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조드」중에서
2012.06.10 23:14
김형수,「조드」중에서
“어머니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신 거예요?”
무료해서 물었더니 어머니가,
“왜?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훌륭한 군인이었어.”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다 잇는다.
“납치할 때 들려준 말이 뭔 줄 아니? 마차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고 서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언덕 너머로 가버렸소. 울어도 외쳐도 들리지 않아요. 이제 고개를 돌려주면 안 되오? 그때 전혀 다른 운명이 내게로 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아, 이 남자를 떼어낼 수 없겠구나! 습격해놓고 그렇게 예의 바를 건 또 뭐라니?”
“마치 아버지가 칠레두를 대신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요.”
“아서라, 칠레두를 사랑했기 때문에 너를 낳아서 기른 일이 내 인생에서 하찮은 것이 될 수 있겠니? 첫 만남이 잘못됐다고 너를 가꿔온 세월까지 잘못일까? 그렇다고 나의 과거가 함부로 구겨져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구나.”
“혹시, 버르테를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으세요?”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버르테는 다른 남자와 살 거다. 그래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너의 아내야.”
“어머니, 궁금한 게 있어요. 왜 사내를 우러러보지 말라고 하셨어요? 만리장성 얘기는 또 왜 하시고?”
“얘야, 인생이 외가닥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칠레두처럼 돼. 세상에서 토라지는 게 바보지 고상한 사람이니? 두고봐라. 만리장성 이야기 때문에 버르테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지 몰라. 아내를 정조관념에 묶어서 희생시키고 싶은 거라면 내 말이 잘못이고.”
“아, 어머니!”
어머니 안에는 언제나 그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있었다.
“울 생각 마라. 자신의 생애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이해하기에 인간은 너무 작아. 인생은 아주 크단다. 우리는 자기 발밑도 온전하게 볼 수가 없어. 사랑의 생명이 끝나버린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될 걸 누가 알아? 한데 그것도 하나의 생명이란다.”
그러다 밤이 기울었다.
● 작가_ 김형수 - 195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으며, 1985년 등단 이래 시, 소설, 평론 분야를 넘나들며 정열적인 창작활동을 하고 있음. 시집 『빗방울에 대한 추억』, 소설집 『이발소에 두고 온 시』, 장편소설 『조드』(전2권), 『나의 트로트 시대』, 평론집『반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흩어진 중심-한국문학에서 주목할 장면들』, 그리고『문익환 평전』이 있음.
● 낭송_홍서준 - 배우. 뮤지컬 〈우리 동네〉, 〈위대한 캐츠비〉 등에 출연.
천정하 - 배우. 〈청춘예찬〉, 〈남도1〉 등에 출연.
천정하 - 배우. 〈청춘예찬〉, 〈남도1〉 등에 출연.
● 출전_『조드』 (자음과모음)
● 음악_ 배기수
● 애니메이션_ 강성진
● 프로듀서_ 김태형
칭기즈 칸이 사랑하는 아내 보르테를 이족에게 빼앗긴 후 어머니 후엘룬과 하룻밤 나누는 대화입니다.
어머니 후엘룬 역시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 용사에게 임신한 몸으로 약탈당해 온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입니다. 며느리가 시집왔을 때 “나는 내 처녀가 묻은 속곳이 어느 하늘 아래를 떠돌아다니는지도
모르고 늙었다”고 시어머니는 말합니다. 사랑보다 운명을 따라 살라고 가르치지요. 척박한 대지에서 이
어지는 생의 연속성. 얼핏 이 비정한 가르침에서 생명을 낳고 기르는 모계의 율법이 느껴집니다. 배 한
번 앓아보지 않고 밤새 불씨를 지켜보지 못한 사내로서 가닿기 힘든 세계이지요. 이 위대한 어머니의 말
에 따르면 사내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감정이 없어서 늙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래서 대지의
대명사 몽골 초원에는 칸의 노래뿐 아니라 두 여인의 운명도 널리 불리고 있잖겠습니까.
문학집배원 전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