 보려는 시도이다. 만물에 깃든 씨알의 원리는 곧 생명의 길, 우주성의 원리이다. 그래서 화자는 “눈보라에 깃든 물의 정령이 흙 속의 봄을 깨우”고 “어머니에게 깃든 소금기 많은 바람은 나를 키웠”으며 “별빛을 품은 이슬은 잎새에 깃들어 열매의 꿈을 이룬다.”고 말한다. 우주의 유기체론적 연기(緣起)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시적 사유는 모든 존재태가 지닌 근원적 본성이며, 이것이 만유로 뻗어나가는 생명의 길이라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바위가 숨을 쉬”고 “알을 낳는”다는, 말하자면 현상계의 모든 존재태가 ‘숨’을 쉬고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는 인식은 모든 사물에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우주성이 깃들어 있으며 모든 생명은 만유에 열려 있다는 유기체론적 인식의 발로이다. 모든 현상계의 사물에는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이러한 시적 인식은 우주적 통일체로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유한한 존재로서 “무한 천공”의 우주적의 원리 앞에 선 화자는 예언자적 목소리로 만물에 깃든 생명의 숨소리, 생명의 씨앗이 내뿜는 숨결을 감지한다. 생명의 “빛을 뿌리는” “별무리의 산란”을 바라보는 화자의 의식은 내적 충일감으로 일렁인다. “무한 천공”에 “빛을 뿌리는” “별무리의 산란”은 무한한 생명에로의 열림을 지향하면서 마치 씨알의 원리처럼 현상 세계는 보이지 않는 작은 씨앗과 같은 원인 속에서 출발한다는 전언을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빛은 생명의 시원에로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화자로 하여금 “바위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듣고 “바위가 알을 낳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준다. 이때 “별무리의 산란”은 생명을 잉태한 빛이 되며, 화자는 여기에서 영속하는 생명의 근본 원리를 발견한다.
사람이 하늘임을 잊고 사는
우리의 업보는 산을 이뤄
어느 시대를 이고 갈지라도
빛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명운의 어둠은 죽음 너머까지 구비쳐
갈대들 흰 머리 푸는 낙동강 하단 지나
너른 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멈출 것인가.
모진 겨울의 피고름 같은 봄비에
용담(龍潭)이 젖어 댓잎 푸르러 오면 알리.
높은 절망에서 낮은 희망
퇴락한 처마에서 오동나무 윗가지를 잇는
거미줄의 중심처럼
우리의 눈과 슬픔이 투명할 수 있다면
허공에라도 제 홀로 집을 짓고
사랑은 별이 되어
이미 내 안의 조선의 머리맡을 밝혔을 것을
「최제우(崔濟愚)의 편지」 중에서
모든 인간과 사물에는 우주가 깃들어 있다는 시적 인식은 우주적 통일체로서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려는 태도이다. 인용 시는 이와 같은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짙은 어둠과 고뇌, 겨울과 죽음, 구름과 “피고름 같은 봄비”가 예비한 끝에 열리는 하늘과 희망, 사랑의 별에 대해 쓰고 있다. 즉 화자는 “사람이 하늘임을 잊고 사는”, 그러니까 인간이 소우주라는, 최제우 식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곧 하느님이며 만물이 모두 하느님이라는 이치를 잊고 사는 “우리의 업보”에 대한 고뇌 끝에서 발견하는 ‘내 안의 하늘’을 노래한다. ‘내 안의 하늘’을 발견하기 전까지의 세계는 ‘모진 겨울, 구름, 어둠, 죽음, 절망’으로 암흑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어둠과 겨울, 죽음과 절망의 소산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하늘임을 잊고 사는” “우리의 업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어둠과 겨울, 죽음과 절망, 혼돈과 미망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정신적 고투의 과정에 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심연 끝에서, 말하자면 “절망에서 낮은 희망”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며, 투명한 눈과 슬픔을 간직한 사랑의 “별이 되”는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이 때 별은 손종호 시인의 시에서 끊임없이 변주 반복되는 천상적 가치로서의 별의 이미지이며, 만유의 우주 속에 깃든 신성의 빛이다. 그 별은 따라서 지상의 존재가 갈망하는 천상의 세계이며,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고, 인간에게 깃든 어둠과 상처를 거두고 치유하게 하는 희망의 별이다. 그리고 그 별이 뿜어내는 푸른 빛은 자아 상승의 지표로 기능한다.
손종호 시인의 시는 강인한 구도의 정신을 포함하는 동시에 생명의 씨앗을 품고 있는 부드럽고 여린 모성적 힘을 지니고 있다. 빛과 어둠, 천상과 지상, 희망과 절망의 변증법적 통일의 관계로 나아가는 그의 시는 강건한 정신적 힘과 포근하게 생명을 감싸 안는 부드러움이 내재해 있다. 그의 시는 존재의 미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떤 순수하고 지고한 절대의 세계로 나아가려 자신의 정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는 과정의 산물이며, 자신을 비우고 우주의 높은 정신에 순화되거나 거기에 귀의처를 마련하기 위한 도정의 소산이다. 그의 시는 이러한 가열하고 응축된 정신의 집중으로 빛난다. 캄캄한 “무한 천공” “별무리의 산란”(「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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