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1

2012.10.06 17:02

강학희 조회 수:435 추천:9

시와 언어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1

   1.1 시의 언어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의도적으로 우회하여 드러내는 언어양식이다.

  

                      맥락

       발신자 — 전언 — 수신자

                     접촉

                  약호체계

  

   어떤 사물이나 체험을 구체적으로 환기하기 위하여 시인은 단순명료한 해설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모호한 언어의 집합을 마련한다. 정곡을 찔러 말하지 않고 돌려 말하거나, 생략해 버리거나, 일상적 어법에 맞지 않는 엉뚱한 표현을 써서 독자의 즉각적 이해를 지연시킨다. 이러한 조작은 사물이나 체험의 구체적 질감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일상적 명명법으로 사물이나 체험을 표현할 경우 독자들은 그 이름만으로 내용을 지레 짐작해버린다. 그러나 그 이름을 떼어버리거나 다른 이름을 붙여놓을 경우 독자들은 그 이름 뒤에 있는 내용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시인이 시치미를 떼는 것은 독자들의 세심한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함도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단숨에 정곡을 찔러 전달하는 것보다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은 생략, 우회 등을 통하여 의도적으로 시의 즉각적인 이해를 지연시킨다.


   1.2 서정주의 다음과 같은 시는 시치미 떼기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바다속에서 전복 따 파는 濟州海女도/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물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시의 전복도 제일 좋은 건 거기 두어라./다 캐어내고 허전하여 헤매이리요?/바다에 두고 바다바래여 詩人인 것을…….(서정주 「詩論」 중에서)

  

   시의 전복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따지 말고 물 속에 붙은 그대로 남겨 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일차적으로는 시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모두 언어를 통하여 노출해버릴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특히 소중한 것은 가슴 속에 남겨두라는 뜻이다.

시세계의 차원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모두 노출하지 말라. 소중한 것은 가슴 속에 숨겨두라. 시창작 방법이라는 차원에서 제주해녀가 바다 속의 전복을 모두 따지 않고 남겨두는 것처럼 시인도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부 말하지 않고 생략한다. 정말 해야 될 말은 마음속에 남겨두고 그와 관련된 다른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시의 의미를 완성시키도록 한다.

  

   1.3 시인은 시치미를 떼고 매만을 보여준다. 매를 다 보여줄 필요도 없다. 상대편이 그 매가 누구의 것인지 겨우 확인할 만큼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만큼 더 열심히 매의 실체를 살펴볼 것이다. 시인은 사물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달하기 위하여 세세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많은 부분은 생략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우회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과장하거나 다르게 그리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물의 구체적인 실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의 독특한 힘이다.

  

2

  

   2.1 사물이나 체험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시의 목적, 그 목적을 위하여 그 대상을 우회하여 드러낸다. 시인은 왜 시치미를 떼야하고 시의 언어는 왜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이어야 하는가. 이 실마리는 언어의 속성에부터 찾아야 한다.

   말(언어)이란 어떤 대상이나 행위에 이름을 붙이는 것. 대상을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은 그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실상을 단순화하고 추상화해버린다. 언어는 사물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일단 언어로 명명되면 그 사물은 다시 숨어버린다. 언어는 일반화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물의 질감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언어는 주체와 대상 사이를 차단하는 장애물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사물과 접촉한다기보다는 그 사물을 대신하는 추상적 언어와 접촉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어는 사물의 존재체계를 대신하는 또 하나의 존재체계로 이미 사물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는 포도밭 언덕에/즐비한 시멘트 십자가를 타고/빛과 물로 싱그럽게 열리는//소리를//바닷속에 남기고 물고기들은/시체가 되어 어시장에서/말없이 우리를 바라본다./저 많은 물고기의 무연한 이름들//우리가 잠시 빌어쓰는//이름이 아니라 약속이 아니라/한 마리 참새의 지저귐도 전할 수 없는/언제나 벗어 던져 구겨진//언어는 불충족한/소리의 옷(김광규, 「詩論」 중에서)

  

   이 시에서 말하는 것도 언어는 사물과 분리된 껍데기일 뿐이라는 점이다. 싱싱한 사물, 생명의 소리를 다 잃어버리고 마치 생명의 장소인 바다를 잃은 어시장의 죽은 물고기와 같은 존재, 다만 이름뿐인 존재가 언어이다. 언어는 사물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소리나 뜻도 전달할 수 없는 “불충족한/소리의 옷”일 따름이다. 그러나 시는 그러한 불충족한 언어를 가지고 사물의 실체를 드러내려는 작업이다. 독특한 방식으로 언어를 조립하여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여기에서 독특한 방식이란 일상적 언어사용법에 대한 일탈을 말한다.

  

   2.2 시의 언어는 일상적 언어사용법에 대한 일탈이다. 형식주의자들은 일상언어란 사물을 지시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반면, 시적 언어는 지시와 전달이라는 일상언어의 기능에 의존하면서도 그 규범의 일탈을 통하여 독특한 언어구조물을 형성한다. 일상언어는 지시기능의 강조로 인하여 마치 하나의 기호처럼 단순화되고 일반화되는 것이 속성인데, 시의 언어는 단순해지기를 거부하고 언어행위가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배격한다.

  

           은피라미떼/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아침풀벌레 소리.(김종길, 「여울」 중에서)

  

   풀벌레 소리가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인다는 진술은 일상언어의 규범에는 맞지 않는다. 일상언어에서는 소리가 반짝일 수는 없다. 이것은 일상적 어법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독자들은 여기서 주의를 집중하고 왜 어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렇게 표현했는가 생각하게 된다. 즉 습관적 언어행위를 중단하고 “은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풀벌레소리”가 어떤 것일까 음미해본다. 그것은 맑고 상쾌한 아침 풀벌레 소리를 매우 선명한 구체적 감각으로 전달해준다. 여기에서 은피라미떼는 은피라미떼대로, 풀벌레 소리는 풀벌레 소리대로 생명감 있는 구체적 사물로 되살아난다. 일상언어 규범에 대한 일탈을 통하여 단순화를 거부하고 이해를 지연시키는 것, 즉 앞에서 말한 시치미를 떼고 우회하여 말하는 것은 바로 시적 언어의 본질에 기인하는 것이다.

  

   2.3 일탈을 통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전체 문맥에서 그 부분이 앞으로 돌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무카르죠프스키의 전경화(前景化), 일상언어의 규범에 맞는 부분이 배경(후경)이 된다면 일탈된 부분은 전경이 되어 독자의 주의를 끌고, 나아가 시적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참신한 비유가 오래 사용되어 그 일탈된 특성을 잃어버릴 때, 즉 전경화가 되지 못할 경우 독자들은 습관적 언어행위를 중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죽은 비유, 즉 상투어가 된다.

  

   2.4 습관적 언어행위를 방해함으로써 사물의 구체적 실감을 드러낸다는 이러한 논리는 단어의 차원에 적용될 때는 비유의 본질이 되고, 작품 전체의 차원에 적용될 때는 예술의 본질이 된다. 예술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처럼 습관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것을 처음 지각하는 하는 것처럼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늘 접하는 사물이나 사건에 무감각해지는 경향이 있다. 즉 우리의 지각은 자동화 ․ 습관화되어 있다. 예술은 바로 이러한 일상의 낯익음의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다시 낯설게 하여 지각의 신선함을 되살리는 행위이다. 형식주의자 쉬클로프스키는,

  

   그러므로 생활감각을 다시 갖기 위하여, 대상을 느끼기 위하여, 돌이 정말로 돌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목적은 대상의 감각을 인식으로서가 아니라 지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의 기법이란 대상들의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며, 그 형식을 애매하게 하는 기법이고,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을 증가시키는 기법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며 오래 끌어야 한다. 예술이란 대상의 생성을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며, 이미 생성된 것은 예술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쉬클로프스키, 「기법으로서의 예술」 중에서 )

  

   예술이란 사고와 지각을 의도적으로 어렵게 만들어 구체적인 사물의 질감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을 낯설게 하기라 한다. 즉 예술의 기법이란 우리가 자동화된 지각으로 접하고 있는 사물을 마치 낯선 사물을 처음 지각할 때처럼 정신작용과 시간을 많이 걸려 알게 함으로써 그 사물의 구체성에 이르게 하는 기술이다.

  

3

  

   3.1 지금까지 시치미를 떼고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우회하여 표현함으로써 사물의 구체적 질감을 전달할 수 있음과, 이러한 점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로 이론화했음을 살펴보았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작품의 형식이나 창작기법까지도 익숙해지면 지각의 자동화에 기여함으로 형식파괴와 기법 창조가 늘 요구된다고 하였다. 그래야만 낯선 것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2 낯설게하기의 방법 : 여백두기와 돌려 말하기, 여백두기는 부분으로 전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제유법적이다. 돌려말하기는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한다는 점에서 완곡법적이다. 여백을 많이 남긴다는 것은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워 넣어냐 할 부분이 많다는 것인데, 그 여백을 채워 넣는 과정에서 작품의 의미는 전달된다. 그리고 돌려서 말한다는 것은 익숙한 표현이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암시적으로 모호하게 말함으로써 사물의 구체적 실감을 전달한다. 시에서 모호함은 단순명료한 지시보다 사물의 본질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다.

  

   3.3 여백 남기기, 공백으로 남겨두는 방법, 독자는 자신의 상상력으로 빈 공백을 채워 넣어야 한다. 독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시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투정이다. 그것은 시의 근본 특성이기 때문이다.

  

내용없는 아름다움처럼//가난한 아회에게 온/서양나라에서 온/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진눈깨비처럼(김종삼, 「북 치는 소년」 전문)

  

   이 시는 3연이 모두 ‘~처럼’으로 끝나 있지만, 그 비교대상이 없다. 시인은 시 전체를 미완성 문장으로 남겨 둠으로써 독자들의 세심한 주의를 유발시키고 그것을 찾아내도록 한다. 예민한 독자라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비교대상이 바로 시의 제목인 것을 알게 되고 ‘북 치는 소년’이란 어느 서양화가의 그림 이름임을 짐작하게 된다. 시인은 지금 그림을 보고 그 그림의 아름다움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1연을 보면 그 그림의 아름다움이 바로 “내용없는 아름다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내용없는 아름다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2연과 3연에서 드러내주고 있다. 그 아름다움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카드는 구체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가난한 아회” 먼 서양나라에서 받은 카드, 즉 바로 그 아이의 가슴이 느꼈던 그런 아름다움이다. 시인은 지금 「북치는 소년」이라는 그림을 보면서, 어렸을 때의 그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면 3연은 무엇인가. 그것은 2연의 부연이다. 어린 양과 진눈깨비는 실제가 아니고 바로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 카드는 어린 양이 그려져 있고 반짝이가 까칠까칠하게 붙어있는 카드이다. 시인은 결국「북치는 소년」이란 그림의 아름다움이 마치 어렸을 적 받았던 크리스마스 카드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을 교묘하게 뒤틀어서 어렵게 만들고, 또 있어야 할 단어들을 생략하여 많은 여백을 독자로 하여금 채워 넣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시는 독자들에게 어린 동심이 먼 나라의 이국적 아름다움을 보고 느꼈던 맑고 깨끗한 감동의 세계를 다시 실감케 해준다. 이러한 여백의 미를 황동규는 잔상효과라 했다.




달 그늘에 잠긴/비인 마을의 잠/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성큼/남겨 놓은 채//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목이 쉬어 짖어대던/외로운 개//그 뒤로 누님은/말이 없었다//달이/커다랗게/불끈 솟은 달이//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김명수, 「月蝕」전문)

  

   이 시는 극도로 생략되어 독자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무엇인가 아름다운 느낌은 전달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극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극도로 생략하고 많은 부분을 여백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독자의 상상력이 극적 상황을 잘 추리하여 여백을 스스로 메울 때 이 시는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우선 전체의 느낌을 생각해 보면, 빈 마을에 누님이 있고, 붉게 물든 사내가 지나가고, 그 사실을 불끈 솟은 달이 가려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골격은 상당히 은밀하고 성적이다. 사나이와 누님의 관계는 알 수 없으나 비밀스럽고 일회적인 사건이라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2연에서 발자국을 성큼 성큼 남겨 놓았다는 것은 아마도 누님의 가슴(마음)에 그랬다는 것일 것이다. 누님의 두근거림이 성큼 성큼이란 말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 다음 3연과 4연은 동어반복이다. 개는 누님집에 있는 개일 것이고, 그것은 누님의 마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개는 외롭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목이 쉬도록 짖으며 내적 외적 유혹을 거부하는데, 이제 사나이가 비밀스럽게 지나간 뒤이므로 개는 다시 짖을 생각을 하지 않고 누님 역시 말이 없다.

   여기서 누님은 곱게 혼자 사는 여자이지만 그 이면에 성적 외로움을 깊이 감추고 있는 여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나이는 누님의 외로움을 침범하였지만 그것은 꿈속에서와 같이 외로움을 더 가중시켰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전의 외로움과 이후의 외로움은 그 결이 다르다. 누님의 몸과 마음에는 사나이의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이 찍혔기 때문이다. 사나의 정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초점은 상처 입은 누님의 외로움이다. 마지막 5연과 6연은 그날 밤의 사건을 다시한번 분위기로써 암시해준다. 이 분위기는 결국 이 시의 제목인 월식을 말한다. 달이 밝은 밤, 갑자기 월식현상이 일어난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모든 사건은 은밀하게 진행되어 버렸다.

   일반적으로 달은 여성을 상징하고, 밝은 달은 여성의 성적 욕구를 상징한다. 월식이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슬그머니, 잠시 동안 그 달을 먹어치우는 현상이다. 시인은 월식현상을 누님의 외로움을 몰래 훔친 사나이로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나이의 침입행위는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마을을 가려줌으로써 오히려 보호받는다. 5연의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은 성적 이미지가 강하다. 그 달과 같은 누님의 외로움이 사나이의 행위를 보호한 것이다.

   이제 이 시의 제목과 내용은 얼추 이해되었다. 월식현상이 있는 그 밝은 달밤의 교교하고 환상적이고 에로틱한 아름다움을 시인은, 누님에게 있었던 은밀한 사건을 제시함으로써 완벽한 등가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달 밝은 밤의 은밀함, 설레임, 갑자기 달이 가려지고 어둠이 덮였을 때의 비밀스런 두근거림 등등의 아름다움을 언어로 드러내기 위하여, 시인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뗀다. 그리고는 엉뚱한 극적 상황을 많은 여백과 함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이러한 우회통로를 참을성 있게 따라갈 때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 사물의 구체적인 질감과 만날 수 있고, 또 시인과의 깊이 있는 교류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시를 통해 사물의 진실에 이르는 길이며, 시를 읽는 기쁨이다.

  

  

   3.4 그런데 시인이 의도적으로 만든 우회통로를 알지 못하고, 그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불평을 하게 된다. 한 평자는,

  

   상당한 내용의 이야기를 생략 압축된 언어로 처리하는 솜씨, 그것은 목가풍 일변도인 청록파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사건의 구체성을 숨김으로써 독자와는 일정한 거리를 의식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의 실체마저 모호하게 한다.(김도연, 「쉬운 시의 힘」에서)

  

   첫째, 생략 압축된 언어로 처리하는 솜씨가 청록파의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이라면, 청록파의 한계는 언어의 생략 압축이 미흡했다는 점인가? 오히려 생략 압축된 언어야말로 이 작품과 청록파의 유일한 유사점이다.

둘째, 사건의 표면적 구체성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고 여백을 많이 둠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실질적인 구체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누님과 사나이 사이의 사건에 대한 줄거리가 아니라 윌식현상이 있는 밤의 미묘하고 환상적인 아름다움이다.

   셋째, 평자가 말하는 사건의 구체성이란 자세한 디테일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은 대개의 경우 시의 의미를 약화시킨다. 디테일을 많이 열거했다고 해서 그 사건이나 사물의 느낌이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한 디테일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독자의 상상력이 뛰어 놀 수 있는 방향과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이 시는 독자의 거리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마련해 준다.

   넷째, 작자의 의도가 모호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문학해석에서 극단적인 의도주의에 불과하다. 작품 해석에 있어서 작자의 의도가 고스란히 작품의 의미라는 생각은 순진한 견해이다. 작자의 의도가 전혀 백지상태의 독자에게 액면 그대로 전달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한 작품의 의미는 독자의 창조적 상상력이 적절하게 개입될 때 비로소 해석된다.

다섯째, 독자의 상상력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는 설명이나 구호이지 시가 아니다. 시는 본질적으로 애매모호한 점이 있다. 시의 애매성이란 시인의 무능이 아니라 의도된 의미의 일종이다. 애매성도 잘못이 아니라 시적 의미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3.5 시는 세세한 디테일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여백을 남김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구체적 실감을 훌륭히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민요를 통해 보자.

  

백확노단 속곳은 넓어서 좋고/호장저고리는 짧아서 좋고/야아야 총각아 손목을 놓게/길상사 접저고리 등이 나간다(경산지방 민요, 임동권 편, 『한국민요전집』 중에서)

  

   1, 2행의 의미는 간단히 짐작된다. 그것은 댓구를 이루면서 육체적 애무의 즐거움을 암시한다. 문제는 4행이다. 저고리의 등이 나간다(찢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아서 처녀와 총각은 야외에서 즉흥적이고 비밀스러운 사랑을 나누는 중이다. 저고리 등이 나간다는 것은 총각이 처녀를 거칠게 눕혔다는 뜻이 아닐까. 처녀는 총각의 강권에 못 이겨 누웠고, 그러면서도 총각을 뿌리치려고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거부이다. 왜냐하면 처녀는 저고리가 찢어지면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은 허락하되 옷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총각과 처녀간의 짙은 육체적 사랑과 그 사랑에 임하는 처녀의 미묘한 심리상태가 “길상사 접저고리 등이 나간다”라는 단 한 구절 속에 다 들어 있다. 사랑 행위, 성적 행위의 구체적 디테일은 거의 생략되고, 즉 사랑행위를 시치미 떼고 그 사랑의 농도와 감정을 실감나게 전달한다.

  

모든 슬픔의 역사를 말하려면/텅 빈 문간과 한 잎의 단풍나무 잎새면 되고/사랑을 말하려면/납작해진 풀밭과 바다 위의 두 불빛이면 된다.( 맥클리쉬, 「시법 Ars Poetica」에서)

  

   시에 대한 시를 쓴 것인데, 시란 조그만 부분으로 전체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납작해진 풀밭이면 족하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잔디밭에 앉아서 서로 나눈 그 푸르른 사랑을, 그들이 앉았다 가서 납작하게 누워버린 잔디을 묘사함으로써 충분히 실감나게 전달하는 것이다. “접저고리 등이 나간다”와 “납작해진 풀밭”이란 구절에 부딪혀 습관적 언어행위, 자동화된 지각 행위를 멈추고 그 의미를 캐는 수고를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구절들이 그처럼 미묘한 사랑의 모습을 감추고 있음을 알아차릴 때 독자들은 사랑의 두근거림을 직접 느낄 수 있다.

  

   3.6 돌려 말함으로써 낯설게 하기를 달성하는 작품을 보자. 지각의 자동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다른 방식으로 돌려서, 완곡하게 사물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近來安否問如何/月到紗窓妾恨多/若使夢魂行有蹟/門前石路更成沙(이옥봉의 시조)

  

   이옥봉은 기생신분의 여류시인이다. 님에 대한 그리움이란 주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수없이 반복되는 상투적인 주제이다. 1, 2행은 쉽게 이해된다. 화자는 달빛이 비치는 창가에 홀로 앉아 오랫동안 보지 못한 님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는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하는 상투적인 연애시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3, 4행은 좀 생각하게 만든다. 님을 직접 찾아갈 수 없는 사회적 여건 속에서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생각으로는 얼마나 님을 많이 찾아갔는지, 만약 생각의 오고감에도 흔적이 남는다면 아마도 님의 집 문 앞에 있는 돌길이 다 닳아서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님 생각을 매우 많이 했다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님에 대한 그리움이란 주제는 동서고금을 통해 수없이 반복된, 그래서 조금도 새로울 것 없는 주제이지만 그것이 이 시에서처럼 다르게 말해졌을 때, 즉 새로운 표현을 얻었을 때는 다시 생생한 느낌이 살아난다. 이 시는 그리움 또는 님 생각이란 말의 상투성에 가리어진 현실의 생생한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시적 감동을 마련해 준다. 새로운 표현이란 독자들로 하여금 습관적인 언어행위를 방해함으로써 사물의 실체와 다시 만나게 해주는 언어의 조립이다.

  

   3.7 잘못한 표현, 어법의 파괴

  

일체 말이 없다/벌써 6개월째 거시기 같지 않은 거시기만 들어온다/나가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누에일보>와 싸워 보겠느냐고 으름장이다/신문 안 볼 이유를 달라고 외치고 싶다 그러나/외쳐지지 않는다.(박남철, 「잠실통신」 중에서)

  

   이 시는 아예 잘못된 표현을 씀으로써 시적 의도를 전달한다. 이 시의 내용은 우리가 과거에 흔히 경험한 일이다. 신문배달부들은 발행부수 경쟁 때문에 구독자의 의향에 관계없이 무조건 신문을 배달하고 본다. 신문 보기보다 안 보기가 훨씬 어렵다. 예전 한때, 웬만한 가정에서는 신문배달부의 무작정 배달 때문에 골치를 앓은 적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때의 그 짜증스럽고 한심한 심경이 이 시에 절묘하게 드러난다. 1행의 “일체 말이 없다”는 뜻은 주인 허락 없이 신문 배달된다는 의미도 있고, 신문 내용 자체가 벙어리와 다름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2행에서 신문이라는 단어 대신 “거시기”라는 야유투의 부정대명사를 썼다. 즉 신문도 아니라는 말이다. 3,4행은 주객전도의 상황을 말을 바꾸어 씀으로써 표출하고 있다. 정상적인 상황은 배달부가 보아달라고 애원하고, 주인은 절대 볼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는 말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주인이 애원하고 배달부가 으름장을 놓는다고 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 다음 행도 단어를 의도적으로 바꾸어 쓰고 있다. 주인 입장에서는 신문 안볼 자유일 것이고, 배달부의 입장에선 “그냥 보시라는 데 안 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라는 뜻의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유와 이유를 바꾸어, 주인인 사람이 신문 안볼 이유를 달라고 하소연한다. 이 시에서는 생략되었지만 배달부가 “신문을 넣을 자유를 왜 박탈하느냐”라고 큰소리치는 것을 “신문 안 볼 이유”라는 구절에서 상상해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부적절한 어휘를 사용하여 그 상황을 더욱 적절하게 전달하고 있다.

  

   3.7 다음 시는 돌려서 말하기가 완전히 어뚱한 진술이 되어 있다. 즉 하고자 하는 말은 전혀 비치지 않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시인의 의도를 전달하는 경우이다

  

왜 말이 없나/죽었으니깐//죽었다고 말을 못하나/죽도록 살려고 했으나 죽었으니/말 못하겠다//말도 못하는 것이 땅에서/왜 동그랗게 튀어 나왔나/억새는 왜 뒤집어썼나/죽은 것이 어떻게 아나/너나 알지//그럼 왜 여기 누워 있나/다른 데 가지 왜 골짝에 모여 있나/할말 있거든 말해라/할말 있거든 말해라(이문길, 「무덤」전문)

  

   웬 미친놈이 무덤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고 있다. 이 시에서 어떤 이는 철학적인 의미를 캐려고 할지 모르나 아마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시의 표면적 의미는 터무니없음 그 자체다. 무덤에 시비를 거는 자도 그러하고 그 시비의 내용도 그러하다. 너무 엉뚱하여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시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의미는? 아무래도 말장난 같지는 않고 말 속에 뼈가 있다. 여기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긴장이 감돈다.

   한마디로 이 시는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의 터무니없음을 엉뚱하게 돌려서 야유하고 있다. 이성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비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고 주눅들게 하는 시대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고발이다. 말못한다 시비이고, 무덤이 무덤처럼 생겼다고 시비이고, 누워 있으면 누워 있다고 시비 거는 삶은 그 자체로 죽은 삶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무덤이고, 이 시의 제목도 무덤이다. 터무니없는 행패를 부리는 가해자가 “할말 있거든 말해라”라고 큰소리치고, 그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우리는 무덤 속에 있는 죽은 인간들인 것이다.

   이 시는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임을 완전히 엉뚱한 진술만으로 돌려서 말하고 있다. 원관념을 완전히 배제하고 보조관념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시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실마리는 시인과 독자가 공유하고 있는 삶의 체험이다.

  

   4.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지시나 설명이 아니라 침묵의 형식을 빌어야 한다. 그리고 문학예술은 어쩌면 드러냄과 감춤(관음과 노출)의 줄타기여야 한다. 모두 다 보여주면 그것은 포르노그라피에 불과하다.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수필가는 독자에게 어느 정도 불친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09/10/12 thru 09/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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