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3
2012.11.05 02:03
버클리 문학 문우들께
10월의 아름다운 밤입니다. 두가지 사항을 첨부해서 알려드립니다.
김경련교수님께서 지난주 보내주신 기형도 시인의 영역시 중 한 두편을 소개해주시고 영문번역자의 입장에서 번역상의 특기사항, 언어선택의 고려할 점 등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홍진 교수님 강좌시작 전에 10-15분 정도 부탁드립니다)
윤영숙 화백님의 그림이 Foster City Jewish Community Center 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Grand Prize를 수상했습니다. 70여명의 artist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당당히 수상하였습니다. 일요일 리셉션에 저희 부부가 참석했는데 감격스러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문우들께서도 축하해 주세요.
행복한 글과 삶!
김희봉드림
버클리 문학 문우들께
10월의 멋진 날들을 보내고 계시지요? 다음은 10월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김홍진 교수님이 준비하신 강좌내용을 첨부합니다. 모임에 오실 때 예습(!) 하시고, 카피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버클리 문학 강좌
10월 22일 (월) 오후 6시, 수라한식당, 김홍진 교수
10월 가을맞이 산행
10월 27일 (토) : China Camp
Car Pool: Allegro Ballroom (5855 Christie Ave, Emeryville, CA 94608) Wells Fargo Bank 건물 뒤로
오전 9시 까지 오시면 Carpool 로 함께 가실수 있습니다.
China Camp Parking Lot 으로 직접 오셔도 좋겠습니다.
점심시간을 즐겁게 하기위해 각자 애송시 나 특기 하나씩 준비해 오십시요
윤영숙 화백 전시회및 시상
10월 21 (일) Foster City Artist Reception Party 오후 1:30분 까지 (주소 문의 650 - 387-8910)
곧 뵙겠습니다.
행복한 글과 삶!
김희봉드림
===============================================================================
시와 시 아닌 것
- 시는 없고 시적인 것만 있다
(김홍진 교수)
映山紅 꽃잎에는/山이 어리고//山 자락에 낮잠 든/슬픈 小失宅//小失宅 툇마루에/놓인 놋요강//山 너머 바다는/보름 살이 때//소금발이 쓰려서/우는 갈매기(서정주, 「映山紅」전문)
서정주의 위 작품을 잘 뜯어보자. 그러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시의 서정성과 노래, 시적 언어의 의미관계, 구조적 연관성과 유기적 전체성, 언어의 경제성과 미적 언어의 쓰임새 등등 시의 구조적 의미가 발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회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紫色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太古木들의 숙연한 全身沈黙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端坐를./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古木들의 출렁거리는 뿌리둥치께에서 놋쇠가 부딪치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나는 걸음을 멈추고/이 겨울내내 山中에서 杜門不出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조정권, 「수유리 시편」 전문)
조정권은 정신주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시인이다. 강인한 정신은 투명하다. 한없이 투명하고 한없이 견고한 정신의 경지는 <수유리 시편>뿐 아니라 조정권의 시가 추구하는 세계다. 이 작품은 언어적 구조물인 시를 통하여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룬 세계, 맑고 투명하면서 집중된 응결의 힘과 역동적이라 할 만큼 힘찬 드라마를 보여주는 빼어난 시다. 전체 6행으로 구성된 있는 이 시는 첫 시행에서 새벽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 화자가 발견한 단서가 시적 발상법의 단초로 제시되어 시적 상상력을 전개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 단서는 태고목들이 가득 들어찬 산중의 풍경, 일부러 찾아가 만나야 하는 봄이 임박한 숲속 약수터를 오르면서 어느 한 순간 자연의 생명력이 일깨우는 강렬한 감동의 직관적 포착이다. 겨울이라는 시간 혹은 계절의 상황 속에서 마침내 움트고 있는 생명 내지는 봄의 발견이다. 이것은 객관적 상황의 겨울이라는 현실적 조건에서 줄기차게 화자 자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주체의 모습이 역력하며,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자기 자신 내면으로 치환하여 정신의 각성으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마치 한 편의 장엄한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산중의 “태고목”이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둘러싼 “자색 안개” “바위들의 단좌”가 이루는 배경은 작품 내적인 구조를 역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작품 내적 구조는 생명 탄생을 위한 강인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 생명 탄생과 관련된 강인한 정신은 이 작품의 폭과 강도를 느끼게 한다.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고목들”을 “겨울내내 산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강철 근육”으로 비유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소생시키는 봄기운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비유하면서 봄가운데 돋아난 새 움을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라는 강렬하고 폭이 큰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힘찬 드라마를 형상한다. 때문에 이 작품은 강건함이나 생명 탄생의 경건함이 잘 나타낸다.
이러한 강건함과 더불어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상쾌한 금속성의 청각적 이미지인 “쩡, 하는” 울림이다. 태고에 울려퍼진 소리가 아득한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재생하는 순간, 죽었다고 믿는 것 가운데 다시 생명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순간, 화자의 내면에 일어난 파열음이다. 이때 시인이 추구하는 강인함은 무겁고 둔중하게 가라앉지 않고 쩡하는 소리와 함께 상승한다. 단단함은 부드러움 속에 용해되고 은거(두문불출)와 각성(때려 깨움)은 하나로 합일한다. 그래서 시 전체가 “쩡, 하는 소리”의 긴 여운에 휩싸이게 된다. 이 소리는 바로 시인의 내면을 깨우는 각성의 소리다.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객관적 상황의 현실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줄기차게 자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주체의 모습이 역력하다. 화자의 준열한 의식과 견고한 정신은 “바위”와 “쇠망치”, “강철” 등의 이미지가 시적 분위기와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강력한 에너지를 촉발한다.
또한 이 시를 관류하는 지배적인 정서는 황홀감이라 할 수 있다. 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한한 우주 자연 앞에서 토하는 탄식이자 찬미가 이 시의 정조를 지배하고 있다. 장엄한 어조로 침잠하면서 무한대의 시공으로 확산하는 상상력의 급류를 방출하면서 자연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즉 “새벽” “자색 안개” “숲” “고목” “바위” 등 이미지 결합을 통해 자연의 황홀감과 그 숲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태고목의 부활이 주는 자연의 장엄함을 찬미하는 것이다.
산과 숲은 세속과 초월, 현실과 영원, 정신과 물질, 상승과 하강, 지상의 질서와 천상의 질서가 엇갈리는 경계를 의미한다. 산은 신화론적 우주론에서 흔히 상반되는 것들 사이의 균형을 상징하는 세계의 중심이자 축으로 나타나곤 한다. 여러 종교와 전설에서 산이 성지나 영생의 땅, 계시의 장소로 선택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올림푸스 산: 그리스, 유태교: 시나이 산, 불교: 수미산, 예수의 산상설교, 단군신화의 산 등은 의미심장한 역할을 수행한다.) 신성한 산은 한 나라,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화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는 행위는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이 아니라 우주적인 정화, 영성의 추구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즉 산을 오르는 것은 위로의 상승인 동시에 중심으로의 회귀이며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한층 우월한 상태, 지고한 가치에로의 다가감이란 내포를 띠고 있는 것이다. 산을 오르며 듣게 되는 생명 탄생의 “쩡, 하는 소리”는 우주의 비의에 대한 깨달음, 진정한 자아의 발견과 같은 위상에 놓인 것으로서, 화자는 모든 유한한 지상의 세속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의 영원성을 깨닫고 있다.
산과 나무는 천상을 지향하는 수직적 존재라는 동질성을 지닌다. 우주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우주목 또는 생명 나무는 하늘과 땅이 소통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기둥이다. 결빙의 시련을 견딘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정신의 강인한 의지적 세계를 보여준다. 간단한 몇 마디의 산문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생명 탄생의 메시지는 숲속의 구체적인 자연들의 모습에 의한 시적 현실의 제시에 의해 성공적인 시적 공감을 획득한다. 시적 현실은 태고목, 바위 등 자연 표상이 숲이 보여주는 자족적인 자기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숲에 있는 그 자연들은 그 누구에 의해 그곳에 놓여지지도 않고, 그 어떤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지만, 그 스스로 충분한 생명의 발언을 행하고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실비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전문)
우선 이 시는 술술 잘 읽힌다. 자연스런 리듬에 율격의 배열이 어우러져 우리의 음악적 감수성을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이 시는 ‘노래하는 시’, ‘읊는 시’다. ‘보는 시’나 ‘생각하는 시’와는 다르다. 영국의 이미지스트 에즈라 파운드가 말한 ‘음악시’로서, 이미지 표상을 중시하는 ‘시각시’, 말뜻의 理智的 특성에 치중하는 ‘언어시’와는 다르다. 이 시는 본래 제목이 붙여지지 않은 시다. 주제보다 다른 특성이 강조된 단서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시는 3음보의 율격을 기초로 한다. 즉 “돌담에/속삭이는/햇발같이”와 같은 음보구조를 기초로 했다. 여기에 묘한 變調가 가해짐으로써, 이 시는 비교적 단순한 음보의 배열을 기초로 하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음악시로서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1연의 3행과 4행을 눈여겨 보면 알 수 있다. 3행의 ‘고운’과 4행의 ‘우러르고 싶다’가 변조를 이룬다. 음절의 수에 변화를 준 것이다. ‘우러르고 싶다’를 ‘우러르고/싶다’의 2음보로 갈라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의 율격은 의미의 율격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법상 본동사와 보조동사(보조용언)는 한 무리의 의미 단위를 이룬다. ‘가고 싶다’나 ‘웃는 듯하다’처럼 말이다. ‘꼼지작거리는 듯하다’처럼 음절 수가 지나치게 늘어날 경우는 2음보로 나누어 읽어야겠으나, 음악시에서는 그런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대개 산문화하기 때문이다. ‘우러르고 싶다’ 같은 6음절 정도의 길이는 1음보로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시가의 전통이기도 하다. 고시조의 셋째 줄 둘째 음보는 5-7음절까지 자유롭게 변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2연의 1행과 2행을 눈여겨 보자. 1행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를 2행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자. ‘/3.2/1.2/’와 ‘/2.3/3.2/’로 대응되고 있다. 1행의 첫 음보와 2행의 그것이 같은 5음절이면서도 하나는 3.2, 다른 하나는 2.3의 배열 형태를 보였습니다. 또 2행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도 같은 5음절이나 앞의 것은 2.3, 뒤의 것은 3.2로 엇물려 변조의 묘한 리듬을 자아낸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시는 같은 음절의 규칙적 반복을 보이며, 다른 나라 시의 요운이나 각운이 빚어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속삭이는-웃음짓는’, ‘떠 오는-젖은’은 외국시의 요운, ‘햇발같이-샘물같이’, ‘부끄럼깥이-물결같이’는 각운과 닮았다. 음악시에 능했던 민요시인 김소월의 「금잔디」「진달래꽃」「산유화」「엄마야 누나야」「천리 만리」 같은 작품에도 이런 기교가 빛나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음악의 기법인 반복과 변조, 균형과 대조의 장치를 효과적으로 부련 쓴 읽는 시다. 낭독하고 외는 즐거움이 있는 시다.
다음은 우아하고 감칠맛나는 雅語를 적절히 구사했다는 점이다. ‘에메랄드’라는 서양말을 제외하면 여기 동원된 모든 시어가 순 우리말이라는 것이 놀랍다. 특히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 같은 아어의 배열은 탁월하다. 영랑의 시어는 우아미의 극치에 도달한 고운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러니까 고운 이미지들을 노래의 고운 가락 속에 짜 넣어 수놓는 交織의 달인이라 하겠다. 전남 강진읍 남성리에서 3백 그루의 모란을 가꾸면서 모란이 피기를 고대하며 일제 강점의 암흑기를 인내하던 영랑, 그는 호남의 걸출한 명인답게 북과 거문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만한 음악시를 쓸 만한 예인이었다.
이 시는 고요한 봄하늘을 동경하는 고운 마음결을 그림으로 그리며 노래한 아름다운 시다. 서술적, 묘사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고운데, 이 아름다운 그림이 노래의 가락을 만나 그 속에 오묘하게 녹아들었다.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등을 박용철, 이하윤, 정지용 등과 발간하며, 이른바 ‘순수시’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던 김영랑 시의 한 전형이 無題의 이 시다. 사회시를 주창하는 이들은 자주 이런 시에 비판의 화살을 쏜다. 일제 강점의 그 피압박 상태에서 이런 ‘낙관적, 낭만적, 반역사적’인 노래나 부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비판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시는 민족어와 고유한 우리 가락의 아름다움을 극한에까지 올려놓는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문제는 이런 아류의 시들이 시단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그것은 통렬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청포도」전문)
청포도는 청신하다. 그냥 포도가 아닌 청포도를 제재로 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 싱그럽고 청신한 이미지를 풍기는 여러 소재들도 모두 시원하고 청신한 이미지를 표상한다. 칠월의 계절감, 꿈꾸듯 푸르기만 한 하늘의 색조, 푸르게 탁 트인 여름 바다, 희디흰 돛배, 청포 입은 반가운 손님,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이런 소재들이 모두 청신한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들이다.
이렇듯 청신하고 푸르른 이미지들로 형상화된 이 시는 육사의 시들이 흔히 내포하는 갈등 의식이나 대결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 희귀한 작품이다. 자아와 세계가 대결관계에 있지 않고 합일의 상태를 보여준다. 物我一體, 主客一體, 物心一如의 경지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제재인 청포도를 비롯한 여러 소재들은 고향의 이미지를 티없이 맑은 세계로 형상화하였고, 전설처럼 아름다운 이 시 세계에서 마땅히 함께 해야 할 ‘그 사람(님)’을 기다리는 서정적 주인공의 간절한 염원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늘, 땅, 사람이 하나 되는 아름답고 푸른 고향의 향연이 펼쳐질 듯 하다.
문제는 이 시를 분석주의적, 일반적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역사주의적으로 보느냐에 있다. 가령 “내가 바라는 손님”을 일반적 접근 방법으로 풀면, 고향을 떠났던 옛 친구나 고결한 선비, 이상향 건설의 주인, ‘백마 탄 초인’에 비길만한 걸출한 인물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흰 돛 단 배’에는 그런 인물이 누구인가가 탈 것이며, ‘고달픈’ 까닭은 오랜 객지 생활이나 긴 방랑, 또는 고된 시련 때문이라 하겠다. 반면에 역사주의적 풀이는 이와 달리 특수하고 구체적인 상황과 결부될 것이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구국의 영웅, 민족의 구원자로 풀이될 수 있다. 이 시는 1939년 『문장』지에 발표되었고, 1946년 『육사시집』에 실렸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가 일제 강점의 폭압 정치가 극한을 치닫던 시대이고, 육사는 44년의 길지 않은 생애에 17회 이상의 감옥살이를 한 독립투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면 자아와 세계가 합일을 이룬 서정시가 아니라 격한 갈등이 내재된 사회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바른 독법은 어디에 있을까? 언어 분석만으로 보면 순수한 서정시로 풀이되는데, 「청포도」를 제외한 육사의 많은 시들이 시대적 절박성이나 저항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 역시 사회시라 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의 지배저긴 요소와 경향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청포도」는 우선 청신한 청각적 이미지로써 전설같이 아름다운 고향을 노래한 시이다. 육사의 「광야」나「절정」이 보여주는 남성적 어조나 웅혼, 장대한 역사적 조망, 절박한 상황 의식 같은 것이 좀체로 감지되지 않는 고운 서정시가 「청포도」다. 육사의 「청포도」는 우선 일반적 접근 방법으로서 읽어 서정시로 받아들이고 낭독, 음미하는 것이 옳다. 역사성, 사회성 문제는 그 다음에 신중히 탐구해야 한다. 이 시의 주제를 섣불리 ‘조국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파악한다면, 작가 및 시대 상황과 작품의 내용은 인과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결정론에 빠지기 쉽다. 좋은 시는 빤히 보이는 도덕률이나 이념 또는 규범을 표방하지 않는다. 시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개념과 함축된 의미, 명료성과 애매성 등이 통합되어 긴축미를 보일 때 성공작이 될 수 있다. 육사의 시 「청포도」는 하늘과 바다가 사람 사는 마을과 한 덩어리를 이룬 우리들 마음의 고향을 그린 시다. 가장 우리다운 마음 속 고향의 시공이 육사의 ‘내 고장 칠월’이라 하겠다.
순서가 바뀐 듯 하지만, 이제 이 시의 형태를 살펴보자. 「청포도」는 그 시상과 닮아서 형태 또한 자연스러워 안정감을 준다. 전편이 6연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연마다 2줄씩 배열되어 있어, 균형미를 유지하며 읽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시의 속살에 스민 율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감동적으로 읽힌다. 시행이 모두 의미의 단절없이 자연스러운 결합력을 보이고 있어 균형감을 느끼게 한다.
내 고장/칠월은/청포도가/익어/가는/시절. 이렇게 배열했다면 이 시의 감흥은 적잖이 감소될 것이다. 육사의 이 시가 어째서 그처럼 술술 자연스럽고 흥겹게 읽히는가를 이제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연미와 소박한 동경의 세계를 아로새긴 시이기에, 여기에는 신화적, 원초적 수사법인 의인화(활유법)의 기법이 구사되었다. 한국인의 원형적 꿈의 심상을 담은 이 시는 길이 애독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시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인정해야 하나, 부정해야 하나? 시에 대해, 혹은 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을 벗어나 있는 이와 같은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나 미와 추, 우아와 골계, 진지함과 경박함, 엄숙함과 천박함, 성(거룩함)과 속(일상의 속됨), 경건과 풍자(해학), 선과 악 등등의 관계에서 우리는 전자의 개념들에서만 미적인 것을 발견하는가. 추(醜)의 미학, 생각해보면 우리는 추함, 천박함, 역겨움, 지루함, 웃음, 불쾌, 괴기스러움, 공포, 불안 등등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들에서도 일정한 미적 쾌감을 얻는다.
황지우, 「묵념, 5분 27초」전문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83.4.1.~지:83.5.31.
황지우, 「벽⦁1」전문
아내가 빤스를 입고 나갔다. 나는 아내 빤스를 입어본 적이 없다./아내는 내 빤스를 입고 가 버린 것이다. 나는 빤스가 없다./일주일 후에 아내는 내 빤스를 빨아서 갖고 왔다./나는 빤스를 입었다.(김영승, 「반성 79」)
당혹스럽다. 시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먼저 「묵념, 5분 27초」는 제목만 있지 서정성이나 리듬을 운위할 본문 자체가 없다. 제목만 있고 소리없는 음악, 그림이 없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시는 제목만으로 본문의 의미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벽⦁1」은 벽보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화자의 태도도 없고, 리듬도 없고, 옮겨 놓은 것만 있다. 기존의 시형식을 해체하고, 그 해제가 보여주는 놀람과 그 놀람의 눈을 통해 흔히 보는 대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려는 것이 이 시의 목표일 수 있다. 시란 언어를 다듬어서 표현하는 창작 예술이라 믿는 독자에게는 시가 되지 못한다.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본문이 창작된 것이 아니라 해도 시의 제목과 시 외부의 문맥 등과의 긴장관계에 의해 또 다른 창작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반성 79 」도 소월, 만해, 영랑 이후 전통적인 서정시에 익숙한 독자들을 당혹케 한다. 시에는 시적인 말, 아름다운 말이 따로 있다고 믿고, 시의 어조는 엄숙하고 비감하거나 애틋하다고 믿는 독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 시에서는 엄숙주의와 비감주의는 아예 조롱의 대상이다. 물론 시는 유희적인 듯하지만 기실은 가난에 대한 반어적인 의미가 날카롭게 깔려 있다. 또한 현대시는 외설적인 표현과 욕설이 흔히 사용되며, 심지어 만화나 광고, 일상의 잡스런 문화적 파편들까지도 삽입된다. 이런 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라 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과/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스/러워…….//어느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랑이/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그래서 나는…….(황지우,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전문)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읍니다.//그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서정주, 「신부」 전문)
“KBS 2TV(하오 9시 45분)”이라는 부제가 붙은 앞의 인용시는 신문의 TV 프로그램 안내에 실린 연속극 줄거리와 화장실의 낙서를 병치시켜 놓고 있다. 현실의 표절에 가까운 이 시는 1연의 자동화된 일상의 파편과 2연의 공중화장실 낙서는 현실적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다. 그런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상의 자동화된 파편을 단순하게 병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소재가 그대로 표절되는 것을 과연 시라고 할 수 있을까?
미당의 시는 시집 『질마재신화』(1975)에 수록된 작품으로 설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시인은 독자에게 설화를 수동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꾼의 역할만 하고 있다. 설화적 모티브를 시적 체험으로 재창조할 때에만, 시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을 텐데, 이 시가 보여주는 반시적인 산문형태가 시로서 승인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시의 특징이 단절성, 말하자면 생략적이며 산문적인 연결방식이 결핍되어 있으며, 어떠한 설명도 없는 이미지들의 병치, 합리적인 질서에 따르지 않는 배열방식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때, 이 시는 지나치게 이완되어 있으며, 긴장된 내재율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설명적인 이야기에만 의존하고 있다.
生界엔 별일 없음. 문협 선거엔 미당이 당선된 모양이고, 내 사랑 서울은 오늘도 안녕함. 서울 S계기의 미스 천은 17살(꿈이 많지요), 데브콘 에이 중독. 평화시장 미싱공 4년생 미스 홍은 22살(가슴이 부풀었지요), 폐결핵. 모두 안녕함.//亡界의 수영은 김우창의 농사가 잘되어 술맛이 좀 풀린다고 히죽 웃음. 오후 3시, 엿가락처럼 늘어져 누워 있는 나에게 亡界의 쥘르 형으로부터 편지 옴(오규원, 「나의 데카메론」 중에서)
위의 시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어느 일요일의 일기, 혹은 간단한 메모 형식의 작품이다. 일기 형식의 메모는 물론이거니와 제목의 데카메론, 라포로그의 시 한 연을 패러디하고, 미당, 김수영, 김우창, 쥘르 등의 보통명사가 차용되면서 아이러니컬한 다성적 의미를 발현하고 있다. 일기 형식의 메모 속에는 늦게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변소를 갔다 오고, TV 스위치를 한번 누르고, 잡지를 1분 만에 읽은 등의 지극히 사소하고 권태로운 일들의 기록이 전부이다. “거리는 오늘도 안녕함. 안녕한 거리에 하품 나옴”의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이 전부이다. 권태로움은 꿈 많은 17살 소녀가 데브콘 에이에 중독되고, 가슴 부푼 22살 아가씨가 결핵을 앓는 비참한 상황까지 “모두 안녕”하게 만든다. 문제는 꿈 많은 17살 소녀와 가슴 부푼 22살 처녀의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안녕한 자신의 삶이다.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안녕하지 못한 상황을 안녕하다고 말하는 반어적 어조를 통해 현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실의 부정성을 바라보는 시인의 냉철한 의식이다
관념화된 사유구조에 대한 해체와 부정의 정신은 “간판이 많은 길”로 대표되는 물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문화 논리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도구화되고 기능화된 언어에 대한 전략적인 뒤집기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본주의의 신전이라 할 수 있는 도시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많”고, 그곳은 자세히 보면 “수상하”(「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고 불온하다.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그 문화 논리의 물질화에 숨겨진 정치적ㆍ사회적 언어와 투쟁한다. 관념화되고 수단화된 언어에 대한 거부는 “음흉한 순수시”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고, 그러한 언어 체계를 극복하는 과정은 억압적인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해방을 위해서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우화, 패러디, 아이러니, 풍자적 수법 등이다.
오규원이 ‘등기된 현실’이라고 말하는 억압의 세계는 관리되고 규격화된 사회와 그것을 지탱하는 관념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물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삭제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일정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인식하도록 한다. 때문에 ‘사실적 현상’의 본질은 투명하게 드러날 수 없다. 이에 대한 해학과 풍자와 야유, 아이러니와 우화, 언어의 뒤틀림과 패러디를 통한 방법론적 대응은 시적 주체가 시 안에 적극적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사회적 비판력을 획득한다. 모더니즘의 정신적 기반이 근대적 경험 세계의 모순과 대결하는 인간의 반성적 인식이라 할 때, 비판적 주체의 적극적 나타남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이때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지적인 주체의 의식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오규원의 시에서 우화나 패러디, 아이러니나 풍자적 수법은 이러한 방법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죽음’이라는 관념을 의인화하여 일상의 세계 자체가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거나(「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꽃이/아름답다는 편견”을 벗어나 “송충이는/모두 저렇게 아름답다”(「송충이」)와 같이 그가 지향하는 아이러니의 언어는 모든 자명성과 자동성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반성적 성찰에서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추구했던 기존관념의 해체와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엉덩이를 모래 사이에 쑤셔넣고/코카콜라 빈 병 주둥이/(미제 지대공 미사일 탄두!)/고개를 쳐들고 웃고 있다/물이 밀어올리고 펼쳐놓은/先山川 모래밭/작은 모래야(오규원, 「모래와 코카콜라」 중에서)
코카콜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수이다. 갈증 해소는 콜라가 지니는 본래의 상품적 기능이다. 그러나 시인은 “엉덩이를 모래 사이에 쑤셔넣”은 채 모래밭에 버려진 “코카콜라 빈 병”에서 어떤 불순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읽어낸다. 시인은 여기에서 자본을 통해 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신식민적 질서의 음흉한 내적 논리를 읽는다. 화자는 자본의 식민적 욕망이 상품으로 변형되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있는 불온한 현실에 대해 비판의 칼을 댄다. 즉 “코카콜라의 빈 병 주둥이”가 “미제 지대공 미사일 탄두”라는 등식은 무력적 폭력이 상품이라는 현대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 이것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폭력성은 내내 한 가지라는 뜻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다국적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코카콜라 빈 병”이 “엉덩이를 모래 사이에 쑤셔넣고” 있는 현실은 현재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래는 아주 작고 물결에 끊임없이 부침을 당한다. 모래로 상징되는 약소한 존재, 물로 상징되는 거대한 자본의 외세에 의해 침식당하는 우리들의 현실, 작은 알갱이의 모래밭에 탐욕스런 “엉덩이를 쑤셔넣”고 자리 잡은 자본의 불순한 본모습을 시인은 다국적 자본주의의 상징적 코드인 코카콜라를 통해 보는 것이다.
1. ‘양쪽 모서리를/함께 눌러주세요’//나는 극좌와 극우의/양쪽 모서리를/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극좌와 극우의 흰/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오규원,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중에서
자본주의의 전령사라 할 수 있는 광고는 상품의 고유한 가치를 창출한다는 본래의 기능뿐 아니라 소비를 조작하고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은 물론 소통 체계까지 소비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강력하게 통어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소비의 물신사회에서 상품 광고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조작하며 관리한다. 이러한 상품 광고의 언어는 자본의 언어이며 물신의 언어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능화된 물신의 언어를 대표하는 언어이다. 인용 시는 수단화되고 기능화된 상품 광고의 언어를 통해 타락한 이데올로기의 정치성을 비판적으로 읽어낸다.
우유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즐겨 먹는 상품이다. 그러나 시인은 상품에 포장된 안내서를 정치적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현실이 상품처럼 “빙그레” 웃을 수 없는 곳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체의 인식론적 측면을 강조할 때, 사실은 늘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오규원은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과 해석이 가져올 수 있는 왜곡의 위험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은 이후 인간중심적인 시선과 관념의 흔적을 제거하고 장식적 요소까지를 삭제한, 그러니까 ‘날이미지’의 시학을 내세우는 데 이른다. 시인은 이제 관념의 껍질을 벗기고 주체의 자의식을 넘어서 투명한 시선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을 ‘맨얼굴’로 대하면서 사물의 ‘맨얼굴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최승자의 표현대로 서정의 시대는 끝났고 서정연습 시대만 있을 뿐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전언이다.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시도 존재하지만, 우리의 허위와 권위, 경건과 엄숙주의, 현실과 제도적 규범이 교묘히 숨기고 있는 억압과 폭력성을 헤집는 시도 분명 존재한다. 미와 추는 항상 대등한 관계에서 작용한다. 자아와 세계가 행복하게 일치하는 황금시대는 갔다. 시는 없고 시적인 것만 존재한다.
10월의 아름다운 밤입니다. 두가지 사항을 첨부해서 알려드립니다.
김경련교수님께서 지난주 보내주신 기형도 시인의 영역시 중 한 두편을 소개해주시고 영문번역자의 입장에서 번역상의 특기사항, 언어선택의 고려할 점 등을 간단히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홍진 교수님 강좌시작 전에 10-15분 정도 부탁드립니다)
윤영숙 화백님의 그림이 Foster City Jewish Community Center 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Grand Prize를 수상했습니다. 70여명의 artist들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당당히 수상하였습니다. 일요일 리셉션에 저희 부부가 참석했는데 감격스러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문우들께서도 축하해 주세요.
행복한 글과 삶!
김희봉드림
버클리 문학 문우들께
10월의 멋진 날들을 보내고 계시지요? 다음은 10월의 행사입니다. 그리고 김홍진 교수님이 준비하신 강좌내용을 첨부합니다. 모임에 오실 때 예습(!) 하시고, 카피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버클리 문학 강좌
10월 22일 (월) 오후 6시, 수라한식당, 김홍진 교수
10월 가을맞이 산행
10월 27일 (토) : China Camp
Car Pool: Allegro Ballroom (5855 Christie Ave, Emeryville, CA 94608) Wells Fargo Bank 건물 뒤로
오전 9시 까지 오시면 Carpool 로 함께 가실수 있습니다.
China Camp Parking Lot 으로 직접 오셔도 좋겠습니다.
점심시간을 즐겁게 하기위해 각자 애송시 나 특기 하나씩 준비해 오십시요
윤영숙 화백 전시회및 시상
10월 21 (일) Foster City Artist Reception Party 오후 1:30분 까지 (주소 문의 650 - 387-8910)
곧 뵙겠습니다.
행복한 글과 삶!
김희봉드림
===============================================================================
시와 시 아닌 것
- 시는 없고 시적인 것만 있다
(김홍진 교수)
映山紅 꽃잎에는/山이 어리고//山 자락에 낮잠 든/슬픈 小失宅//小失宅 툇마루에/놓인 놋요강//山 너머 바다는/보름 살이 때//소금발이 쓰려서/우는 갈매기(서정주, 「映山紅」전문)
서정주의 위 작품을 잘 뜯어보자. 그러면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시의 서정성과 노래, 시적 언어의 의미관계, 구조적 연관성과 유기적 전체성, 언어의 경제성과 미적 언어의 쓰임새 등등 시의 구조적 의미가 발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회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가 보았다./紫色 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太古木들의 숙연한 全身沈黙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端坐를./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古木들의 출렁거리는 뿌리둥치께에서 놋쇠가 부딪치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나는 걸음을 멈추고/이 겨울내내 山中에서 杜門不出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조정권, 「수유리 시편」 전문)
조정권은 정신주의 시인으로 평가되는 시인이다. 강인한 정신은 투명하다. 한없이 투명하고 한없이 견고한 정신의 경지는 <수유리 시편>뿐 아니라 조정권의 시가 추구하는 세계다. 이 작품은 언어적 구조물인 시를 통하여 정신적 순결성과 이미지의 명징성이 조화롭게 일치를 이룬 세계, 맑고 투명하면서 집중된 응결의 힘과 역동적이라 할 만큼 힘찬 드라마를 보여주는 빼어난 시다. 전체 6행으로 구성된 있는 이 시는 첫 시행에서 새벽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다 화자가 발견한 단서가 시적 발상법의 단초로 제시되어 시적 상상력을 전개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 단서는 태고목들이 가득 들어찬 산중의 풍경, 일부러 찾아가 만나야 하는 봄이 임박한 숲속 약수터를 오르면서 어느 한 순간 자연의 생명력이 일깨우는 강렬한 감동의 직관적 포착이다. 겨울이라는 시간 혹은 계절의 상황 속에서 마침내 움트고 있는 생명 내지는 봄의 발견이다. 이것은 객관적 상황의 겨울이라는 현실적 조건에서 줄기차게 화자 자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주체의 모습이 역력하며,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자기 자신 내면으로 치환하여 정신의 각성으로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마치 한 편의 장엄한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산중의 “태고목”이라는 대상과 그 대상을 둘러싼 “자색 안개” “바위들의 단좌”가 이루는 배경은 작품 내적인 구조를 역동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역동적인 작품 내적 구조는 생명 탄생을 위한 강인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 생명 탄생과 관련된 강인한 정신은 이 작품의 폭과 강도를 느끼게 한다. “죽었다고 생각해 오던 고목들”을 “겨울내내 산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강철 근육”으로 비유하면서, 그리고 그것을 소생시키는 봄기운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비유하면서 봄가운데 돋아난 새 움을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라는 강렬하고 폭이 큰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했다. 이렇게 해서 이 시는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힘찬 드라마를 형상한다. 때문에 이 작품은 강건함이나 생명 탄생의 경건함이 잘 나타낸다.
이러한 강건함과 더불어 이 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상쾌한 금속성의 청각적 이미지인 “쩡, 하는” 울림이다. 태고에 울려퍼진 소리가 아득한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재생하는 순간, 죽었다고 믿는 것 가운데 다시 생명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순간, 화자의 내면에 일어난 파열음이다. 이때 시인이 추구하는 강인함은 무겁고 둔중하게 가라앉지 않고 쩡하는 소리와 함께 상승한다. 단단함은 부드러움 속에 용해되고 은거(두문불출)와 각성(때려 깨움)은 하나로 합일한다. 그래서 시 전체가 “쩡, 하는 소리”의 긴 여운에 휩싸이게 된다. 이 소리는 바로 시인의 내면을 깨우는 각성의 소리다. 피폐하기 이를 데 없는 객관적 상황의 현실이라기보다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줄기차게 자신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주체의 모습이 역력하다. 화자의 준열한 의식과 견고한 정신은 “바위”와 “쇠망치”, “강철” 등의 이미지가 시적 분위기와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강력한 에너지를 촉발한다.
또한 이 시를 관류하는 지배적인 정서는 황홀감이라 할 수 있다. 유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무한한 우주 자연 앞에서 토하는 탄식이자 찬미가 이 시의 정조를 지배하고 있다. 장엄한 어조로 침잠하면서 무한대의 시공으로 확산하는 상상력의 급류를 방출하면서 자연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즉 “새벽” “자색 안개” “숲” “고목” “바위” 등 이미지 결합을 통해 자연의 황홀감과 그 숲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태고목의 부활이 주는 자연의 장엄함을 찬미하는 것이다.
산과 숲은 세속과 초월, 현실과 영원, 정신과 물질, 상승과 하강, 지상의 질서와 천상의 질서가 엇갈리는 경계를 의미한다. 산은 신화론적 우주론에서 흔히 상반되는 것들 사이의 균형을 상징하는 세계의 중심이자 축으로 나타나곤 한다. 여러 종교와 전설에서 산이 성지나 영생의 땅, 계시의 장소로 선택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올림푸스 산: 그리스, 유태교: 시나이 산, 불교: 수미산, 예수의 산상설교, 단군신화의 산 등은 의미심장한 역할을 수행한다.) 신성한 산은 한 나라, 나아가 세계의 중심이자 근원이다. 따라서 화계사 숲속의 약수터로 오르는 행위는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이 아니라 우주적인 정화, 영성의 추구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즉 산을 오르는 것은 위로의 상승인 동시에 중심으로의 회귀이며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한층 우월한 상태, 지고한 가치에로의 다가감이란 내포를 띠고 있는 것이다. 산을 오르며 듣게 되는 생명 탄생의 “쩡, 하는 소리”는 우주의 비의에 대한 깨달음, 진정한 자아의 발견과 같은 위상에 놓인 것으로서, 화자는 모든 유한한 지상의 세속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의 영원성을 깨닫고 있다.
산과 나무는 천상을 지향하는 수직적 존재라는 동질성을 지닌다. 우주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우주목 또는 생명 나무는 하늘과 땅이 소통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통로이자 기둥이다. 결빙의 시련을 견딘 나무의 이미지를 통해 정신의 강인한 의지적 세계를 보여준다. 간단한 몇 마디의 산문으로 끝날 수도 있는 생명 탄생의 메시지는 숲속의 구체적인 자연들의 모습에 의한 시적 현실의 제시에 의해 성공적인 시적 공감을 획득한다. 시적 현실은 태고목, 바위 등 자연 표상이 숲이 보여주는 자족적인 자기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숲에 있는 그 자연들은 그 누구에 의해 그곳에 놓여지지도 않고, 그 어떤 목적을 지향하지도 않지만, 그 스스로 충분한 생명의 발언을 행하고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실비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전문)
우선 이 시는 술술 잘 읽힌다. 자연스런 리듬에 율격의 배열이 어우러져 우리의 음악적 감수성을 충족시켜준다. 그래서 이 시는 ‘노래하는 시’, ‘읊는 시’다. ‘보는 시’나 ‘생각하는 시’와는 다르다. 영국의 이미지스트 에즈라 파운드가 말한 ‘음악시’로서, 이미지 표상을 중시하는 ‘시각시’, 말뜻의 理智的 특성에 치중하는 ‘언어시’와는 다르다. 이 시는 본래 제목이 붙여지지 않은 시다. 주제보다 다른 특성이 강조된 단서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 시는 3음보의 율격을 기초로 한다. 즉 “돌담에/속삭이는/햇발같이”와 같은 음보구조를 기초로 했다. 여기에 묘한 變調가 가해짐으로써, 이 시는 비교적 단순한 음보의 배열을 기초로 하면서도, 단조롭지 않은 음악시로서 성공하고 있다. 이것은 1연의 3행과 4행을 눈여겨 보면 알 수 있다. 3행의 ‘고운’과 4행의 ‘우러르고 싶다’가 변조를 이룬다. 음절의 수에 변화를 준 것이다. ‘우러르고 싶다’를 ‘우러르고/싶다’의 2음보로 갈라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법하나,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의 율격은 의미의 율격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법상 본동사와 보조동사(보조용언)는 한 무리의 의미 단위를 이룬다. ‘가고 싶다’나 ‘웃는 듯하다’처럼 말이다. ‘꼼지작거리는 듯하다’처럼 음절 수가 지나치게 늘어날 경우는 2음보로 나누어 읽어야겠으나, 음악시에서는 그런 예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는 대개 산문화하기 때문이다. ‘우러르고 싶다’ 같은 6음절 정도의 길이는 1음보로 소화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시가의 전통이기도 하다. 고시조의 셋째 줄 둘째 음보는 5-7음절까지 자유롭게 변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2연의 1행과 2행을 눈여겨 보자. 1행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를 2행의 그것들과 비교해 보자. ‘/3.2/1.2/’와 ‘/2.3/3.2/’로 대응되고 있다. 1행의 첫 음보와 2행의 그것이 같은 5음절이면서도 하나는 3.2, 다른 하나는 2.3의 배열 형태를 보였습니다. 또 2행의 첫 음보와 둘째 음보도 같은 5음절이나 앞의 것은 2.3, 뒤의 것은 3.2로 엇물려 변조의 묘한 리듬을 자아낸다.
그 뿐이 아니다. 이 시는 같은 음절의 규칙적 반복을 보이며, 다른 나라 시의 요운이나 각운이 빚어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속삭이는-웃음짓는’, ‘떠 오는-젖은’은 외국시의 요운, ‘햇발같이-샘물같이’, ‘부끄럼깥이-물결같이’는 각운과 닮았다. 음악시에 능했던 민요시인 김소월의 「금잔디」「진달래꽃」「산유화」「엄마야 누나야」「천리 만리」 같은 작품에도 이런 기교가 빛나고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음악의 기법인 반복과 변조, 균형과 대조의 장치를 효과적으로 부련 쓴 읽는 시다. 낭독하고 외는 즐거움이 있는 시다.
다음은 우아하고 감칠맛나는 雅語를 적절히 구사했다는 점이다. ‘에메랄드’라는 서양말을 제외하면 여기 동원된 모든 시어가 순 우리말이라는 것이 놀랍다. 특히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 같은 아어의 배열은 탁월하다. 영랑의 시어는 우아미의 극치에 도달한 고운 이미지를 창출해냈다. 그러니까 고운 이미지들을 노래의 고운 가락 속에 짜 넣어 수놓는 交織의 달인이라 하겠다. 전남 강진읍 남성리에서 3백 그루의 모란을 가꾸면서 모란이 피기를 고대하며 일제 강점의 암흑기를 인내하던 영랑, 그는 호남의 걸출한 명인답게 북과 거문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이만한 음악시를 쓸 만한 예인이었다.
이 시는 고요한 봄하늘을 동경하는 고운 마음결을 그림으로 그리며 노래한 아름다운 시다. 서술적, 묘사적인 시각적 이미지가 고운데, 이 아름다운 그림이 노래의 가락을 만나 그 속에 오묘하게 녹아들었다.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등을 박용철, 이하윤, 정지용 등과 발간하며, 이른바 ‘순수시’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던 김영랑 시의 한 전형이 無題의 이 시다. 사회시를 주창하는 이들은 자주 이런 시에 비판의 화살을 쏜다. 일제 강점의 그 피압박 상태에서 이런 ‘낙관적, 낭만적, 반역사적’인 노래나 부르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비판은 타당하다. 그럼에도 이 시는 민족어와 고유한 우리 가락의 아름다움을 극한에까지 올려놓는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문제는 이런 아류의 시들이 시단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그것은 통렬히 비판받아 마땅하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박혀,/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이육사, 「청포도」전문)
청포도는 청신하다. 그냥 포도가 아닌 청포도를 제재로 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 싱그럽고 청신한 이미지를 풍기는 여러 소재들도 모두 시원하고 청신한 이미지를 표상한다. 칠월의 계절감, 꿈꾸듯 푸르기만 한 하늘의 색조, 푸르게 탁 트인 여름 바다, 희디흰 돛배, 청포 입은 반가운 손님,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이런 소재들이 모두 청신한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들이다.
이렇듯 청신하고 푸르른 이미지들로 형상화된 이 시는 육사의 시들이 흔히 내포하는 갈등 의식이나 대결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 희귀한 작품이다. 자아와 세계가 대결관계에 있지 않고 합일의 상태를 보여준다. 物我一體, 主客一體, 物心一如의 경지를 지향하는 아름다운 서정시다. 제재인 청포도를 비롯한 여러 소재들은 고향의 이미지를 티없이 맑은 세계로 형상화하였고, 전설처럼 아름다운 이 시 세계에서 마땅히 함께 해야 할 ‘그 사람(님)’을 기다리는 서정적 주인공의 간절한 염원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늘, 땅, 사람이 하나 되는 아름답고 푸른 고향의 향연이 펼쳐질 듯 하다.
문제는 이 시를 분석주의적, 일반적 관점으로 보느냐, 아니면 역사주의적으로 보느냐에 있다. 가령 “내가 바라는 손님”을 일반적 접근 방법으로 풀면, 고향을 떠났던 옛 친구나 고결한 선비, 이상향 건설의 주인, ‘백마 탄 초인’에 비길만한 걸출한 인물 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흰 돛 단 배’에는 그런 인물이 누구인가가 탈 것이며, ‘고달픈’ 까닭은 오랜 객지 생활이나 긴 방랑, 또는 고된 시련 때문이라 하겠다. 반면에 역사주의적 풀이는 이와 달리 특수하고 구체적인 상황과 결부될 것이다. “내가 바라는 손님”은 독립운동가, 애국지사, 구국의 영웅, 민족의 구원자로 풀이될 수 있다. 이 시는 1939년 『문장』지에 발표되었고, 1946년 『육사시집』에 실렸다. 처음 발표되었을 때가 일제 강점의 폭압 정치가 극한을 치닫던 시대이고, 육사는 44년의 길지 않은 생애에 17회 이상의 감옥살이를 한 독립투사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풀면 자아와 세계가 합일을 이룬 서정시가 아니라 격한 갈등이 내재된 사회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바른 독법은 어디에 있을까? 언어 분석만으로 보면 순수한 서정시로 풀이되는데, 「청포도」를 제외한 육사의 많은 시들이 시대적 절박성이나 저항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작품 역시 사회시라 할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의 지배저긴 요소와 경향이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청포도」는 우선 청신한 청각적 이미지로써 전설같이 아름다운 고향을 노래한 시이다. 육사의 「광야」나「절정」이 보여주는 남성적 어조나 웅혼, 장대한 역사적 조망, 절박한 상황 의식 같은 것이 좀체로 감지되지 않는 고운 서정시가 「청포도」다. 육사의 「청포도」는 우선 일반적 접근 방법으로서 읽어 서정시로 받아들이고 낭독, 음미하는 것이 옳다. 역사성, 사회성 문제는 그 다음에 신중히 탐구해야 한다. 이 시의 주제를 섣불리 ‘조국 광복에 대한 간절한 염원’으로 파악한다면, 작가 및 시대 상황과 작품의 내용은 인과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결정론에 빠지기 쉽다. 좋은 시는 빤히 보이는 도덕률이나 이념 또는 규범을 표방하지 않는다. 시는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개념과 함축된 의미, 명료성과 애매성 등이 통합되어 긴축미를 보일 때 성공작이 될 수 있다. 육사의 시 「청포도」는 하늘과 바다가 사람 사는 마을과 한 덩어리를 이룬 우리들 마음의 고향을 그린 시다. 가장 우리다운 마음 속 고향의 시공이 육사의 ‘내 고장 칠월’이라 하겠다.
순서가 바뀐 듯 하지만, 이제 이 시의 형태를 살펴보자. 「청포도」는 그 시상과 닮아서 형태 또한 자연스러워 안정감을 준다. 전편이 6연으로 이루어진 시인데, 연마다 2줄씩 배열되어 있어, 균형미를 유지하며 읽는 이를 편안하게 한다. 시의 속살에 스민 율격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감동적으로 읽힌다. 시행이 모두 의미의 단절없이 자연스러운 결합력을 보이고 있어 균형감을 느끼게 한다.
내 고장/칠월은/청포도가/익어/가는/시절. 이렇게 배열했다면 이 시의 감흥은 적잖이 감소될 것이다. 육사의 이 시가 어째서 그처럼 술술 자연스럽고 흥겹게 읽히는가를 이제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연미와 소박한 동경의 세계를 아로새긴 시이기에, 여기에는 신화적, 원초적 수사법인 의인화(활유법)의 기법이 구사되었다. 한국인의 원형적 꿈의 심상을 담은 이 시는 길이 애독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시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이런 작품들을 인정해야 하나, 부정해야 하나? 시에 대해, 혹은 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전통적인 관념을 벗어나 있는 이와 같은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러나 미와 추, 우아와 골계, 진지함과 경박함, 엄숙함과 천박함, 성(거룩함)과 속(일상의 속됨), 경건과 풍자(해학), 선과 악 등등의 관계에서 우리는 전자의 개념들에서만 미적인 것을 발견하는가. 추(醜)의 미학, 생각해보면 우리는 추함, 천박함, 역겨움, 지루함, 웃음, 불쾌, 괴기스러움, 공포, 불안 등등의 감정을 유발하는 것들에서도 일정한 미적 쾌감을 얻는다.
황지우, 「묵념, 5분 27초」전문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83.4.1.~지:83.5.31.
황지우, 「벽⦁1」전문
아내가 빤스를 입고 나갔다. 나는 아내 빤스를 입어본 적이 없다./아내는 내 빤스를 입고 가 버린 것이다. 나는 빤스가 없다./일주일 후에 아내는 내 빤스를 빨아서 갖고 왔다./나는 빤스를 입었다.(김영승, 「반성 79」)
당혹스럽다. 시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먼저 「묵념, 5분 27초」는 제목만 있지 서정성이나 리듬을 운위할 본문 자체가 없다. 제목만 있고 소리없는 음악, 그림이 없는 그림을 상상해 보라. 시는 제목만으로 본문의 의미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벽⦁1」은 벽보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화자의 태도도 없고, 리듬도 없고, 옮겨 놓은 것만 있다. 기존의 시형식을 해체하고, 그 해제가 보여주는 놀람과 그 놀람의 눈을 통해 흔히 보는 대상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려는 것이 이 시의 목표일 수 있다. 시란 언어를 다듬어서 표현하는 창작 예술이라 믿는 독자에게는 시가 되지 못한다.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창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본문이 창작된 것이 아니라 해도 시의 제목과 시 외부의 문맥 등과의 긴장관계에 의해 또 다른 창작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반성 79 」도 소월, 만해, 영랑 이후 전통적인 서정시에 익숙한 독자들을 당혹케 한다. 시에는 시적인 말, 아름다운 말이 따로 있다고 믿고, 시의 어조는 엄숙하고 비감하거나 애틋하다고 믿는 독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 시에서는 엄숙주의와 비감주의는 아예 조롱의 대상이다. 물론 시는 유희적인 듯하지만 기실은 가난에 대한 반어적인 의미가 날카롭게 깔려 있다. 또한 현대시는 외설적인 표현과 욕설이 흔히 사용되며, 심지어 만화나 광고, 일상의 잡스런 문화적 파편들까지도 삽입된다. 이런 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길중은 밤늦게 돌아온 숙자/에게 핀잔을 주는데, 숙자는/하루종일 고생한 수고도 몰/라 주는 남편이 야속해 화가/났다. 혜옥은 조카 창연이/은미를 따르는 것을 보고 명/섭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이모는 명섭과/은미의 초라한 생활이 안스/러워…….//어느날 나는 친구집엘 놀러/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친구 누나의 벌어진 가랑이/를 보자 나는 자지가 꼴렸다./그래서 나는…….(황지우, 「숙자는 남편이 야속해」전문)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읍니다.//그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서정주, 「신부」 전문)
“KBS 2TV(하오 9시 45분)”이라는 부제가 붙은 앞의 인용시는 신문의 TV 프로그램 안내에 실린 연속극 줄거리와 화장실의 낙서를 병치시켜 놓고 있다. 현실의 표절에 가까운 이 시는 1연의 자동화된 일상의 파편과 2연의 공중화장실 낙서는 현실적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다. 그런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상의 자동화된 파편을 단순하게 병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소재가 그대로 표절되는 것을 과연 시라고 할 수 있을까?
미당의 시는 시집 『질마재신화』(1975)에 수록된 작품으로 설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시인은 독자에게 설화를 수동적으로 전달하는 이야기꾼의 역할만 하고 있다. 설화적 모티브를 시적 체험으로 재창조할 때에만, 시로서의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을 텐데, 이 시가 보여주는 반시적인 산문형태가 시로서 승인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시의 특징이 단절성, 말하자면 생략적이며 산문적인 연결방식이 결핍되어 있으며, 어떠한 설명도 없는 이미지들의 병치, 합리적인 질서에 따르지 않는 배열방식 등으로 이해될 수 있을 때, 이 시는 지나치게 이완되어 있으며, 긴장된 내재율을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설명적인 이야기에만 의존하고 있다.
生界엔 별일 없음. 문협 선거엔 미당이 당선된 모양이고, 내 사랑 서울은 오늘도 안녕함. 서울 S계기의 미스 천은 17살(꿈이 많지요), 데브콘 에이 중독. 평화시장 미싱공 4년생 미스 홍은 22살(가슴이 부풀었지요), 폐결핵. 모두 안녕함.//亡界의 수영은 김우창의 농사가 잘되어 술맛이 좀 풀린다고 히죽 웃음. 오후 3시, 엿가락처럼 늘어져 누워 있는 나에게 亡界의 쥘르 형으로부터 편지 옴(오규원, 「나의 데카메론」 중에서)
위의 시는 지루하고 권태로운 어느 일요일의 일기, 혹은 간단한 메모 형식의 작품이다. 일기 형식의 메모는 물론이거니와 제목의 데카메론, 라포로그의 시 한 연을 패러디하고, 미당, 김수영, 김우창, 쥘르 등의 보통명사가 차용되면서 아이러니컬한 다성적 의미를 발현하고 있다. 일기 형식의 메모 속에는 늦게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고, 변소를 갔다 오고, TV 스위치를 한번 누르고, 잡지를 1분 만에 읽은 등의 지극히 사소하고 권태로운 일들의 기록이 전부이다. “거리는 오늘도 안녕함. 안녕한 거리에 하품 나옴”의 권태롭고 무의미한 일상이 전부이다. 권태로움은 꿈 많은 17살 소녀가 데브콘 에이에 중독되고, 가슴 부푼 22살 아가씨가 결핵을 앓는 비참한 상황까지 “모두 안녕”하게 만든다. 문제는 꿈 많은 17살 소녀와 가슴 부푼 22살 처녀의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안녕한 자신의 삶이다.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은 결코 안녕하지 못한 상황을 안녕하다고 말하는 반어적 어조를 통해 현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실의 부정성을 바라보는 시인의 냉철한 의식이다
관념화된 사유구조에 대한 해체와 부정의 정신은 “간판이 많은 길”로 대표되는 물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문화 논리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도구화되고 기능화된 언어에 대한 전략적인 뒤집기로 나타난다. 그에게 자본주의의 신전이라 할 수 있는 도시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많”고, 그곳은 자세히 보면 “수상하”(「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고 불온하다.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와 그 문화 논리의 물질화에 숨겨진 정치적ㆍ사회적 언어와 투쟁한다. 관념화되고 수단화된 언어에 대한 거부는 “음흉한 순수시”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고, 그러한 언어 체계를 극복하는 과정은 억압적인 현실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해방을 위해서 시인이 선택한 방법은 우화, 패러디, 아이러니, 풍자적 수법 등이다.
오규원이 ‘등기된 현실’이라고 말하는 억압의 세계는 관리되고 규격화된 사회와 그것을 지탱하는 관념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물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삭제하여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일정한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인식하도록 한다. 때문에 ‘사실적 현상’의 본질은 투명하게 드러날 수 없다. 이에 대한 해학과 풍자와 야유, 아이러니와 우화, 언어의 뒤틀림과 패러디를 통한 방법론적 대응은 시적 주체가 시 안에 적극적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사회적 비판력을 획득한다. 모더니즘의 정신적 기반이 근대적 경험 세계의 모순과 대결하는 인간의 반성적 인식이라 할 때, 비판적 주체의 적극적 나타남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 이때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를 냉철하게 인식하는 지적인 주체의 의식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오규원의 시에서 우화나 패러디, 아이러니나 풍자적 수법은 이러한 방법적 차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령, ‘죽음’이라는 관념을 의인화하여 일상의 세계 자체가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암시하거나(「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꽃이/아름답다는 편견”을 벗어나 “송충이는/모두 저렇게 아름답다”(「송충이」)와 같이 그가 지향하는 아이러니의 언어는 모든 자명성과 자동성을 해체시키고자 하는 반성적 성찰에서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추구했던 기존관념의 해체와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엉덩이를 모래 사이에 쑤셔넣고/코카콜라 빈 병 주둥이/(미제 지대공 미사일 탄두!)/고개를 쳐들고 웃고 있다/물이 밀어올리고 펼쳐놓은/先山川 모래밭/작은 모래야(오규원, 「모래와 코카콜라」 중에서)
코카콜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수이다. 갈증 해소는 콜라가 지니는 본래의 상품적 기능이다. 그러나 시인은 “엉덩이를 모래 사이에 쑤셔넣”은 채 모래밭에 버려진 “코카콜라 빈 병”에서 어떤 불순한 자본주의의 논리를 읽어낸다. 시인은 여기에서 자본을 통해 새롭게 구축되고 있는 신식민적 질서의 음흉한 내적 논리를 읽는다. 화자는 자본의 식민적 욕망이 상품으로 변형되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있는 불온한 현실에 대해 비판의 칼을 댄다. 즉 “코카콜라의 빈 병 주둥이”가 “미제 지대공 미사일 탄두”라는 등식은 무력적 폭력이 상품이라는 현대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 이것이 지니고 있는 정치적 폭력성은 내내 한 가지라는 뜻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다국적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코카콜라 빈 병”이 “엉덩이를 모래 사이에 쑤셔넣고” 있는 현실은 현재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모래는 아주 작고 물결에 끊임없이 부침을 당한다. 모래로 상징되는 약소한 존재, 물로 상징되는 거대한 자본의 외세에 의해 침식당하는 우리들의 현실, 작은 알갱이의 모래밭에 탐욕스런 “엉덩이를 쑤셔넣”고 자리 잡은 자본의 불순한 본모습을 시인은 다국적 자본주의의 상징적 코드인 코카콜라를 통해 보는 것이다.
1. ‘양쪽 모서리를/함께 눌러주세요’//나는 극좌와 극우의/양쪽 모서리를/함께 꾸욱 누른다
2. 따르는 곳/⇩/극좌와 극우의 흰/고름이 쭈르르 쏟아진다
오규원, 「빙그레 우유 200ml 패키지」 중에서
자본주의의 전령사라 할 수 있는 광고는 상품의 고유한 가치를 창출한다는 본래의 기능뿐 아니라 소비를 조작하고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은 물론 소통 체계까지 소비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강력하게 통어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소비의 물신사회에서 상품 광고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조작하며 관리한다. 이러한 상품 광고의 언어는 자본의 언어이며 물신의 언어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능화된 물신의 언어를 대표하는 언어이다. 인용 시는 수단화되고 기능화된 상품 광고의 언어를 통해 타락한 이데올로기의 정치성을 비판적으로 읽어낸다.
우유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즐겨 먹는 상품이다. 그러나 시인은 상품에 포장된 안내서를 정치적 언어로 해석함으로써 현실이 상품처럼 “빙그레” 웃을 수 없는 곳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체의 인식론적 측면을 강조할 때, 사실은 늘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오규원은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과 해석이 가져올 수 있는 왜곡의 위험 사이에서 고민한다. 이러한 고민은 이후 인간중심적인 시선과 관념의 흔적을 제거하고 장식적 요소까지를 삭제한, 그러니까 ‘날이미지’의 시학을 내세우는 데 이른다. 시인은 이제 관념의 껍질을 벗기고 주체의 자의식을 넘어서 투명한 시선으로 세계 내에 존재하는 사물을 ‘맨얼굴’로 대하면서 사물의 ‘맨얼굴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최승자의 표현대로 서정의 시대는 끝났고 서정연습 시대만 있을 뿐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전언이다.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시도 존재하지만, 우리의 허위와 권위, 경건과 엄숙주의, 현실과 제도적 규범이 교묘히 숨기고 있는 억압과 폭력성을 헤집는 시도 분명 존재한다. 미와 추는 항상 대등한 관계에서 작용한다. 자아와 세계가 행복하게 일치하는 황금시대는 갔다. 시는 없고 시적인 것만 존재한다.
댓글 0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 46 | [re] "시" 란 무엇일까?, / 사전적 정의-2 | 강학희 | 2014.04.06 | 477 |
| 45 | "시" 란 무엇일까?, / 사전적 정의-1 | 강학희 | 2014.04.06 | 1677 |
| 44 | 바늘 / 천운영 | 강학희 | 2014.03.15 | 791 |
| 43 |
이은하교수 문학과 상상력, 과제-01
| 강학희 | 2014.03.15 | 5 |
| 42 |
수필의 개요와 이해 #18 / 111712
| 강학희 | 2012.11.16 | 3 |
| 41 |
"버클리 문학" 특별 강좌
| 강학희 | 2012.11.05 | 1 |
| 40 |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4 | 강학희 | 2012.11.05 | 751 |
| 39 |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1 | 강학희 | 2012.10.06 | 435 |
| 38 | (김홍진 교수 - 버클리문학강좌 ) #5 | 강학희 | 2012.11.16 | 698 |
| 37 |
수필의 개요와 이해 #16 / 091512
| 강학희 | 2012.09.13 | 6 |
| » |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3 | 강학희 | 2012.11.05 | 793 |
| 35 |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2 | 강학희 | 2012.10.06 | 393 |
| 34 | Berkeley literature class #5 | 강학희 | 2012.05.12 | 97 |
| 33 | Berkeley literature class #4 | 강학희 | 2012.05.12 | 234 |
| 32 | Berkeley literature class #3 | 강학희 | 2012.05.12 | 180 |
| 31 | Berkeley literature class #2 | 강학희 | 2012.05.12 | 91 |
| 30 | Berkeley literature class #1 | 강학희 | 2012.05.12 | 190 |
| 29 |
수필의 개요와 이해 #15 / 051912
| 강학희 | 2012.05.18 | 6 |
| 28 |
수필의 개요와 이해 #14 / 042112
| 강학희 | 2012.04.20 | 5 |
| 27 |
수필의 개요와 이해#13 /021812
| 강학희 | 2012.02.17 |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