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4

2012.11.05 02:08

강학희 조회 수:751 추천:9


버클리 문학 문우들께


10월의 마지막 멋진 날입니다. 2012년 후반기 버클리 문학 강좌도 이제 한달 여 밖에 남지않았습니다. 세월이 가기 전에 알찬 열매맺으며 행복하게 살아야겠지요. 문학 (시와 수필과 소설과 문우들)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친구입니다. 김홍진 교수님이 준비하신 강좌내용을 첨부합니다. 모임에 오실 때 예습(!) 하시고, 사본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모임엔 지난 번 "Foster City JCC 예술전시회"에서 대상(Grand Prize)를 받으신 윤영숙 화백께서 저녁을 준비하십니다. 약속대로 맛있는 일식 건강도시락을 주문하십니다. 몇분이 오시는 지 알아야함으로 평소 참석하시는 회원들 중에 부득이 못오시는 분들은 금요일까지 꼭 연락 바랍니다 (새 회원들은 계수했습니다. -  KJA, CMA,  EHL님등). 그리고 이번에는 축하하는 의미로 Wine Party를 겸하기로 했습니다. 회원들 중에 와인 1병씩 가져오시기 부탁드립니다 (남으면 크리스마스와 연말파티에 쓸 터이니 마음 놓고 가져오세요..). 다음은 11월 모임 내용입니다.


버클리 문학 강좌및 축하 와인 파티
11월 5일 (월) 오후 6시, 수라한식당, 김홍진 교수 - 빛과 어둠에 시학
윤영숙화백 서양화 대상 축하파티
김종훈님의 오페라 해설과 감상
김경련 교수의 한국시 영어번역 낭독 (1작품)
코리안 센타및 국제문화대학 Benefit Gala 연회
11월 10일 (토) 오후 6시
Grand Hyatt on Union Square (345 Stockton St., SF)
38th Anniversary Benefit Gala 에 버클리 문학협회가 가장 가까운 후원자매 단체입니다.
버클리 문학협회에서 12명이 한테이블을 후원합니다.  
10월 문학산행 보고: 지난번 10월 27일 버클리 문학회와 ROTC 합동 산행은 김종훈 대장님의 인솔로 산라파엘에 있는 China Camp Trail과 Historic site를 탐방했습니다. 김홍진 교수를 위시해서 우리팀 6분이 침삭했습니다. 감사!


행복한 문학과 삶!


버클리 문학협회장
김희봉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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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시학

(김홍진 교수)


  

  1. 빛과 이둠의 시학

  아도르노의 표현처럼 서정시의 내용이 지니는 보편성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 서정시는 그것이 사회적인 것을 거부하는 정도만큼 사회를 반영하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서정시가 갖는 사고의 구조 자체 속에는 이미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개별적인 사실이나 작품으로부터 그 뒤에 있는 뭔가 보다 넓은 사회적 현실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전제되어 있다. 이 같은 명제는 마치 한국에서의 서정시의 운명이란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질곡과 분리해 사유할 수 없다는 전언처럼 들린다. 한국의 근대사는 굴곡 많은 시대를 통과해 왔다. 우리의 근대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민족국가의 건설이 좌절되고 식민지배, 민족 분단, 전쟁과 분단체제의 고착, 군부독재, 파행적 산업화 등으로 점철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파행적 근대사 속에서 우리 사회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끈질긴 변혁 운동을 경험하였고, 그런 흐름을 반영하여 한국 현대시는 억압적인 상황과 체제 내의 순응주의 미학을 거부하는 사회적 상상력을 경험한 바 있다.

  한국 현대시는 식민과 분단, 전쟁과 독재, 파행적 산업화 과정이라는 역사적 질곡을 온몸으로 격지 않으면 안 되는 불행하고 불온하며 궁핍한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은 우리 사회의 가치 체계의 분열과 정신적 혼돈의 상태, 모순과 부조리한 삶 속으로 사람들을 내몰았다. 비극적인 역사적 상황은 시인들로 하여금 ‘어둠’과 ‘밤’, 또는 ‘겨울’의 이미지를 현실의 알레고리로 인식하게 하고, 빛’과 ‘불’ 또는 ‘봄’의 이미지를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 억압과 결핍, 혼돈과 분열을 극복한 이상 세계의 알레고리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빛은 더욱 강렬한 것처럼 한국 현대시의 향일성은 그만큼 서정시의 현실적 조건이 어둡고 황폐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간증한다. 역사 현실의 어둠에서 빛과 불의 알레고리는 발원하고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틔우고자 하는 열망이 현대시의 출발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서정시의 향일성은 부조리와 악, 모순과 고통, 부재와 결핍의 억압적 현실을 돌파하려는 계몽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어둠’이나 ‘밤’, ‘겨울’과 같은 시어는 암울한 역사 현실의 알레고리로 쓰였다. 암울한 밤의 어둠으로 인식되는 현실은 극복되어야 마땅하며 빛의 밝음, 불의 정화와 태양의 부성적 질서가 지배하는 낮의 세계로 전환되어야 온당하다. 이 빛과 어둠의 소박한 알레고리가 그 언어적 위력을 발휘하고 실천적 계몽의 의지를 고양할 수 있었던 것은, 서정시의 조건을 형성하는 역사 현실이 그만큼 사악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둠과 빛처럼 독재/민주, 지배/피지배, 억압/해방 등 이분법적으로 단순 선명하게 인식하도록 했다. 이 같은 인식구조는 지금 여기의 세계를 부정하고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세계의 모습을 너무도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었고, 그에 따라 빛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품게 만들었다. 지금 여기의 압도적인 절망적 현실은 계몽의 등대가 비추는 불빛을 따라 희망의 나라로 나가려 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느 정도의 초월적 유토피아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본고는 한국 현대시에 나타나는 빛과 어둠의 알레고리가 지닌 의미를 조명하고자 기획되었다. 한국 근대시가 싹트기 시작하는 때부터, 특히 낭만주의적 열정을 분출하는 시들의 대부분은 ‘빛’과 ‘어둠’ 등의 시어를 감각적이고 격정적으로 사용한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의 대조는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새로운 관념적 요소를 그 안에 포함”하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상징으로 쓰이면서 한국문학사에서 낭만주의적 미적 근대성의 특수성을 낳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후 빛과 어둠의 이미지는 역사 사회적 알레고리로 쓰이면서 시인들의 사회학적 상상력에 구체성을 부여한다. 본고는 시의 언어로서 ‘빛’과 ‘어둠’의 알레고리를 한국사회의 지난한 역사적 도정이라는 맥락에서 조망해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빛과 어둠의 사회학적 상상력의 면모를 한국 현대시 작품의 역사적 맥락과 풍경 속에서 통시적으로 고찰해 그 의미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2. ‘어둠’의 상투화와 낭만적 죽음에의 충동


     빛과 어둠은 각자 상대방의 소멸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둘은 원시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흑(어둠)과 백(빛), 밤과 낮, 사와 생이라는 본능적인 상징체계의 출발점이 되었고, 마침내 정신적인 차원으로 옮겨와서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선과 악의 상징으로 쓰이게 되었다. 신화 원형적으로 빛과 어둠의 상징에서 빛은 성스러운 의미였으며, 어둠은 그 자체로 창조 이전의 카오스를 상징하고, 존재 그 자체로 악을 표상한다. 가령 기독교에서 카오스의 세상에 온 분이 빛, 즉 그리스도였고 빛에 의해 혼돈은 질서의 세계로 창조된 것이다. 빛과 어둠은 신과 인간 세상, 즉 천상과 지상, 질서와 혼돈, 선과 악, 이상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는 식민지배로부터 출발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해 민족국가의 건설이 좌절되고 식민침탈과 지배라는 어두운 현실에서부터 태동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압도적인 어둠의 비극성과 궁핍한 시대 앞에서 시인들은 고뇌하고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근대사의 파행적 질곡은 시인들이 역사 현실을 혼돈과 무질서의 어둠의 세계로 인식하도록 매개한다. 말하자면 시대의 알레고리로서 어둠의 혼돈과 무질서가 가져오는 비극성은 한국 근대시 출발의 무의식을 강력하게 규정한다. 따라서 밤의 어둠은 식민 현실에 대한 좌절과 패배감에서 오는 심리적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금실이 密輸出 馬車를 띄워놓고 /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 물레 젓던 손도 脈이풀려서 / 파아!하고 붙는 魚油등잔만 바라본다. / 北國의 밤은 차차 깊어가는데.(김동환, 「국경의 밤」 제1부 1장 3연)

  

   김동환의 「국경의 밤」은 한국 근대시의 출발점이 얼마나 비극적이었나를 상징적으로 웅변한다. 위의 시는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의 불안하고 초조하며 애타는 심리상태와 국경지대의 음습한 겨울밤의 풍경이 진술되고 있다. 이를 통해 시인은 밤이 지배하는 어둠의 현실을 불안하게 살아가는 식민지 원주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밤은 차차 깊어”가고 어둠을 밝히는 “魚油등잔”의 불빛은 초라하며 극도의 불안에 휩싸여 떨리고 있다. 음울하고 불안한 시적 분위기는 장차 벌어질 비극적 사건에 대한 암시인데, 이러한 사전 암시는 결국 남편이 시체로 돌아오는 결과로 귀결된다. 식민 현실의 삶은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의 모습과 다르지 않으며, 끝내 죽어 돌아오는 남편의 삶은 식민지 현실의 은유에 가깝다. 인용 시의 비극성은 제목이 암시하듯 ‘국경’이라는 공간과 ‘겨울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의 결합을 통해 절실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어둠이 지배하는 밤은 작품의 계절적 배경인 겨울과 함께 암담하고 우울한 언어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은 아시아의 감각이요, 감성이요, 性慾이다. / 아시아는 밤에 만유애를 느끼고 임을 포옹한다. / 밤은 아시아의 식욕이다. 아시아의 몸은 밤을 먹고 생성한다. // …중략… // 밤은 아시아의 미학이요 종교이다. / 밤은 아시아의 유일한 사랑이요, 자랑이요, 보배요, 그 영광이다. / 밤은 아시아의 영혼의 궁전이요, 개성의 터요, 성격의 틀이다.(오상순,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중에서)

  

    빛과 어둠, 낮과 밤, 생과 사, 봄과 겨울의 대조는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새로운 관념적 요소를 그 안에 포함하게 되었는데, 1920년대 낭만주의자들이 그랬듯이 ‘폐허’의 어두운 현실에서 새로운 미래 창조의 빛을 발견한다. 즉 새로운 미래의 창조를 현실의 폐허와 어둠 속에서 시작하려 했다. 『폐허』의 동인인 오상순의 인용 작품은 밤의 예찬을 통해 새로운 창조가 폐허와 어둠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강렬한 신념을 느낄 수 있다. ‘아시아’는 곧 밤이고, 화자는 이 어둠의 폐허 속에 깃든 원시적 창조력을 본다. ‘밤의 감각’이 ‘호흡’, ‘고동’, ‘자궁’, ‘식욕’, ‘성욕’ 등 다양한 육체적 생명력과의 결합을 통해 밤에 응축된 창조의 힘을 역설적으로 인식한다. 어둠의 시대, 밤의 현실, 고난과 비극의 세계는 화자에게 바로 어둠이 새로운 창조의 태반이라는 역설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다. 말하자면 어둠의 밤은 혼돈의 시간이지만 또한 미래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창조의 자궁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어둠에 대한 역설적 인식은 식민지적인 부정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려는 일종의 심리적인 자기치유, 혹은 유토피아적인 낭만적 초월, 혹은 극단적 현실부정의 한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마돈나 -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테면 우리 가자, 끙으려 가지 말고! / 너는 네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復活의 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 마돈나 -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랑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으니, /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이상화, 「나의 寢室로」 중에서)

  

    빛보다는 밤의 어둠에 대한 집착은 1920년대 낭만주의적 경향으로 연결된다. 비극적 포즈, 육체적 욕망, 초월주의 등이 공존하는 격정성은 이미 알려진 대로이다. 가령 『백조』 동인인 이상화의 인용 시에서 드러나듯이 밤의 이미지는 모두 하나의 관념으로 고착된다. 이로부터 밤이나 어둠은 이미지라기보다는 하나의 상투적 관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현실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꿈의 세계나 죽음을 연상시키는 관념화된 어둠은 바로 비현실의 공간으로 당대 시인들의 극단적인 현실 부정적 태도를 보여준다. 그만큼 밤과 어둠과 꿈의 일반적 관계를 구도로 하는 시적 의식은 낭만적이고 상투화된 죽음과 소진, 퇴폐와 환각을 가리키는 관념적 수사로 고착되었다.

    밤과 어둠, 폐허와 비애를 꿈과 이상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전경화된 수사는 우리가 1920년대 『폐허』나 『백조』 동인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을 우리는 밤, 어둠, 눈물, 꿈, 탄식, 도피, 고립, 죽음, 퇴폐, 환각의 미학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암담한 현실의 극단적 부정과 미래지향, 초월의 의지를 공통적으로 함유한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대로 극단적 현실 부정에 대한 대안을 현실 안에서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태도는 현실부정을 넘어서는 비판력과 자기 반성력을 획득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초월적 공간으로 상정된 밤은 어떤 이미지이기보다는 하나의 감각화된 관념으로서 비현실, 환상을 대표하는 시어로 기능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밤은 낭만적 현실부정과 낭만적 죽음의식이 결합된 관념적 공간으로서 침실, 동굴, 꿈성, 꿈나라, 마방(魔房), 술과 연기로 상징되는 퇴폐와 환각”의 환상적 공간이다.

  

가신 님 생각에 살아도 죽은이 마음이야, 에라 모르겠다, 저 불길로 이 가슴 태워버릴까, 이 설음 살라버릴까, 어제도 아픈 발 끌면서 무덤에 가보았더니, 겨울에는 말랐던 꽃이 어느덧 피었더라마는, 사랑의 봄은 또 다시 안 돌아오는가,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주요한, 「불노리」 중에서)




    밤의 관념적 감각이 지닌 낭만적 도피와 환상에의 경도는 불꽃의 이미지조차도 죽음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로 쓰인다. 가령 주요한의 「불노리」에서 화자는 마치 불꽃에 몸을 던지는 나방처럼 낭만적 죽음에 유혹당한 듯하다. 밤과 축제, 불꽃과 강물, 군중들 사이에서 시적 자아의 내면 풍경은 낭만적 죽음의 충동으로 얼룩져 있다. 어둠의 밤은 외부로부터 자아를 차단하고 내면으로 그 시선을 향하게 하는 속성을 지닌다. 이 같은 이유로 어둠의 밤은 내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다. 밤의 불꽃은 촛불처럼 자아를 태우고 상승시킨다. 이 작품에서도 낭만적 자아의 내면을 투영해주는 매개물로 쓰이기는 하되, 그것이 다분히 죽음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강물의 흐름이 주는 허무감, 군중과 축제에서 느끼는 자아의 고립감이나 단절감이나 외로움, 불꽃의 매혹과 자극이 환기하는 좌절감은 시적 화자를 죽음의 충동으로 이끈다. 화자는 “차라리 속 시원히 오늘밤 이 물 속에…….” 몸을 던져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밤은 그저 삶의 현실이 지닌 고통과 비애를 잊을 수 있는 에로틱한 죽음,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박영희의 「꿈의 나라로」와 「환영의 황금탑」, 박종화의 「흑방비곡」과 「밀실로 돌아가다」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도 밤과 어둠은 밀실, 동굴, 꿈 등의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낭만적 도피와 환각의 공간으로 반복적으로 미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 같은 감정의 반복과 소모의 경향이 도달한 최종 지점이 폐허의 죽음이며, 이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미래 창조의 생명의 빛을 찾고자 했다.

    한국 근대시 초기에는 빛의 이미지보다는 밤과 어둠의 이미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있다. 말하자면 밤과 어둠은 당대 서정시의 토대를 구축하는 핵심적인 시어이다. 따라서 이들 시어는 시인들의 세계 인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틀을 제공해준다. 그뿐 아니라 한국 근대문학 초창기 시인들의 미적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증명해주는 핵심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어둠은 현실의 알레고리로서 퇴폐와 환각, 도피와 초월의 원리가 죽음과 동일시되면서 근대시 초기의 관념적 통속화와 상투화라는 미적 한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밤이나 폐허가 지닌 원초적 이미지에 따라 새로운 미래 창조의 생명력으로 확장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정화의 ‘빛’과 피안 세계의 염원

    1930년대 자연친화적인 시인들의 시에 대해 ‘목가시’ 혹은 ‘전원시’라는 명칭을 붙이게 만든 바 있다. 일제 강점기의 자연에 토대를 둔 전원 지향은 보통 식민 지배체제의 현실적 좌절과 패배의식을 치유하고 위안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것은 곧 현실을 외면한 무책임한 도피거나 패배주의라 비판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 편의 서정시가 지닌 비사회성이야말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역설적인 주장처럼 서정시의 내용이 갖는 보편성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시대적이다. 따라서 자연 지향은 부조리와 악, 모순과 고통의 현실을 돌파하려는 유토피아 정신의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에서 출발한 박두진의 시는 보다 바람직한 삶에 대한 꿈과 희망, 그리고 이상적이자 긍정적인 사회상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그의 자연은 “민족과 인류, 현실과 영원, 현세적인 이상과 종교적인 궁극적 생활 생존양식이 아무런 모순 없이 일원화”된 세계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그의 시의 상상력은 희망과 기대를 표상하는 햇빛, 태양의 세계와 골짜기, 무덤, 벼랑 같은 어둠의 대립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의 초기 시에서 ‘해’나 ‘태양’, 그리고 ‘불’의 이미지는 수도 없이 관찰되는데, 이때 불타는 둥근 원인 해(태양)는 “유해하지 않은 불이요, 열과 생명을 자극하는 천체요, 존재를 소생시키는 위대한 자극제”로서 기능한다.

    이 같은 원형적 의미를 지닌 ‘해’는 박두진 초기시의 핵심 이미지로서 불과 빛의 이미지로 연결되면서 그의 시를 규제하는 중심 이미지로 기능한다. 해는 그에게 개인적, 역사적, 민족적 어둠을 함께 묶는 초월의 상징이다. 이때 해의 성질은 그 밝은 빛의 요소와 새로움, 아름다움, 순수 등을 의미한다. ‘해’에 의해 나타나는 자연의 질서와 이상의 세계는 불멸의 확실성과 동경, 열정을 의미한다. 그는 해의 이미지가 지닌 밝음과 소생을 통해 생명적 가치와 희망을 빛을 찾는다. 말하자면 어둡고 절망적인 ‘벼랑’과 ‘골짜기’ 등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관념적 선악의 상징으로 발전된다. 즉 빛의 세계는 신과 선의 세계와도 같은 것으로 그 반대편에 대조적으로 악인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어둠 안에서 시인은 해의 빛을 갈망하고 “확확 치밀어오를 火焰”(「香峴」)을 통해 부정한 현실을 무화시켜 정화된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꿈꾼다.

  

누가 와서 기웃대면, 내새끼 보금자릴 어늬 뱀이 넘실대면, 나는 불이 되어 쪼아라. 살같이 내리박혀 불이 되어 쪼아라. 내새끼 품에 안고 불이 되어 싸워라(박두진, 「노고지리」 중에서)

  

    “산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해」) 솟아난 해(태양)의 불은 뱀으로 상징되는 사악하고 암울한 시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원리를 내포한다. 그의 불은 불의와 싸우고 부정성을 파괴하는 불로써 우주적인 죽음과 무화(無化)를 상징한다. 암담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비극적인 역사의 고난과 어둠의 알레고리로서 밤은 불타오름으로써 정화된 세계를 기약하는 것이다. 그는 화염으로 불타버린 현실에서 차라리 새로운 탄생을 기약하는 정화와 이상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억압적 현실과 어둠을 물리치고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의 의지적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치밀어오를 화염”에의 기대는 부정한 역사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한다. 그는 파괴와 분노의 불꽃을 통해 정화와 평화의 세계가 이룩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지향은 널리 알려진 대로 시인의 후기시로 가면서 더욱 강화되며, 불을 통한 소멸과 정화의 의식은 그의 시에서 하나의 근원적 상상력의 모태가 된다.

    햇빛의 알레고리는 지금 여기의 차안을 벗어나 궁극적으로 피안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현실 초월적인 유토피아 의식을 어느 정도 포함한다. 유토피아 의식은 역사적 현실인식의 끝에 발생하는 의식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유토피아 의식이라는 것은 현실을 은폐하거나 도피하려는 행위가 아니라 “행동의 단계로 이행하면서부터 기존의 질서를 부분적으로나마 혹은 전적으로 파괴해버리는 현실 초월적 방향설정을 뜻한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를 규정하는 현실의 질서는 어둠이고, 이러한 현실은 빛의 현실, 어둠을 물리친 형이상학적 순수, 부정이 정화된 세계를 지향하게 만드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유토피아는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탄생”한다는 점을 고려 할 때, 박두진의 햇빛 찬란한 생명의 세계에 대한 지향과 불이 지닌 파괴를 통한 정화에의 경도는 지극히 의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향한 박두진의 유토피아적 충동은 이상세계의 창조라는 ‘희망의 원리’가 됨을 뜻한다. 유토피아는 지상에 없는 행복한 나라이기 때문에 더 강한 매혹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식민지적 고통과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박두진의 시적 자아는 빛의 총체적 동일성이 확보된 이상 세계를 꿈꾼 것이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 …중략… //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신석정, 「꽃덤불」 중에서)

  

    빛을 향한 희망의 원리는 전쟁 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령 신석정의 인용 시는 참여적 의식을 드러내는 한국 전쟁 뒤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민족 역사의 그늘진 사회 현실을 취재하여 민족의 정체성 회복 의지를 태양의 이미지와 꽃의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은 꽃을 우주에서 가장 조화롭게 타오르는 극치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꽃을 피우는 근원적 조건이 빛임을 상기할 때 자명한 것이며, 불타는 둥근 원의 이미지나 붉은 빛깔로 보아도 그러하다. 시적 대상으로서의 군집을 이룬 “꽃덤불”이 주는 포근하고 조화로운 이미지의 표상을 통해 사랑의 화해와 소망을 압축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이는 “태양”과 “달”, “겨울밤”과 “봄”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대립을 통해 화해와 사랑의 가능성과 희망을 담아내는 의미로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용 시에서처럼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한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태양”이 상징하는 빛과 불, 생명의 충일이 “태양을 등진” 어둠에서 발원한다는 역설적 의미를 통해 화자가 희망을 노래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태양 - 봄 - 꽃덤불”로 상관되는 이미지 변화에 의해서 불과 빛, 생명으로의 긍정적 의미의 상승 효과를 내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의 “헐어진 성터”란 암담한 현실 인식에서 형성된 이미지다. 화자는 암담한 현실에 대한 고뇌 속에서 아픔을 견디며 “오롯한 태양”을 염원한다. “달빛”과 대조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태양”은 현실의 어둠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열렬히 희구하는 기다림과 부성의 존재, 즉 시적 화자가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이다. 이 점에서 “태양”은 현실 의식이 투영된 역사 의식의 등가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현실과 전쟁이라는 암담한 역사 현실은 달이 차가운 어두운 “겨울밤”으로 표상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적 자아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꽃덤불에 아늑히 안”길 수 있는 진정한 새 봄을 기다린다. 즉 꽃덤불은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우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의 염원과 의지에서 시적 화자의 변함없는 심지의 정신을 엿보게 한다.

    불(빛)을 향한 이러한 희망과 기다림의 의지적 정신은 한국 서정시의 한 관류로 흐르는 소멸의식과 불귀의식을 극복하고 생명과 소망의 등가물인 ‘태양’, ‘빛’, ‘봄’을 매체로 한 적극적인 의식을 창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의 가시적 속성을 갖는 빛은 부정하고 불순한 것을 정화시키고, 혼돈과 무질서를 조화와 질서의 세계로 창조하는 신성의 대리물이며, 미래적 가치의 염원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러한 연유로 역사 현실의 압도적인 비극성은 시인들로 하여금 강렬한 빛(불)을 염원하게 한 것이다. 빛(불)에 대한 지향은 세계가 그만큼 황폐하고 불모적인 죽음의 현실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역사 인식의 끝에 발생하는 의식으로 어둠의 심연을 통과해 빛의 세계, 즉 ‘희망의 나라’로 나가려는 유토피아 정신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는 현실에서의 탈주와 이탈의 욕망으로서 바람직한 세계상에 대한 꿈과 희망에 대한 열망을 내포한다.

  

  

  4. 저항의 ‘불’과 민중해방의 표상

   해방 후 우리의 문학은 분단과 전쟁에 뒤이어 카프 문학이 간직한 사회적 상상력의 거세로부터 출발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 비판적 전통의 거세는 그 후 전개될 문학에서 결핍과 파행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단적인 예는 고은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서낭당 문학’이라 일갈한 데서 잘 드러나며, ‘텅 빈 비극’으로 명명되는 서구 추수적인 실존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런데 4월 혁명은 이러한 퇴행성과 텅 빈 난해성을 어느 정도 반성할 주체적 역량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역량은 60년대 이후 강제된 산업화, 말하자면 개발 독재의 파행적 산업화의 과정, 그리고 환멸의 80년대에 그 위력을 발휘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발 독재에 의해 추동되는 강제된 산업화의 과정은 여러 모순과 부조리를 파생시키면서 우리의 근대사에 또 하나의 어둠으로 자리한다.

  

구석구석이 허사로 가득한 밤 / 우리들은 허사에서 배어나오는 암흑을 보며 / 암흑 속에서 승냥이처럼 울부짖는다 / 울부짖음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 암흑이 되어 돌아온다 / 암흑이 우리를 둘러싸고 / 우리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 넣는다(최하림, 「설야」 중에서)

  

    최하림 시인이 유신의 70년대를 건너며 노래하고 있듯이 암흑의 어둠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존하는 실체이다. 시인의 인식처럼 현실의 어둠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의 세계로 정화되기는커녕 갈수록 깊어간다. 암흑의 실체는 말할 나위 없이 역사 현실의 시련과 고통을 상징적으로 표상한다. 어둠 속에서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동시대인을 둘러싸고 있는 불의의 암흑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다. 다만 “암흑을 보며 / 암흑 속에서 승냥이처럼 울부짖”을 뿐이다. 울부짖음은 “암흑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암흑으로 반사되어 되돌아와 반복된다. “암흑이 우리를 둘러싸고 / 우리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 넣는다”는 구절에 이르면 시련과 고통의 폭력적 현실은 더욱 증폭된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의 폭압적 현실은 어둠의 시대, “허사로 가득한 밤”의 암흑으로 표상된다. 눈앞의 어둠은 너무 짙어 이에 항거하는 방법은 “어둠으로 뻗어가는 길”에서 다만 정신의 ‘칼날’(「詩人에게」)을 벼려 칼날의 시퍼런 빛으로 자신을 지킬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궁핍한 현실, 폭력적 시대, 전망 없는 미래는 어둠의 공간으로 드러나며, ‘눈보라’는 가혹한 고통을 가중하는 매개물이다.

    어둠의 현존에 대한 인식은 80년대에도 지속된다. 암울한 어둠의 역사적 환경에서 시는 새벽을 기다리며, 따뜻한 생명의 봄을 꿈꾸고 전망하며 씌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심에 대표적으로 김지하, 박노해, 김남주 같은 시인이 자리한다. 유신의 엄혹한 어둠 속에서 김지하가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내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타는 목마름으로」)라고 울부짖으며 노래했을 때, 혹은 박노해가 야만의 80년대에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잔을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노동의 새벽」)라고 노래했을 때, 그 “새벽은 어둠의 현존성과 새벽에의 전망이라는 세계 인식”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동트는 새벽을 바라며 어둠의 밤과 싸우고, 봄꽃의 개화를 꿈꾸며 겨울을 견뎌내려는 저항의 의지를 촉발한다.

  

해 뜨는 아침 마당에 / 산벚나무 꽃이 핀다 // 조용히 토옥 토옥 토옥 / 꽃망울 터뜨린다 // 눈부셔라 눈물 나라 / 저 꽃잎 속의 숨은 얼굴 // 그래 지난 겨울이 꽃핀다 / 어둠 속 뿌리가 환히 꽃핀다(박노해, 「겨울이 꽃핀다」 전문)

  

    인용 시에서 화자는 겨울을 견딘 “산벚나무 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는 상황을 통해 생성과 부활을 본다. 원형적 사유라 할 만한 화자의 의식은 어두운 밤과 겨울, 소멸과 죽음의 세계에서 새벽과 봄, 생성과 부활의 생명을 보는 것이다. “지난 겨울”의 고난을 이겨낸 인고의 꽃, 겨울과 어둠의 부정적 이미지 속에서 환히 번지는 꽃의 이미지는 그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통해 선명한 저항의 정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표현한다. 이때 꽃은 태양의 지상적 등가물이며 은근히 타오르는 불빛으로서의 생명, 눈부신 파동으로 현현하는 우주적인 조화의 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둠과 죽음의 겨울 속에서 꽃을 피워내기 위해 긴 인고의 시간과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꽃의 이미지는 비장미보다는 숭고미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처럼 시인들은 어두운 역사의 폭력과 대면하면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

  

갈피 모를 막바지의 어둠 속에 흐르는 / 피여 살라라 / 어둠 속에 우뚝 선 침묵의 영원한 / 압제를 불살라라 / 사월의 피여/어둠에도 화안히 흐드러지는 꽃내의 / 영롱한 영롱한 생명에 미쳐.(김지하, 「사월의 피」 중에서)

  

빈손 가득히 움켜진 / 햇살에 살아 / 벽에도 쇠창살에도 / 노을로 붉게 살아 / 타네 / 불타네 / 깊은 밤 넋 속의 깊고 / 깊은 상처에 살아 / 모질수록 매질 아래 날이 갈수록 / 흡뜨는 거역의 눈동자에 핏발로 살아 / 열쇠 소리 사라져버린 밤은 끝없고 / 끝없이 혀는 짤리어 굳고 굳고 / 굳은 벽 속의 마지막 / 통곡으로 살아 / 타네 / 불타네 / 녹두꽃 타네 /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횃불 아래 / 햇불이여 그슬러라 / 하늘을 온 세상을 / 번뜩이는 총검 아래 비웃음 아래 / 너희, 나를 육시토록 / 끝끝내 살아(김지하,「녹두꽃」 전문)

  

    시대의 어둠 속에서 불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시인이 김지하이다. 어느 평자의 견해처럼 “김지하의 시는 불과 싸우고 불을 다스려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때로는 밖으로 분출하고 때로는 안으로 스며드는 불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시에서 불은 “불의 시련, 고행의 길을 의미”하기도 하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영적 가치, 내적 광휘”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이러한 김지하 시인의 불은 민중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생명의 세계로 열려 나가는 과정에서 파악할 수 있다. “어둠에도 화안히 흐드러지는 꽃내”로부터 촉발된 불은 현실의 ‘어둠’과 ‘압제’를 거침없이 파괴하고 “영롱한 생명”을 생성하는 불이다. 불은 ‘어둠’과 ‘압제’를 불살라버리는 파괴적인 소멸을 함축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영롱한 생명”의 창조하는 기능을 발휘한다. 특히 ‘살다’라는 동사는 생명 현상을 의미하는 동시에 ‘불살라’ 없애버리는 소진(消盡)과 정화의 차원을 내포함으로써 죽음과 생성으로서의 불의 본질을 그대로 표상한다. 말하자면 불은 이원 대립적인 모순을 소멸시키는 불이며 일체의 대결 구도를 무화시켜 총체적 생명을 구현하는 불이다.

    「녹두꽃」에서도 이 점은 그대로 드러난다. 이 시에서 불의 이미지는 압제와 저항과 생성의 구도를 통해 형상화된다. 화자는 지금 쇠창살의 감옥에 갇힌 채 창밖으로 불타번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감옥의 창살 아래 전해지는 햇살과 노을은 생명의 불로 작용하다가 그것이 매질, 혀 잘림, 참수, 육시와 같은 신체적 고통과 교직되면서 처음 불의 이미지는 폭력의 이미지로 변한다. 그러나 화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모질면 모질수록 “흡뜨는 눈동자 거역의 핏발”로 진술되듯 저항으로서의 불은 더욱 거세게 타오른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녹두꽃 타네”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생성의 의미 자질을 획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별 푸른 시구문 아래 목 베어” 죽은 녹두장군의 죽음은 죽음로 끝나지 않고 ‘횃불’로 “끝끝내 살아”남으로써 불은 생성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의미 형성의 과정은 곧 압제와 고통이 더욱 가혹하게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그에 대한 거역의 저항력 또한 불타오르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그를 개발독재 시대의 대표적인 저항 시인으로 평가하게 하는 한 요소이기도 하다.

  

미선이 효순이 때 / 처음 촛불을 들었다 화염병도 죽창도 아닌 / 연약한 촛불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 …중략 … / 그렇게 몇년 나는 지난 시절 / 화염병과 돌과 쇠파이프를 들던 손에 / 촛불을 들고 유령처럼 밤거리를 서성였다 / 촛불은 진화하면 화살촉이 되는 걸까 / 들불이 되는 걸까(송경동, 「촛불 연대기」 중에서)

  

동물성 사료를 먹여 / 미쳐버린 소가 오는 / 썩은 물 위에 / 연꽃이 피네 // 제 몸을 태워 일렁이는 / 혁명의 불꽃 / 직접 민주주의를 밝히는 / 촛불을 켜면(최종진, 「연꽃」 전문)

  

    두 편의 인용 시는 역사 현실의 부정성과 불의에 저항하는 촛불이 전경화되어 있다. 문면에 드러나는 것처럼 두 작품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 현장을 경험하고 쓴 시이다. 송경동의 시는 불의에 저항해온 불의 진화의 역사에 쓰고 있는데, 불의의 세력에 맞서 싸운 전력을 가진 화자에게 ‘화염병’과 ‘꽃병’은 역사변혁의 무기이다. 그런데 화자인 ‘나’는 지금 화염병 대신 “순한 촛불 하나를 들고” 저항의 의지를 불태운다. 화자에게 촛불은 들불이나 횃불 등으로 표현되던 지난 시대와는 다른 방식의 저항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촛불은 자신의 온몸을 태우면서 마지막까지 타오르는 희생의 정신, 불의에 대한 저항, 부정과 불순의 정화, 미래적 가치의 실현 등을 표현하는 새로운 세목의 언어가 된 것이다. 촛불은 이제 과거와 같이 밀실에서 빛을 발하며 몽상을 추동하는 개인적 소품이 아니라 광장으로 나가 불의에 항거하는 민중적 저항의 언어가 된 것이다.

    최종진의 시 역시 촛불에서 “민주주의를 밝히는” “혁명의 불꽃”을 본다. 화자는 촛불을 연꽃으로 등가한다. 수없이 운집한 촛불의 무리에서 연꽃을 연상하는 일은 자연스런 상상력의 흐름으로 보인다. 그것은 불꽃, 즉 불과 꽃의 결합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시에서 연꽃은 “빛이 되기를 바라는 불꽃이며 생명을 표시할 수 있는 불꽃”이다. 촛불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고 “동물성 사료를 먹여 / 미쳐버린 소가 오는” 현실의 “썩은 물 위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은 것이다. 곧 “촛불을 켜”는 것은 “썩은 물 위에 / 연꽃을 피”우는 신성한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촛불을 켜는 것, 달리 말해 연꽃을 피우는 것은 혼탁한 ‘물’로 상징되는 오염된 현실을 물리치고 미래의 긍정적 가치가 실현되기를 소망하는 염결한 저항의 정신을 표상한다. 그것은 또한 “제 몸을 태워”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희생제의이며, 때문에 생명의 가치가 훼손된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려는 신성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연꽃으로 등가된 촛불은 세속에 처해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영성체와 같은 것이다.

    빛을 발하는 사물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한다. 빛은 신이고 구원이며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성스러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불빛은 어둠과 대비되면서 저항과 생명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부각한다. 그것은 또한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난다.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불의의 힘 앞에서 인간은 고독하고 무력할 수밖에 없지만, 작은 불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게 된다. 이와 같이 어둠 속에서 인간은 빛과 밝음을 향한 희망을 품고 그에 저항한다. 한국 현대시에서 역사 현실의 알레고리로서의 불빛은 거대한 불의와 억압에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반민주, 반민족, 반민중 세력에 저항하는 “해방의 불꽃”(김남주, 「불꽃」)으로서 투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전망 표상의 대표 언어이다. 우리의 근대사는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끈질긴 변혁 운동을 경험하였고, 그런 흐름을 반영하여 현대시에서의 불과 빛은 억압적인 상황과 체제 내의 순응주의 미학을 거부하는 사회적 상상력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5. ‘빛’의 불온성과 욕망의 모조신화

    한국 근현대 시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은 낮과 밤, 봄과 겨울, 생과 사, 정의와 불의, 질서와 혼돈이라는 의미 계열들을 거느리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처음부터 고정된 형태의 시적 상징과 은유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것은 차라리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과 함께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점은 역사적이며 문학적인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 따라 시적 주체의 감각이나 인식도 부단히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당연하다. 그러나 어둠과 대립하는 성질의 불빛은 긍정적이기도 하지만 폭력적이고 불온한 것이기도 하다.

  

깜빡이는 것들은, 위험하다 / 엘리베이터 표시등, 병원 약국의 번호판 / 횡단보도 신호등, 카드공중전화의 / 액정화편, 컴퓨터의 커서…… / 이것들은 무시로 깜빡거리며 / 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 버린다 / 그 짧은 순간들을 참을 수 없는 / 무거움, 강박으로 바꾸어버린다(이문재, 「저 깜빡이는 것들-散策詩 5」 중에서)

  

    이문재의 인용 시에서 화자는 도시의 산책자이다. 산책자는 주로 저녁에 산책의 길을 나선다. 화자는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는 것/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기는 것”(「저녁 산책」)이라 말하면서 ‘뒷짐’(「저녁의 뒷짐-散策詩 2」)을 지고 저녁 산책을 나선다. 세상의 속도에서 일탈한 느림보에게 적합한 것은 저녁 산책이다. 저녁의 산책은 낮의 확실성과 합리성에 대한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낮이 상징하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부정하고 현실원칙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과 혼돈을 투시하는 통찰을 가능케 한다. 저녁 산책은 현실원칙의 허위를 간파하고 본래적 삶을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시인은 현실적으로 부도덕한 것으로 단죄되는 게으름과 어슬렁거림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실의 속도전이 내포하는 부도덕성과 위험성을 경고한다.

    산책자로서의 화자는 도시문명의 반짝이는 빛과 속도에 대한 깊은 위기감과 절망감을 표현한다. 반짝이는 빛과 속도에 대해 나타내는 화자의 부정적 인식은 도시의 반짝이는 기호들이 “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화자가 도시 공간에서 목격하는 것은 “무시로 깜빡거리”는 도시의 현란하고 풍요로운 기호들과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게으른 도시의 산책자는 그것들에서 자본과 기술이 가져다 준 문명의 풍요와 편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문명의 폭력과 억압의 징후를 본다. 도시 공간의 여기저기에 편재하면서 “무시로 깜빡거리”는 불빛들은 우리들의 ‘기다림’을 “무거움, 강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그 안락과 풍요, 편리와 질서의 기호들인 “깜빡이는 것들은, 위험”한 것이다. “무시로 깜빡거리”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도시의 삶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깜빡거리는 것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며, 조작되고 왜곡되는 도시적 일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한여름의 시청 광장 / 마천루 위에 까마득히 떠 있는 / 광고탑, 뜨겁게 달아오른 아라비아 숫자들이 / 불인두처럼 이글이글 내 몸에 닿아 / 쉬 지워지지 않을 깊은 文身을 아로새긴다 / …중략… / 오, 결핍은 / 작렬하는 사막에 솟은 불기둥인 양 / 아무데서나 불타오르고 / 터번도 두르지 않은 아라비아 숫자들이 / 태양을 삼킨 채 / 광고탑에서 이글거리고 있다(고진하,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중에서)

  

    고진하의 인용 시에서도 역시 빛의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지각된다. “마천루 위” 광고탑에서 “작렬하는 사막에 솟은 불기둥인 양” 이글이글 뜨겁게 불타오르는 “아리비아 숫자들”은 무엇으로도 애출 수 없는 결핍된 욕망의 기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빛은 존재자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 근거로 기능하지 않는다. 빛은 어둠의 혼돈과 타락한 세계를 정화하거나 생명과 질서, 미래적 가치에 대한 소망의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또한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면서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저항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원초적인 불빛의 숭고한 신성성은 변질되어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고 환각과 파멸로 이끄는 기제로 기능한다. 오히려 화자는 불빛의 긍정적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빛의 문법과 규칙이야말로 허구이고 환각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둠 속의 불빛은 오히려 탐욕의 상징으로서 욕망의 한계효용에 의해 무한대로 증폭해가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인간의 결핍된 욕망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화자가 불빛의 이미지에서 본 것은 그 욕망의 확대재생산이 불러올 재앙이다.

  

눈앞의 저 빛! / 찬란한 저 빛! / 그러나/저건 죽음이다 // 의심하라 / 모오든 광명을!(유하, 「오징어-여는 시」 전문).

  

불빛을 발견한 오징어의 눈깔처럼 / 눈에 거품을 물고 돌진 돌진 // 불 같은 소망이 이 백야성을 / 만들었구나, 부릅뜬 눈의 식욕, 보기만 해도 눈에 / 군침이 괴는, 저 불의 부페 色의 盛饌을 보라 / 그저 불밝히기 위해 심지 돋우던 시절은 지났다 // 매서운 한강 똥바람 속, / 촛불의 아이들은 너무도 당당해 보인다 / 그들을 감싸고 있는 이 도시 전체가 / 하나의 거대한 수정 샹들리에이므로 / 風前燈火, 불을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 이젠 바람도 불과 함께 놀아난다 / 휘황찬란 늘어진 샹들리에 주위에 붙은 똥파리(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4―불의 뷔페」 중에서)

  

    유하의 두 편의 인용 시는 불빛에 대한 욕망과 유혹이 종국에는 파멸의 함정을 감추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첫번째 인용 시는 묵시록적 예언의 어조로 매우 간명하고 명료하게 빛이 지닌 파괴성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빛을 보면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오징어의 속성에 빗대어 도시문명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비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이 시는 빛을 죽음의 세계로 인식한다. 도시문명의 “모오든 광명”을 죽음으로 바라보는 의심과 회의에 찬 화자의 시선은 도시의 광명을 심판이 임박한 묵시록적 상황의 집약적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문명의 “모오든 광명을” 의심하는 환멸의 사유이다. 이러한 문명의 빛에서 역설적으로 죽음을 보는 묵시록적 사유는 문명의 현실에 대한 반성적 인식행위에 속한다. 도시문명의 빛이 품고 있는 묵시록적이며 종말론적인 인식은 도시체험의 한 양상이며, 그러한 묵시록적 세계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유하가 도시공간, 혹은 물질적 풍요와 욕망이 번성하는 문명의 세속세계를 탐구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이 시의 제재가 되어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도시공간에서 체험하는 일상을 시로 형상화함으로써 그것이 은폐하고 있는 공포와 폭력의 불온성을 경계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시에서처럼 문명의 빛에 대한 묵시록적 상상력은 존재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죽음의 종말론적 세계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그는 “욕망의 허기가 세운상가를 번창시켰”으며 그 “어두운 욕망의 벌집”에서 “충동의 벌떼들”처럼 “끝없이 응응대다가 죽음을 맞으리라”(「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2」)고 미래를 불길하게 예견한다. 이러한 문명의 “불의 폭포수를 보며/폭포가 말라버린 내일의 암흑 따위를 생각”(「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8」)하는 미래에 대한 묵시록적 사유는 독자로 하여금 그의 시를 반성적 사유의 자장 안에서 읽도록 요구한다.

    두 번째 인용 시에서 화자는 도시공간의 풍요와 맹목적 욕망의 부정성을 지각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수행하는 산책자이다. 태초의 성스런 불의 이미지로부터 욕망의 불에 이르기까지의 이미지의 연쇄적 변주를 통해 조직된 인용 시는 “불의 부페”로 명명되는 도시의 ‘백야성’에 사는 인간을 “휘황찬란 늘어진 샹들리에 주위에 붙은 똥파리”로 묘사한다. 그럼으로써 도시공간과 그 안에 사는 인간에 대한 산책자의 부정적 지각을 보여준다. 화자는 “소망교회 앞” “아이들의 행렬”이 들고 있는 촛불에서 ‘태초의 불’을, 다시 “두메산골을 걸어가다가 발견한” “반갑던 먼 곳의 등잔불”을 연상한다. 그것은 다시 “불빛을 발견한 오징어의 눈깔”이라는 맹목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를 얻고, 이것은 다시 “불의 부페”라는 ‘백야성’에 대한 이미지로 전이된다. 이어서 ‘백야성’에 사는 인간은 “휘황찬란 늘어진 샹들리에 주위에 붙은 똥파리”로 변주된다. 이렇게 ‘불’에 의해 연쇄되는 이미지의 변주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는 “오징어의 시커먼 눈들”을 한 사람들이 “불의 부페 파티장 쪽으로” “신바람으로 몰려가는” 맹목적인 욕망에 대한 반성이며, ‘태초의 불’과 대립되는 차원에서 타락한 도시의 불을 비판하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에 달라붙은 ‘똥파리’나 불빛을 향해 돌진하는 ‘오징어’는 도시문명 이면에 숨어 있는 부정적 측면에 대한 시인의 지각을 암시한다.

    결국 불빛에 대한 부정적 지각은 대도시 공간의 물질적 풍요와 소비사회의 욕망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이 숨기고 있는 폭력성과 억압성에 대하여 저항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산업문명 사회에서 불빛의 모조신화에 대한 시인들의 부정과 비판과 저항은 불모적인 도시공간에 대한 반성적 성찰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대도시 공간에서 전개되는 일상적 현실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매개하는 것이며, 이는 곧 문명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시인들은 문명의 불빛에서 소유와 소비의 욕망이 지배하는 도시공간의 추함, 유토피아를 가장한 불길한 욕망, 관능적 쾌락, 물질적 풍요가 배면에 감춘 죽음을 투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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