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 「라산스카」
2012.07.02 23:38
김종삼의 「라산스카」를 배달하며
소설가 강석경은 한 권짜리 『김종삼전집』 뒤에 실린 김종삼론 「문명의 배에서 침몰하는 토끼」에
에밀 시오랑의 글 두 줄을 제사로 썼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나 자신을 견딥니다.”
견디다, 견디다, 견디다, 견디다, 견디다…….
명민하고 아리따운 강석경이 젊은 날에 무산자 보헤미안 노시인 김종삼을 만난 뒤 쓴
「문명의…」에는 김종삼의 생생한 육성이 여럿 담겨 있다. 그 중 하나.
“라산스카가 뭐냐고? 밑천을 왜 드러내? 그걸로 또 장사할 건데. 묻는 사람이 여럿 있어요.
안 가르쳐 줘요.”
하긴 라산스카가 뭔지 몰라도, 팔레스트리나 들어본 적 없어도, 「라산스카」를 읽으며
비통한 전율을 느끼는데 하등 장애가 없었다. 그래도 문득 궁금했는데
고종석 시론집 『모국어의 속살』에 의하면 김종삼의 라산스카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뉴욕 출신 소프라노 가수 헐더 라샨스카라고 한다.
내친 김에『모국어의 속살』에 실린 김종삼론 한 부분을 옮기겠다.
“김종삼은 외래어를 그려다 붙이며 제 교양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 의지해
정서적 확장과 공명을 이뤄내는 데 자주 성공했다. 말하자면 그
고유명사들을 장악하고 있다.”
핵심을 제대로 짚었다. 김종삼 선생이 봤으면 기특해하셨을 글이다.
어떤 시인들에게 이제 김종삼은 전설적 시인이며 “내 영혼에 존재하는 나라다”.
선생이 그토록 혐오했다는 팝송을 즐겨 듣는 통속한 나도 그의 시를
성소(聖召)처럼, 본향처럼 여기는 시인의 하나다. 음악으로 치면기악곡처럼
추상적이고 알쏭달쏭한 게 김종삼 시의 특징인데, <라산스카>는
짧지만 전하는 바가 명료하다. 죽어서도 영혼이 없으리라 싶게
죄의 물살에 휘말려 떠오르는 전생애 감각. 이 죄를 어떻게 견딜까!
팔레스트리나를 들으면서 「라산스카」를 읽어 봤다. 한 곡을 채 못 듣겠다.
훅 끼치는 내 죄의 기세에 속이 메슥거린다.
팔레스트리나는 참으로 가학적인 음악이다. 죄를 씻어 주는 게 아니라
끝없이 환기시키며 주위 공기를 습한 죄의 입자들로 자욱이 채운다.
아주 숨통을 죈다. 팔레스트리나가 시 「라산스카」를 쓰게 한 게 틀림없다.
시 속의 라산스카, 헐더 라샨스카는 아마도 팔레스트리나의 대척점에 있으리라.
나를 구원해다오, 라산스카! 그리운 안니 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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