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2
2012.10.06 17:06
비극적 실존의 시간 현상학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 기형도론 -
1. 문학의 시간 현상학
문학의 시간은 주관적 시간으로 인간의 경험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이다. 문학의 시간은 “사적이고 주관적이며 심리적 차원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여 말한다.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선조적 질서에 따라 계기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가역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 시간의 계기적 “선조성은 파괴될 여지가 다분한 관념”이다. 문학의 시간에서 시인은 현재 자기의식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의 간극을 주관적으로 재정립할 수 있으며, 이때 시간은 가역화된다. 따라서 문학의 시간은 자연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주관적 경험의 인간적 시간’이다. 시간의 가역성으로 말미암아 시인의 의식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새로이 조합되고 재구될 수 있다.
시간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불가역성의 물리적인 시간과 문학적 주체가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가역성의 주관적 시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주관적 시간은 이를 통합적으로 보거나 계기적 질서를 무화하는 태도를 보인다. 시간은 시간을 인식하고 시간을 반성적으로 대하려는 자아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 시간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인식의 태도가 시간성을 생성하게 된다. 따라서 시간성은 시간의 성격, 의미 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서 시간성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시로 형상화될 때의 특징적 성격과 의미를 일컫는다. 이러한 시간성은 그것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결부되어 시인이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대하는가에 따라 그 성격과 의미는 달라지며, 이때 시간의식이 나타난다. 환언하면 시간의식이란 시간성에 대한 의식, 또는 시간성을 대하는 인식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에 있어서 시간의식이란 시간과 시간성을 대하는 시인의 주관적인 방식과 태도, 인식과 판단으로 결정된 시간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식이 시인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태도나 방식과 결부된 문제이므로 그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지향된 작가적 의식’을 뜻하기도 한다. 즉 시에서 시간의식은 시적 주체가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의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지향하는 시간의식은 시에 나타나는 실존적 자의식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인식 내지는 현실 파악의 양상을 보여준다. 시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보통 현재의 계기 속으로 수렴된다. 이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과거의 체험뿐 아니라 미래의 상상력까지도 언제나 현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중심은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시간 체험이란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균열을 극복하고 통합하려는 정신의 긴장으로 나타나며, 균열을 통합하려는 의지로 시간 체험이 생긴다.” 시간의 체험은 항상 현재에서 일어나는 지각된 경험이며, 관념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시간에 대한 기억과 미래 시간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의미 있는 시간 연속체를 구성한다. 과거란 과거사에 대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억 경험이며, 미래란 미래사에 대한 현재의 기대나 예상된 경험인 것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자연과학적인 시간인 동질적 시간과 의식이 침투되어 있는 참다운 시간인 순수 지속으로 구분한다. 순수 지속의 시간은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데, 이때 시간의 순수 지속이란 “우리의 의식 상태가 취하는 모습이며 현재의 상태와 그 이전의 상태 사이의 분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의식 사실들이 실로 연속적이며 서로서로 침투하는 가운데 그 사실중의 가장 단순한 것에서도 영혼 전체가 반영”되는 시간성을 갖는다. 따라서 시간의식은 시적 주체의 실존적 자의식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인식의 양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시간의식에 대해서 마이어호프도 유사한 사유를 펼치는데, 그는 시간적인 지속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지속적이고 동일적인 자아라는 관념을 획득한다고 보았다. 자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문학적 재구성의 연속성에 대한 지각은 시간 속에서의 연속성이나 지속의 측면과 상관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학작품 속에서 지속에 대한 시간의식은 곧 자아가 지향하는 의식과 동일성을 이루며 시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모든 일은 현재 시점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항상 현재에 일어나는 지각 경험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경험이며, 미래의 예기는 현재의 기대나 예상의 경험이다. 기형도의 시는 현재를 매개로 하여 양방향으로 시간이 침투한다. 이것은 단일한 시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상은 과거의 현재화와 미래의 현재화로 나타난다. 과거나 미래의 현재화와 더불어 시간의 선조적 흐름을 거부한 순환적인 시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영원의 초월적 시간양상을 띤다.
2. 기억, 과거 시간의 비극적 현재 지속
주관적인 경험의 시간에서 과거를 현재에 현속시키는 고리는 기억이다. 후설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기억은 실제의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연속시킨다. 기억 속의 과거는 일종의 추상화된 과거로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의미화되고 변형된 정서의 상태로 재현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사건의 한 가지 측면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여러 가지 측면이 골고루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은 단순히 현재 지각된 대상의 사물에 지배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상에 작용하여 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연속은 인간적 시간의 가역성에서 비롯하며, 주관적인 경험적 시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의 본질은 흘러간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생성하고 있는 현재 가운데에서만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는 현재 시점에서 병존하여 지속된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 시점으로 다시 떠올려 재구성하는 과정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현재로 되돌려 놓는 과정이다. 기형도의 시에 드러나는 시간의 양상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동기로 작용한다. 시에 과거를 확장시켜 놓으면서 그 과거의 기억과 추억이 현재의 시적 주체의 상황과 동일하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화되는 양상을 통해 과거가 현재를 허구적으로 재구하고, 또 과거를 현재 속에서 재구하는 양상을 띤다.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 / 그 옆에 은박지 같은 예배당이 있었지 / 틀린 기억이어도 좋아 / 멀고먼 길 한가운데 / 알아? 얼음자루 꽉찬 바다야 / 이 작은 성냥불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 / 어머니는 나보고 / 소다가루를 좀 먹으라셔 / 어디선가 통통 기타 소리가 들려 / 방금 문을 연 촛불 가게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 참, 그런데 / 오늘은 왜 아까부터(聖誕木 - 겨울 版畵3」 중에서)
인용 시에서 화자는 지금 “자꾸만 기침”을 하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있다. 자꾸만 나오는 기침은 어두운 방에 있는 자신의 몸이 “얼음으로 꽉찬 모양”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화자가 위치한 방의 밖은 또 “한 달 내내 숲에 눈이 퍼부었던” 것처럼 춥다. 화자는 그 추위를 “참으려 애”쓰다가 성냥불을 긋는 행위를 반복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성냥불을 긋는 행위는 유년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 “사과나무”, “은박지 같은 예배당”, “기타 소리”와 같은 유년의 기억과 연결되면서, 그 속에서 어머니(모성)에 의한 치유를 갈망한다.
그런데 현재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과거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동일시되고 있다. 화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은유된 현재의 아픔을 견디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결구에 “참, 그런데 / 오늘은 왜 아까부터”라고 끝맺고 있는 것처럼 2연의 첫 행에 설정되었던 기침이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기침과 한기는 치유되기 어려운 과거와 현재의 동일적인 아픔으로 과거의 아픔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유년시절에 대한 화자의 기억은 비록 그 형태는 과거의 것일지라도 내용은 현재의 것이다. 말하자면 유년시절에 대한 성인 화자의 기억은 현재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과거 유년시절의 “얼음자루 꽉찬 바다”로 은유된 아픈 상황에 대한 기억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정황의 유사성에 의한 과거로의 삼투 현상”은 기형도 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과거 기억이 현재 상황과 유사하게 겹치면서 화자의 내면적 고통의 깊이가 보다 절실하게 환기된다. 이처럼 화자는 “틀린 기억이어도 좋”은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게 재구성한다. 그럼으로써 아픈 유년시절의 과거 기억은 “현재의 감각 속으로 끼어들어 작용”하면서 현재를 더욱 아프게 지각하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과거에로의 후퇴에 있지 않고 정반대로 과거의 현재에로의 진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아픔이 현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기억이 단순히 현실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는 작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자의 기억은 현재의 지각에 한기나 기침 같은 고유한 이미지를 보내거나 혹은 이와 유사한 종류의 이미지나 회상, 가령 그의 시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겨울’, ‘밤’, ‘안개’, ‘죽음’ 등과 같은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냄으로써 현재의 고통스러운 지각을 더욱 배가시킨다. 그럼으로써 유년시절의 기억, 이를테면 과거 체험을 재구함으로써 현재의 절망적 체험을 더욱 실감나도록 생산적으로 기능한다. 이렇게 기형도의 시에서 지나간 과거는 현재화되면서 “현재적인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더 견고하게 지속”함으로써 현재의 비극적인 실존적 상황을 보다 뚜렷하게 부조한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
인용 시는 현재 시점의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인 화자는 어린 시절의 어둡고 외로운 방을 기억해낸다. 그 방 안에서 한 소년이 “찬밥처럼 방에 담겨”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해가 저물어 밤이 왔는데도 시장에 간 엄마는 오지 않는다. 소년은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이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모성의 결핍이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상황을 바라보는 화자의 아픈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유년시절의 기억은 현재 성인 화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한 것이다. 성인이 된 현재의 화자가 느끼는 과거의 어머니 부재가 가져다 준 단절감과 고립감의 강도는 어린 시절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불행하고 외롭고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즉 화자의 시간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데서 멈춰서 현재의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현재화, 즉 과거가 현재화되어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현재적 지속은 “시간을 연속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단순한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성으로서의 연속이다.” 또한 “순수 상태에서의 내적 경험이 우리에게 하나의 실체 ― 그 본질은 지속함이며, 그 결과 그것은 파괴 불가능한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 속으로 연장”시킨다. 그러므로 기형도의 시에서 과거는 영원히 현재를 생성한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과거의 현재적 지속에 대한 화자의 지각은 매우 선명하다. 과거 기억의 현재화는 “자신이 아직도 그 빈방에서 홀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게 없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한다. “(현재가 지나가는 반면) 과거는 그 자체로(자기 자신 안에) 보존”되기 때문에 화자의 어린 시절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남아 현재의 시적 주체의 비극적 실존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 중에서)
인용 시에서 화자의 현실적 상황은 지극히 ‘불행’하다. 화자는 진눈깨비 내리는 귀가 길에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짐했던 “참 많은 각오”, 언젠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진눈깨비 내리는 저녁의 귀가길,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 이런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 등 과거사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은 현재 화자가 처해 있는 지난한 삶의 조건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인 동시”에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불우한 어린 시절, 어린 넋의 반향”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달라지려는 많은 각오는 사라지고, 예나 지금이나 정처 없이 낯선 곳을 떠돌고 있는 화자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불우한 과거는 현재에도 그대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자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불우한 과거의 현재화로 말미암아 끝내 “나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나아가 불우한 과거와 현재가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예기는 화자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즉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는 미래에 대한 전망부재로까지 나아가면서 화자의 절망적 현실인식은 더욱 부각된다.
인용 시는 귀가 중인 현재 상황에서 과거의 기억이 중첩되는 구조를 취한다. 진눈깨비 속에 귀가 중이라는 설정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이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 과거와 현재, 심지어는 미래까지 등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과거의 시간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연결된 비극적 세계 인식 때문이다. 화자는 절망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지속되고 있음을 경험한다. 즉 과거는 현재나 미래 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화자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오래된 書籍」)인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인생을 증오”(「장미빛 인생」)하며, 허망하게도 “이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절망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결국 과거의 현재화라는 재구의 과정은 화자가 처한 비극적 현재 상황을 더욱 부각한다.
기형도의 시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현실의 부정성을 시간 흐름의 지속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수법은 기억의 회상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생성 가능하게 하는 과거를 허구적으로 재구한다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과거 회상은 “항상 회상의 시점에서의 재구성이며 일종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재화, 즉 과거의 현재적(허구적) 재구는 과거를 현재의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현재의 시적 주체의 상황과 과거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시적 주체가 느끼는 현실의 비극성은 오히려 과거의 현재화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있다. 현실의 부정성은 과거에서 이어져 미래로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시인이 인식하는 부정적 현실의 비극성은 더욱 극대화되는 효과를 낳는다. 과거의 비극적 현재화는 현재의 시적 주체의 상황이 그 만큼 부조리하고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현실임을 환기하는 것이다.
3. 죽음, 미래 시간의 절망적 현재 예기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로 수렴된다. 과거, 현재, 미래는 현재의 계기 속에 수렴된다. 시인의 상상력은 과거의 체험뿐만 아니라 미래의 상상력까지도 현재화할 수 있다.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 혹은 죽음의 현재화 양상은 대부분 절망적 미래나 죽음에 대한 의식을 내포한 비극적 시간관에서 연유한다. 그가 “경력은 출생”뿐이고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 나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나의 영혼은 /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書籍」)이라고 미래를 절망적으로 진술할 때, 그의 시는 전망부재의 미래를 현재 속에 끌어들여 현재의 폭력적 비극성을 절실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테면 미래뿐만 아니라 미래의 죽음을 현재화함으로써 현재를 죽음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것은 과거의 현재화가 그랬듯이 절망적 현실의 부정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하는 수법인 것이다.
대체로 기형도의 시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허구적인 사건, 혹은 관념에 밀착”되어 미래의 죽음을 현재 속에 부단히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많다. 유년기나 청년기의 상실 체험과 연관되는 도저한 부정성과 압도적인 죽음의 이미지로 인하여 기형도의 시는 삶의 길 없음의 인식을 그 창조적 원천으로 한다. 그리고 그 길 없음의 배경은 인간 실존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부조리성과 무의미성을 이끌어낸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렇게 그의 시는 죽음의 편향성, 혹은 ‘죽음의 미학화’를 통해 비극적 세계 인식을 드러내며, 동시에 실존의 부조리성과 현실의 폭력성을 절실하게 담아낸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전문)
화자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미래를 가정하고 자신이 살아온 날을 회고적으로 기록한다.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라고 예언적으로 말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정한다. 화자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먼 미래의 지점에 이미 가 있다. 먼 미래의 지점에 서서는 과거형 어미로 현재의 상황을 옛날로 가정하고 돌아보듯 시적 진술을 펼친다. 여기에서 화자가 가정한 미래는 현재의 상황이 된다. 화자가 현재 받고 있는 ‘사랑’의 고통은 미래에도 어김없이 일어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말하는 미래의 사건과 감정은 결국 현재의 시적 주체가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 미래는 현재의 감각적 경험들이 지각되면서 순간적으로 바뀌어가는 부단한 의식 활동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미래 시간의 현재적 예기를 통해 미래를 현재의 상황과 동일시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처한 현재의 실존적 고통을 극대화한다. “미래는 현재의 지속이고 공존”이라 할 때, 미래는 현재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재(先在)된 양상을 갖는다. 화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아프게 자신의 삶에 대해 평가적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예언적이며 평가적인 기록은 미래가 현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현재의 정서적 반응일 것이다.
이와 같은 미래의 현재화 양상은 시적 주체가 희망 없는 현실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도 부정적 전망을 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자는 먼 미래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예언적 단정으로 기록한다. ‘현재의 사랑에서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추구를 단념하지 못하는 데”에 기형도 시의 비극성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의 현재화는 미래뿐만 아니라 미래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시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노인들」 전문)
기형도에게 미래의 시간은 “허기의 바람을 펄럭이며 다가오고”(「廢鑛村」), “잃어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종이달」)하는 시간이다. 이와 같이 미래는 “또 다시 어리석은 시간”(「오후 4시의 희망」)일 뿐이며 “나는 이미 늙은 것”(「정거장에서의 충고」)으로 인식된다. 인용 시에서도 미래에 대한 비극적인 시간의식은 현재의 모습으로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미래를 예기하는 모습에서 잘 표명되어 있다. 이렇듯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의 시간은 현재에 이미 와 있는 것이다.
인용 시에서 봄날의 약동하는 생명성과 희망적인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로 형상화된 노인의 모습은 화자에게 ‘추악’하게 느껴진다. 늙음에 이르기에는 아직 젊은 육체를 지닌 화자에게 노인이 되는 것은 미래 시간의 일이다. 이렇듯 젊은 현재의 육체에 추악한 노년을 끌어들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자는 의식적으로 노년과 죽음을 현재에 앞당겨 실현시킴으로써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시간관이 시적 주체로 하여금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고 탄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이란 미래의 시간에 속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인간에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예상이 필수불가결하고 불식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시간적 흐름의 종말로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태의 것이다. 죽음의 실현은 시간의 흐름이 직선적으로 이어져 나간 끝에 가능하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육체적 체험으로 일어나지 않은 가능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형도는 미래의 죽음을 현재에 허구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현실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 나는 헛것을 살아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물 속의 사막」 중에서)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 김은 주저 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오후 4시의 희망」 중에서)
「물 속의 사막」에서 “나는 헛것을 살아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는 진술은 표면적으로는 아버지가 했던 진술이면서 현재 화자가 바라본 아버지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심층적 의미는 현재 화자가 자신의 삶에 아버지의 삶을 비유해 평가한 진술로 해석할 수도 있다. ‘헛것’이었던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삶이 중첩되면서 미래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 역시 살아서 ‘헛것’인 평가로 귀결된다. 「오후 4시의 희망」 역시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빵 껍데기처럼”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기적인 진술에서도 ‘빵 껍데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고 말 꽃’은 시적 화자의 현재가 투영된 모습이다. 이처럼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 시간의 죽음은 허구적으로 현실화된다. 현재화된 미래의 죽음, 말하자면 미래의 시간은 현재를 더욱 분명히 하고 현실적 실존을 본질적으로 투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불길한 전망은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을 거느리는가”(「나리 나리 개나리」)에서처럼 과거에서부터 지속되어 현재와 섞이고, 이것은 미래에 대한 시간의식을 결정하는 데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 연속되어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와도 섞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시적 주체가 “미래가 나의 과거”(「오래된 書籍」)라 말할 때, “미래는 근본적으로 과거에서 규정된다”는 명제를 상기하게 한다. ‘현재의 지각 속에는 기억이나 회상의 연속적인 흐름에 의한 과거의 재생이 있는 한편, 이 지각과 재생의 힘에서 나아가 예상이나 기대를 선인식하는 예기의 힘 곧 미래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를 통해 지속되는 시간의 범위는 기억과 기대를 다 포함한다”고 할 때,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의 죽음이나, “마른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삼촌의 죽음」)는 유년의 죽음 체험은 현재에도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입 속의 검은 잎」)치며 공포스럽게 지속된다. 이러한 기억의 현재적 지속은 미래의 죽음까지도 현재화하며, 여기에서 죽음이라는 허구적 기표는 전망 없는 현실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기의가 된다.
기형도의 시는 미래의 시간에 예기된 죽음을 현재적으로 허구화하여 부단히 재구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지속적으로 화자가 허구적으로 현실화한 죽음을 경험하고, 그 죽음이 절망적인 과거의 현실적 지속에서 비롯하며, 그것이 미래의 시간에까지 연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형도 시가 보여주는 “상징적 죽음의 형식”은 “전망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실존적 갈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4. 초월, 영원한 시간의 본질적 무시간성
시인은 현실의 원칙이란 이름으로 기각된, 말하자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탐색하고 창조하는 자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시인은 시가 현실을 닮을 것이 아니라 현실이 시를 닮기를 희망한다. 이럴 때 시는 현실원칙이 강제하는 가치들을 물리치고 일상적 경험을 초월한 초역사적 시간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아울러 시는 미지, 즉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만큼 일상적 시간의 경험을 괄호에 묶어두고 영원의 본질적 시간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때 본질적 시간으로서의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 아닌, 무시간성, 즉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고, 이 시간 밖에 있는 경험의 한 성질”을 의미한다.
기형도의 시에서 초월적 시간의 영원성은 현실적 고통과 부조리와 모순 등 모든 부정적 요소가 제거된 동화적 동일성의 세계로 나타난다. 동화의 환상 세계에서는 시간의 선조적 흐름을 거부한 순환적인 시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영원의 초월적 시간양상을 띤다. 그의 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수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유년의 넋과 꿈으로서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폭압적인 현실 세계에 귀착한다. 이때 낙원을 상실했다는 상실의식과 ‘안개’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영원의 시간, 그 잃어버린 낙원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의식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가 시적 허구로 창조한 세계는 동일성이 오롯이 확보된 동화적 환상의 세계이다.
저녁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成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成 //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成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숲으로 된 성벽」 전문)
인용 시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기형도의 시적 경향과 사뭇 다르다. 지극한 고요와 평화, 안정과 신비로움으로 말미암아 ‘성’ 안의 세계는 동화적인 환상적 분위기로 가득하고, 존재의 충만한 동일성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 신비로운 그 成” 안에는 ‘농부들’과 ‘당나귀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골동품 商人”이 사는 현실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성’ 안의 세계는 일체의 비본질이 제거된 순수 상태이자 현세적 시간의 분열과 모순이 해결된 초시간의 영역이다.
시간성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구조라면 인간은 시간을 살면서 동시에 그러한 일상적 시간을 넘어서 진정한 시간의 본질적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곳은 바로 ‘성’ 안의 세계이다. ‘성’ 안은 단순히 시간의 계기적 질서가 무화된 것이 아닌 본질적인 것의 집약된 형태로서의 세계이다. 초월적인 영원의 시간이 지배하는 ‘성’ 안의 세계에서 시간은 변하지 않는 진리와 순수를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시간을 초월한 숲으로 둘러싸인 ‘성’ 안의 시간은 영원의 봉인된 시간이 된다.
물리적 시간의 계기적 질서가 무화된 “숲으로 된 성벽”의 안은 일상적 경험세계의 시간을 이탈한 초역사적 시간의 영역이다. 이와 같이 “시인에 의해 체험되는 영원은 무한의 시간, 영원의 생명이 아니라 지상의 한 순간 속에서 파악되는 ‘영원의 지금’, 즉 무시간성의 체험”으로 이것이 현실성을 갖도록 표현되려면 연대기적 질서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무시간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시간성은 신화적 시간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화세계에는 역사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영원한 원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화가 지닌 과거⋅현재⋅미래의 동시성, 혹은 영원한 시간의 지속과 반복이라는 시간성은 결국 원형적 무시간성을 의미한다. 성 안에서의 시간은 현세적 시간과는 대비되는 ‘영원한 지금’으로서의 봉인된 현재이다. 이 봉인된 현재의 무시간성에서 화자의 ‘혼이 물살, 고기떼, 물새, 구름, 비’(「시인 1」)로 재생되거나, ‘인간과 짐승과 무생물이 서로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넘다드는 것’(「시인 2」)처럼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한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중략…/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모든 사물들의 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집시의 詩集」 중에서)
인용한 시는 동화적 상상력에 의해 환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기형도의 시 가운데는 동화적 상상력에 의해 환상적인 세계가 창조되는 경우가 다수 있다. 그 가운데 앞서 살펴본 「숲으로 된 성벽」이 ‘성 안’과 ‘성 밖’, ‘농부’와 ‘골동품 상인’이라는 대비적 관계에서 영원의 시간이 드러나는 것처럼, 인용 시도 역시 마찬가지로 “神의 공장”인 손을 가진 “떠돌이 사내”와 호통을 치는 어른, 환상의 신성한 저녁 시간과 어른들의 공리적 시간을 대비하면서 동화적인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동화적 상상력에 의하여 인용 시는 현실에서의 해방,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호통”을 치고, 또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공리적인 현실원칙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떠돌이 사내”는 동화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 역시 환상적이며 신비롭고 비현실적이다. 동화의 세계에서 “떠돌이 사내”는 신비로운 인물이며 “신의 공장”인 손을 가진 ‘마법사’로서 현실적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기형도가 현실적 시간을 초월해 구축한 동일성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만물이 서로 자유롭게 교통하며 연대하는 물활론적 공동체이자 경험 현실과 상관없이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동화적 공간”이다. 여기에서 “숲으로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신비한 성이나, “신성한 저녁”과 같은 공간과 시간은 현실 세계에서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대기적 시간과는 무관한 영원한 지속의 시간인 “무시간은 시간이 어떤 상관성도 띠지 않는 곳, 곧 추상적 실체들과 관계되고, 일반적 진리들이 표현되거나, 몽상 속에서처럼 어떤 현실적 상황과도 단절된 채 순수한 관념들이 예상되는 자리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형도 시에서 영원의 무시간성은 물리적 시간 질서에 대한 반성적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기형도는 의식적으로 무시간의 영원성을 지향함으로써 시의 주제의식을 강화하려는 시간의식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실의 폭력성과 부조리성, 도시에 대한 환멸과 부정적 의식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신비, 영원, 동일성의 초월적 시간을 허구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참된 시간성과 단절된 근대의 직선적 시간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중에서)
인용 시에서 시적 주체는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들려오는 기타의 아름다운 소리에서 영원의 무시간을 체험한다. 끊어진 기타에서 소리가 나면서 텅 빈 방은 환상적 공간으로 변화하고 시간은 멈춰버리는 것이다. 환상적 공간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른 종이’의 본질은 ‘먼지’의 덧칠에도 불구하고 본질로서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여기에서 본질로서의 푸른 종이의 색깔은 아마도 동일성이 오롯이 확보된 영원의 시간과 공간일 것이다.
본질적 시간과의 만남을 화자는 “어둡고 텅 빈 희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현실이 될 수 없는 영원의 무시간이다. ‘아름다운 기타 소리’는 ‘농부의 성’(「숲으로 된 성벽」)이나, ‘떠돌이 사내’(「집시의 詩集」) 등과 같이 한 때 존재했으나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닌 절대적 지향점, 말하자면 동일성이 상상적으로 실현되는 영원의 초월적 시간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부재하지만 강렬하게 시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으며, 부재하기 때문에 항상 시인의 상상력을 매혹시키면서 또 좌절시킨다. 그의 시를 압도하는 지배적인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형도의 시에 나타나는 초월적 시간의 무시간성은 시인의 시간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기 동일성이 확보된 초월적 시간의 영원성은 시간에 대한 전통적 인식 체계를 거부할 때 가능하다. 직선적 시간을 거부하고 초월적 시간으로의 진입은 자아와의 참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서 “자아와의 참된 만남이란 결국 현실적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개’(「안개」)에 의해 은폐된 현실의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구조를 의식한 기형도는 일상적 경험의 현실적 시간에서 이탈하여 희망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 찾기’는 역설적으로 시인이 처한 현재 상황의 비극성을 더욱 강화하고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왜냐하면 환상의 세계는 부재와 결핍, 말하자면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현실의 부정의식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폭력적 현실의 시간을 떠나 동화적 상상력을 통한 동일성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희망할수록 현실의 비극성은 더욱 극대화되고, 이러한 양상은 기형도 시를 압도한다. 예컨대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반 토막 영혼”(「病」)의 “황폐한 내부”(「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 발생하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짙으면 짙을수록, 또 그의 시에서 ‘안개’, ‘어둠’, ‘밤’, ‘검은 구름’, ‘비’, ‘겨울’, ‘눈’, ‘진눈깨비’ 등 일기 상태의 이미지로 은유된 현실의 폭력성과 허위성에 대한 인식은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시적 삶의 추악함과 허망함을 비정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며, 폭력적 현실의 구조에서 느끼는 실존적 고통과 공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10/10/12
(김홍진 교수 - 버클리 문학강좌)
- 기형도론 -
1. 문학의 시간 현상학
문학의 시간은 주관적 시간으로 인간의 경험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이다. 문학의 시간은 “사적이고 주관적이며 심리적 차원의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여 말한다. 이러한 물리적 시간은 선조적 질서에 따라 계기적으로 흐르기 때문에 가역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 시간의 계기적 “선조성은 파괴될 여지가 다분한 관념”이다. 문학의 시간에서 시인은 현재 자기의식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의 간극을 주관적으로 재정립할 수 있으며, 이때 시간은 가역화된다. 따라서 문학의 시간은 자연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주관적 경험의 인간적 시간’이다. 시간의 가역성으로 말미암아 시인의 의식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은 새로이 조합되고 재구될 수 있다.
시간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불가역성의 물리적인 시간과 문학적 주체가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가역성의 주관적 시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주관적 시간은 이를 통합적으로 보거나 계기적 질서를 무화하는 태도를 보인다. 시간은 시간을 인식하고 시간을 반성적으로 대하려는 자아에 의해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 시간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인식의 태도가 시간성을 생성하게 된다. 따라서 시간성은 시간의 성격, 의미 등을 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서 시간성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시로 형상화될 때의 특징적 성격과 의미를 일컫는다. 이러한 시간성은 그것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와 결부되어 시인이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대하는가에 따라 그 성격과 의미는 달라지며, 이때 시간의식이 나타난다. 환언하면 시간의식이란 시간성에 대한 의식, 또는 시간성을 대하는 인식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에 있어서 시간의식이란 시간과 시간성을 대하는 시인의 주관적인 방식과 태도, 인식과 판단으로 결정된 시간관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의식이 시인의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식태도나 방식과 결부된 문제이므로 그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지향된 작가적 의식’을 뜻하기도 한다. 즉 시에서 시간의식은 시적 주체가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의식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지향하는 시간의식은 시에 나타나는 실존적 자의식은 물론이거니와 세계 인식 내지는 현실 파악의 양상을 보여준다. 시에서 과거, 현재, 미래는 보통 현재의 계기 속으로 수렴된다. 이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과거의 체험뿐 아니라 미래의 상상력까지도 언제나 현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의 중심은 현재에 있기 때문이다. “시간 체험이란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균열을 극복하고 통합하려는 정신의 긴장으로 나타나며, 균열을 통합하려는 의지로 시간 체험이 생긴다.” 시간의 체험은 항상 현재에서 일어나는 지각된 경험이며, 관념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시간에 대한 기억과 미래 시간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의미 있는 시간 연속체를 구성한다. 과거란 과거사에 대해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억 경험이며, 미래란 미래사에 대한 현재의 기대나 예상된 경험인 것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을 자연과학적인 시간인 동질적 시간과 의식이 침투되어 있는 참다운 시간인 순수 지속으로 구분한다. 순수 지속의 시간은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데, 이때 시간의 순수 지속이란 “우리의 의식 상태가 취하는 모습이며 현재의 상태와 그 이전의 상태 사이의 분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의식 사실들이 실로 연속적이며 서로서로 침투하는 가운데 그 사실중의 가장 단순한 것에서도 영혼 전체가 반영”되는 시간성을 갖는다. 따라서 시간의식은 시적 주체의 실존적 자의식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인식의 양상을 반영한다. 이러한 시간의식에 대해서 마이어호프도 유사한 사유를 펼치는데, 그는 시간적인 지속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지속적이고 동일적인 자아라는 관념을 획득한다고 보았다. 자아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문학적 재구성의 연속성에 대한 지각은 시간 속에서의 연속성이나 지속의 측면과 상관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문학작품 속에서 지속에 대한 시간의식은 곧 자아가 지향하는 의식과 동일성을 이루며 시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모든 일은 현재 시점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항상 현재에 일어나는 지각 경험이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경험이며, 미래의 예기는 현재의 기대나 예상의 경험이다. 기형도의 시는 현재를 매개로 하여 양방향으로 시간이 침투한다. 이것은 단일한 시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혼재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양상은 과거의 현재화와 미래의 현재화로 나타난다. 과거나 미래의 현재화와 더불어 시간의 선조적 흐름을 거부한 순환적인 시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영원의 초월적 시간양상을 띤다.
2. 기억, 과거 시간의 비극적 현재 지속
주관적인 경험의 시간에서 과거를 현재에 현속시키는 고리는 기억이다. 후설에 따르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기억은 실제의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를 연속시킨다. 기억 속의 과거는 일종의 추상화된 과거로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의 재현이 아니라 의미화되고 변형된 정서의 상태로 재현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기억은 사건의 한 가지 측면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여러 가지 측면이 골고루 작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은 단순히 현재 지각된 대상의 사물에 지배되지 않고, 능동적으로 대상에 작용하여 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연속은 인간적 시간의 가역성에서 비롯하며, 주관적인 경험적 시간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의 본질은 흘러간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생성하고 있는 현재 가운데에서만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는 현재 시점에서 병존하여 지속된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 시점으로 다시 떠올려 재구성하는 과정은 지속되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현재로 되돌려 놓는 과정이다. 기형도의 시에 드러나는 시간의 양상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동기로 작용한다. 시에 과거를 확장시켜 놓으면서 그 과거의 기억과 추억이 현재의 시적 주체의 상황과 동일하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과거가 현재화되는 양상을 통해 과거가 현재를 허구적으로 재구하고, 또 과거를 현재 속에서 재구하는 양상을 띤다.
그래, 고향에 가고 싶어 /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렸지만 / 사과나무는 나를 사로잡았어 / 그 옆에 은박지 같은 예배당이 있었지 / 틀린 기억이어도 좋아 / 멀고먼 길 한가운데 / 알아? 얼음자루 꽉찬 바다야 / 이 작은 성냥불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어 / 어머니는 나보고 / 소다가루를 좀 먹으라셔 / 어디선가 통통 기타 소리가 들려 / 방금 문을 연 촛불 가게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 / 참, 그런데 / 오늘은 왜 아까부터(聖誕木 - 겨울 版畵3」 중에서)
인용 시에서 화자는 지금 “자꾸만 기침”을 하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고 있다. 자꾸만 나오는 기침은 어두운 방에 있는 자신의 몸이 “얼음으로 꽉찬 모양”으로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화자가 위치한 방의 밖은 또 “한 달 내내 숲에 눈이 퍼부었던” 것처럼 춥다. 화자는 그 추위를 “참으려 애”쓰다가 성냥불을 긋는 행위를 반복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성냥불을 긋는 행위는 유년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 “사과나무”, “은박지 같은 예배당”, “기타 소리”와 같은 유년의 기억과 연결되면서, 그 속에서 어머니(모성)에 의한 치유를 갈망한다.
그런데 현재의 “크리스마스 트리”와 과거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동일시되고 있다. 화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멈추지 않는 기침으로 은유된 현재의 아픔을 견디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러나 결구에 “참, 그런데 / 오늘은 왜 아까부터”라고 끝맺고 있는 것처럼 2연의 첫 행에 설정되었던 기침이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기침과 한기는 치유되기 어려운 과거와 현재의 동일적인 아픔으로 과거의 아픔이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서 유년시절에 대한 화자의 기억은 비록 그 형태는 과거의 것일지라도 내용은 현재의 것이다. 말하자면 유년시절에 대한 성인 화자의 기억은 현재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과거 유년시절의 “얼음자루 꽉찬 바다”로 은유된 아픈 상황에 대한 기억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남아 있다. “정황의 유사성에 의한 과거로의 삼투 현상”은 기형도 시에 빈번하게 나타나는데, 과거 기억이 현재 상황과 유사하게 겹치면서 화자의 내면적 고통의 깊이가 보다 절실하게 환기된다. 이처럼 화자는 “틀린 기억이어도 좋”은 과거를 현재와 유사하게 재구성한다. 그럼으로써 아픈 유년시절의 과거 기억은 “현재의 감각 속으로 끼어들어 작용”하면서 현재를 더욱 아프게 지각하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은 “현재의 과거에로의 후퇴에 있지 않고 정반대로 과거의 현재에로의 진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아픔이 현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기억이 단순히 현실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인식하는 작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자의 기억은 현재의 지각에 한기나 기침 같은 고유한 이미지를 보내거나 혹은 이와 유사한 종류의 이미지나 회상, 가령 그의 시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겨울’, ‘밤’, ‘안개’, ‘죽음’ 등과 같은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보냄으로써 현재의 고통스러운 지각을 더욱 배가시킨다. 그럼으로써 유년시절의 기억, 이를테면 과거 체험을 재구함으로써 현재의 절망적 체험을 더욱 실감나도록 생산적으로 기능한다. 이렇게 기형도의 시에서 지나간 과거는 현재화되면서 “현재적인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더 견고하게 지속”함으로써 현재의 비극적인 실존적 상황을 보다 뚜렷하게 부조한다.
열무 삼십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 전문)
인용 시는 현재 시점의 화자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성인 화자는 어린 시절의 어둡고 외로운 방을 기억해낸다. 그 방 안에서 한 소년이 “찬밥처럼 방에 담겨” 훌쩍거리며 울고 있다. 해가 저물어 밤이 왔는데도 시장에 간 엄마는 오지 않는다. 소년은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이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모성의 결핍이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상황을 바라보는 화자의 아픈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유년시절의 기억은 현재 성인 화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강렬한 것이다. 성인이 된 현재의 화자가 느끼는 과거의 어머니 부재가 가져다 준 단절감과 고립감의 강도는 어린 시절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불행하고 외롭고 두려워하는 존재이다. 즉 화자의 시간은 아직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데서 멈춰서 현재의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현재화, 즉 과거가 현재화되어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거의 현재적 지속은 “시간을 연속적으로 체험하는, 시간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것은 단순한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성으로서의 연속이다.” 또한 “순수 상태에서의 내적 경험이 우리에게 하나의 실체 ― 그 본질은 지속함이며, 그 결과 그것은 파괴 불가능한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 속으로 연장”시킨다. 그러므로 기형도의 시에서 과거는 영원히 현재를 생성한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과거의 현재적 지속에 대한 화자의 지각은 매우 선명하다. 과거 기억의 현재화는 “자신이 아직도 그 빈방에서 홀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게 없음을 토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자는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한다. “(현재가 지나가는 반면) 과거는 그 자체로(자기 자신 안에) 보존”되기 때문에 화자의 어린 시절은 현재까지도 지속적으로 남아 현재의 시적 주체의 비극적 실존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진눈깨비」 중에서)
인용 시에서 화자의 현실적 상황은 지극히 ‘불행’하다. 화자는 진눈깨비 내리는 귀가 길에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짐했던 “참 많은 각오”, 언젠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 진눈깨비 내리는 저녁의 귀가길,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 이런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 등 과거사를 떠올리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은 현재 화자가 처해 있는 지난한 삶의 조건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인 동시”에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불우한 어린 시절, 어린 넋의 반향”이라 할 수 있다. 과거와 달라지려는 많은 각오는 사라지고, 예나 지금이나 정처 없이 낯선 곳을 떠돌고 있는 화자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불우한 과거는 현재에도 그대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자는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불우한 과거의 현재화로 말미암아 끝내 “나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나아가 불우한 과거와 현재가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예기는 화자가 처한 현실적 상황을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즉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는 미래에 대한 전망부재로까지 나아가면서 화자의 절망적 현실인식은 더욱 부각된다.
인용 시는 귀가 중인 현재 상황에서 과거의 기억이 중첩되는 구조를 취한다. 진눈깨비 속에 귀가 중이라는 설정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아니라 화자의 의식이 과거를 현재로 불러와 과거와 현재, 심지어는 미래까지 등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과거의 시간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연결된 비극적 세계 인식 때문이다. 화자는 절망적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지속되고 있음을 경험한다. 즉 과거는 현재나 미래 속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화자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인”(「오래된 書籍」)인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고, “인생을 증오”(「장미빛 인생」)하며, 허망하게도 “이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절망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결국 과거의 현재화라는 재구의 과정은 화자가 처한 비극적 현재 상황을 더욱 부각한다.
기형도의 시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현실의 부정성을 시간 흐름의 지속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현재화하는 수법은 기억의 회상이라기보다는 현재를 생성 가능하게 하는 과거를 허구적으로 재구한다는 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과거 회상은 “항상 회상의 시점에서의 재구성이며 일종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현재화, 즉 과거의 현재적(허구적) 재구는 과거를 현재의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다. 기형도의 시에서 현재의 시적 주체의 상황과 과거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 시적 주체가 느끼는 현실의 비극성은 오히려 과거의 현재화를 통해 더욱 강화되어 있다. 현실의 부정성은 과거에서 이어져 미래로까지 지속되기 때문에 시인이 인식하는 부정적 현실의 비극성은 더욱 극대화되는 효과를 낳는다. 과거의 비극적 현재화는 현재의 시적 주체의 상황이 그 만큼 부조리하고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현실임을 환기하는 것이다.
3. 죽음, 미래 시간의 절망적 현재 예기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로 수렴된다. 과거, 현재, 미래는 현재의 계기 속에 수렴된다. 시인의 상상력은 과거의 체험뿐만 아니라 미래의 상상력까지도 현재화할 수 있다.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 혹은 죽음의 현재화 양상은 대부분 절망적 미래나 죽음에 대한 의식을 내포한 비극적 시간관에서 연유한다. 그가 “경력은 출생”뿐이고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 나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나의 영혼은 /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오래된 書籍」)이라고 미래를 절망적으로 진술할 때, 그의 시는 전망부재의 미래를 현재 속에 끌어들여 현재의 폭력적 비극성을 절실하게 드러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테면 미래뿐만 아니라 미래의 죽음을 현재화함으로써 현재를 죽음의 상황으로 인식하는 것은 과거의 현재화가 그랬듯이 절망적 현실의 부정성을 효과적으로 부각하는 수법인 것이다.
대체로 기형도의 시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허구적인 사건, 혹은 관념에 밀착”되어 미래의 죽음을 현재 속에 부단히 끌어들이는 작품들이 많다. 유년기나 청년기의 상실 체험과 연관되는 도저한 부정성과 압도적인 죽음의 이미지로 인하여 기형도의 시는 삶의 길 없음의 인식을 그 창조적 원천으로 한다. 그리고 그 길 없음의 배경은 인간 실존의 근원적 조건으로서의 부조리성과 무의미성을 이끌어낸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이렇게 그의 시는 죽음의 편향성, 혹은 ‘죽음의 미학화’를 통해 비극적 세계 인식을 드러내며, 동시에 실존의 부조리성과 현실의 폭력성을 절실하게 담아낸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질투는 나의 힘」전문)
화자는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미래를 가정하고 자신이 살아온 날을 회고적으로 기록한다.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라고 예언적으로 말하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정한다. 화자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먼 미래의 지점에 이미 가 있다. 먼 미래의 지점에 서서는 과거형 어미로 현재의 상황을 옛날로 가정하고 돌아보듯 시적 진술을 펼친다. 여기에서 화자가 가정한 미래는 현재의 상황이 된다. 화자가 현재 받고 있는 ‘사랑’의 고통은 미래에도 어김없이 일어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말하는 미래의 사건과 감정은 결국 현재의 시적 주체가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 미래는 현재의 감각적 경험들이 지각되면서 순간적으로 바뀌어가는 부단한 의식 활동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미래 시간의 현재적 예기를 통해 미래를 현재의 상황과 동일시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처한 현재의 실존적 고통을 극대화한다. “미래는 현재의 지속이고 공존”이라 할 때, 미래는 현재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재(先在)된 양상을 갖는다. 화자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아프게 자신의 삶에 대해 평가적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예언적이며 평가적인 기록은 미래가 현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현재의 정서적 반응일 것이다.
이와 같은 미래의 현재화 양상은 시적 주체가 희망 없는 현실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있으며,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대해서도 부정적 전망을 내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자는 먼 미래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예언적 단정으로 기록한다. ‘현재의 사랑에서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한 추구를 단념하지 못하는 데”에 기형도 시의 비극성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의 현재화는 미래뿐만 아니라 미래의 늙음과 죽음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시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노인들」 전문)
기형도에게 미래의 시간은 “허기의 바람을 펄럭이며 다가오고”(「廢鑛村」), “잃어버려야 할 것들을 점검”(「종이달」)하는 시간이다. 이와 같이 미래는 “또 다시 어리석은 시간”(「오후 4시의 희망」)일 뿐이며 “나는 이미 늙은 것”(「정거장에서의 충고」)으로 인식된다. 인용 시에서도 미래에 대한 비극적인 시간의식은 현재의 모습으로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미래를 예기하는 모습에서 잘 표명되어 있다. 이렇듯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의 시간은 현재에 이미 와 있는 것이다.
인용 시에서 봄날의 약동하는 생명성과 희망적인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로 형상화된 노인의 모습은 화자에게 ‘추악’하게 느껴진다. 늙음에 이르기에는 아직 젊은 육체를 지닌 화자에게 노인이 되는 것은 미래 시간의 일이다. 이렇듯 젊은 현재의 육체에 추악한 노년을 끌어들이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자는 의식적으로 노년과 죽음을 현재에 앞당겨 실현시킴으로써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시간관이 시적 주체로 하여금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장미빛 인생」)고 탄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이란 미래의 시간에 속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인간에게 자기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예상이 필수불가결하고 불식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인간의 삶 속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시간적 흐름의 종말로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상태의 것이다. 죽음의 실현은 시간의 흐름이 직선적으로 이어져 나간 끝에 가능하기 때문에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육체적 체험으로 일어나지 않은 가능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형도는 미래의 죽음을 현재에 허구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현실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 나는 헛것을 살아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물 속의 사막」 중에서)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 침묵은 그러나 얼마나 믿음직한 수표인가 /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 김은 주저 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 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오후 4시의 희망」 중에서)
「물 속의 사막」에서 “나는 헛것을 살아다, 살아서 헛것이었다”는 진술은 표면적으로는 아버지가 했던 진술이면서 현재 화자가 바라본 아버지의 삶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심층적 의미는 현재 화자가 자신의 삶에 아버지의 삶을 비유해 평가한 진술로 해석할 수도 있다. ‘헛것’이었던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삶이 중첩되면서 미래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 역시 살아서 ‘헛것’인 평가로 귀결된다. 「오후 4시의 희망」 역시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빵 껍데기처럼”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라는 예기적인 진술에서도 ‘빵 껍데기’나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고 말 꽃’은 시적 화자의 현재가 투영된 모습이다. 이처럼 기형도의 시에서 미래 시간의 죽음은 허구적으로 현실화된다. 현재화된 미래의 죽음, 말하자면 미래의 시간은 현재를 더욱 분명히 하고 현실적 실존을 본질적으로 투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불길한 전망은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을 거느리는가”(「나리 나리 개나리」)에서처럼 과거에서부터 지속되어 현재와 섞이고, 이것은 미래에 대한 시간의식을 결정하는 데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기억이 연속되어 현재를 규정하고 미래와도 섞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맥에서 시적 주체가 “미래가 나의 과거”(「오래된 書籍」)라 말할 때, “미래는 근본적으로 과거에서 규정된다”는 명제를 상기하게 한다. ‘현재의 지각 속에는 기억이나 회상의 연속적인 흐름에 의한 과거의 재생이 있는 한편, 이 지각과 재생의 힘에서 나아가 예상이나 기대를 선인식하는 예기의 힘 곧 미래까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를 통해 지속되는 시간의 범위는 기억과 기대를 다 포함한다”고 할 때,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나리 나리 개나리」) 누이의 죽음이나, “마른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삼촌의 죽음」)는 유년의 죽음 체험은 현재에도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입 속의 검은 잎」)치며 공포스럽게 지속된다. 이러한 기억의 현재적 지속은 미래의 죽음까지도 현재화하며, 여기에서 죽음이라는 허구적 기표는 전망 없는 현실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기의가 된다.
기형도의 시는 미래의 시간에 예기된 죽음을 현재적으로 허구화하여 부단히 재구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지속적으로 화자가 허구적으로 현실화한 죽음을 경험하고, 그 죽음이 절망적인 과거의 현실적 지속에서 비롯하며, 그것이 미래의 시간에까지 연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형도 시가 보여주는 “상징적 죽음의 형식”은 “전망 없는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실존적 갈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4. 초월, 영원한 시간의 본질적 무시간성
시인은 현실의 원칙이란 이름으로 기각된, 말하자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탐색하고 창조하는 자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시인은 시가 현실을 닮을 것이 아니라 현실이 시를 닮기를 희망한다. 이럴 때 시는 현실원칙이 강제하는 가치들을 물리치고 일상적 경험을 초월한 초역사적 시간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아울러 시는 미지, 즉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만큼 일상적 시간의 경험을 괄호에 묶어두고 영원의 본질적 시간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이때 본질적 시간으로서의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 아닌, 무시간성, 즉 물리적 시간을 초월하고, 이 시간 밖에 있는 경험의 한 성질”을 의미한다.
기형도의 시에서 초월적 시간의 영원성은 현실적 고통과 부조리와 모순 등 모든 부정적 요소가 제거된 동화적 동일성의 세계로 나타난다. 동화의 환상 세계에서는 시간의 선조적 흐름을 거부한 순환적인 시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신화적이고 원형적인 영원의 초월적 시간양상을 띤다. 그의 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수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유년의 넋과 꿈으로서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폭압적인 현실 세계에 귀착한다. 이때 낙원을 상실했다는 상실의식과 ‘안개’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영원의 시간, 그 잃어버린 낙원의 시간으로 돌아가려는 회귀의식을 보인다. 그리하여 그가 시적 허구로 창조한 세계는 동일성이 오롯이 확보된 동화적 환상의 세계이다.
저녁노을이 지면 /神들의 商店엔 하나둘 불이 켜지고/농부들은 작은 당나귀들과 함께 /成안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성벽은 울창한 숲으로 된 것이어서 /누구나 寺院을 통과하는 구름 혹은 /조용한 공기들이 되지 않으면 /한걸음도 들어갈 수 없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그 成 //
어느 골동품 商人이 그 숲을 찾아와 /몇 개 큰 나무들을 잘라내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본 것은/쓰러진 나무들뿐, 잠시 후 /그는 공터를 떠났다 /농부들은 아직도 그 평화로운 成에 살고 있다 /물론 그 작은 당나귀들 역시(「숲으로 된 성벽」 전문)
인용 시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는 기형도의 시적 경향과 사뭇 다르다. 지극한 고요와 평화, 안정과 신비로움으로 말미암아 ‘성’ 안의 세계는 동화적인 환상적 분위기로 가득하고, 존재의 충만한 동일성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 신비로운 그 成” 안에는 ‘농부들’과 ‘당나귀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다. “골동품 商人”이 사는 현실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성’ 안의 세계는 일체의 비본질이 제거된 순수 상태이자 현세적 시간의 분열과 모순이 해결된 초시간의 영역이다.
시간성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구조라면 인간은 시간을 살면서 동시에 그러한 일상적 시간을 넘어서 진정한 시간의 본질적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곳은 바로 ‘성’ 안의 세계이다. ‘성’ 안은 단순히 시간의 계기적 질서가 무화된 것이 아닌 본질적인 것의 집약된 형태로서의 세계이다. 초월적인 영원의 시간이 지배하는 ‘성’ 안의 세계에서 시간은 변하지 않는 진리와 순수를 내재하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영원한 현재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시간을 초월한 숲으로 둘러싸인 ‘성’ 안의 시간은 영원의 봉인된 시간이 된다.
물리적 시간의 계기적 질서가 무화된 “숲으로 된 성벽”의 안은 일상적 경험세계의 시간을 이탈한 초역사적 시간의 영역이다. 이와 같이 “시인에 의해 체험되는 영원은 무한의 시간, 영원의 생명이 아니라 지상의 한 순간 속에서 파악되는 ‘영원의 지금’, 즉 무시간성의 체험”으로 이것이 현실성을 갖도록 표현되려면 연대기적 질서로부터 해방된 것 같은 무시간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무시간성은 신화적 시간과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신화세계에는 역사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영원한 원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화가 지닌 과거⋅현재⋅미래의 동시성, 혹은 영원한 시간의 지속과 반복이라는 시간성은 결국 원형적 무시간성을 의미한다. 성 안에서의 시간은 현세적 시간과는 대비되는 ‘영원한 지금’으로서의 봉인된 현재이다. 이 봉인된 현재의 무시간성에서 화자의 ‘혼이 물살, 고기떼, 물새, 구름, 비’(「시인 1」)로 재생되거나, ‘인간과 짐승과 무생물이 서로의 영역을 자연스럽게 넘다드는 것’(「시인 2」)처럼 끊임없이 순환하고 반복한다.
모든 풍요의 아버지인 구름 /모든 질서의 아버지인 /숲에서 날 찾으려거든 장화를 벗어주어요 /나는 나무들의 家臣, 짐승들의 다정한 맏형/…중략…/나는 즐거운 노동자, 항상 조용히 취해 있네 /술집에서 나를 만나려거든 신성한 저녁에 오게 /가장 더러운 옷을 입은 사내를 찾아주오 /사냥해온 별/모든 사물들의 圖章 /모든 정신들의 장식 /랄라라, 기쁨들이여! 過誤들이여! 겸손한 친화력이여!(「집시의 詩集」 중에서)
인용한 시는 동화적 상상력에 의해 환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기형도의 시 가운데는 동화적 상상력에 의해 환상적인 세계가 창조되는 경우가 다수 있다. 그 가운데 앞서 살펴본 「숲으로 된 성벽」이 ‘성 안’과 ‘성 밖’, ‘농부’와 ‘골동품 상인’이라는 대비적 관계에서 영원의 시간이 드러나는 것처럼, 인용 시도 역시 마찬가지로 “神의 공장”인 손을 가진 “떠돌이 사내”와 호통을 치는 어른, 환상의 신성한 저녁 시간과 어른들의 공리적 시간을 대비하면서 동화적인 환상의 세계를 구축한다. 동화적 상상력에 의하여 인용 시는 현실에서의 해방, 말하자면 “우리들에게 호통”을 치고, 또 “참된 즐거움을 두려워”하며, “세상을 자물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른들의 공리적인 현실원칙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떠돌이 사내”는 동화의 세계에서 온 사람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 역시 환상적이며 신비롭고 비현실적이다. 동화의 세계에서 “떠돌이 사내”는 신비로운 인물이며 “신의 공장”인 손을 가진 ‘마법사’로서 현실적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기형도가 현실적 시간을 초월해 구축한 동일성의 세계는 “인간과 자연만물이 서로 자유롭게 교통하며 연대하는 물활론적 공동체이자 경험 현실과 상관없이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동화적 공간”이다. 여기에서 “숲으로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신비한 성이나, “신성한 저녁”과 같은 공간과 시간은 현실 세계에서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대기적 시간과는 무관한 영원한 지속의 시간인 “무시간은 시간이 어떤 상관성도 띠지 않는 곳, 곧 추상적 실체들과 관계되고, 일반적 진리들이 표현되거나, 몽상 속에서처럼 어떤 현실적 상황과도 단절된 채 순수한 관념들이 예상되는 자리에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형도 시에서 영원의 무시간성은 물리적 시간 질서에 대한 반성적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기형도는 의식적으로 무시간의 영원성을 지향함으로써 시의 주제의식을 강화하려는 시간의식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실의 폭력성과 부조리성, 도시에 대한 환멸과 부정적 의식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신비, 영원, 동일성의 초월적 시간을 허구적으로 창조함으로써 참된 시간성과 단절된 근대의 직선적 시간에 대한 저항을 드러내는 것이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중에서)
인용 시에서 시적 주체는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들려오는 기타의 아름다운 소리에서 영원의 무시간을 체험한다. 끊어진 기타에서 소리가 나면서 텅 빈 방은 환상적 공간으로 변화하고 시간은 멈춰버리는 것이다. 환상적 공간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푸른 종이’의 본질은 ‘먼지’의 덧칠에도 불구하고 본질로서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여기에서 본질로서의 푸른 종이의 색깔은 아마도 동일성이 오롯이 확보된 영원의 시간과 공간일 것이다.
본질적 시간과의 만남을 화자는 “어둡고 텅 빈 희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현실이 될 수 없는 영원의 무시간이다. ‘아름다운 기타 소리’는 ‘농부의 성’(「숲으로 된 성벽」)이나, ‘떠돌이 사내’(「집시의 詩集」) 등과 같이 한 때 존재했으나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닌 절대적 지향점, 말하자면 동일성이 상상적으로 실현되는 영원의 초월적 시간에 대한 각기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부재하지만 강렬하게 시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으며, 부재하기 때문에 항상 시인의 상상력을 매혹시키면서 또 좌절시킨다. 그의 시를 압도하는 지배적인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서 발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형도의 시에 나타나는 초월적 시간의 무시간성은 시인의 시간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자기 동일성이 확보된 초월적 시간의 영원성은 시간에 대한 전통적 인식 체계를 거부할 때 가능하다. 직선적 시간을 거부하고 초월적 시간으로의 진입은 자아와의 참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에서 “자아와의 참된 만남이란 결국 현실적 시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개’(「안개」)에 의해 은폐된 현실의 폭력적이며 부정적인 구조를 의식한 기형도는 일상적 경험의 현실적 시간에서 이탈하여 희망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 찾기’는 역설적으로 시인이 처한 현재 상황의 비극성을 더욱 강화하고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 왜냐하면 환상의 세계는 부재와 결핍, 말하자면 현재 상태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현실의 부정의식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폭력적 현실의 시간을 떠나 동화적 상상력을 통한 동일성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희망할수록 현실의 비극성은 더욱 극대화되고, 이러한 양상은 기형도 시를 압도한다. 예컨대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반 토막 영혼”(「病」)의 “황폐한 내부”(「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에서 발생하는 자기 동일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짙으면 짙을수록, 또 그의 시에서 ‘안개’, ‘어둠’, ‘밤’, ‘검은 구름’, ‘비’, ‘겨울’, ‘눈’, ‘진눈깨비’ 등 일기 상태의 이미지로 은유된 현실의 폭력성과 허위성에 대한 인식은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로 시인을 이끄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시적 삶의 추악함과 허망함을 비정하게 드러내는 방식이며, 폭력적 현실의 구조에서 느끼는 실존적 고통과 공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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