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 버클리문학강좌 ) #5

2012.11.16 11:20

강학희 조회 수:698 추천:5

버클리 문우님들께


깊어가는 가을에 당신의 시심은 어떤 색깔로 물들어 가십니까? 시 한수가 단풍처럼 내려앉는 당신의 마음은 어떤 빛깔의 호수입니까?  다음 월요일 저녁, 문우들의 가을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11월 19일 (월) 저녁 6시 수라 - 김홍진 교수의 문학강좌
◦김종훈님의 음악산책
◦김경련님의 한국시의 영역본 읽기
•12월 3일 - 종강및 김홍진 교수님 환송파티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공지).
•지난 11월 10일 코리안 센터 모금 파티에 참여해주신 문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유형섭 이사장님을 비롯 장용희, 정은경 임원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번 홍인숙시인의 제1회 이민문학 시 당선 축하드립니다 (오셔서 낭독해 주시면 어떠실런지요?)
•11월 해마다 열리는 오클랜드 불우이웃돕기 추수감사절 만찬 (이종혁 위원장님)에 문우님들의 도움과 참석바랍니다. (이번 모임에서 자세한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 모임 버클리 문우들에게 저녁을 베풀어주신 윤영숙화백께 다시한번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버클리 문학협회회장
김희봉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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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산책자와 시선의 정치성

― 유하ㆍ이문재ㆍ고진하의 시를 중심으로 ―

  

    1

  

    후기산업사회에서 삶의 조건과 환경은 자연이 아니라 도시이다. 고도 산업사회로 접어든 현대의 도시와 문명은 인간의 삶과 의식을 규정하는 지배력을 행사한다. 근대화의 속도전을 치르며 우리 사회는 이미 탈근대의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다. 이러한 “도시화 또는 도시문명의 체험 증대는 한국 현대사회와 시의 역사적 변화에 주요한 지표”로 기능한다. 한국문학은 도시문명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 문학적 적층을 가지고 있으며, 대도시 공간의 등장으로 발생한 새로운 미적 체험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일찍이 김기림, 이상, 박태원, 정지용, 김광균 등의 작품과 특히 산업사회로 전환한 이후 현대시에서 도시 문명이 차지하는 위상은 중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문명이 어원적으로 도시에서 파생한 말이 듯이 도시는 문명의 대표적 표상이다. 따라서 도시공간과 문명에 대한 문학적 관심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근대화에 의해 새롭게 출현한 도시공간과 그로 인한 지각방식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미적 체험의 형식에 주목한 이는 발터 벤야민이다. 그는 대도시 공간에서 집단적 지혜인 경험이 몰락하고 개인적 지각인 체험이 대두하는 현상을 주목하면서, 대도시 공간의 출현으로 새롭게 등장한 지각체험의 주체로서 ‘산책자(flaneur)’를 상정한다. 산책자는 근대가 창조한 환경과 공간, 특히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생활방식과 경험구조를 비판적으로 개념화하기 위해 제안된 개념의 용어이다. 도시의 거리를 근대적 삶의 상징으로 간주한 벤야민은 산업화 시대의 부산물인 대도시의 군중(menge)이라는 ‘현상’과 거리의 다양한 자극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는 산책자의 양가적 ‘시선’에 주목한다. 산책자의 개념은 19세기 파리 거주민들의 한 유형에 대한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대도시적 삶의 체험구조에 대한 일반적 표상이며, 특히 문학적 모티프의 측면에서 유효한 개념이다.

    벤야민에게 도시는 새로운 미적 체험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대도시 공간에서의 미적 체험은 오늘날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를테면 도시의 발전으로 인하여 자연의 아우라 경험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고, 이에 따라 미적 대상과 지각방식도 변화하였다. 도시는 개인적 지각체험이 지배하는 장소이며 경험이 상실되는 장소이다. 특히 후기산업사회라는 탈근대적 도시의 출현은 분명 전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도시의 군중에 매혹되어 그들 사이를 거닐면서도 동시에 군중과 자신을 격리시키는 양가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근대 세계에서의 시인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암시해준다고 한다. 보들레르와 같이 도시의 시인은 거리를 느리게 거닐며 도시의 논리와 생활방식을 비판적으로 엿보는 산책자로 존재한다. 관찰자이자 탐정으로서의 산책자는 도시공간이 지닌 기호와 욕망의 풍경에 도취되는 자아이면서 동시에 이로부터 세속적 깨달음을 얻는 반성적 자아이다. 이를테면 산책자는 군중에게 매혹당한 집단의 일원인 동시에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관찰하는 양가적 존재이다.

    1930년대 김기림, 이상, 박태원 등이 산책자의 고유한 내면적 시선으로 백화점, 쇼 윈도, 다방, 모던 걸, 카페 여급과 같은 근대 문명을 포착해 그것을 의미화한 이후 도시의 시인들은 문명화된 일상의 세속도시 한복판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도시적 감수성으로 상상력의 폭을 확장해 나가는 도시의 산책자라 할 수 있다. 이 글이 주목하는 유하ㆍ이문재ㆍ고진하의 도시체험과 그에 대한 지각반응으로서의 시는 경험이 붕괴되고 체험이 그 자리를 대치하는 문명사적 지형에 위치한다. 이들 시인의 시에서 산책자로 등장하는 화자의 시선이 포착하는 문명의 세속도시는 무의미한 풍요와 화려함이 현시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진리에 대한 태도는 냉소적이며 일상의 무의미과 권태, 반복과 통속이 압도한다. 도시의 산책자는 거리의 속도에 대항하면서, 그 속도에 반성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이다. 또한 그들의 산책은 그곳으로부터 탈주하거나 본래적 삶을 회복하려는 정신적 고투의 산물이다. 때문에 산업문명의 논리와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에 대한 산책자의 시선과 체험은 불온하며 비판적이다.

    도시의 속도와 논리에 저항하는 게으른 산책자의 시선은 도시적 일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미시적 관찰과 반성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산책자의 시선은 도시문명이 강요하는 현실원칙과 질서에 대한 대항적 사유를 동반한다. 도시공간 속에서 산책자로서 시인의 대항적 사유는 지금 이곳의 삶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또 다른 피안의 전망을 내다보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도시 산책자의 불온한 시선은 “물질과 기호의 현란함에 내재한 욕망과 미시 권력의 작동, 무의식적으로 강요된 타율성, 획일적 존재방식을 발견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선과 인식은 탈주를 꿈꾸게 하며, 탈주는 현실과 다른 곳으로의 이탈인 동시에 ‘현대성의 무의식’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 때문에 세속도시와 문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산책자의 시선은 삶의 조건과 환경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대도시 공간의 출현에서 발생하는 생활방식과 체험구조를 벤야민이 제안한 산책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유하ㆍ이문재ㆍ고진하 시에 나타나는 도시 산책자의 시선과 체험이 함유하는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은 대도시 공간을 ‘시각적 패러다임’ 속에서 사유하는 산책자의 투시적 상상력을 주목하는 방법이다. 시적 주체로서 산책자가 대도시 공간이라는 객체에 대하여 반응하는 지각은 도시적 삶의 조건과 과정에 대한 구체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이들 세 시인의 시를 통해 도시 산책자의 미적 체험과 의미범주의 층위를 조명함으로써 도시 산책자의 시선이 투시하는 시적 상상력의 스펙트럼이 함유하는 시적 의미를 따져볼 작정이다. 환언하면 도시 산책자의 시각적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함축하는 시선의 정치성이 지닌 사회ㆍ문화ㆍ문명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매혹적인 상품의 이미지와 기호가치가 지배하는 도시의 산책자임을 자임하면서 현란한 소비도시의 풍경 속을 산책하는 시인이 유하이다. 유하의 시적 주체는 ‘압구정동’, ‘경마장’, ‘세운상가’로 상징되는 도시공간의 일상적 풍경에 “동화되는 동시에 그 동화를 또한 자연스럽게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압구정동의 중독자”이며 “압구정동의 반성자”로서의 태도를 지닌 양가적인 산책자이다. 그는 벤야민이 말하는 도시의 군중에게 매혹당한 집단의 일원인 동시에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관찰하는 양면적 존재인 산책자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 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 그러나 갈수록 쎅시하게 /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2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중에서)

  

    화자는 도시공간에 펼쳐진 상품과 욕망의 풍경, 안락과 풍요로움, 소유와 소비에 도취되고 매혹당하는 거리의 산책자이다. 말하자면 산책자는 “상품의 황홀한 패션들이 매혹하는 거리, 그 스펙터클에 사로잡혀 있는 군중의 물결, 그리고 그 물결 속에 휩쓸려 걸어가는 산책자의 시선”이 중첩되어 있다. 산책자로서 화자의 시선은 물질적 풍요와 소비가 보장된 도시공간의 화려하고 “갈수록 쎅시”한 거리의 풍경에 매혹당하며 휩쓸려가는 인물이다. 산책자로서 화자는 “욕망의 언체인드 멜로디”(「시인 유보씨의 하루 2」)에 몸을 맡긴 채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을” “오관으로 느”끼며 “갈수록 쎅시하게” 변화하는 도시의 매혹에 이끌린다. 그는 거리에 출렁이는 상품의 기호와 패션, 광고 언어와 이미지의 물결에 휩쓸린다.

    산책자의 시선은 도시가 생성한 다양한 이미지들, 즉 ‘안락’과 ‘쾌락’과 ‘쎅시’함에 도취되고 매혹되는 관음증의 시선인 동시에 도취의 매혹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도시의 논리와 권력을 비판적으로 포착하는 정치성을 갖는 시선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평등사회”,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대중의 일원인 동시에 그러한 도취와 매혹에서 깨어나 그 부정성을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적 성찰은 곧 “곰팡이를 반성하지 않는 곰팡이”(「세운상가 키드의 사랑」)를 반성하는 세속적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책자는 군중들과 함께 휩쓸려 거리를 거닐면서 도시공간의 부정성을 지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산책자는 도시공간이라는 화려한 물신의 신전을 떠도는 “군중들 속의 한 사람”이며, 동시에 물신의 우상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정치적 성격을 지닌다.

  

난 전율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심혜진의 보조개 패인 미소 뒤에도 얼마나 /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쾌남아들의 거대한 미소가 도사리고 있는가 / 하여튼 단 십 초의 미소로 바보상자의 관객들과 쇼부를 끝낸 여자 심혜진 / 그녀가 요즘 씨에프에서 닦여진 순발력 있는 연기로 은막에서고 함참 주가를 올리고 있다 제목은 물의 나라 / 감독은 얼씨구나 양파 껍질처럼 끝없이 옷을 벗기기 시작하는데, 그녀만 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코카콜라를, / 삼성 에이 에프 오토 줌 카메라를, 해태 화인쥬시껌을 사고 싶어지는 내 눈알, 나는 본다 저 알몸 위로 오버랩되는…… / 온 산을 갈아엎는 사람들을 세상을 온통 콜라빛 폐수로 넘실대게 하는 사람들을 이 땅을 온갖 욕망의 구매력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을(「콜라 속의 연꽃, 심혜진論 ―난 느껴요-苦口苦來」 중에서)

  

    인용 시에서 산책자의 시선은 온갖 상품의 이미지가 소비의 욕망과 무의식을 자극하는 거리의 부정성을 포착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현대적 도시공간을 산책하는 화자는 시대가 즐기는 것들 앞에서 “난 전율한다”고 외친다. 그는 물신이 지배하는 시대의 경향과 풍요를 경멸한다. 산책자의 시선에는 ‘압구정동’이라는 도시공간과 문화적 풍속과 인간의 욕망에 대한 부정적 지각이 도사리고 있다. 산책자는 기호와 이미지 자체의 상징가치가 우세한 소비사회의 현실을 “온통 콜라빛 폐수로 넘실대”는 세상으로 바라보며,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소비적이고 관능적 욕망의 풍경에서 물신에 사로잡힌 군중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보드리야르의 지적처럼 도시적 현실은 “소비가 생활 전체를 사로잡고 있으며” 소비를 위해서 “환경은 전면적으로 조절되고 정비되어” 있다. 소비의 도시에서 지시대상을 잃고 떠도는 기표의 현란한 이미지들은 우리들에게 자유와 행복, 물질적 풍요와 안락의 세계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그것들은 기표가 기표를 낳고 또 낳는 자기증식을 통해 욕망을 조작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산책자의 시선은 물신이 지배하는 도시의 거리 풍경을 관찰하고 그것의 숨은 정치성을 깨묻는 것이다. 이 산책자는 도시의 물질적 풍요와 패션, 기호의 풍요로움과 현란함에 깃든 욕망의 확대 재생산과 미시권력의 작동을 바라보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3」) 부정하면서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이러한 반성적 성찰은 현실의 부정적 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주의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도시의 거리는 상품미학의 전시장이며, 그곳을 산책하는 일은 새로운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상품미학은 도시적 삶의 풍요로움과 물질적 풍요의 신화를 보장해주는 표지이다. 그러나 도시공간에서의 미적 체험의 주체로서 산책자는 상품의 황홀한 유혹에 매혹당하면서도 그 매혹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양가적인 것이다. 상품에 대한 매혹이야말로 “대중의 참다운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며, 동시에 대중을 사로잡는 일상에 있어서 권력을 붙잡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체험의 확대와 그에 따른 상품 물신에 대한 욕망의 탐사는 왜곡된 현대성으로부터 삶의 진정성을 찾는 일에 부응하는 것이다. 유하는 이러한 삶의 진정성을 도시의 속도와 소비의 욕망에 저항하는 항체를 느림과 비움의 철학에서 찾는다.

  

산책가는 누구를 추월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 / 나를 무수히 추월해간 지상의 탈것들이여 / 어쩌면 목적지란 시간의 종말 아닌가 / 나의 시간은 무한한 곡선 / 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 시간이 머문다 / 샛길의 시간은 무익하여,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는다 / 나는 그 무익의 시간을 벗 삼아 / 유한한 삶에 대한 명상을 충분히 할 것이다 / 산책가는 늘 길 위편에 남아 있다(「나는 추억보다 느리게 간다-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유하의 산책자는 자본주의적 현실의 속도에 저항하면서, 그 속도에 반성적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느리게 걷는 자이다. “산책가는 누구를 추월하지도 않”으며, “추억보다도 느리게” 걷는 자이다. 도시문명의 속도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로서 산책자는 빠르게 “추월해간 탈것들”에서 종말의 징후, 즉 “시간의 종말”을 예견한다. 그에게 모든 것을 빠르게 추월해가는 직선적 시간은 빠른 만큼 종말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다. 그러한 직선적 시간관에 의하면 “은륜의 텅 빈 내부로 물이 고이듯 머”무는 “샛길의 시간은 무익”한 것이어서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길이다. 그러나 산책자는 문명의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한한 곡선”의 길, “그 무익한 시간을 벗 삼아” “유한한 삶에 대한 명상을 충분히 할 것”을 권고한다. 즉 종말의 시간으로 치닫는 직선적 속도의 문명과 “유한한 삶”에서 “생의 시간을 길게 확장시키”는 방법은 “무한한 곡선”의 시간이 갖는 느림의 미학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환기한다.

    속도에 역행하는 산책자는 “세속세계에서 이탈한 자이거나 정신적 지체를 앓고 있는 자”로서 현실적으로 “무능하고 불온하고 비관적이고 게으르고 방탕”해 보인다. 이들의 “정신적 지체는 이 세계가 안겨준 쓰라린 선물이며, 본래적 삶을 회복하려는 정신적 고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하 시의 비움과 느림의 미학은 따라서 삶과 세계의 원향(原鄕)을 회복하려는 정신적 고투의 산물이다. 특히 「천일馬화」 연작은 문명의 무한한 욕망과 속도전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보여준다. 느림의 미학은 경마장의 말처럼 “고액배당을 꿈꾸며” “질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산책하고 싶은 것이”(「천일馬화」)며, “속도의 권력”을 거부하고 “모든 야생이 내어준 그 길을”(「들꽃에 대한 명상」) 느린 속도로 거니는 것이다. 산책자는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머물고자 하며, “텅 빈 중심”과 “텅 빔의 에너지”(「無의 페달을 밟으며-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 2」)로 상징되는 느림과 비움의 철학으로 문명의 속도와 욕망에 저항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채움이 아닌 비움, 빠름이 아닌 느림의 미학을 통해 생을 성찰한다. 그러면서 자본주의적 질서와 문명, 물신적 욕망과 풍속에 대한 반성적 자각이며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3

  

    고도로 발달한 문명의 도시 산책자임을 자처하면서 도시문명의 모순을 뼈아프게 각성하는 시인이 이문재이다. 그는 “도시, 즉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기 위해 “속도 지상주의에 딴죽을 거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한다. 이를테면 도시문명이 강제하는 속도의 폭력성을 느림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저항의 방식은 “발효의 시간”(「푸른 곰팡이―散策詩」)처럼 느릿한 “유목민적 속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느림의 미학을 통해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도시문명, 즉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속도지상주의에 딴죽’을 걸며 문명의 메커니즘에 제동을 건다. 그에게 도시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느리게 걷는 산책의 방식은 도시의 논리가 강제하는 속도를 역행하는 행위이다. 산책은 일상적 삶과 무의식을 규제하는 도시의 논리, 자본과 상품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이다. 그에게 산책은 일상을 지배하는 문명의 논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충동과 연관된 일종의 정신적 가출이다.

  

이 도시는 느슨한 산책을 아주 / 싫어하는 모양입니다 산책은 아니 / 산책만이 두 눈과 귀를 열어준다는 비밀을 / 이 도시는 알고 있는 것이겠지요 / 도시는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어하지 /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 반짝이는 / 유토피아에의 초대장들로 길 안팎에서 / 산책을 훼방하는 것이지요(「마지막 느림보―散策詩 3」 중에서)

  

    빠른 속도는 도시의 운명이며 미덕이다. 도시는 효율적 생산성의 가치와 속도의 신화가 지배하는 공간이므로 “느슨한 산책을 싫어”한다. 속도숭배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속도를 거스르거나 게으르게 해찰을 떠는 자는 도태되거나 죄인이 된다. 때문에 자본주의적 현실의 속도에 저항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부도덕하며, “가장 큰 죄인”으로 몰린다. 도시는 “유토피아에의 초대장”이라는 환상, 즉 풍요롭고 안락한 기호와 이미지로 자신의 환부를 은폐하며, 그것을 결코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속도를 거스르는 산책은 산책자의 “두 눈과 귀를 열어”줌으로써 도시의 신화가 은폐한 폭력성을 깨닫는 방식이다. 도시의 속도에 순응할 때, 그것에 대한 투시적 관찰과 비판은 불가능하다. 산책은 도시의 논리가 제시하는 환상, 즉 “유토피아에의 초대장”이라는 허구적 환상과 뚜렷한 대립적 의미를 지님으로써 산책의 느림만이 도시의 속도에 대한 대항적 사유를 확보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의 속도를 거스르는 산책자의 시선은 도시가 감추고 싶은 환부를 냉정한 투시를 통해 관찰해 낸다. 여기에서 산책자는 도시의 물질적 풍요와 현란한 이미지가 감추고 있는 미시 권력의 은밀한 작동을 엿보고 이를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이문재의 시에서 산책자는 도시의 “마지막 느림보”임을 자처하면서 “빠른 것은 부도덕”(「타클라마칸-부사성 5」)하다는 비판적 명제를 시적 사유의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걷는다.’ 그는 “무서운 이 시대의 속도에 치”(「산성눈 내리네」)이는 상황과 “1500cc 오토매틱”의 속도로 “간식처럼 사랑을”(「공중도시」) 끝내버리는 문명의 강박적인 속도의 부정성을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시인은 “게으른 사람만이 볼 수 있”기 때문에 “아프도록 게을러져야 한다”(「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게으른 사람, 속도의 질주에 저항하고 “역행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안고 있는 허상을 간파하고 비판”할 수 있으며, “속도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삶의 실상을 주목”할 수 있는 것이다.

  

깜빡이는 것들은, 위험하다 / 엘리베이터 표시등, 병원 약국의 번호판 / 횡단보도 신호등, 카드공중전화의 / 액정화편, 컴퓨터의 커서…… / 이것들은 무시로 깜빡거리며 / 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 버린다 / 그 짧은 순간들을 참을 수 없는 / 무거움, 강박으로 바꾸어버린다(「저 깜빡이는 것들-散策詩 5」 중에서)

  

    산책이라는 가벼운 행위가 무겁고 절박한 대항적 사유로 전환되는 요인은 도시의 무서운 속도전 때문이다. 산책시편들은 이러한 도시문명의 속도에 대한 깊은 위기감과 절망감의 표현이다. 속도에 대해 나타내는 산책자의 부정적 인식은 문명의 기호들이 “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비롯한다. 그가 산책자의 시선이 주시하는 것은 “무시로 깜빡거리”는 도시의 현란하고 풍요로운 기호들과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게으른 도시의 산책자의 시선은 그것들에서 자본과 기술이 가져다 준 문명의 풍요와 편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문명의 폭력과 억압의 징후를 본다. 도시 공간의 여기저기에 편재하면서 “무시로 깜빡거리”는 것들은 우리들의 ‘기다림’을 “무거움, 강박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그 안락과 풍요, 편리와 질서의 기호들인 “깜빡이는 것들은, 위험”한 것이다. “무시로 깜빡거리”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도시의 삶과 무의식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깜빡거리는 것들의 체계와 그것이 부여하는 명령을 위반하면 이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깜빡거리는 것들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 도시의 일상, 도시적 삶은 움직인다. 산책자의 시선은 깜빡거리는 것들에 의해 관리되고 통제되며, 조작되고 왜곡되는 도시적 일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도시의 산책자로서 사유하는 유형화된 화자는 도시문명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자아이다. 화자는 “저녁의 뒷짐”을 지고 “어슬렁 저녁을 따라”(「저녁의 뒷짐-散策詩 2」) 세속도시를 산책하면서, 그것이 드러내면서 감추고 있는 의미를 탐구하는 자아이다. 유형화된 화자에게 세속세계라는 외부의 현실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내면성의 기호이다. 그의 시에서 ‘제국호텔’로 상징되는 문명화된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는 것은 문명화된 삶의 내부는 물론 자기 자신의 황폐성과 불모성을 치유하기 위한 탐색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동시에 ‘유토피아에의 초대장’이라는 환상이 빚어낸 고독한 군상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고독한 군상들 가운데 하나인 산책자는 ‘제국’이 유포한 기호들과 이미지들과 화법을 본다. 그것들은 제국의 자본과 권력의 이데올로기를 풍요의 이름으로 은폐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게으른 산책자는 이것들에서 자본과 기술, 문명과 도시의 승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억압과 폭력, 그리고 죽음의 징후를 본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 속에서 광고의 잡음과 매체의 아우성으로 나온다, 저, 아니, 이 길뿐, 빈틈은 없다, 내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러하니 /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중략… 시선이 떠나가 돌아오질 않는다, 서울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섭게 돌아간다,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고,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타워 크레인-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중에서)

  

    인용 시에서 산책자의 시선은 각종 ‘매체’와 ‘광고’, ‘전광판’과 ‘네트워크’들이 권력으로 작동하면서 도시의 삶과 욕망을 관리하고 지배하는 현상을 주시하고 있다. 즉 산업사회에서 “통제의 새로운 형태”로 인간을 억압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까지 교묘하게 조종”하는 매체의 억압적 지배 논리를 비판적으로 주시한다. 산책자의 시선에 의하면 깜빡거리는 도시의 ‘전광판’은 하나의 권력으로 도시의 정보와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주입시키며 조종한다. 산책자는 조작되고 왜곡된 욕망에 의해 인간이 몰주체적 존재로 전락하게 된 상황을 고통스럽게 주시하면서 그 억압성과 부정성을 드러낸다. “광고의 아우성과 매체의 잡음”으로 인해 산책자인 화자의 “시야와 시력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며, “내 눈이 보고 싶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산책자의 시선은 탈근대 문명의 메커니즘과 광고 전략, 고도로 발달한 네트워크 등은 일상생활의 주재자가 되었고, 그 권력 안에서 인간들 몰주체적으로 조작되는 상황을 비감하게 주목하는 하는 것이다.

    광고나 네트워크의 매체언어와 화법은 ‘제국’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의 기능화된 화법이며 언어양식이다. 그것은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형식으로 억압”하는 양식이며, “은폐된 억압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로 작동한다. 그것은 또한 “현란하고 감각적인 언어적 기교들, 그 매끄럽고 그윽한 상상력과 감수성들, 그 넘치는 쾌적과 안락과 풍요의 환상들”로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매혹하고 압도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불빛은 “캄캄할 만큼 현란하고 현기증으로 증발할 만큼 무섭게 돌아”가는 것이어서 “즐겁다고, 쫓아가고 싶다고,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만큼 매혹적이다. 휘황찬란한 불빛의 전광판과 네트워크를 동원해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욕망을 조작한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전달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도시문명의 책략이다. 그것은 “밤을 끄고 휘황하게 낮을 켜놓는 권력들”(「광화문, 겨울, 불꽃, 나무」)로서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을 조작하고 조종하며 왜곡시킨다. 욕망의 조작과 왜곡에 의해 인간들은 도시의 불빛과 그것이 유포한 메커니즘에 복종하게 되며 몰주체적 존재로 변질되고 만다.

    이문재는 반생명적이고 반생태적인 도시문명 현실과 탈근대로 접어든 후기자본주의의 생태에 대한 대항적이며 비판적인 사유의 형식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는 탈근대 문명과 도시, 후기산업사회의 자본과 권력이 간직한 반인간적이며 반생명적인 현상에 대해 느림의 미학으로 대항하면서, 생명의 전체성과 생태적 전체성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시적 도정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시는 탈근대의 세속적 문명의 풍경과 그것을 야기하는 인간의 무정부적 욕망과 욕망의 환각 상태를 집요하게 비판한다. 생태학적 전체성이 훼손된 타락한 도시문명의 현실을 어슬렁거리며 거니는 산책자의 시선을 통해 문명을 비판하는 그의 시에서 우리는 특히 속도와 느림의 미학, 원형의 상실과 생태학적 회복, 문명사적 차원에서 ‘제국’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을 주목하였다. 타락한 생태현실과 그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탈근대의 제국의 논리에 대한 비판과 반성, 그리고 원형이라는 동일성의 회복에서 산책자의 투시와 대항적 사유는 탈근대 문명에 대한 대안 명제의 수사학으로 읽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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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진하의 시는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의해 피폐화된 농촌의 황폐하고 곤궁한 현실과 대도시 문명의 파괴성, 폭력성, 추악성의 카테고리(category) 안에서 시를 형상화한다. 외관상으로 도시의 풍경은 풍요롭고 안락하다. 그러나 외피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후기산업사회로 대변되는 탈근대의 사회는 일정한 가치와 질서를 상실한 묵시록적 상황처럼 보인다. 도시문명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분열을 낳고, 그 속에 자리한 시적 자아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매우 낯선 것이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의 눈에 도시는 묵시록적 상황의 집약적 상징처럼 보인다. 도시는 “악취 풍기는 폐수와 썩지 않는 쓰레기 더미 위로 / 무성하게 피어난 인공 독버섯이 뒤덮인 땅”(「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이나 “치매에 걸린 세상 /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 죽음의 속도로” “미친 듯이 달려가”(「어머니의 총기」) 듯이 묵시록적이고 그로테스크하게 지각된다.

  

오랜만의 내 산책길 끝에 / 비단뱀의 살결 같은 / 실개천 한 폭을 펼쳐놓는다. / 꿈틀거리는 저것이 / 폐유가 빚어낸 무늬일망정 / 곱다. / 정말 곱다. / 키 작은 봄풀들을 품고 스르르 기어가는 / 비단뱀 무리, 잠시동안이지만 / 환각은 고마운 것, / 환각 속이라고 왜 삶이 없겠는가. / …중략… / 그 순간, / 2,500볼트에 실린 高壓의 시간이 / 창백한 얼굴들을 차창에 매달고 / 쏜살같이 흘러간다. / 내 앞에 가로놓인 어두운 심연을 가로질러(「고압의 시간」 중에서)

  

    인용 시의 화자는 벤야민이 제안한 ‘산책자’의 모습과 유사하다. 이 시에서 도시공간의 탐정이자 관찰자로서의 산책자인 화자는 현란한 기호와 욕망의 풍경에 도취되면서, 동시에 이로부터 세속적 깨달음을 얻는 반성적 자아로 등장한다. 그는 도시공간의 일상적 풍경에 동화되는 동시에 환각적 동화에서 깨어나 세속적 깨달음을 얻는 반성적 주체이다. 이러한 세속적 깨달음의 과정은 마치 “도시 군중에게 매혹당한 집단의 일원인 동시에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관찰하는 양면적 존재로서의 산책자”를 상기하게 만든다. 도시의 산책자인 화자는 “폐유가 빚어낸 무늬”의 ‘오색빛’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그것은 비단뱀의 무늬처럼 “정말 곱”고 매혹적이다. 화자는 문명이 배태한 폐유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그 아름다움에 유혹당해 그 아름다움을 긍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화자는 곧 그 아름다움이 환각이라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깨닫는다. 이러한 각성을 통해 산책자로서의 화자는 환각의 무서운 정체가 죽음, 즉 폐유의 아름다움이란 질주하는 죽음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도시적 삶과 문명의 얼굴이 쉽게 부정할 수 없는 매혹적인 모습이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경험세계에 대한 고진하의 부정적 지각은 현실이 고통이라는 비판적 인식을 동반한다. 이는 곧 도시문명이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에 대하여 시적 주체의 저항의지를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매혹적인 현실의 외피가 이면에 감추고 있는 고통과 환각이 급속하게 확장되는 세계를 피할 수 없다면, 비판적 저항의 의지는 그것을 직시하여 우리의 인식 속에 등기(登記)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문명의 아름다움과 매혹이 사실은 폐유의 순간적인 아름다운 오색무늬,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박제된 새의 아름다움에서 오는 환각이라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일이다. 이 환각은 “마취의 문명”에 의해 “잘 길들여진 행복”(「껍질만으로도 눈부시다, 후투티」)으로서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이라는 점을 일깨우는 일이다.

  

한여름의 시청 광장 / 마천루 위에 까마득히 떠 있는 / 광고탑, 뜨겁게 달아오른 아라비아 숫자들이 / 불인두처럼 이글이글 내 몸에 닿아 / 쉬 지워지지 않을 깊은 文身을 아로새긴다 / … 중략 … / 오, 결핍은 / 작렬하는 사막에 솟은 불기둥인 양 / 아무데서나 불타오르고 / 터번도 두르지 않은 아라비아 숫자들이 / 태양을 삼킨 채 / 광고탑에서 이글거리고 있다(고진하, 「천국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중에서)

  

    “마천루 위” 광고탑에서 “작렬하는 사막에 솟은 불기둥인 양” 이글이글 뜨겁게 불타오르는 “아리비아 숫자들”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결핍된 욕망의 기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빛은 존재자의 인식을 가능하게 한 근거로 기능하지 않는다. 빛은 어둠의 혼돈과 타락한 세계를 정화하거나 생명과 질서, 미래적 가치에 대한 소망의 의미로 쓰이지 않는다. 또한 밤의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면서 거대한 불의에 맞서는 저항성을 지니지도 않는다. 원초적인 불빛의 숭고한 신성성은 변질되어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고 환각과 파멸로 이끄는 기제로 기능한다. 오히려 화자는 불빛의 긍정적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빛의 문법과 규칙이야말로 허구이고 환각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어둠 속의 불빛은 오히려 탐욕의 상징으로서 욕망의 한계효용에 의해 무한대로 증폭해가는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인간의 결핍된 욕망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화자가 불빛의 이미지에서 본 것은 그 욕망의 확대재생산이 불러올 문명의 재앙이다.

    고진하의 시는 세계의 불행을 인식하는 데서 예술은 자신의 행복을 갖는다는 표현처럼 불우한 세계의 실상을 예민하게 지각해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적 주체가 보여주는 세계 인식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농촌은 희망 없는 ‘빈들’과 ‘검은 골짜기’로 표상되고, 문명의 도시는 “질척이는 욕망과 소음의 때”(「월식」)로 인해 “황홀한 부패가 / 깊고 고요히 진행되는”(「사천」) 것처럼 부정적으로 표상된다. 요컨대 현실은 “인간의 사슬로부터 날 좀 풀어다오!”(「천둥소리」)라고 울부짖는 신의 절규에서 드러나듯 타락해 있다. 이처럼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신이 고통스러워하는 현실이라면, 그 현실은 심판이 임박한 최악의 사태인 것이다. 그런데 고진하의 시적 주체는 타락한 현실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동시에 희망을 품는 주체이다. 그는 반생명적인 문명의 부정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세계 변혁에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 그리고 희망에의 성찰이라는 틀은 고진하 시의 주요한 인식론적 틀이다. 이것은 마치 “예술은 세계의 모든 어둠과 죄를 자신의 내부에서 떠맡”으면서 부정적 “경험세계가 변화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말없이 말한다”는 아도르노의 전언과 유사한 의미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폭력과 패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폐허와 죽음의 상징적 장소인 ‘골고다’에서 “여전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생명 탄생의 ‘우주배꼽’(「장마」)으로 받아들이는 역설적 인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고진하의 시적 주체는 부정적 현실에 고통을 받으면서도 역설적으로 희망을 갖는 주체이다. 이러한 시인의 부정적 현실에 대한 고발과 반생명적 문명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 영성에 토대를 둔 상상력에서 발원한다. 그의 시에서 기독교 영성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반성적 성찰을 통해 대안적 항체를 형성하는 토대를 이룬다.

    시인은 희망도 미래도 없는 타락한 현실에서 구원의 빛을 본다. 이러한 역설적 인식에 의하여 고진하의 시적 주체는 부정적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것은 황폐한 ‘빈들’에서 ‘당신’을 발견하거나 “아들아 여기가 네가 견뎌야 할 빈들이란다”라는 진술에서처럼 숨은 신의 목소리를 듣고, 그 뜻을 헤아려 읽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즉 희망 없는 현실을 감내하는 시적 주체의 모습은 마치 타락한 세계를 기독교적 영성으로 감수하는 선지자의 자세처럼 보인다. “아무도 들려 하지 않는 빈들”은 고통스럽지만 그가 견뎌야 할 곳이며,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숨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현실을 기독교적 영성으로 감수하려는 시인의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빈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당신’의 존재는 마치 구약의 선지자들이 보여주는 현실인식으로서 심판이 임박한 타락한 현실의 묵시록적 상황에서 신의 사랑과 구원을 내다보는 태도와 유사하다. 말하자면 현실에 대한 고통스런 인식과 예언자적 상상력은 현실 세계를 종말의 현상으로 읽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기원한 것이다.

  

말발굽 같은 유혹과 끈끈한 욕망이 물결치는 / 홍등가에서 흘러나오는 현란한 불빛, / 저 불빛은 / 헐떡거리는 짐승의 시간, 마취의 시간을 가리킨다 / 온갖 괴로움의 시간은 끝났다 아직도 / 혹 전갈에 쏘인 사라들처럼 부질없는 괴로움에 / 붉은 혀를 깨무는 사람들은 / 황홀하게 멈춰 선 지상의 마지막 시계탑을, 어둠 속에 /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저 하얀 소금 기둥들을 바라보라 지금이 / 바로 구원의 시간이요 짜, 짜릿한 / 해탈의 시간이다! // 쿵, 하는 소리도 없이 무너질 날만 기다리던 바로 그날……(「소금기둥」 중에서)

  

    인용 시는 성서의 소돔성(城) 이야기(「창세기」19:1~29)를 소재로 하고 있다. 소돔은 성적으로 타락한 추악한 죄악의 도시이다. 화자가 보기에 현실은 “저마다 가슴에 소돔城 한 채씩 품고” “홍등가로 몰려”드는 형국이며, 탐욕스러운 욕망의 유혹에 이끌려 ‘소금기둥’이 된 형상을 하고 있다. 현실은 “말발굽 같은 유혹과 끈끈한 욕망”으로 들끓는 “짐승의 시간, 마취의 시간”으로 소돔성이 무너지듯 “소리도 없이 무너질” 종말의 ‘그날’을 향해 치닫고 있다. 화자는 “현란한 불빛”으로 빛나는 타락한 현실을 “짐승의 시간, 마취의 시간”으로 보고 심판이 임박한 세계의 종말에서 선지자처럼 “구원의 시간”을 전망한다. 이와 같이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과 예언자적 감수성은 기독교적 영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진하의 시적 주체는 황폐한 현실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 종교적 주체이다. 현실의 구원이 현실을 고통으로 인식하고 감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처럼, 고진하는 부재하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의 도처에 “편재하는 모든 신성의 존재를 발견하고 만나며, 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고 한다. 이러한 소통의 자세는 이를테면 “사물의 형상이나 속성과 교감하는 태도”이다. 나아가 부정적 현실을 끌어안고 감수하면서 부정성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정신적 자세를 말한다. 타락한 삶의 양식과 욕망에 대한 부정의 변증법은 “짐승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인식하듯이 희망에 대한 성찰을 함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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