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keley literature class #1

2012.05.12 03:14

강학희 조회 수:190 추천:8

창작방법을 통해서 본 만해 시의 이해 / 김완하


왜 다시 만해인가


최근의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과를 설치했다. 또한 대학의 사회교육원이나 사설 교육기관에서도 시 창작 강의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시 창작방법과 시 창작 교육이라는 문제가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 또한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시 창작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시 창작방법론을 어떻게 일깨워줄 것인가를 많이 고심하고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기존의 시 창작 교재를 통해서 원칙론적으로 접근하는 길이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 문학사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시인들의 시세계를 창작방법의 실제로 접근해 보는 길일 것이다.

한국 현대시사에 높은 시적 성과를 보여준 시인들은 그들만의 시 창작방법을 구사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시 창작방법으로 시적형상화를 꾀했다. 우리가 만해의 시에 다시 주목하는 이유도 이 대문이다.

현대시에서 만해의 시는 여러 면으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한 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통해 완성도를 갖추고 궁극에는 문학적 감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점에서 그의 시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또한 만해는 불교사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해 냄으로써 한국 현대시사에서 사상적 깊이를 확보한 선구적 시인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 점 또한 오늘날 우리가 다시 만해의 시를 재평가해야 할 주요한 요소이다.


만해 시의 보편성

만해 시문학 연구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김재홍 교수는 그의 저서 『한용운 문학연구』에서 만해 문학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한국 신문학사를 논하면서 만해 문학은 우리가 반드시 뛰어넘어야 할 가장 큰 봉우리의 하나로 생각된다. 단지 그의 문학이 지닌 예술적 형상성의 우수함 때문만은 아니다. 또한 그의 문학이 전통과 현대의 맥락을 이어주는 소중한 문학사적 다리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의 문학은 험난한 역사를 살아가는 예지와 용기를 가르쳐주며, 생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신념과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다는 점에서 참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의 문학이 한국문학에 가장 부족한 요소인 종교적 명상의 진지함과 형이상학적 깊이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문학에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관념적인 주장에 의한 종교적 깊이가 아니라 세속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이상적인 삶을 갈망하는 신성 지향의 숭고함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와 현실, 사회와 상황에 치열하게 부딪치면서도 물러나 정관하고 투시하는 구도자적 삶 속에서 만해가 견지한 미적거리와 형이상학적 주제의 진지함은 한국문학의 원숙을 위해 참으로 값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일관성 있는 행동에 다른 실천의지와 지조를 깊이 있는 삶의 철학으로 이끌어 올리면서 끊임없이 변모하고 스스로 뛰어넘는 만해의 예술혼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소중한 정신사적 자산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은 만해 시의 문학적 본질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만해 시의 창작방법이자 원리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시를 쓰는 젊은이들이라면 만해의 문학을 통해 시 창작이란 손끝이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성취하는 생의 전체와 맞먹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좀 더 숙연해져야 할 것이다.

2005년도 만해대상 수상자이자 1983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소잉카도, 만해대상 문학부분 수상 연설에서 만해 문학과 만해 사상이 가잔 세계적 보편성에 대한 평가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 문학도 세계적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할 21세기의 지평 위에서, 만해의 사상과 문학은 이렇듯 한국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적 관점과 관심 위에서 평가받고 있다. 이 점 또한 오늘 창작 현장에 서 있는 젊은 시인들이 만해의 시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님의 침묵』》 창작 배경

『님의 침묵』은 1926년 5월에 서울 회동서관에서 간행되었다. 만해는 1919년 3 ․ 1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 민족의 절망스런 분위기와 침체된 의식세계를 일깨우기 위하여 백담사에 칩거라면서 《님의 침묵》을 집필하기에 이른다. 한 개인으로서의 울분 이전에 우리 민족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민족의 비애감을 극복하기 위한 만해의 크고도 높은 시 창작 의지가, 불교사상과 융화되어 그의 시집 《님의 침묵》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시를 쓸때에 즉흥적으로 몇 편의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만해의 경우처럼 분명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전체적인 구상과 구성을 통해 집중적으로 한 권의 시집을 쓴다면, 좀 더 높은 시적 성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점은 시 창작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새겨보아야 할 문제라 할 수 있다.


능동적으로 희생을 감내하는 시적 자아상

시는 화자가 청자에게 만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시 창작에서 시인은 가상의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현실의 상황이 아닌 상상을 통해 창조해 낸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시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그것에 어울리는 역할을 한다. 시인은 그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화자를 설정하여 그의 목소리로 시에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 목소리와 역할은 시적 화자의 개성을 드러낸다.
만해 시에 나타나고 있는 화자의 목소리는 일반적으로 여성적이다. 또한 그의 화자는 님을 향하여 질투하고, 그리워하고, 외로워하는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즉 ‘님’이라는 상징체계를 향하여 지극히 인간적인 갈등과 번민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듯 만해 시에서는 역동적 ․ 능동적으로 희생을 감내하는 시적 자아
상의 형성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어조는 무겁고 관념적인 불교사상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하여 차용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어조는 무거운 주제를 쉽게 수용하여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상된 것이다. 이러한 시적 어조는 그의 시를 연애시로부터 종교시로까지 폭 넓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즉 님의 의미의 다층성을 성취하게 하는 양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연작시의 형식과 극적 구성

우리 시인들의 시는 다양성은 보여주지만 전문성이 결여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연작시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만해의 시는 연작시의 형태를 취하여 불교사상의 깊이까지 담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의 층위는 자연사적 단계 ․ 인간사적 단계 ․ 사회사적 단계 ․ 신성사적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이 네 가지 단계를 전체적으로 아우르면서 종국에는 그의 사상적 깊이를 담아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은 그의 연작시 형태에서 성취되고 있다.

이 점은 오늘날 시를 쓰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에게도 필요한 방법일 수 있다. 시를 쓸 때 우리는 ‘무엇을’과 ‘어떻게’의 두 가지 측면을 고심하게 된다. 그러나 연작시는 하나의 테마를 갖는 것으로서 ‘무엇을’에 대한 고민을 벗어나 ‘어떻게’에 관심을 집중시켜 시 창작의 활성화를 꾀할 수 있게 한다.

만해는 그의 시 <군말>에서 시집 전체에 대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어서 <님의 침묵>에서부터 <사랑의 끝판>까지 이어가고, 마지막으로 <독자에게>라는 시로 탈고의 마지막 심정과 독자에 대한 당부를 붙이고 있다. 이렇게 하여 《님의 침묵》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상징체계를 갖는다.

또한 그의 시에서 극적인 구성들이 나타나고 있다. 님과의 역학관계나 대화체로의 사용, 상황의 연출 속에서 펼치는 동작 등 시 장르에서의 극적 구성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을 김지하의 시와 황지우의 시, 그리고 장정일의 시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독자를 잃어가는 현대시의 대안

오늘날 독자들이 현대시에 대해 갖는 불편함은 장황한 설명식 문체, 알 수 없는 넋두리, 과도한 해체와 실험성에서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만해의 시는, 현대시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듯하다. 그의 시에 내재하는 의식세계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 창작방법은 독자가 그의 시를 무리 없이 읽어 내려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만해의 시가 쉽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물 흐르듯이 읽히면서도, 그 안의 의식세계를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전달해 준다. 다양한 비유와 형상화 방법으로 서서히 독자들을 이끌어가면서, 마침내 그의 사상적 깊이에까지 이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비유 및 역설의 미학

만해 시는 직유에서 은유 나아가 상징에 이르기까지, 시 창작법의 전형이 될 만한 비유의 보고(寶庫)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일례로 그의 시에서는 직유와 은유가 동시에 섞여서 쓰이기도 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님의 침묵」 부분

이 시 구절에서 “황금의 꽃같이”와 “차디찬 티끌”은 은유와 직유의 동시적 사용으로 그의 시에 활력을 더해주고 있다. 이렇듯 그의 시를 살펴보면 다양한 비유법의 양상과 실제를 발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시 창작의 예를 모색할 수 있다.
또한 만해 시의 묘미는 그의 역설의 미학에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의 존재와 우주의 원리 속에 내재하는 모순의 진리를 포괄하기 위해서, 역설은 매우 주요한 시적 원리이자 창작방법이다. 독자들은 만해의 시에서 표면적 의미와 이면적 의미 사이의 차이를 읽어냄으로써, 그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체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원리와 그 실제로서 만해의 시는 대단히 유용하다고 하겠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님의 침묵」 부분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은 미(美)의 창조」 부분

그의 항거(抗拒)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부분

사랑의 속박은 단단히 얽어매는 것이 풀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해탈(大解脫)은 속박에서 얻는 것입니다.
-「선사(禪師)의 설법」 부분

사람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가까워지고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멀어진다.
-「그를 보내며」 부분

이러한 표현들은 보다 근원적인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적 차원의 갈등을 넘어서는 지혜로 작용하고 있다. 그의 시는 놀라운 역설의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 그것은 불교적 사유인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역설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의 시적 기법은 사상이나 관념의 깊이를 수용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그의 역설법은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인간사의 역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시 낭송의 적합성

현대시는 리듬과 운율을 잃어가고 있다. 난해한 표현과 산문 투로 이어지는 현상이, 독자들과 멀어지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독자들과 시를 다시 가깝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 낭송의 중요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만해의 시는 시 낭송에 적합하다. 그의 시가 운율과 리듬의 속성을 바탕으로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시는 노래다’라는 사실을 만해는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 창작방법에서 산문적 형태의 시와 리듬 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데, 만해 시는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해는 시가 읽히기도 하는 것이지만 노래되는 것이라는 점을 깊게 인식하여, 시의 대중화에도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시인들은 만해 시를 낭송해 보고, 그 깊이에서 울려나오는 언어의 힘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그의 시적 리듬감을 자세히 파악하여, 스스로의 시 창작에 원용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관념적 주제를 구체화한 감각적 표현

다양한 감각적 표현은 시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관념을 실체화하면서, 시를 한층 정감 있게 한다.

만해의 시는 매우 심오한 종교적 ․ 사상적 주제를 지향하면서도, 대단히 감각적인 표현을 구현해 내고 있다. 이 점은 성서 ‘아가서’ 등에 나타나는 육감적 표현과도 견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의 직접적인 전달 효과를 위한 하나의 방법, 즉 관념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그의 시가 추구한 형상화의 한 방편이었다. 몇 구절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님의 침묵」 부분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 도금한 금방울이다.
칼로 벤 이별의 키스가 어디 있나요.
- 「이별」 부분

꽃향기의 무르녹은 안개에 취하여 청춘의 광야에 비틀걸음치는 미인이여.
죽음을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웁게 여기고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얼음처럼 마시는 사랑의 광인이여.
- 「슬픔의 삼매(三昧)」 부분

님의 사랑은 강철을 녹이는 불보다도 뜨거운데 님의 손길은 너무 차서 한도가 없습니다.
나의 작은 가슴에 타오르는 불꽃은 님의 손길이 아니고는 끄는 수가 없습니다.
- 「님의 손길」 부분

나는 당신과 떠날 때에 입맞춘 입술이 마르기 전에 당신이 돌아와서 다시 입맞추기를 기다립니다.
- 「인과율」 부분


토속어 사용과 전통계승 및 심화

만해는 충청도 방언이나 토속어를 효과적으로 써서 시적 의미를 강화하기도 했다. 시인은 민족어의 완성과 연마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기표의 우위성에 놓여 있는 시어에서, 토속어와 방언의 사용은 삶의 리얼리티와 현장감을 일깨워주는 매우 중요한 방법이다.

정수박이(정수리) / 갓이없는(가없는) / 자기자기한(아기자기한) / 자먁질(자맥질) / 새암(샘) / 쩔러서(짧아서) / 나한지(나한테서) / 님한지(님한테서) / 제워서(겨워서) / 포시랍고(포동포동하고 보드랍고) / 사리뜨리다(‘사리다’를 강조한 말) / 시친듯(씻은 듯) / 달금하다(부드럽고 달콤하다) / 곱드리다(여러 겹으로 꼬다) / 갈궁이(갈고리) / 기루다(애절하다) / 비겨(비유해서) / 뒤움박(뒤웅박) / 도롱태(나무로 만든 수레) / 목마친(목이 메인) / 그물치다(꾸미어 장식하다) / 숫옥(순정한 옥) / 각근한(충실한) / 비슥이(비스듬히) / 몰란결(모르는 결) / 촌집(초가집) / 저퍼하다(저어하다)

아울러 그의 시는 우리 전통을 계승하고 그것을 심화하는 측면에서도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시의 전통을 살펴보면 어려운 시대일수록 시인의 목소리는 여성적으로 나타나, 시대의 어려움과 고뇌를 깊이 끌어안으며 시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시의 전통과 만해의 시가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시 창작방법론에 있어 전통에 뿌리를 둔 새로움의 추구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스며듦과 파급효과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만해의 시는 산문적 형태시와 리듬 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구체적이고 모범적인 예이다. 또한 그를 통해 역동적 ․ 능동적으로 희생을 감내하는 시적 자아의 형성 과정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만해 시는 오늘날의 시인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예를 들어 만해처럼 시인의 이력이 시 해석에 영향을 주는 경우, 시의 의미가 위축되거나 훼손되기 쉽다. 외적 정보에 영향을 받는 만큼 의미 해석이 고정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해의 시를 통해 외적 정보에 의지하지 않는 시 해석과 감상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만해 시는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시인의 행동성과 고뇌를 보여준다. 시대와 시인으로서의 개인이 맺는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해의 시는, 읽고 느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시를 낭송하다 보면, 그의 시 안으로 점차 한 발자국씩 다가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 다가서다 보면, 그의 시 창작방법이 자연스레 전이되어 올 것이다. 그러한 스며듦과 파급효과, 그것이 바로 만해 시 창작방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처했던 암흑의 현실을 넘어 그것을 인류 보편성의 문제로 끌어올리려 했던 그의 시적 노력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시류에 휩쓸리며 새로움만 추구하려다 시간의 풍화작용을 제대로 견뎌내기 못하는 시가 많은 오늘, 젊은 시인들은 새삼 만해 시의 융숭하고도 깊은 의미에 젖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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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무릎

모래바람이 낙타의 속눈썹을 자라게 하고 목마름이 낙타의 등에 혹을 키운다.
선인장은 온몸에 가시를 꽂고 갈증을 견딘다.
스스로 사막이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곳, 바람이 모래 기둥으로 일어서는 사막에서
길을 찾아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낙타뿐이다.
그러나 뜨거운 모래 폭풍이 휘몰아칠 때 낙타도 가던 발을 멈춘다.
무릎을 꿇고 모래 폭풍이 그치기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사막을 건너는 힘은 참을성 있는 낙타의 무릎에서 나온다.
굳은살이 박힌 낙타의 무릎만이 모래언덕을 넘을 수 있다.
낙타의 양쪽 무릎에 붙은 혹은 고난의 상처이다.
시의 사막을 헤메는 시인도 낙타의 무릎을 가졌다. 신기루 같은 시는 설핏 보였다가 사라진다.
바람은 약대를 거느리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들의 발자국마저도 모래밭에 묻는다.
가끔 길을 잃은 사람의 뼈를 꺼내 보여주는 사막에서 시인은 좌절하고 털썩 무릎을 꿇는다.
오아시스 같은 시 한 편을 만나 목을 축이기 위해 시에 목마른 시인은 낙타처럼 몸을 낮춘다.
막막한 사막에서 두 손 모으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타는 입술로 시를 불러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낙타의 무릎을 가질 수 없다.
사막을 건너려면 한 마리 낙타가 되어 혹이 불룩하게 솟을 때 까지 터벅터벅 걸어야 한다고 했다.
스스로 낙타가 되지 않는다면 깊은 땅속의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낼 수 없다.
당신은 낙타가 된 적이 있는가?
낙타의 젖은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사막의 복병은 또 있다. 그것은 외로움이다 끝없는 사막에서 엄습해 오는 고독과 싸워야한다.
"오르탕스 블루"는 사막이라는 시에서 외로움을 이렇게 말 했다.
그 사막에서 그는 / 너무나 외로워 / 때로는 뒷걸음질로 /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 보려고
이 짤막한 시는 파리 지하철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 당선작이다.
인적이 끊긴 사막에서 뒷걸음치며 자신의 발자국을 보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한다.
불안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인간은 너무 나약한 존재다.
사막에서 외로움이란 곧 죽음과 같은 것이다.
무릎이 없는 나무는 늘 서 있다. 몸을 굽힐 수 없어 그대로 벼락을 맞기도한다.
구부리지 못하는 나무는 바람에 꺽이거나 뿌리채 뽑혀 쓰러지기도 한다.
나무는 스스로 몸을 낮출 수 없다. 신은 인간에게 왜 무릎을 주셨을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에 관절이 있기 때문이다.
겸손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일줄 모르는 사람은 마음의 관절에 이상이 생긴 사람이다.
뻣뻣한 관절로 지내는 사람은 자칫 부러지기 쉽다.
펜혹이란 말이 있다. 컴퓨터가 나오기 이전에 대부분 펜이나 연필로 직접 글을 썼다.
필기구를 잡고 글을 오래 쓰다보면 펜을 잡은 손가락에 딱딱한 못이 박힌다.
펜혹은 글이 남긴 아름다운 상처다.
어느 시인은 펜혹이 없는 시인의 손은 신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펜혹의 두께로 글쓰기로 보낸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펜혹도 낙타의 무릎과 같은 것이다.
원고지를 메워간 그 많은 땀 방울이 무릅을 꿇고 흘린 기도와 다를 것이 없다.
시인은 무릎을 꿇어야 한다.
낙타가 제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시듯 몸을 헐어 시를 뽑아 올려야 한다.
시인은 낙타가되어 뜨거운 시의 사막을 맨발로 건너야 한다.
눈을 뜰 수 없는 모래폭풍를 견디어야한다.
굳은 살이 박히도록 수천만번 세상에게 낮아져야한다.
눈물을 뿌려보지 않고 어덯게 아픔을 말할 수 있겠는가?
아픈 척하는 시인의 엄살엔 고통이 없다. 감동이 없다.
시인은 시 한편을 낳기 위해 앓고 또 앓아야 한다.
그것이 시의 힘이다.
좌절과 위기를 통해 낙타의 무릎은 만들어 진다.
신은 왜? 우리에게 무릎을 주셨을까?

(이 글은 "우리시" 2007년 9월호에 실린 마경덕 시인의 <낙타는 무릎을 꿇는다>라는 엣세이의 한부분을 발취하여 소개하는 것 입니다.
마경덕 시인의 말 처럼 "무릎 아래" 슬하"(膝下)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봅니다.
어찌 시 뿐이겠습니까?
우리들 인간의 마음과 행동 모두가 고통이며 시련이며 또한 패배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도리와 본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결코 아름다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질 수 없을 것 입니다.

삶에 대한 절망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삶에 대한 사랑도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충만된 기쁨과 행복을 실감하기 위해서 인간은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고통을 참으며 인내하는 지혜와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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