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교수 평론 #3 / 우주적 교감과 존재...
2012.05.11 22:52
우주적 교감과 존재론적 통찰 / 김홍진
1. 직관과 통찰의 문법
인간과 존재, 그리고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 앞에서 문학이 보여주는 여유로운 태도는 불친절한 것이다. 특히 시는 불친절하게도 항상 여유를 갖고 그 명제를 유보해 두거나, 애써 그 실체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친절함을 베푼다 해도 기껏해야 상징적 제시나 암시에 머물며 유연하게 질문의 중심에서 비켜서고자 한다. 시는 특성상 그러한 질문에 대해 철학적 사유에서처럼 정곡을 찔러 논리적으로 명료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두리번거리거나 딴전을 피우기 일쑤이다. 여기에 문학만의 고유한 변별적 존재 이유가 있다.
문학은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에 관해서 다만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거나 생략, 또는 압축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문학은 숨기고 감추는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여백의 침묵으로 남아 있고, 그 여백을 채워야 할 몫은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감동이 가능한 것이고, 이것이 문학만이 지닌 고유한 맛이고 미덕이며 매력이다. 문학은 뚜렷한 실체나 정체 없음으로 우리를 매혹한다. 그 감추어진 대상의 정체나 의미를 훔쳐보려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이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에 대해 판단을 유보해 두거나 그것을 다만 상징적 제시로 머물고자 할 때, 더욱 그 강한 속성을 드러내는 장르는 시이다. 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서정이란 대상을 인과적인 논리적 완결성에 의해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생의 순간을 포착’하거나 혹은 직관적 통찰을 통한 존재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를 깊은 서정의 매혹과 직관적 통찰로 이끌며 새로운 서정적 윤리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손택수의 『목련전차』(창비, 2006)와 문태준의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가 있다.
2. 설화적 화법, 소통과 교감의 원리 : 손택수
손택수의 『목련전차』의 시세계에는 설화적 상상력과 화법의 구술성을 통한 우주적 소통과 교감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의 시는 경쾌하고 활달하며 분방한 어법으로 문명 이전의 근원적 야성(野性)으로서의 ‘있음’과 그것의 자연적 ‘흐름’의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 마디로 그의 시는 야성으로서의 ‘있음’과 ‘흐름’의 우주적 원리로서 상호 소통과 교감과 교응의 본성적이며 감각적 에너지에 의해 구축된다. 다음의 시에는 우주적 원리로써 상호 소통하고 교감하며 교응하고 혼융하는 문명 이전의 숲이 있다.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흰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궤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 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 든다
「어부림」 중에서
시인에겐 꿈꿀 권리, 꿈꿀 자유가 있다. 시인은 현실적 요청을 받아들여 치열하게 의식을 고양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 너머에서 꿈꾸고, 현실 너머를 동경할 수 있다. 이 시는 남해 먼 바닷가 끝자락에 위치한, 그래서 일상적 현실의 저편, 문명의 현실원칙 너머에 있는 시원으로서의 공간을 오롯이 재현한 작품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도한 곳은 바닷가 짙은 그늘로 물고기를 끌어들이는 숲, 어부림이다. 그곳은 분열과 모순이 사라진 우주적 소통과 교감이 가능한 공간으로서 삶과 자연이 혼융하는 근원적 원초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다.
이 시는 일상의 저편에 있는 그 아늑한 꿈과 생명의 원시림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하여 반복적이고 평균적인 현실원칙의 이성이 지배하는 일상의 진부하고 낡아빠진 삶에서 얻을 수 없는, 일상의 현실 저만치에서 충만한 생명과 고양된 감각, 우주적 교감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느낌은 고요함과 평화로움, 내적 충일감과 따뜻한 안정감이다. 어부림이라는 숲과 바다가 원초적으로 간직한, 그러나 지금의 현실적 일상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숲과 바다의 상호 교감과 호응에 대한 재신비화이며 동시에 자연의 재신화화이다.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 저편에 자리한 어부림이라는 숲과 바다를 통해 잃어버린 생명의 신비적 질서와 그것이 퍼뜨리는 교감의 감각적 울림에 귀 기울이게 하고, 우주적 교감의 떨림에 동요하도록 한다.
「어부림」에서 원시적 생명과 우주적 교감은 시인이 대상에 대해 감각하는 천진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바람에 파닥이는 나뭇잎과 물비늘처럼 생동하는 빛나는 언어구사, 그리고 환상적이며 신비한 이미지의 조형은 우리를 황홀경에 빠뜨려 아늑하게 만든다. 화자는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대며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이 있는 바닷가 어부림 속에서 몽상의 나래를 편다. 언어는 은빛 바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고, 시적 감수성은 그 어부림의 수천수만 나뭇잎처럼 일렁이며, 가볍고 투명하게 숲과 바다를 통과해 상호 교감하고 조응한다. 꽃가루 날리고 그 꽃향기 수평선 너머 심해로도 가서 그 향기에 취해 물고기가 뭍으로 오고 나무 그늘로 물고기를 낚는 어부림은 그야말로 물고기를 유인하는 집어등이다. 어부림은 환하게 불을 켜든 집어등이다. 어부림의 집어등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아와 대상의 원초적 만남과 만남에서 오는 주체할 수 없는 상호 소통과 교감의 떨림일 것이다. 떨림은 숲과 바다와 물고기, 그리고 내가 일체된 우주적 감각에서 오는 떨림이다.
손택수의 『목련전차』가 보여주는 이러한 우주적 소통과 교감의 세계는 시집 곳곳에서 산견되는데, 가령「청둥오리떼 파다닥 멀어지기 직전」, 「강이 날아 오른다」, 「장생포 우체국」 등등의 예를 드는 것만으로 족하다. 문명의 현실원칙이 아닌 우주적 교감과 소통의 세계는 종종 설화적 화법에 의해 이야기 식으로 전개되는 시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보여주는 설화적 화법의 세계는 이야기의 서사성을 바탕으로 구술성과 현장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목련전차』는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또한 설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민중적 서사성을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는 타당하고도 적절하다. 설화적 구술성과 현장성, 이를 바탕으로 하는 우주적 교감과 소통의 세계는 주로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기억을 통해서 재생된다.
상할머니는 비를 불러왔다 몸이 쿡쿡 쑤시는 아픔으로
들판을 쿡쿡 쑤시며 마디마디 뼈마디 저린 비를 짚고 왔다
상할머니의 몸은 천문을 품고 있었던 게지
내가 알지 못할 예감으로 떨리는 우듬지 끝
떨어져내리는 잎사귀 잎사귀마다
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던 게지
쿠르릉 밤늦게 저린 다리를 끌며 일어난 어머니 빨래를 걷는다
서러운 몸속에서 몸속으로 구름이 유전하고 있다
일기에 대한 할머니의 신비한 예감이 말해주고 있듯이 할머니는 하늘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존재이다. 할머니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기운을 읽어낼 줄 아는 고대의 천관(天官)과 같은 존재이다. “상할머니의 몸은 천문을 품고” 있어서 “쿠르응 먹구름 우는 소리가 신음 신음” 들리는 “그런 날은 영락없이 비가 내렸다”는 설화적 이야기를 통해 할머니의 여성적 내력이 어머니에게로, “몸속에서 몸속으로” 유전하는 계보를 시인은 들려준다. 이러한 계보는 “별들의 신호”를 정확하게 감지하고 씨앗을 파종하는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을 노래하는 「달과 토성의 파종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이다. 하늘의 ‘별’, 땅속의 ‘씨앗’, ‘할머니’가 서로 일체가 되어 소통하고 교감하는 우주적 행위가 그렇다.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달과 토성의 파종법」 중에서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어서 이들은 서로 일체가 되어 소통하고 교감하며 “최대의 發芽를” 이루어낸다. 이와 같이 손택수의 시적 상상력과 세계관를 지탱하는 설화적 세계와 우주적 소통의 교감은 「가새각시 이야기」, 「혼쥐 이야기」, 「오줌 뉘는 소리」, 「홍어」,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자음」 등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우주 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시적 인식은 그래서 곧잘 메주는 “자연 발효시킨 부처님”(「메주佛」)이라거나 모든 존재가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환하게 뚫려”(「화엄일박」) 있다는 불교적 인식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울러 그의 시가 보여주는 경쾌함과 활달함, 그리고 직관에 의한 사물의 내면 세계를 생동감 있게 순간 포착하는 경지는 경탄할 만하다. 가령,
아낙이 숫돌에
칼을 갈고 있다
횟집촌 골목
생선 배를 따던 칼날들이
녹을 벗고 은빛 날을 세운다
칼들은 생선처럼 이내 싱싱해졌다
生鮮이라는 말의
배를 갈라놓을 듯
죽은 말의 살점을 다 저며놓을 듯
철선이 스윽 바다를 가르며 지나간다
상처가 나기 무섭게 아무는 푸른 부위,
불꽃을 튀기며 숫돌이 돌아간다
거대한 상처 속에서 파닥파닥 깨어나는 말,
손에 쥔 날치 한 마리가 은빛 날비린내를 뿜는다
「자갈치」 전문
라고 노래할 때 그 생동하는 이미지는 날치의 은빛 비늘처럼, 잘 갈린 푸른 칼날처럼 빛난다. 이 시는 바닷가 횟집촌의 풍경, 자갈치 어시장의 생동하는 싱싱한 풍경을 집요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작품이다. “아낙이 숫돌에/칼을 갈고”, 칼날들이 “은빛 날을 세”우고, “칼들은 생선처럼 이내 싱싱해”지고, 그 칼이 “生鮮이라는 말의/배를 갈라”놓는 것처럼 “철선이 스윽 바다를 가르며 지나”가고, “거대한 상처 속에서 파닥파닥” 말이 깨어나고, 아낙이 “손에 쥔 날치 한 마리가 은빛 날비린내를 뿜는다”로 전이되는 고도의 감각적이며 회화적이고 역동적인 언어 구사와 이미지의 연쇄는 살아 숨쉬는 날것으로서의 언어의 백미를 보여 준다. 이러한 감각적이며 회화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에 의해 구축되는 시의 이미지는 각각의 동선(動線)으로 연쇄되면서 자갈치 어시장의 활어처럼 “은빛 날비린내를 뿜어”내는 듯하며, 일렁이는 파도처럼 매우 역동적이고 생기에 차 있는 ‘싱싱’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손택수 시의 경쾌함과 활달함은 녹슨 언어의 “녹을 벗고 은빛 날을 세운” 언어의 칼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은빛 날을 세운 언어로 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인의 안목과 상상력이 있다. 그 생의 순간 포착은 일상적 경험 세계에 바탕한 것이며, 이것을 전통적인 시의 문법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시가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이미지의 압축된 전개와 역동적인 시선에 의한 시적 형상화의 정공법은 시에 모범적 규범이라 할 만하다. 이것은 시의 근원과 기율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손택수의 상상력은 “제비 한 마리가” 스윽 “집을 관통”하여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放心」)는 소통과 교감의 세계를 지향한다.
3. 존재의 통찰, 비움과 성찰의 문법 : 문태준
문태준의 세번째 시집 『가재미』 역시 깊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삶과 존재의 따뜻하고 슬픈 내면을 매우 치밀하고 정제된 어법으로 밀도 있게 보여준다. 문태준의 시집은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과 두번째 시집 『맨발』이 보여주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따뜻한 원형과 모성적 세계를 포괄하면서 “보리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자루」)는 존재의 근원적 결핍에 대한 긍정과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는”(「벌레詩社」) 비움의 세계를 정제된 어법으로 따뜻하게 재현하는 연장선상에 있다.
문태준은 이 세번째 시집에서도 모든 인간과 존재, 혹은 사물과 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관계성을 차분히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존재와 사물이 어떤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성을 맺고 얽혀 있으며, 그 복합적 관계가 발현하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깊고 고요하며 따뜻한 슬픔,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는 삶과 존재의 복합성과 신비로움, 그리고 그런 것들이 환기하는 생의 덧없음과 삶의 본원적인 문제를 그야말로 차분한 어법으로 성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별처럼 살다 갔으면/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가 갔으면/내가 예전에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의 세계를 지향하며, 서정적 주체의 자기 표현 욕망을 극도로 낮추고자 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 이러한 문태준의 시는 한마디로 비움의 삶과 존재 성찰의 문법이라 할 만하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그맘때에는」 중에서
소월 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알려진 이 시는 기억 속의 풍경과 정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로 보인다. 그의 시가 기억의 원리에 의해 작동될 때 대체로 그러하듯 이 작품도 아스라하며 미묘한 파장의 잔상으로 남는 그리움과 고요하고 적막한 적멸의 아련한 슬픔이 바탕에 깔려 있다. 화자는 유년 시절에 잠자리를 잡았다 놓친 기억을 추억하면서, 혹은 가을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는 소소한 현상을 반추하면서 생의 덧없음과 소멸의 의미를 정말로 조용히 성찰하고 있다.
화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언젠가는 “그맘때가” 오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라짐과 소멸, 덧없음과 공허 등의 의미를 잔잔히 성찰한다. 문태준의 시는 이 작품에서와 같이 기억 속의 풍경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며, 주체와 풍경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아스라한 삶의 심연을 드러내기도 한다. 문태준은 기억 속의 풍경에 존재하는 한 순간을 적확하게 포착하여 우리들 삶이 간직하고 있는 복합적인 심연을 정제된 화폭에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잠자리’나 ‘나’는 는 '그맘때가' 오면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잠자리는 화자인 나의 내면적 세계를 표상하기 위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곧 서정적 화자가 제기하고 싶은, 혹은 서정적 자아가 몰두하고 있는 삶과 존재에 대한 핵심적 질문이다. 그런데 불교적 세계관을 은연중에 드러내면서도 화자는 그것을 정신의 어떤 드높은 경지, 깨달음의 어떤 숭고한 의미로 확대하지 않고 오히려 사소한 부재의 영역에 축소시켜버린다. 화자는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면서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고 되새긴다. 불교에서 수행자가 일체의 미혹과 번뇌를 떨쳐버리고 구경(究竟)의 단계에 이른 상태, 그리고 “완고한 비석”이 말하는 견고한 진리와 영원성은 화자인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무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인식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 결핍의 긍정이라 할 수 있다.
문태준이 서정의 깊이와 삶의 내면적 깊이를 천착해 들어가는 시법의 탁월함은 동세대 시인들이 성취한 경지와는 다른 세계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문태준과 같은 유형의 시들이 천착하는 삶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시들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언어의 긴장감이나 미학성이 소홀히 되는 것과 달리 매우 섬세하고 세련된 언어 감각과 시적 상상력을 통해 웅숭깊은 삶의 배면과 사물에 대한 인식의 구체성을 절묘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근원적 결핍의 긍정, 그러니까 아스라이 느껴지는 어떤 그리움, 사라짐, 비움, 쓸쓸함이라는 형식들이 관념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구체적 사물과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즉 푸른 하늘과 빈손, 잠자리와 비석 등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탐문하고 그것을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움의 철학, 혹은 존재론적이며 근원적인 결핍의 긍정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빼어난 형상으로 나타난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걸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중에서
열무는 식용을 위해 재배하는 채소이다. 그런데 화자는 게을러 “가까스로 꽃을 얻어” “공중에/흰 열무꽃이 파다”한 지경이 되었다. 화자는 얻고자 했던 열무를 얻지 못하고 다만 꽃을 얻어 나비에게 내어주고 만 것이다. 열무라는 채소가 지닌 실용적 가치를 얻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묻는다. 이러한 시적 상황에서 화자는 ‘극빈’이라는 윤리적인 미적 가치를 발견한다. 그것은 ‘나비 떼’에게 발 딛고 앉을 작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효용적 가치와는 다른 자기 성찰적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다른 발견, 즉 실용성과는 다른 윤리적인 미적 가치의 발견이다.
화자가 발견한 현실의 일상적이며 효용적 가치와는 다른 자기 성찰과 미적 가치는 이런 것이다. 인간의 현실적 척도로는 나비 떼가 열무 꽃의 작은 자리에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내려 앉는 것이지만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이며,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인간의 관점 혹은 인간의 물리적이며 효용적인 시간적 척도와는 다른 시간이다. 여기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꽃밭처럼 다른 존재, 즉 타자가 머무를 수 있는 무릎을 내준 적이 없다는 성찰적 깨달음을 얻고 있다.
「극빈」이 보여주는 비움과 존재론적 성찰의 세계에서 우리는 시인이 추구하는 미적 자의식의 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현실적 가난의 의미를 넘어서 있다. 단순히 채소를 얻지 못하고 그것을 나비에게 내어주었다는, 그리고 나비에게 채소밭을 내어주었다는 것에게 화자인 ‘나’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가난을 말하고 있다. 극빈은 시집의 해설에서 빼어나게 분석(이광호)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적 가난 너머의 가난마저도 비우는 경지를 뜻한다. 그 세계는 서정 주체의 자기 표현 욕망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이며,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思慕-물의 안쪽」)로 수직의 ‘병풍’이 아닌 ‘수평’(「水平」)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화자는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수련」)이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 결핍 혹은 부재의 긍정은 가령,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평상이 있는 국숫집」)든가, 혹은 “누렇게 늙어 누운 오이 같은 그녀가 뜨락에 앉아 웃는다/날지 못하는 거러기가 웃는다”(「기러기가 웃는다」)든가, 또는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가재미」)는 존재론적 슬픔과 관조, 침잠과 고요의 시선은 문태준 시학의 한 권역이다. 이러한 관조와 침잠, 고요와 적멸의 시선은 다음과 같은 「바닥」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시선이 문태준 시의 지배적인 권역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바닥」 중에서
화자는 “홀로 의자에 앉아” “그대를 사랑했”던 옛일을 생각하며 가랑잎이 떨어지는 것을 침잠과 관조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떨어지는 가랑잎에서 화자는 소리를 듣는데, 그 가랑잎이 지는 소리의 순간을 포착하여 거기에 내재하는 고요와 적멸, 비움과 공허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그 소리는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로서 이 때 화자는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는 것을 관조적으로 발견한다. “떨어지는 가랑잎”과 “아직 매달린 가랑잎”, ‘그대’와 ‘나’, ‘몸’과 ‘몸’, ‘숨결’과 ‘숨결’, ‘비’와 ‘바닥’이 스치고 받아줄 때 생겨나는 소리들이야말로 앞서 말한 세계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실존, 혹은 사물들과 상호 의존적이며 관계성을 맺고 살아감을 증언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관계성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연관성이 발현하는 눈부신 순간과 슬픔의 힘을 이 시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물과 사물, 사물과 현상, 인간과 세계의 관계성에서 서로 삼투하면서 파생하는 미묘한 파장은 긴 여운을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긴 울림의 잔상으로 남게 되는 것들이다. 여운의 잔상은 인간과 존재, 혹은 사물과 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복합적 관계에서 발현하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슬픔, 그리고 신비로움, 그리고 그런 것들이 환기하는 생의 덧없음과 삶의 아련한 결핍들이다. 문태준 시인이 보여주는 이런 근원적 권역에 대한 천착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진화해나갈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Berkeley 문학 5월 14일 2012년 자료)
1. 직관과 통찰의 문법
인간과 존재, 그리고 삶에 대한 근원적 물음 앞에서 문학이 보여주는 여유로운 태도는 불친절한 것이다. 특히 시는 불친절하게도 항상 여유를 갖고 그 명제를 유보해 두거나, 애써 그 실체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친절함을 베푼다 해도 기껏해야 상징적 제시나 암시에 머물며 유연하게 질문의 중심에서 비켜서고자 한다. 시는 특성상 그러한 질문에 대해 철학적 사유에서처럼 정곡을 찔러 논리적으로 명료한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두리번거리거나 딴전을 피우기 일쑤이다. 여기에 문학만의 고유한 변별적 존재 이유가 있다.
문학은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에 관해서 다만 우회적으로 돌려서 말하거나 생략, 또는 압축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문학은 숨기고 감추는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그래서 많은 부분이 여백의 침묵으로 남아 있고, 그 여백을 채워야 할 몫은 순전히 독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때문에 다양한 해석과 감동이 가능한 것이고, 이것이 문학만이 지닌 고유한 맛이고 미덕이며 매력이다. 문학은 뚜렷한 실체나 정체 없음으로 우리를 매혹한다. 그 감추어진 대상의 정체나 의미를 훔쳐보려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이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물음에 대해 판단을 유보해 두거나 그것을 다만 상징적 제시로 머물고자 할 때, 더욱 그 강한 속성을 드러내는 장르는 시이다. 왜냐하면 시에 있어서 서정이란 대상을 인과적인 논리적 완결성에 의해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인식 주체가 주관적으로 체험하고 느끼는 ‘생의 순간을 포착’하거나 혹은 직관적 통찰을 통한 존재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를 깊은 서정의 매혹과 직관적 통찰로 이끌며 새로운 서정적 윤리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 손택수의 『목련전차』(창비, 2006)와 문태준의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가 있다.
2. 설화적 화법, 소통과 교감의 원리 : 손택수
손택수의 『목련전차』의 시세계에는 설화적 상상력과 화법의 구술성을 통한 우주적 소통과 교감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의 시는 경쾌하고 활달하며 분방한 어법으로 문명 이전의 근원적 야성(野性)으로서의 ‘있음’과 그것의 자연적 ‘흐름’의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 마디로 그의 시는 야성으로서의 ‘있음’과 ‘흐름’의 우주적 원리로서 상호 소통과 교감과 교응의 본성적이며 감각적 에너지에 의해 구축된다. 다음의 시에는 우주적 원리로써 상호 소통하고 교감하며 교응하고 혼융하는 문명 이전의 숲이 있다.
남해는 나무그늘로 물고기를 낚는다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짙은 그늘 물 위에 드리우고
그물을 끌어당기듯, 바다로 흰 우듬지에 잔뜩 힘을 주면
푸조나무 이팝나무 꽃이 때맞춰 떨어져내린다
꽃냄새에 취한 물고기들 영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말채나무 박쥐나무 꽃도 덩달아 떨어져내린다
木그늘로 너희들 목에 내린 그늘이라도 풀어라
남해 삼동 촘촘한 그늘 가득 퍼득대는 물고기를
잎잎이 어깨에 메고 우뚝 선 어부림
꽃향기는 수평선 너머로도 가고 심해로도 가서
낚싯바늘처럼 단숨에 아가미를 궤뚫는다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 철썩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
날이 저물면 남해는 나무들도 집어등을 켜 든다
「어부림」 중에서
시인에겐 꿈꿀 권리, 꿈꿀 자유가 있다. 시인은 현실적 요청을 받아들여 치열하게 의식을 고양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 너머에서 꿈꾸고, 현실 너머를 동경할 수 있다. 이 시는 남해 먼 바닷가 끝자락에 위치한, 그래서 일상적 현실의 저편, 문명의 현실원칙 너머에 있는 시원으로서의 공간을 오롯이 재현한 작품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당도한 곳은 바닷가 짙은 그늘로 물고기를 끌어들이는 숲, 어부림이다. 그곳은 분열과 모순이 사라진 우주적 소통과 교감이 가능한 공간으로서 삶과 자연이 혼융하는 근원적 원초성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다.
이 시는 일상의 저편에 있는 그 아늑한 꿈과 생명의 원시림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하여 반복적이고 평균적인 현실원칙의 이성이 지배하는 일상의 진부하고 낡아빠진 삶에서 얻을 수 없는, 일상의 현실 저만치에서 충만한 생명과 고양된 감각, 우주적 교감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 느낌은 고요함과 평화로움, 내적 충일감과 따뜻한 안정감이다. 어부림이라는 숲과 바다가 원초적으로 간직한, 그러나 지금의 현실적 일상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숲과 바다의 상호 교감과 호응에 대한 재신비화이며 동시에 자연의 재신화화이다.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현실 저편에 자리한 어부림이라는 숲과 바다를 통해 잃어버린 생명의 신비적 질서와 그것이 퍼뜨리는 교감의 감각적 울림에 귀 기울이게 하고, 우주적 교감의 떨림에 동요하도록 한다.
「어부림」에서 원시적 생명과 우주적 교감은 시인이 대상에 대해 감각하는 천진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바람에 파닥이는 나뭇잎과 물비늘처럼 생동하는 빛나는 언어구사, 그리고 환상적이며 신비한 이미지의 조형은 우리를 황홀경에 빠뜨려 아늑하게 만든다. 화자는 “꽃가루 날리고 꽃봉오리 터지고 청미래 댕댕이 철썩”대며 “파도소리를 흉내내며 뒤척이는 숲”이 있는 바닷가 어부림 속에서 몽상의 나래를 편다. 언어는 은빛 바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고, 시적 감수성은 그 어부림의 수천수만 나뭇잎처럼 일렁이며, 가볍고 투명하게 숲과 바다를 통과해 상호 교감하고 조응한다. 꽃가루 날리고 그 꽃향기 수평선 너머 심해로도 가서 그 향기에 취해 물고기가 뭍으로 오고 나무 그늘로 물고기를 낚는 어부림은 그야말로 물고기를 유인하는 집어등이다. 어부림은 환하게 불을 켜든 집어등이다. 어부림의 집어등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자아와 대상의 원초적 만남과 만남에서 오는 주체할 수 없는 상호 소통과 교감의 떨림일 것이다. 떨림은 숲과 바다와 물고기, 그리고 내가 일체된 우주적 감각에서 오는 떨림이다.
손택수의 『목련전차』가 보여주는 이러한 우주적 소통과 교감의 세계는 시집 곳곳에서 산견되는데, 가령「청둥오리떼 파다닥 멀어지기 직전」, 「강이 날아 오른다」, 「장생포 우체국」 등등의 예를 드는 것만으로 족하다. 문명의 현실원칙이 아닌 우주적 교감과 소통의 세계는 종종 설화적 화법에 의해 이야기 식으로 전개되는 시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보여주는 설화적 화법의 세계는 이야기의 서사성을 바탕으로 구술성과 현장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목련전차』는 첫 시집 『호랑이 발자국』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또한 설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민중적 서사성을 노래하고 있다는 평가는 타당하고도 적절하다. 설화적 구술성과 현장성, 이를 바탕으로 하는 우주적 교감과 소통의 세계는 주로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기억을 통해서 재생된다.
상할머니는 비를 불러왔다 몸이 쿡쿡 쑤시는 아픔으로
들판을 쿡쿡 쑤시며 마디마디 뼈마디 저린 비를 짚고 왔다
상할머니의 몸은 천문을 품고 있었던 게지
내가 알지 못할 예감으로 떨리는 우듬지 끝
떨어져내리는 잎사귀 잎사귀마다
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져 있었던 게지
쿠르릉 밤늦게 저린 다리를 끌며 일어난 어머니 빨래를 걷는다
서러운 몸속에서 몸속으로 구름이 유전하고 있다
일기에 대한 할머니의 신비한 예감이 말해주고 있듯이 할머니는 하늘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존재이다. 할머니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기운을 읽어낼 줄 아는 고대의 천관(天官)과 같은 존재이다. “상할머니의 몸은 천문을 품고” 있어서 “쿠르응 먹구름 우는 소리가 신음 신음” 들리는 “그런 날은 영락없이 비가 내렸다”는 설화적 이야기를 통해 할머니의 여성적 내력이 어머니에게로, “몸속에서 몸속으로” 유전하는 계보를 시인은 들려준다. 이러한 계보는 “별들의 신호”를 정확하게 감지하고 씨앗을 파종하는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을 노래하는 「달과 토성의 파종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바이다. 하늘의 ‘별’, 땅속의 ‘씨앗’, ‘할머니’가 서로 일체가 되어 소통하고 교감하는 우주적 행위가 그렇다.
설씨 문중 대대로 내려온 농법대로
할머니는 별들의 신호를 알아듣고 씨를 뿌렸다
별과 별 사이의 신호를
씨앗들도 알아듣고
최대의 發芽를 이루었다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할머니 주름을 닮은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었던가
매달 스무여드레 별들이 지상에 금빛 씨앗을 뿌리던 날
할머니는 온몸에 별빛을 받으며 돌아왔다
「달과 토성의 파종법」 중에서
“할머니의 몸속에, 씨앗 속에” “밭고랑 속에” “별과의 교신을 하는 무슨 우주국이 들어” 있어서 이들은 서로 일체가 되어 소통하고 교감하며 “최대의 發芽를” 이루어낸다. 이와 같이 손택수의 시적 상상력과 세계관를 지탱하는 설화적 세계와 우주적 소통의 교감은 「가새각시 이야기」, 「혼쥐 이야기」, 「오줌 뉘는 소리」, 「홍어」,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자음」 등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우주 만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시적 인식은 그래서 곧잘 메주는 “자연 발효시킨 부처님”(「메주佛」)이라거나 모든 존재가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환하게 뚫려”(「화엄일박」) 있다는 불교적 인식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울러 그의 시가 보여주는 경쾌함과 활달함, 그리고 직관에 의한 사물의 내면 세계를 생동감 있게 순간 포착하는 경지는 경탄할 만하다. 가령,
아낙이 숫돌에
칼을 갈고 있다
횟집촌 골목
생선 배를 따던 칼날들이
녹을 벗고 은빛 날을 세운다
칼들은 생선처럼 이내 싱싱해졌다
生鮮이라는 말의
배를 갈라놓을 듯
죽은 말의 살점을 다 저며놓을 듯
철선이 스윽 바다를 가르며 지나간다
상처가 나기 무섭게 아무는 푸른 부위,
불꽃을 튀기며 숫돌이 돌아간다
거대한 상처 속에서 파닥파닥 깨어나는 말,
손에 쥔 날치 한 마리가 은빛 날비린내를 뿜는다
「자갈치」 전문
라고 노래할 때 그 생동하는 이미지는 날치의 은빛 비늘처럼, 잘 갈린 푸른 칼날처럼 빛난다. 이 시는 바닷가 횟집촌의 풍경, 자갈치 어시장의 생동하는 싱싱한 풍경을 집요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작품이다. “아낙이 숫돌에/칼을 갈고”, 칼날들이 “은빛 날을 세”우고, “칼들은 생선처럼 이내 싱싱해”지고, 그 칼이 “生鮮이라는 말의/배를 갈라”놓는 것처럼 “철선이 스윽 바다를 가르며 지나”가고, “거대한 상처 속에서 파닥파닥” 말이 깨어나고, 아낙이 “손에 쥔 날치 한 마리가 은빛 날비린내를 뿜는다”로 전이되는 고도의 감각적이며 회화적이고 역동적인 언어 구사와 이미지의 연쇄는 살아 숨쉬는 날것으로서의 언어의 백미를 보여 준다. 이러한 감각적이며 회화적이고 역동적인 이미지에 의해 구축되는 시의 이미지는 각각의 동선(動線)으로 연쇄되면서 자갈치 어시장의 활어처럼 “은빛 날비린내를 뿜어”내는 듯하며, 일렁이는 파도처럼 매우 역동적이고 생기에 차 있는 ‘싱싱’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손택수 시의 경쾌함과 활달함은 녹슨 언어의 “녹을 벗고 은빛 날을 세운” 언어의 칼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은빛 날을 세운 언어로 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인의 안목과 상상력이 있다. 그 생의 순간 포착은 일상적 경험 세계에 바탕한 것이며, 이것을 전통적인 시의 문법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시가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이미지의 압축된 전개와 역동적인 시선에 의한 시적 형상화의 정공법은 시에 모범적 규범이라 할 만하다. 이것은 시의 근원과 기율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손택수의 상상력은 “제비 한 마리가” 스윽 “집을 관통”하여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放心」)는 소통과 교감의 세계를 지향한다.
3. 존재의 통찰, 비움과 성찰의 문법 : 문태준
문태준의 세번째 시집 『가재미』 역시 깊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삶과 존재의 따뜻하고 슬픈 내면을 매우 치밀하고 정제된 어법으로 밀도 있게 보여준다. 문태준의 시집은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과 두번째 시집 『맨발』이 보여주었던 삶과 존재에 대한 따뜻한 원형과 모성적 세계를 포괄하면서 “보리질금 같은 세월의 자루를 메고 이 새벽 내가 꿔온 영원을 다시 생각하”(「자루」)는 존재의 근원적 결핍에 대한 긍정과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는”(「벌레詩社」) 비움의 세계를 정제된 어법으로 따뜻하게 재현하는 연장선상에 있다.
문태준은 이 세번째 시집에서도 모든 인간과 존재, 혹은 사물과 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관계성을 차분히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내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존재와 사물이 어떤 내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성을 맺고 얽혀 있으며, 그 복합적 관계가 발현하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깊고 고요하며 따뜻한 슬픔,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하는 삶과 존재의 복합성과 신비로움, 그리고 그런 것들이 환기하는 생의 덧없음과 삶의 본원적인 문제를 그야말로 차분한 어법으로 성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별처럼 살다 갔으면/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가 갔으면/내가 예전에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의 세계를 지향하며, 서정적 주체의 자기 표현 욕망을 극도로 낮추고자 하는 태도를 갖게 한다. 이러한 문태준의 시는 한마디로 비움의 삶과 존재 성찰의 문법이라 할 만하다.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 보았다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
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
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어디로 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
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
「그맘때에는」 중에서
소월 시문학상 수상작으로 알려진 이 시는 기억 속의 풍경과 정서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로 보인다. 그의 시가 기억의 원리에 의해 작동될 때 대체로 그러하듯 이 작품도 아스라하며 미묘한 파장의 잔상으로 남는 그리움과 고요하고 적막한 적멸의 아련한 슬픔이 바탕에 깔려 있다. 화자는 유년 시절에 잠자리를 잡았다 놓친 기억을 추억하면서, 혹은 가을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는 소소한 현상을 반추하면서 생의 덧없음과 소멸의 의미를 정말로 조용히 성찰하고 있다.
화자는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언젠가는 “그맘때가” 오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사라짐과 소멸, 덧없음과 공허 등의 의미를 잔잔히 성찰한다. 문태준의 시는 이 작품에서와 같이 기억 속의 풍경은 그 자체로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며, 주체와 풍경 사이의 관계에서 파생하는 아스라한 삶의 심연을 드러내기도 한다. 문태준은 기억 속의 풍경에 존재하는 한 순간을 적확하게 포착하여 우리들 삶이 간직하고 있는 복합적인 심연을 정제된 화폭에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다.
‘잠자리’나 ‘나’는 는 '그맘때가' 오면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잠자리는 화자인 나의 내면적 세계를 표상하기 위한 대상이면서 동시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곧 서정적 화자가 제기하고 싶은, 혹은 서정적 자아가 몰두하고 있는 삶과 존재에 대한 핵심적 질문이다. 그런데 불교적 세계관을 은연중에 드러내면서도 화자는 그것을 정신의 어떤 드높은 경지, 깨달음의 어떤 숭고한 의미로 확대하지 않고 오히려 사소한 부재의 영역에 축소시켜버린다. 화자는 “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면서 “무른 나는 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고 되새긴다. 불교에서 수행자가 일체의 미혹과 번뇌를 떨쳐버리고 구경(究竟)의 단계에 이른 상태, 그리고 “완고한 비석”이 말하는 견고한 진리와 영원성은 화자인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무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적 인식은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 결핍의 긍정이라 할 수 있다.
문태준이 서정의 깊이와 삶의 내면적 깊이를 천착해 들어가는 시법의 탁월함은 동세대 시인들이 성취한 경지와는 다른 세계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문태준과 같은 유형의 시들이 천착하는 삶과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시들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언어의 긴장감이나 미학성이 소홀히 되는 것과 달리 매우 섬세하고 세련된 언어 감각과 시적 상상력을 통해 웅숭깊은 삶의 배면과 사물에 대한 인식의 구체성을 절묘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근원적 결핍의 긍정, 그러니까 아스라이 느껴지는 어떤 그리움, 사라짐, 비움, 쓸쓸함이라는 형식들이 관념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구체적 사물과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즉 푸른 하늘과 빈손, 잠자리와 비석 등의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탐문하고 그것을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움의 철학, 혹은 존재론적이며 근원적인 결핍의 긍정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 빼어난 형상으로 나타난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걸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극빈」 중에서
열무는 식용을 위해 재배하는 채소이다. 그런데 화자는 게을러 “가까스로 꽃을 얻어” “공중에/흰 열무꽃이 파다”한 지경이 되었다. 화자는 얻고자 했던 열무를 얻지 못하고 다만 꽃을 얻어 나비에게 내어주고 만 것이다. 열무라는 채소가 지닌 실용적 가치를 얻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묻는다. 이러한 시적 상황에서 화자는 ‘극빈’이라는 윤리적인 미적 가치를 발견한다. 그것은 ‘나비 떼’에게 발 딛고 앉을 작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는 효용적 가치와는 다른 자기 성찰적이며 동시에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다른 발견, 즉 실용성과는 다른 윤리적인 미적 가치의 발견이다.
화자가 발견한 현실의 일상적이며 효용적 가치와는 다른 자기 성찰과 미적 가치는 이런 것이다. 인간의 현실적 척도로는 나비 떼가 열무 꽃의 작은 자리에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내려 앉는 것이지만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이며,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인간의 관점 혹은 인간의 물리적이며 효용적인 시간적 척도와는 다른 시간이다. 여기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꽃밭처럼 다른 존재, 즉 타자가 머무를 수 있는 무릎을 내준 적이 없다는 성찰적 깨달음을 얻고 있다.
「극빈」이 보여주는 비움과 존재론적 성찰의 세계에서 우리는 시인이 추구하는 미적 자의식의 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가난은 현실적 가난의 의미를 넘어서 있다. 단순히 채소를 얻지 못하고 그것을 나비에게 내어주었다는, 그리고 나비에게 채소밭을 내어주었다는 것에게 화자인 ‘나’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가난을 말하고 있다. 극빈은 시집의 해설에서 빼어나게 분석(이광호)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적 가난 너머의 가난마저도 비우는 경지를 뜻한다. 그 세계는 서정 주체의 자기 표현 욕망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이며,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思慕-물의 안쪽」)로 수직의 ‘병풍’이 아닌 ‘수평’(「水平」)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화자는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수련」)이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다.
존재론적 결핍 혹은 부재의 긍정은 가령,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평상이 있는 국숫집」)든가, 혹은 “누렇게 늙어 누운 오이 같은 그녀가 뜨락에 앉아 웃는다/날지 못하는 거러기가 웃는다”(「기러기가 웃는다」)든가, 또는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가재미」)는 존재론적 슬픔과 관조, 침잠과 고요의 시선은 문태준 시학의 한 권역이다. 이러한 관조와 침잠, 고요와 적멸의 시선은 다음과 같은 「바닥」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 이러한 시선이 문태준 시의 지배적인 권역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바닥」 중에서
화자는 “홀로 의자에 앉아” “그대를 사랑했”던 옛일을 생각하며 가랑잎이 떨어지는 것을 침잠과 관조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떨어지는 가랑잎에서 화자는 소리를 듣는데, 그 가랑잎이 지는 소리의 순간을 포착하여 거기에 내재하는 고요와 적멸, 비움과 공허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그 소리는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로서 이 때 화자는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는 것을 관조적으로 발견한다. “떨어지는 가랑잎”과 “아직 매달린 가랑잎”, ‘그대’와 ‘나’, ‘몸’과 ‘몸’, ‘숨결’과 ‘숨결’, ‘비’와 ‘바닥’이 스치고 받아줄 때 생겨나는 소리들이야말로 앞서 말한 세계내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실존, 혹은 사물들과 상호 의존적이며 관계성을 맺고 살아감을 증언하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관계성의 필연적이고 내적인 연관성이 발현하는 눈부신 순간과 슬픔의 힘을 이 시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물과 사물, 사물과 현상, 인간과 세계의 관계성에서 서로 삼투하면서 파생하는 미묘한 파장은 긴 여운을 남기면서 독자들에게 긴 울림의 잔상으로 남게 되는 것들이다. 여운의 잔상은 인간과 존재, 혹은 사물과 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복합적 관계에서 발현하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따뜻한 슬픔, 그리고 신비로움, 그리고 그런 것들이 환기하는 생의 덧없음과 삶의 아련한 결핍들이다. 문태준 시인이 보여주는 이런 근원적 권역에 대한 천착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진화해나갈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Berkeley 문학 5월 14일 2012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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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 시인이 된다는 것/ 밀란 쿤데라 [1] | 최보경 | 2012.07.06 | 354 |
| 171 | 김종삼 / 「라산스카」 | 강학희 | 2012.07.02 | 296 |
| 170 | 6월의 인사, 잘 지내고 있어요 / 목필균 | 강학희 | 2012.06.14 | 514 |
| 169 | 김홍진 교수 평론 #6 / 빛이 산란한 씨알의 시학 | 강학희 | 2012.06.23 | 573 |
| 168 | 김형수, 「조드」중에서 | 강학희 | 2012.06.10 | 321 |
| 167 | 김홍진 교수 평론 #4 / 길의 숨결과 함께 숨쉬기 | 강학희 | 2012.06.02 | 494 |
| » | 김홍진교수 평론 #3 / 우주적 교감과 존재... | 강학희 | 2012.05.11 | 623 |
| 165 | 5월의 시 / 이해인 | 강학희 | 2012.05.07 | 301 |
| 164 | 김홍진교수 평론 #2 / [여인등신불], 김승희 | 강학희 | 2012.04.29 | 575 |
| 163 | 딜란 토마스의 시 | 강학희 | 2012.04.16 | 358 |
| 162 | 드보르작의 신세계와 딜란 토마스의 시 | 강학희 | 2012.04.16 | 529 |
| 161 | 곡선과 직선 / 박기호 | 강학희 | 2012.03.04 | 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