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평론 #4 / 길의 숨결과 함께 숨쉬기
2012.06.02 00:43
버클리 문우들께!
올해 마지막 5월의 봄 언덕을 넘어갑니다. 푸른 언덕을 넘으면 건너편 눈두렁에 싱그런 포플라나무들이 사열병처럼 일렬로 서서 몸으로 세상을 지켜내는 초여름이 보이겠지요. 나무사이로 높새바람이 불고, 매미들이 울음을 준비하는 계절,. 봄과 여름 사이에서 문우님은 누구를 그리워하며 사시는지요? 무엇을 사랑하며 글을 쓰시는지요?
세월은 자꾸 우리를 앞질러가는데 무슨 세상의 영화를 보겠다고 순수를 잃고 글 한줄 다듬지 못하고 살아가는지요? 어젠 우리의 벗, 이재상님의 유고집 출판기념회에서 그가 마지막 남긴 글 한편을 읽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도 통증때문에 쓰지못하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그 마음을 눈물로 읽었습니다. 지금은 3년전 만해도 우리들과 함께 존 스타인벡의 문학관을 찾으며 유머넘치는 기지로 우리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버클리 문우, 송인섭님의 유고집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글을 쓰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순수했던 영혼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들이 글을 쓰려고 모인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때가 우리 곁에 있을때 부여잡고, 사랑하고, 잠 못이루며 글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재상님이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실어증에 빠졌을때 제게 집에 있는 컴퓨터를 가져다달라는 말을 눈빛으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인이 쓰고 싶어하던 글인데 그에게는 내일이 오지않아 다 쓰지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들께 소중했던 내일이 우리 앞엔 아직도 눈만 뜨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요? 세월은 자꾸 우리를 앞질러 가는데...
다음 주에 버클리 문학강좌를 아래와 같이 갖습니다. 오셔서 사랑하는 글을 함께 숨쉬어 보십시다.
5/29/12 (화) 저녁 6시
수라한식당, 오클랜드
강사: 김홍진 교수
주제: 김완하시인의 "길의 숨결과 함께 숨쉬기" (아래 참조)
버클리 문학회장
김희봉드림
길의 숨결과 함께 숨쉬기
━ 김완하론
1. 길의 숨결
198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김완하는 『길은 마을에 닿는다』(1992),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1995), 『네가 밟고 가는 바다』(2002)를 상재했으며, 최근에 네번째 시집『허공이 키우는 나무』(시작, 2007)를 선보이며, 이 시집으로 시와 시학사에서 주관하는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김완하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삶과 현실을 기꺼이 수락하고 버텨내려는 견딤과 초극의 과정으로서의 삶의 자세이다. 그것은 모든 시인들이 그렇겠지만 시적 자아를 가로 막아 선 세계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시쓰기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현실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에게 시쓰기는 고통스러운 삶과 운명의 형식에 대한 역설적 응전의 방식이며,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고 세상의 가치를 탐색해 가치화하는 삶의 연속적 작업으로 여겨진다. 더 나아가서 그는 시쓰기를 통해 존재의 회복이나 완성에 이르는 전망까지 꿈꾼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김완하의 시적 관심은 삶의 문제에 있다.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은 문학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에게 삶은 운명적으로 결핍과 고통스러운 대상으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 삶의 길이란 주어진 한계를 견뎌내고 돌파해나가는 초극의 길이고, 또한 성찰의 길이며, 삶의 원리로서의 길이다. 그에게 삶의 원리는 궁극적으로 길의 원리로 귀착하는 것이다. 삶의 원리로서의 길은 시인의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최근 상재한 네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이미지이다. 그만큼 길은 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배적으로 기능한다. 특히 길의 이미지는 네번째 시집 『허공이 키우는 나무』에 이르러서는 허공이나 벼랑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삶과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심화 확장된 양상을 보인다.
길을 따라 ‘여행하는 인간(Homo Viator)'의 운명이란 길 위에서 시작하여 길 위에서 맺는다. 길은 공간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길은 어느 곳을 향해 가는 도정으로서 삶의 지향ㆍ지침ㆍ목적, 그리고 방법이나 수단 등 갖가지 의미로 쓰인다. 일상적으로, 혹은 사전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 계열을 거느리는 길의 의미와 상징들은 문학뿐만 아닌 다른 예술 장르에서 포괄적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구체적 실례들을 예술사적 적층을 통해 경험해 왔다. 특히 문학이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차원에서 길은 인간의 삶이나 운명의 행로를 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길은 인간 삶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으로 쓰인다. 이러한 길의 이미지는 김완하의 시에서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김완하는 아직도 길을 따라 여행 중인 시인이다. 그에게 길은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통로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은 생성과 트임의 존재론적 확산을 이루는 계기성과 지향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글은 김완하 시에 나타나는 길의 숨결을 따라 함께 걷고 호흡하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을 살피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이 시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삶, 생명과 초극의 원리
김완하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방법은 줄곧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을 꾸준히 밀고 나가면서 강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보편적 감동을 환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시인의 시에 주로 동원되는 시적 소재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의 시에서 산, 강, 별, 바다, 나무, 허공 등등의 시적 소재는 이러한 측면을 반증하는 예이다. 특히 첫 시집에서부터 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시세계는 삶과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귀속되는 것이었다. 시인의 첫 시집 표제를 빌려 표현한다면 모든 “길은 마을에 닿”(「눈발」)고 삶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그런 만큼 길은 김완하의 시정신을 관류하는 커다란 흐름이다.
부언하자면 김완하의 시는 자연의 공간적 길에서 시작되지만, 그러나 결국은 삶의 길, 우주적 원리의 길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첫 시집에서 환멸과 전복의 80년대를 통과하면서 시인이 보여준 자연 친화적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거나 지시하는 않지만 의지적이며 격정에 찬 강렬한 정서와 어조는 이후 낮은 목소리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삶과 세계를 따듯하게 바라보려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과 긍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안에는 삶에 대한 초극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으며, 김경복의 적실한 표현처럼 ‘벼랑의 정신’(「벼랑의 정신과 존재론적 도약」)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각성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따금 그어대는 성냥불 안으로
급히 얼굴을 디밀었다 사라지는 나무들
하루의 곤함도 잠겨 가고
잠시 침묵이 긋는 사이,
오리나무 숲은 설친 잠을 추스린다
보리밭 머리에서 일행은 흩어지고
수군거리며 도랑을 건너고
황토고개 올라서면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줄기,
탱자나무 울타리 적셔 가면
마을 가득히 살아나는 숨결
「밤길」 중에서
김완하의 시에는 고통스러운 인간 삶의 모습과 그것을 꿋꿋이 견뎌내며 살아가는 의지력과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 김완하에게 삶은 운명적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삶의 운명적 비극성을 한탄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삶을 수용하고 내면화하여 초극하려 한다. 그는 삶의 비극성을 긍정적으로 수락하고, 그 운명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극복해가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초기 시에는 고달프게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과 정서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진안행 막차”를 타고 “금산장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허기진 하루”를 노래하고 있는 인용 시에서처럼, 삶은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과 ‘안개’로 뒤덮여 불투명하고 애달프며 고달프고 쓸쓸한 모습으로 현상된다. 시인의 눈에 의해 현상된 삶의 형상은 “하루 일을 마치고/허리가 휘어 오르는/사람들”(「별ㆍ1」)이나, “헐렁한 바지, 기운 어깨/뒤축이 단 구두만 보이는” “추억이 없는 너”(「너」), “하루내 꺽인 어깨를 걸고/취한 사람들 삽을 끌며/비칠대고 걸어”(「겨울 이사리」)가는 사람들의 쓸쓸한 모습이다.
삶은 고달프고 가난하지만, 김완하는 그것을 부정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김완하에게 삶은 부정과 저주의 형식이 아니다. 그에게 삶은 견뎌내고 살아내야 하는 사랑과 생명, 희망과 초극의 형식이다. 그의 시에서 삶의 고달픔이나 외로움은 ‘밤’이나 ‘어둠’, ‘막차’, ‘골목(길)’, ‘겨울’ 등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삶이 지닌 비극성을 절실하게 표백한다. 그러나 삶은 “이따금 그어대는 성냥불”로 길을 밝혀가는 희망의 원리에 다름 아니며, 그렇게 간 길은 결국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줄기”로 “마을 가득 살아나는 숨결”의 생명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삶에 대한 사랑과 초극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삶은 비극적이지만 ‘별’은 “어두운 곳에 선 이들의 어깨 위로만/살아 오르”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만 빛을 뿌리는”(「별ㆍ3」) 역설적 이치와 같은 것이다.
삶의 비극적 형식을 초극하려는 의지적이며 지사적 성격은 삶에 대한 김완하의 치열성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삶에 대한 결연하며 신념어린 자세는 첫 시집에서부터 줄곧 이어지는 「별」 연작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천체의 이미지로서 별은 김완하의 시에서 삶의 비극성을 초월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의 시에서 별은 삶과 현실의 어둠을 밝혀주는 희망이며, 어둠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빛이다. 시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겨울’이나 ‘밤’과 관련된 이미지들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은유이다. 반면 ‘별’은 지상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 지닌 비극성을 초극할 수 있는 구원과도 같은 생명의 빛이다. ‘별’은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이자 가치이며, 믿음의 표상이자 자아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결정체로서 절대성을 지닌다. 그래서 시인은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에서처럼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끝없이 하늘의 별을 우러르며 천상적 가치를 지향한다.
그래, 나도 손을 뻗고 싶다
저 하늘, 너희들이 꿈꾸는 세상으로
나도 차 오르고 싶다
기대지 않고는 설 수 없는 땅에서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하나의 기둥으로 서고 싶다
휘감지 않고는 버틸 수도 없는 비탈
가파른 바지랑대에 몸을 묶어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나팔 소리 힘차게 불어올릴 수 있다면
「나팔꽃의 꿈」전문
김완하에게 지상의 삶은 궁핍하다. 지상의 삶이 지닌 근원적 결핍과 고달픈 삶의 양식은 시인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을 바라게 한다. 천상 이미지로서의 별은 시인에게 지상의 궁핍함과 미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이다. 별과 같은 천상적 가치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은 ‘산’이나 ‘나무’ 등의 수직 직립하는 상승의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를 거느리게 한다. 그에게 산은 “안개의 살을 벗고/일어서는 산”(「일어서는 산」)이며, “우뚝 치솟아” “겨울 벌판을 지키며/무지몽매한 우리를” 깨우는 “차오르는 산”(「월출산」)이고, “모든 산줄기 불러깨워” “아침 열리”(「동트는 계룡산」)는 동트는 산이다. 이처럼 산은 무지몽매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각성시키는 대상이며, “삶의 길 엇갈려 곤궁에 빠질 때/무릎까지 빠지는 산을 오르며” 삶의 곤궁으로부터, 그리고 지상적 삶의 몽매한 미망을 돌파할 수 있게 하는 극복의 정신과 “맨몸으로 겨울을 견디”(「겨울산」)는 견딤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다.
김완하의 시에는 일상을 뛰어넘고자 하는 초인과 같은 정신의 힘이 있다. 그것은 삶의 비극성에 굴복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정면 돌파하려는 초극의 정신과 수직 상승의 의지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때로 산의 이미지를 통해, 때로는 인용 시에서처럼 식물의 이미지를 빌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용 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나팔꽃의 꿈”을 통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력과 생명력이다. 시인은 삶의 근원적 궁핍 속에서도 삶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긍정을 바탕으로 생명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그에게 상승하는 힘은 초극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또 “가파른 바지랑대에 몸을 묶어서” 하늘에 오르고 싶은, 허공을 움켜잡고 나아가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존재, 그리움과 사랑의 힘
김완하의 시는 존재의 보편적 궁핍성에 대한 문제에 천착한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어둠이나 밤, 겨울의 이미지는 바로 삶과 존재의 궁핍성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시인은 근원적으로 가난하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삶과 운명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어린 애정의 시선을 내비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정서는 남성적 의지력으로 결속된 강력한 수직 상승의 힘과 초극의 정신이다. 천상의 별을 우러르는 시인의 정신은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 극한의 절정에서 다다르고자 하는 의지적 욕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은 맑고 투명하며 염결성(廉潔性)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시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정서는 정신적 순결함과 강직한 품성이다.
그가 네번째로 상재한 시집 『허공이 키우는 나무』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비탈을 기꺼이 수락하고 수직 직립하는 나무나, 끝 모를 벼랑의 절정을 향해나가는 의지적인 정신이다. 그것은 초기의 시에서 나타나는 삶에 대한 사랑과 희망의 정신에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이와 같은 우주적 원리로서의 길에 도달하는 과정에는 삶과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확인한 후에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삶의 생명성에 대한 애착은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경험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삶에서 느끼게 되는 경험세계의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삶에 대한 긍정의 형식과 생명에 대한 사랑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김완하의 시에서 길이 삶의 보편적 원리와 생명의 원리, 또는 우주적 원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의 길목에는 그리움의 정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표백된 작품들이 자리한다.
보편적 존재와 삶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 사랑의 정신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시적 자아를 초월하여 타자를 향한 것이고, 뭇 존재들이나 공동체와 함께하는 열린 정서이다. 이 타자와의 연대감이나 유대감은 시적 자아 안으로만 향한 세계라기보다는, 세계내에 존재하는 보편적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개방된 형식을 취한다. 시인에게 삶과 존재들은 서로 “기대지 않고는 설 수 없”고 “휘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비탈”과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지 않고서는 “하나의 기둥”(「나팔꽃의 꿈」)으로 설 수 없다. 그의 시는 자기 독백적인 개별적 자아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자아의 개별적인 목소리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실존적 존재가 내뱉는 목소리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감동을 유발시키며, 읽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는 요인으로 기능한다.
돌아보면 내 몸 구석구석
네 그리움으로 커온 길이 있다
발자국이여,
네가 먼저 마을에 가 닿았구나
「발자국」 중에서
김완하의 시에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정서가 깊이 투영되어 있다. 시인이 길을 가는 것은 “사람이 사는 마을에 가 닿기” 위함이며, 그것은 그리움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같은 정서는 첫 시집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의 시에서 모든 길은 “길은 마을에 닿”(「눈발」)는데, 사람이 사는 마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그리움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움은 삶의 가치이며, 믿음의 표상이자 자아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별’을 우러르게 하는 동인이기도 하다. 그리움이 길을 만들고, 길은 그리움으로 가득 하며, 그 길을 통해 시인은 사람이 사는 마을에 닿고자 한다.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에서처럼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움으로 난 길을 통해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곳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그곳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골목”(「별ㆍ1」)이기도 하고, “서로의 상처를 온몸으로 감싸 주”며 “하나의 뿌리로 여러 개 하늘을 품고/무더기무더기 꽃을 피우는”(「칡덩굴」)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모내기 다 끝난 다음날이면”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 빠짐없이 모여” “대동 천렵을 벌”(「대동천렵」)이는 유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은 “가진 것 없이 한겨울”을 지내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지만 “홀로의 목마름 속”에서도 “뿌리로 몰린 생의 온기”(「생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사랑과 생명의 공간이다. 이와 같은 생명에 대한 사랑은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서에서 촉발된 것이다. 특히 그의 세번째 시집 『네가 밟고 가는 바다』에는 존재에 대한 짙은 연민과 그리움으로 짜여 있는 시들이 많이 포진해 있으며,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리움은 삶과 존재의 근원적 결핍성에 대한 희망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러한 세계가 네번째 시집에 이르게 되면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심화 확장된 모습으로 전이한다.
꽃이 진 그 자리에 움트는
잎은 그래도 얼마나 행복한가
하나의 죽음으로만 닿는
뿌리와 줄기의 캄캄한 거리
무너지는 삶의 흔적을 껴안고
겨우내 삭이고 삭인 뒤
하늘로 퍼올리는 푸르른 그리움
땅 밑을 헤매는 뿌리의 기도
이제, 봄이 오는 의미를 안다
「숲에서」 중에서
삶에 대한 연대의식과 사랑은 “꽃이 진 자리에 움트는”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게 한다. 소멸과 생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역설적인 사유를 통해 가능해진다. 사실 김완하 시에서 역설적 인식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시적 사유의 방식이다. “뿌리와 줄기”는 “캄캄한 거리”를 유지하다 “하나의 죽음으로만 닿”을 수밖에 없고, “겨우내 삭이고 삭인 뒤”의 소멸은 역설적으로 생성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은 사유 방식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하늘로 퍼올리는 푸르른 그리움”과 “땅 밑을 헤매는 뿌리의 기도”로서의 희망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 희망의 원리는 삶을 떠받치는 그리움의 원리이고, 생명의 원리이기도 하며,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리움의 원리가 이제 그늘을 몸에 들이며 “내가 그늘 속에 뒤섞”(「내 몸에 그늘이 들다」)이는 혼융과 통섭(統攝)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김완하의 시에서 역설적 세계인식은 초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시적 장치이지만 네번째 시집으로 가까워올수록 그러한 세계인식은 더욱 깊어지는 양상을 띤다. 밤 하늘의 별을 우러르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 그러니까 수직 상승과 직립, 그리고 천체 지향성의 초극의 길은 같은 맥락에서 허공을 향하고, 벼랑을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허공의 이미지와 벼랑의 이미지는 별안간 나타난 생소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그의 초기시에서부터 단초가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공은 모든 존재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우주적 원리로서의 트임의 길이다. 또한 시인 개인적으로 허공은 삶의 극한, 혹은 그 극한의 절정에 올라 서서 세계와 팽팽히 맞서고자 하는 ‘벼랑의 정신’이다.
4. 허공, 생성과 트임의 길
김완하에게 길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부터 네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이미지이며, 그런 만큼 시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배적으로 기능한다. 특히 길의 이미지는 네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는 허공이나 벼랑, 그리고 나무와 물과 집의 이미지와 함께 어울리면서 삶과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심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고 버티면서 삶을 걸어가는 자로서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조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폭넓게 획득하고, 또 그 깊이가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깨닫고 발견하는 자리가 철학적 사유의 고심 끝에 얻어지는 뭔가 심오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세계의 자리에서 발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의 경험세계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시인은 “땅에서 부활하는 순간이/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매미의 무덤」)이라든가, “폭설이 벽이 아니고 나를 막는 것은 내 안의 벽”(「폭설에 막혀」)이라는, 혹은 곶감처럼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기다려온 만큼 빛깔”(「허공에 매달려 보다」)이 곱다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상적이지만, 그것을 매우 낯설고 역설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시적 발상을 출발시킨다.
길 따라 흐르며 그 길 가득 채우는
또 하나의 길
시간과 하나 되는 물이여
절대 뒤돌아서지 않는, 길이여
길 위로 흐르면서 이미 길이 아닌
하나의 길을 비워내
다시 길을 여는 저 물의 길
「물」 전문
길은 일반적으로 시간적ㆍ공간적 계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상징체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계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관계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기성은 시작과 끝, 연결과 단절 사이의 긴장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시적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동양적 사유에서 길은 물리적인 시간성이나 공간성을 초월하여 삶의 원리나 존재의 생성원리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삶의 규범이나 우주의 원리에 따른다는 의미가 바로 것이다. 아무튼 길은 현대시에서 중요한 재원의 하나로 작품 속에 다양하게 수용되고 있는데, 김완하의 길은 말하자면 자기실현의 방식이거나 존재의 생성과 트임, 혹은 존재의 어울림과 혼융, 즉 통섭의 길로 집중된다는 점이다.
물의 길을 노래하는 위의 시에서처럼 길은 “길 따라 흐르며 그 길 가득 채우는/또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길 위로 흐르면서 이미 길이 아닌” 길이고, “비워내”고 “다시 길을 여는” 마감과 트임, 막힘과 열림, 시작과 끝, 단절과 연속의 역설적인 길이다. 그것은 물의 이법처럼 흐르면서 채우고, 채워지면 비우는 삶의 이법을 말하는 동시에 함께 어울리는 통로로서의 길이다. 각각의 존재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것이 김완하의 길이며, 모든 존재가 생명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양태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시에서 길은 “시냇물 흘러 강으로 스미고/바닷물은 수평선 쪽으로 가/하늘에 닿”(「처서 지나」)거나, “햇살과 그늘을 두고/허공을 끌어안”으면 “비로소 서늘한 길이 열린다”(「내 몸에 그늘이 들다」)는 채움과 비움, 수평적 흐름과 멈춤, 그리고 수직적 상승과 하강의 우주적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따라서 길은 대나무나 대숲의 나무들 사이처럼 “캄캄한 구멍으로 열리”면서 동시에 “너와 나 사이에 맺히는//단단한 빛의 고리”(「대숲」)로 삶과 존재들 사이를 잇고 구성하는 원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길과 보이지 않는 길은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닌다.
길은 김완하의 시에서 모든 존재는 삶의 원리에 따르고 어울림을 통해 더 큰 세계를 열어가는 상징체계이다. 더욱이 시인은 일관되게 길이 “열린다”(「내 몸에 그늘이 들다」), 그리고 “닿는다”(「처서 지나」), “품는다” “들어간다”(「꽃」) 등의 동사 진행형의 시제로 말한다. 이것은 갑자기 어느 순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쉼 없는 운동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생성과 트임의 원리를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 만큼 시인의 세계 인식의 깊이가 깊어졌고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를 실현하는 길과 존재들 사이를 잇고 어울리는 통섭의 길이 같다는 깨달음의 표현은 우주적 생성과 트임의 체계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확장의 심화된 세계는 결국 우주적 사유의 획득이라는 세계관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새들의 가슴을 밟고
나뭇잎은 진다
허공의 벼랑을 타고
새들이 날아간 후,
또 하나의 허공이 열리고
그곳을 따라서
나뭇잎은 날아간다
허공을 열어보니
나뭇잎이 쌓여 있다
새들이 날아간 쪽으로
나뭇가지는,
창을 연다
「허공이 키우는 나무」 전문
길이 존재 생성의 원리와 자기실현의 방식, 혹은 존재의 어울림과 혼융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면,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어울리는 곳은 허공이다. 그것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 위와 같은 작품의 경우이다. 허공은 위의 시에서 보듯 “새들의 가슴을 밟고/나뭇잎은 지”고 동시에 “새들이 날아간 후” 다시 열리고 또 열리는 막힘이 없는 공간이다. 허공은 나무들이 품어나가는 공간이고 새들이 날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하늘이나 비슷한 의미이다. 새들이 날아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쌓이는 공간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허공은 길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 종종 ‘하늘’이나 ‘그늘’, ‘사이’나 ‘빈터’ 등의 이미지도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허공은 “그림자로 엉기어” “몸을 섞”(「한쪽 어깨를 밀어주네」)는, 혹은 “나무는 햇살과 그늘을 두고/허공을 끌어안으”며 “서늘한 길을”(「내 몸 속에 그늘이 들다」) 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가 된다. 허공은 만물이 생성하고 서로 통섭하는 태허(太虛)의 열린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을 따라서/나뭇잎이 날아”가는 허공을 여니 “나뭇잎이 쌓”여 있다. 빈 나뭇가지 사이에는 어떤 막힘이나 소멸의 흔적이 없다. 모든 것은 길을 통해 허공으로 이어지고 스스로 존재의 창을 연다. 나뭇잎이 지고 새가 날고 나뭇잎이 쌓이는 이치는 이미 허공 속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만물은 허공의 움직임 속에 빚어진 형체일 뿐이고, 생명이 시작되는 것과 마감되는 것 역시 하나의 길, 허공의 길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존재가 계속 변화하는 과정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김완하의 시에서 허공은 “푸른 잎새들 팔을 뻗어/하늘 깊숙이 손을 묻는” “나무들의 집”(「허공은 나무들의 집」)이거나, “따스한 물 속”의 “집”(「허공 속의 집」)이며, “능소화 은행나무 허리 껴안고”(「능소화 1」) 오르는 하늘이기도 하고, “내 안의 빈 터”(「벼랑에 서다」)이기도 하듯, 허공은 하늘의 일부거나 비어 있는 공간의 의미로 나타난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의 허공은 “두 겹의 짙은 그늘이 깔리며” “그림자로 엉기어” “몸을 섞는”(「한쪽 어깨를 밀어주네」) 통섭의 공간이기도 하고,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을 벗어나”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지기 위에 “몸을 다는 시간”(「허공에 매달려본다」)으로서의 모든 존재가 자기를 실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럴 때 허공은 단지 공간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시작되거나 마감하는, 그리고 서로 함께 어울리는 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존재생성의 원리와 우주적 원리에 포획되는 전체론적 사유의 결과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김완하의 『허공이 키우는 나무』에 실린 시들은 허공으로 가득하고, 또 허공으로 비어 있다. 허공은 모든 것을 관장한다. 허공은 꽉 찬 것으로 비어 있고, 비어 있는 것으로 꽉 찬 노자의 그릇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허공은 단순한 공간적 의미를 넘어서 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즉, 잠재된 가능성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생명의 전과정을 주재하는 시간성을 함께 지닌다. 따라서 허공은 존재의 근원이며 동시에 모든 것들이 ‘사이’를 두고, 또 ‘그늘’과 ‘빈터’를 두고 어울리는 통섭의 공간이다. 이러한 근원에 대한 인식은 세계와 나를 분리하는 시간관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 그것은 세계와 나를 하나로 보는 전체론적이고 우주적인 사유를 통해서만 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만큼 김완하 시인이 거니는 사유의 숲은 더욱 깊어졌고, 그 숲으로 이르는 길가엔 존재의 자기완성을 향한 나무들이 울창하다. 이제 시인은 “나무들 서로를 품으며” “보듬어 안는”(「숲의 힘」) 통섭의 숲에 든 것이다. 시인의 더욱 깊어진 사유의 숲, 그 나무들 ‘사이’의 ‘그늘’이나 ‘비탈’과 ‘벼랑’ 사이의 ‘허공’을 함께 거니는 일은 즐거운 행복이며, 팽팽하게 긴장된 벼랑의 정신적 높이를 함께 느끼는 일이다.
5. 허공의 길
김완하 시인에게 길은 시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배적으로 기능한다. 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김완하의 시세계는 삶과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귀속된다. 길은 삶의 형식으로서 김완하의 시정신을 관류한다. 특히 길은 최근에 이르러서 허공이나 벼랑 등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삶과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심화 확장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고 버티면서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조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폭넓게 획득하고, 또 그 깊이가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김완하의 시는 존재의 보편적 궁핍성에 대한 문제에 천착한다. 시인은 근원적으로 가난하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어린 애정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은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생명의 원리, 그리움과 사랑의 힘으로 이를 초극하려 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가 그의 시에서 주목한 것은 남성적 의지력으로 결속된 강력한 수직 상승의 힘과 역동적인 초극의 정신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 극한의 절정에서 다다르고자 하는 시인의 강직한 의지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벼랑의 정신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그가 최근에 보여주는 세계는 절정을 향한 초극의 정신이다. 이러한 초극의 정신은 삶에 대한 사랑, 존재론적 그리움이 긴밀히 맞닿아 있다. 태허의 허공과 절정의 벼랑을 향한 초극의 정신이 지닌 치열성과 염결성, 그리고 그 정신이 함유하는 자질로서 생성과 트임이라는 우주적 원리로서의 통섭의 삶은 허공에 대한 인식에서 구체화된다. 김완하 시인이 거니는 사유의 숲은 더욱 깊어졌고, 그 숲으로 이르는 길가엔 존재의 자기완성을 향한 나무들이 울창하다. 시인의 더욱 깊어진 사유의 숲, 그 나무들 사이의 그늘이나 비탈과 벼랑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함께 거니는 일은 즐거운 행복이다. 허공, 그 벼랑의 길에는 팽팽하게 긴장한 김완하의 정신 지향과 높이가 자리한다.〔2007〕
05/29/12 버클리 문학 자료
올해 마지막 5월의 봄 언덕을 넘어갑니다. 푸른 언덕을 넘으면 건너편 눈두렁에 싱그런 포플라나무들이 사열병처럼 일렬로 서서 몸으로 세상을 지켜내는 초여름이 보이겠지요. 나무사이로 높새바람이 불고, 매미들이 울음을 준비하는 계절,. 봄과 여름 사이에서 문우님은 누구를 그리워하며 사시는지요? 무엇을 사랑하며 글을 쓰시는지요?
세월은 자꾸 우리를 앞질러가는데 무슨 세상의 영화를 보겠다고 순수를 잃고 글 한줄 다듬지 못하고 살아가는지요? 어젠 우리의 벗, 이재상님의 유고집 출판기념회에서 그가 마지막 남긴 글 한편을 읽었습니다. 글을 쓰고 싶어도 통증때문에 쓰지못하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던 그 마음을 눈물로 읽었습니다. 지금은 3년전 만해도 우리들과 함께 존 스타인벡의 문학관을 찾으며 유머넘치는 기지로 우리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시던 버클리 문우, 송인섭님의 유고집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글을 쓰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순수했던 영혼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들이 글을 쓰려고 모인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때가 우리 곁에 있을때 부여잡고, 사랑하고, 잠 못이루며 글귀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재상님이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고 실어증에 빠졌을때 제게 집에 있는 컴퓨터를 가져다달라는 말을 눈빛으로 하셨습니다. 그렇게 고인이 쓰고 싶어하던 글인데 그에게는 내일이 오지않아 다 쓰지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들께 소중했던 내일이 우리 앞엔 아직도 눈만 뜨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요? 세월은 자꾸 우리를 앞질러 가는데...
다음 주에 버클리 문학강좌를 아래와 같이 갖습니다. 오셔서 사랑하는 글을 함께 숨쉬어 보십시다.
5/29/12 (화) 저녁 6시
수라한식당, 오클랜드
강사: 김홍진 교수
주제: 김완하시인의 "길의 숨결과 함께 숨쉬기" (아래 참조)
버클리 문학회장
김희봉드림
길의 숨결과 함께 숨쉬기
━ 김완하론
1. 길의 숨결
198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김완하는 『길은 마을에 닿는다』(1992),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1995), 『네가 밟고 가는 바다』(2002)를 상재했으며, 최근에 네번째 시집『허공이 키우는 나무』(시작, 2007)를 선보이며, 이 시집으로 시와 시학사에서 주관하는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김완하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삶과 현실을 기꺼이 수락하고 버텨내려는 견딤과 초극의 과정으로서의 삶의 자세이다. 그것은 모든 시인들이 그렇겠지만 시적 자아를 가로 막아 선 세계에 대한 성찰과 그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시쓰기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힘겨운 현실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에게 시쓰기는 고통스러운 삶과 운명의 형식에 대한 역설적 응전의 방식이며, 삶과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고 세상의 가치를 탐색해 가치화하는 삶의 연속적 작업으로 여겨진다. 더 나아가서 그는 시쓰기를 통해 존재의 회복이나 완성에 이르는 전망까지 꿈꾼다.
누구나 공감하듯이 김완하의 시적 관심은 삶의 문제에 있다. 인간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은 문학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에게 삶은 운명적으로 결핍과 고통스러운 대상으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에게 삶의 길이란 주어진 한계를 견뎌내고 돌파해나가는 초극의 길이고, 또한 성찰의 길이며, 삶의 원리로서의 길이다. 그에게 삶의 원리는 궁극적으로 길의 원리로 귀착하는 것이다. 삶의 원리로서의 길은 시인의 첫번째 시집에서부터 최근 상재한 네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이미지이다. 그만큼 길은 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배적으로 기능한다. 특히 길의 이미지는 네번째 시집 『허공이 키우는 나무』에 이르러서는 허공이나 벼랑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삶과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심화 확장된 양상을 보인다.
길을 따라 ‘여행하는 인간(Homo Viator)'의 운명이란 길 위에서 시작하여 길 위에서 맺는다. 길은 공간적 의미와 시간적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길은 어느 곳을 향해 가는 도정으로서 삶의 지향ㆍ지침ㆍ목적, 그리고 방법이나 수단 등 갖가지 의미로 쓰인다. 일상적으로, 혹은 사전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 계열을 거느리는 길의 의미와 상징들은 문학뿐만 아닌 다른 예술 장르에서 포괄적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구체적 실례들을 예술사적 적층을 통해 경험해 왔다. 특히 문학이 인간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차원에서 길은 인간의 삶이나 운명의 행로를 뜻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길은 인간 삶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으로 쓰인다. 이러한 길의 이미지는 김완하의 시에서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김완하는 아직도 길을 따라 여행 중인 시인이다. 그에게 길은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이어주는 통로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은 생성과 트임의 존재론적 확산을 이루는 계기성과 지향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글은 김완하 시에 나타나는 길의 숨결을 따라 함께 걷고 호흡하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을 살피고, 또 가능하다면 그것이 시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삶, 생명과 초극의 원리
김완하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방법은 줄곧 전통적인 서정시의 문법을 꾸준히 밀고 나가면서 강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보편적 감동을 환기하는 세계이다. 그것은 시인의 시에 주로 동원되는 시적 소재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의 시에서 산, 강, 별, 바다, 나무, 허공 등등의 시적 소재는 이러한 측면을 반증하는 예이다. 특히 첫 시집에서부터 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시세계는 삶과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귀속되는 것이었다. 시인의 첫 시집 표제를 빌려 표현한다면 모든 “길은 마을에 닿”(「눈발」)고 삶의 형식으로 이어진다. 그런 만큼 길은 김완하의 시정신을 관류하는 커다란 흐름이다.
부언하자면 김완하의 시는 자연의 공간적 길에서 시작되지만, 그러나 결국은 삶의 길, 우주적 원리의 길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첫 시집에서 환멸과 전복의 80년대를 통과하면서 시인이 보여준 자연 친화적이면서 동시에 시대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거나 지시하는 않지만 의지적이며 격정에 찬 강렬한 정서와 어조는 이후 낮은 목소리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삶과 세계를 따듯하게 바라보려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삶과 생명에 대한 사랑과 긍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안에는 삶에 대한 초극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으며, 김경복의 적실한 표현처럼 ‘벼랑의 정신’(「벼랑의 정신과 존재론적 도약」)이라 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각성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따금 그어대는 성냥불 안으로
급히 얼굴을 디밀었다 사라지는 나무들
하루의 곤함도 잠겨 가고
잠시 침묵이 긋는 사이,
오리나무 숲은 설친 잠을 추스린다
보리밭 머리에서 일행은 흩어지고
수군거리며 도랑을 건너고
황토고개 올라서면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줄기,
탱자나무 울타리 적셔 가면
마을 가득히 살아나는 숨결
「밤길」 중에서
김완하의 시에는 고통스러운 인간 삶의 모습과 그것을 꿋꿋이 견뎌내며 살아가는 의지력과 생명이 약동하고 있다. 김완하에게 삶은 운명적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삶의 운명적 비극성을 한탄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삶을 수용하고 내면화하여 초극하려 한다. 그는 삶의 비극성을 긍정적으로 수락하고, 그 운명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극복해가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초기 시에는 고달프게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과 정서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진안행 막차”를 타고 “금산장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의 “허기진 하루”를 노래하고 있는 인용 시에서처럼, 삶은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둠’과 ‘안개’로 뒤덮여 불투명하고 애달프며 고달프고 쓸쓸한 모습으로 현상된다. 시인의 눈에 의해 현상된 삶의 형상은 “하루 일을 마치고/허리가 휘어 오르는/사람들”(「별ㆍ1」)이나, “헐렁한 바지, 기운 어깨/뒤축이 단 구두만 보이는” “추억이 없는 너”(「너」), “하루내 꺽인 어깨를 걸고/취한 사람들 삽을 끌며/비칠대고 걸어”(「겨울 이사리」)가는 사람들의 쓸쓸한 모습이다.
삶은 고달프고 가난하지만, 김완하는 그것을 부정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다. 김완하에게 삶은 부정과 저주의 형식이 아니다. 그에게 삶은 견뎌내고 살아내야 하는 사랑과 생명, 희망과 초극의 형식이다. 그의 시에서 삶의 고달픔이나 외로움은 ‘밤’이나 ‘어둠’, ‘막차’, ‘골목(길)’, ‘겨울’ 등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삶이 지닌 비극성을 절실하게 표백한다. 그러나 삶은 “이따금 그어대는 성냥불”로 길을 밝혀가는 희망의 원리에 다름 아니며, 그렇게 간 길은 결국 “폭포처럼 쏟아지는 빛줄기”로 “마을 가득 살아나는 숨결”의 생명을 확인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는 삶에 대한 사랑과 초극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삶은 비극적이지만 ‘별’은 “어두운 곳에 선 이들의 어깨 위로만/살아 오르”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만 빛을 뿌리는”(「별ㆍ3」) 역설적 이치와 같은 것이다.
삶의 비극적 형식을 초극하려는 의지적이며 지사적 성격은 삶에 대한 김완하의 치열성을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삶에 대한 결연하며 신념어린 자세는 첫 시집에서부터 줄곧 이어지는 「별」 연작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천체의 이미지로서 별은 김완하의 시에서 삶의 비극성을 초월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의 시에서 별은 삶과 현실의 어둠을 밝혀주는 희망이며, 어둠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빛이다. 시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겨울’이나 ‘밤’과 관련된 이미지들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은유이다. 반면 ‘별’은 지상의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 지닌 비극성을 초극할 수 있는 구원과도 같은 생명의 빛이다. ‘별’은 시인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이자 가치이며, 믿음의 표상이자 자아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결정체로서 절대성을 지닌다. 그래서 시인은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에서처럼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끝없이 하늘의 별을 우러르며 천상적 가치를 지향한다.
그래, 나도 손을 뻗고 싶다
저 하늘, 너희들이 꿈꾸는 세상으로
나도 차 오르고 싶다
기대지 않고는 설 수 없는 땅에서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하나의 기둥으로 서고 싶다
휘감지 않고는 버틸 수도 없는 비탈
가파른 바지랑대에 몸을 묶어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나팔 소리 힘차게 불어올릴 수 있다면
「나팔꽃의 꿈」전문
김완하에게 지상의 삶은 궁핍하다. 지상의 삶이 지닌 근원적 결핍과 고달픈 삶의 양식은 시인으로 하여금 하늘의 별을 바라게 한다. 천상 이미지로서의 별은 시인에게 지상의 궁핍함과 미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이다. 별과 같은 천상적 가치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은 ‘산’이나 ‘나무’ 등의 수직 직립하는 상승의 이미지와 식물적 이미지를 거느리게 한다. 그에게 산은 “안개의 살을 벗고/일어서는 산”(「일어서는 산」)이며, “우뚝 치솟아” “겨울 벌판을 지키며/무지몽매한 우리를” 깨우는 “차오르는 산”(「월출산」)이고, “모든 산줄기 불러깨워” “아침 열리”(「동트는 계룡산」)는 동트는 산이다. 이처럼 산은 무지몽매한 우리의 정신을 일깨우고 각성시키는 대상이며, “삶의 길 엇갈려 곤궁에 빠질 때/무릎까지 빠지는 산을 오르며” 삶의 곤궁으로부터, 그리고 지상적 삶의 몽매한 미망을 돌파할 수 있게 하는 극복의 정신과 “맨몸으로 겨울을 견디”(「겨울산」)는 견딤의 정신을 대변하는 것이다.
김완하의 시에는 일상을 뛰어넘고자 하는 초인과 같은 정신의 힘이 있다. 그것은 삶의 비극성에 굴복하지도 저주하지도 않고 정면 돌파하려는 초극의 정신과 수직 상승의 의지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때로 산의 이미지를 통해, 때로는 인용 시에서처럼 식물의 이미지를 빌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용 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나팔꽃의 꿈”을 통한 삶에 대한 강한 의지력과 생명력이다. 시인은 삶의 근원적 궁핍 속에서도 삶에 대한 뚜렷한 신념과 긍정을 바탕으로 생명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 그에게 상승하는 힘은 초극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또 “가파른 바지랑대에 몸을 묶어서” 하늘에 오르고 싶은, 허공을 움켜잡고 나아가고자 하는 초극의 정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존재, 그리움과 사랑의 힘
김완하의 시는 존재의 보편적 궁핍성에 대한 문제에 천착한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등장하는 어둠이나 밤, 겨울의 이미지는 바로 삶과 존재의 궁핍성에 대한 은유로 작용한다. 시인은 근원적으로 가난하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삶과 운명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어린 애정의 시선을 내비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시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정서는 남성적 의지력으로 결속된 강력한 수직 상승의 힘과 초극의 정신이다. 천상의 별을 우러르는 시인의 정신은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 극한의 절정에서 다다르고자 하는 의지적 욕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은 맑고 투명하며 염결성(廉潔性)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시에서 주목할 수 있는 정서는 정신적 순결함과 강직한 품성이다.
그가 네번째로 상재한 시집 『허공이 키우는 나무』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비탈을 기꺼이 수락하고 수직 직립하는 나무나, 끝 모를 벼랑의 절정을 향해나가는 의지적인 정신이다. 그것은 초기의 시에서 나타나는 삶에 대한 사랑과 희망의 정신에 긴밀히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이와 같은 우주적 원리로서의 길에 도달하는 과정에는 삶과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확인한 후에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삶의 생명성에 대한 애착은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경험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삶에서 느끼게 되는 경험세계의 것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삶에 대한 긍정의 형식과 생명에 대한 사랑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김완하의 시에서 길이 삶의 보편적 원리와 생명의 원리, 또는 우주적 원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의 길목에는 그리움의 정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표백된 작품들이 자리한다.
보편적 존재와 삶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와 사랑의 정신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시적 자아를 초월하여 타자를 향한 것이고, 뭇 존재들이나 공동체와 함께하는 열린 정서이다. 이 타자와의 연대감이나 유대감은 시적 자아 안으로만 향한 세계라기보다는, 세계내에 존재하는 보편적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개방된 형식을 취한다. 시인에게 삶과 존재들은 서로 “기대지 않고는 설 수 없”고 “휘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비탈”과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지 않고서는 “하나의 기둥”(「나팔꽃의 꿈」)으로 설 수 없다. 그의 시는 자기 독백적인 개별적 자아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지만 그것은 특수한 자아의 개별적인 목소리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실존적 존재가 내뱉는 목소리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감동을 유발시키며, 읽는 이로 하여금 정서적 공감의 영역을 확보하는 요인으로 기능한다.
돌아보면 내 몸 구석구석
네 그리움으로 커온 길이 있다
발자국이여,
네가 먼저 마을에 가 닿았구나
「발자국」 중에서
김완하의 시에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정서가 깊이 투영되어 있다. 시인이 길을 가는 것은 “사람이 사는 마을에 가 닿기” 위함이며, 그것은 그리움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같은 정서는 첫 시집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의 시에서 모든 길은 “길은 마을에 닿”(「눈발」)는데, 사람이 사는 마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그리움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움은 삶의 가치이며, 믿음의 표상이자 자아의 순수성을 지켜내는 ‘별’을 우러르게 하는 동인이기도 하다. 그리움이 길을 만들고, 길은 그리움으로 가득 하며, 그 길을 통해 시인은 사람이 사는 마을에 닿고자 한다. 두번째 시집의 표제시에서처럼 “그리움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움으로 난 길을 통해 시인이 이르고자 하는 곳은 사람이 사는 마을이다. 그곳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골목”(「별ㆍ1」)이기도 하고, “서로의 상처를 온몸으로 감싸 주”며 “하나의 뿌리로 여러 개 하늘을 품고/무더기무더기 꽃을 피우는”(「칡덩굴」)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모내기 다 끝난 다음날이면”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 빠짐없이 모여” “대동 천렵을 벌”(「대동천렵」)이는 유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은 “가진 것 없이 한겨울”을 지내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이지만 “홀로의 목마름 속”에서도 “뿌리로 몰린 생의 온기”(「생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사랑과 생명의 공간이다. 이와 같은 생명에 대한 사랑은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의 정서에서 촉발된 것이다. 특히 그의 세번째 시집 『네가 밟고 가는 바다』에는 존재에 대한 짙은 연민과 그리움으로 짜여 있는 시들이 많이 포진해 있으며, 이러한 작품들에서 그리움은 삶과 존재의 근원적 결핍성에 대한 희망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러한 세계가 네번째 시집에 이르게 되면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심화 확장된 모습으로 전이한다.
꽃이 진 그 자리에 움트는
잎은 그래도 얼마나 행복한가
하나의 죽음으로만 닿는
뿌리와 줄기의 캄캄한 거리
무너지는 삶의 흔적을 껴안고
겨우내 삭이고 삭인 뒤
하늘로 퍼올리는 푸르른 그리움
땅 밑을 헤매는 뿌리의 기도
이제, 봄이 오는 의미를 안다
「숲에서」 중에서
삶에 대한 연대의식과 사랑은 “꽃이 진 자리에 움트는”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게 한다. 소멸과 생성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역설적인 사유를 통해 가능해진다. 사실 김완하 시에서 역설적 인식은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시적 사유의 방식이다. “뿌리와 줄기”는 “캄캄한 거리”를 유지하다 “하나의 죽음으로만 닿”을 수밖에 없고, “겨우내 삭이고 삭인 뒤”의 소멸은 역설적으로 생성의 의미를 지니는 것과 같은 사유 방식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하늘로 퍼올리는 푸르른 그리움”과 “땅 밑을 헤매는 뿌리의 기도”로서의 희망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 희망의 원리는 삶을 떠받치는 그리움의 원리이고, 생명의 원리이기도 하며, 사랑의 원리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리움의 원리가 이제 그늘을 몸에 들이며 “내가 그늘 속에 뒤섞”(「내 몸에 그늘이 들다」)이는 혼융과 통섭(統攝)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김완하의 시에서 역설적 세계인식은 초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시적 장치이지만 네번째 시집으로 가까워올수록 그러한 세계인식은 더욱 깊어지는 양상을 띤다. 밤 하늘의 별을 우러르고 가파른 산을 오르는, 그러니까 수직 상승과 직립, 그리고 천체 지향성의 초극의 길은 같은 맥락에서 허공을 향하고, 벼랑을 지향하게 된다. 이러한 허공의 이미지와 벼랑의 이미지는 별안간 나타난 생소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그의 초기시에서부터 단초가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공은 모든 존재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우주적 원리로서의 트임의 길이다. 또한 시인 개인적으로 허공은 삶의 극한, 혹은 그 극한의 절정에 올라 서서 세계와 팽팽히 맞서고자 하는 ‘벼랑의 정신’이다.
4. 허공, 생성과 트임의 길
김완하에게 길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부터 네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는 이미지이며, 그런 만큼 시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배적으로 기능한다. 특히 길의 이미지는 네번째 시집에 이르러서는 허공이나 벼랑, 그리고 나무와 물과 집의 이미지와 함께 어울리면서 삶과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심화 확장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고 버티면서 삶을 걸어가는 자로서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조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폭넓게 획득하고, 또 그 깊이가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깨닫고 발견하는 자리가 철학적 사유의 고심 끝에 얻어지는 뭔가 심오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 경험세계의 자리에서 발견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일상의 경험세계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시인은 “땅에서 부활하는 순간이/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매미의 무덤」)이라든가, “폭설이 벽이 아니고 나를 막는 것은 내 안의 벽”(「폭설에 막혀」)이라는, 혹은 곶감처럼 “얼었다 풀리는 시간만큼 몸은 달고/기다려온 만큼 빛깔”(「허공에 매달려 보다」)이 곱다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상적이지만, 그것을 매우 낯설고 역설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시적 발상을 출발시킨다.
길 따라 흐르며 그 길 가득 채우는
또 하나의 길
시간과 하나 되는 물이여
절대 뒤돌아서지 않는, 길이여
길 위로 흐르면서 이미 길이 아닌
하나의 길을 비워내
다시 길을 여는 저 물의 길
「물」 전문
길은 일반적으로 시간적ㆍ공간적 계기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상징체계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계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관계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기성은 시작과 끝, 연결과 단절 사이의 긴장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많은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시적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동양적 사유에서 길은 물리적인 시간성이나 공간성을 초월하여 삶의 원리나 존재의 생성원리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삶의 규범이나 우주의 원리에 따른다는 의미가 바로 것이다. 아무튼 길은 현대시에서 중요한 재원의 하나로 작품 속에 다양하게 수용되고 있는데, 김완하의 길은 말하자면 자기실현의 방식이거나 존재의 생성과 트임, 혹은 존재의 어울림과 혼융, 즉 통섭의 길로 집중된다는 점이다.
물의 길을 노래하는 위의 시에서처럼 길은 “길 따라 흐르며 그 길 가득 채우는/또 하나의 길”이다. 그것은 “길 위로 흐르면서 이미 길이 아닌” 길이고, “비워내”고 “다시 길을 여는” 마감과 트임, 막힘과 열림, 시작과 끝, 단절과 연속의 역설적인 길이다. 그것은 물의 이법처럼 흐르면서 채우고, 채워지면 비우는 삶의 이법을 말하는 동시에 함께 어울리는 통로로서의 길이다. 각각의 존재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것이 김완하의 길이며, 모든 존재가 생명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양태로서의 상징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시에서 길은 “시냇물 흘러 강으로 스미고/바닷물은 수평선 쪽으로 가/하늘에 닿”(「처서 지나」)거나, “햇살과 그늘을 두고/허공을 끌어안”으면 “비로소 서늘한 길이 열린다”(「내 몸에 그늘이 들다」)는 채움과 비움, 수평적 흐름과 멈춤, 그리고 수직적 상승과 하강의 우주적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따라서 길은 대나무나 대숲의 나무들 사이처럼 “캄캄한 구멍으로 열리”면서 동시에 “너와 나 사이에 맺히는//단단한 빛의 고리”(「대숲」)로 삶과 존재들 사이를 잇고 구성하는 원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길과 보이지 않는 길은 서로 같은 의미를 지닌다.
길은 김완하의 시에서 모든 존재는 삶의 원리에 따르고 어울림을 통해 더 큰 세계를 열어가는 상징체계이다. 더욱이 시인은 일관되게 길이 “열린다”(「내 몸에 그늘이 들다」), 그리고 “닿는다”(「처서 지나」), “품는다” “들어간다”(「꽃」) 등의 동사 진행형의 시제로 말한다. 이것은 갑자기 어느 순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쉼 없는 운동과 변화의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생성과 트임의 원리를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그 만큼 시인의 세계 인식의 깊이가 깊어졌고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를 실현하는 길과 존재들 사이를 잇고 어울리는 통섭의 길이 같다는 깨달음의 표현은 우주적 생성과 트임의 체계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확장의 심화된 세계는 결국 우주적 사유의 획득이라는 세계관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새들의 가슴을 밟고
나뭇잎은 진다
허공의 벼랑을 타고
새들이 날아간 후,
또 하나의 허공이 열리고
그곳을 따라서
나뭇잎은 날아간다
허공을 열어보니
나뭇잎이 쌓여 있다
새들이 날아간 쪽으로
나뭇가지는,
창을 연다
「허공이 키우는 나무」 전문
길이 존재 생성의 원리와 자기실현의 방식, 혹은 존재의 어울림과 혼융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면, 모든 존재가 생겨나고 어울리는 곳은 허공이다. 그것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작품이 위와 같은 작품의 경우이다. 허공은 위의 시에서 보듯 “새들의 가슴을 밟고/나뭇잎은 지”고 동시에 “새들이 날아간 후” 다시 열리고 또 열리는 막힘이 없는 공간이다. 허공은 나무들이 품어나가는 공간이고 새들이 날아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하늘이나 비슷한 의미이다. 새들이 날아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쌓이는 공간은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허공은 길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서 종종 ‘하늘’이나 ‘그늘’, ‘사이’나 ‘빈터’ 등의 이미지도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허공은 “그림자로 엉기어” “몸을 섞”(「한쪽 어깨를 밀어주네」)는, 혹은 “나무는 햇살과 그늘을 두고/허공을 끌어안으”며 “서늘한 길을”(「내 몸 속에 그늘이 들다」) 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가 된다. 허공은 만물이 생성하고 서로 통섭하는 태허(太虛)의 열린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을 따라서/나뭇잎이 날아”가는 허공을 여니 “나뭇잎이 쌓”여 있다. 빈 나뭇가지 사이에는 어떤 막힘이나 소멸의 흔적이 없다. 모든 것은 길을 통해 허공으로 이어지고 스스로 존재의 창을 연다. 나뭇잎이 지고 새가 날고 나뭇잎이 쌓이는 이치는 이미 허공 속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만물은 허공의 움직임 속에 빚어진 형체일 뿐이고, 생명이 시작되는 것과 마감되는 것 역시 하나의 길, 허공의 길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모든 존재가 계속 변화하는 과정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김완하의 시에서 허공은 “푸른 잎새들 팔을 뻗어/하늘 깊숙이 손을 묻는” “나무들의 집”(「허공은 나무들의 집」)이거나, “따스한 물 속”의 “집”(「허공 속의 집」)이며, “능소화 은행나무 허리 껴안고”(「능소화 1」) 오르는 하늘이기도 하고, “내 안의 빈 터”(「벼랑에 서다」)이기도 하듯, 허공은 하늘의 일부거나 비어 있는 공간의 의미로 나타난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의 허공은 “두 겹의 짙은 그늘이 깔리며” “그림자로 엉기어” “몸을 섞는”(「한쪽 어깨를 밀어주네」) 통섭의 공간이기도 하고, “단단하고 떫은 시간의 비탈을 벗어나” “내 몸 말랑말랑 달콤해”지기 위에 “몸을 다는 시간”(「허공에 매달려본다」)으로서의 모든 존재가 자기를 실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럴 때 허공은 단지 공간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시작되거나 마감하는, 그리고 서로 함께 어울리는 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존재생성의 원리와 우주적 원리에 포획되는 전체론적 사유의 결과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김완하의 『허공이 키우는 나무』에 실린 시들은 허공으로 가득하고, 또 허공으로 비어 있다. 허공은 모든 것을 관장한다. 허공은 꽉 찬 것으로 비어 있고, 비어 있는 것으로 꽉 찬 노자의 그릇과 같다. 이런 의미에서 허공은 단순한 공간적 의미를 넘어서 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생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근원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즉, 잠재된 가능성으로서의 의미와 함께 생명의 전과정을 주재하는 시간성을 함께 지닌다. 따라서 허공은 존재의 근원이며 동시에 모든 것들이 ‘사이’를 두고, 또 ‘그늘’과 ‘빈터’를 두고 어울리는 통섭의 공간이다. 이러한 근원에 대한 인식은 세계와 나를 분리하는 시간관으로는 획득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 그것은 세계와 나를 하나로 보는 전체론적이고 우주적인 사유를 통해서만 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만큼 김완하 시인이 거니는 사유의 숲은 더욱 깊어졌고, 그 숲으로 이르는 길가엔 존재의 자기완성을 향한 나무들이 울창하다. 이제 시인은 “나무들 서로를 품으며” “보듬어 안는”(「숲의 힘」) 통섭의 숲에 든 것이다. 시인의 더욱 깊어진 사유의 숲, 그 나무들 ‘사이’의 ‘그늘’이나 ‘비탈’과 ‘벼랑’ 사이의 ‘허공’을 함께 거니는 일은 즐거운 행복이며, 팽팽하게 긴장된 벼랑의 정신적 높이를 함께 느끼는 일이다.
5. 허공의 길
김완하 시인에게 길은 시인의 시세계를 형성하는 데 지배적으로 기능한다. 길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김완하의 시세계는 삶과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귀속된다. 길은 삶의 형식으로서 김완하의 시정신을 관류한다. 특히 길은 최근에 이르러서 허공이나 벼랑 등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삶과 존재의 생성과 트임, 존재의 근원과 생명의 원리에 이르는 우주적 리듬을 반영하는 차원으로 심화 확장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고 버티면서 삶을 살아가는 자로서의 삶과 존재에 대한 관조적 깊이와 철학적 사유를 폭넓게 획득하고, 또 그 깊이가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다.
김완하의 시는 존재의 보편적 궁핍성에 대한 문제에 천착한다. 시인은 근원적으로 가난하고 결핍된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어린 애정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은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생명의 원리, 그리움과 사랑의 힘으로 이를 초극하려 한다. 이와 같은 점에서 우리가 그의 시에서 주목한 것은 남성적 의지력으로 결속된 강력한 수직 상승의 힘과 역동적인 초극의 정신이다. 우리는 그의 시에서 삶의 존재론적 한계를 넘어서 극한의 절정에서 다다르고자 하는 시인의 강직한 의지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벼랑의 정신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그가 최근에 보여주는 세계는 절정을 향한 초극의 정신이다. 이러한 초극의 정신은 삶에 대한 사랑, 존재론적 그리움이 긴밀히 맞닿아 있다. 태허의 허공과 절정의 벼랑을 향한 초극의 정신이 지닌 치열성과 염결성, 그리고 그 정신이 함유하는 자질로서 생성과 트임이라는 우주적 원리로서의 통섭의 삶은 허공에 대한 인식에서 구체화된다. 김완하 시인이 거니는 사유의 숲은 더욱 깊어졌고, 그 숲으로 이르는 길가엔 존재의 자기완성을 향한 나무들이 울창하다. 시인의 더욱 깊어진 사유의 숲, 그 나무들 사이의 그늘이나 비탈과 벼랑 사이로 난 허공의 길을 함께 거니는 일은 즐거운 행복이다. 허공, 그 벼랑의 길에는 팽팽하게 긴장한 김완하의 정신 지향과 높이가 자리한다.〔2007〕
05/29/12 버클리 문학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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