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keley literature class #4
2012.05.12 03:53
북경의 밤은 없다
김 완 하
1
밤, 눈이 흩날린다. 그것은 송이 눈이 아닌, 아주 곱디고운 가루약. 눈은 소리 없이 부서져 내려 어둠 위로 고인다. 그렇다. 고인다.
저녁식당에 닿아 요리를 시켜놓고 이과두주 한 잔을 따른다. 화주(火酒)의 열기가 잔 밖으로 넘치며 식탁 위를 또 하나의 겹으로 감싸 안는다.
식당의 불빛이 새어나가 밝히는 거리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차들이 줄을 잇는다. 인도 위에는 간간이 사람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북경의 붐비던 자전거, 밤이 되면 그것들은 스스로 길을 따라서 돌아가고 더러는 어둠 속에 무겁게 묶여 있다. 굳게 입을 다문 침묵 속에서 나무들이 껴입은 몇 겹 밤의 딱딱한 어깨를 움츠린다.
홍성(紅星) 이과두주 한 잔이 가슴 속으로 불을 지른다. 찌르르 내면으로 타고 번지는 불길. 한밤의 깊디깊은 터널 속으로 드리운 심지에도 불이 옮겨 붙는다.
무엇이 이 한 밤 이국의 어둠을 떠받치고 있는가. 다시 독한 눈가루가 부서져 내린다. 그것은 소리 없이 고이며 어둠 속에 취한 뱀의 독한 눈을 뜬 채 웅크리고 있다.
내 앞에 고여 있다가 사라진, 잔속의 불을 내장(內藏)한 물. 그것은 어딘가 머나먼 곳으로 이 밤 전체를 밀고 끌고 가리라. 잔을 들자 그것이 놓여 있던 곳에 한 모금의 불빛이 고인다. 방금 닿은 빛의 여린 날개가 파르르 떤다.
잠시 눈길을 비껴 밖을 본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내리는 가루눈, 그것은 마약처럼 고운 가루, 땅에 닿아도 녹지 않는다.
밖으로 던졌던 눈길을 거두어 잔에 채운다. 어느 사이 빈 잔에 술이 고여 있다. 밤은 두꺼운 침묵의 옷깃을 여미고, 내 어깨에도 와 닿는다. 잠시 그 서늘함을 새긴다.
2
불빛, 아, 불빛, 불빛, 불빛들.
나무, 저 나무, 나무, 나무들.
거리는 오직 밤으로 가득하고 밤의 속살은 누군가의 거친 잠 속으로 흘러가 홑이불이 되어 펄럭일 것인가.
흰 약 가루 눈.
침묵의 간격.
시간의 거리, 빈 거리.
싸늘한 시간을 딛고 또 한 밤이 대지 위로 눕는다. 차가운 거리 위로 또 하나의 망사 같은 불빛이 덮인다.
잠시 밖으로 나가 가로수 둥치에 귀를 대본다. 그 싸늘한 허리를 쓸어본다. 나무들의 가슴속에 굳어있던 말인지, 불현듯 이국의 감회가 끓고 나무들이 내 어깨에 기댄다.
북경의 겨울, 바람은 차고 맵다.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들의 침묵. 사람들마다 모두 딱딱한 시간 하나씩을 안고 있다.
한 겨울의 북경, 북경 하면 침묵이 얼어붙는다. 길은 더 둔탁한 시간을 쌓고, 나무들 더 꼿꼿한 수직으로 선다. 수직, 하고 조용히 되 뇌이면 북경의 어둠은 더 짙은 숱 눈썹을 껌뻑거린다.
하, 입김으로 쏟아지는 내면의 폐허. 바람은 쉽사리 제 어깨를 드러내지 않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는 사이 심장이 있는 것이라면 어딘 가에라도 가서 꽂히리.
어쩌면 하늘의 별들은 모든 심장의 피들이 솟구친 것이리라. 그러나 하늘로 오르지 못한 혈기만이 구석으로 흩어져 침묵의 두께를 더하는 것이다.
3
두 개의 바퀴가 밀고 끌고 가는 겨울나무. 자전거처럼 그것들 잠시라도 걷기를 쉰다면 금방 쓰러지리라. 달리면서야 바로 서는 것, 더 꼿꼿이 제 중심을 향해서 곧추 세우는 것. 겨울나무들의 등 뒤로 밤바람 밀려와 닿는다.
나무들 두 개의 바퀴가 땅속으로 달리면서 비로소 어둠 속에 선다. 빈 길 거리에서도 어둠에 기대어 바로 세운다. 그 무엇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온 몸을
버팅긴다.
북경의 어둠 속에 성냥 한 개비를 긋는다. 탁, 탁, 탁, 둔탁한 소리를 튕기다 파르르 떨고 살아나는 불, 숨 가쁜 어둠을 밀고 푸른 꽃잎을 퍼덕인다. 주위 나무들이 굳은 어깨를 들어 불길 쪽으로 다가선다. 서서히 제 목을 조이다가 끝내 벼랑으로 목을 꺾는다. 뚝, 떨어져 내리는 불똥, 사위의 어둠이 이리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그의 어깨는 차갑고 두껍다. 북경의 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려하지 않는다. 그의 심장만 따뜻한 열기로 가득하다. 우리만 모를 뿐, 골목마다 작은 불을 걸어두고 밤이 와도 절대 침묵을 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굳게 그 어깨를 움츠린다. 그의 어깨 쪽으로 가루눈은 낮게 낮게 스친다. 이따금씩 가파른 나뭇가지에도 가루는 쌓인다. 그러다 부스스 땅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어둠은 중심으로 더 가쁘게 몰리고 그 중심을 향해 가로수들 더 꼿꼿이 허리를 세운다. 북경의 밤, 밤이면 보이지 않던 골목들이 여기 저기 열리고 그 길로 소리 없는 발자국을 찍으며 형체 없는 발길들 줄지어 간다. 아니, 걸어간 것이 아니라, 다음날 발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밤은 양파의 속살처럼 어둠을 쟁이고 길가의 나무들은 모두 무거운 침묵을 입고 있다. 한낮의 나무들이 벗어놓은 그림자가 털고 일어서 겹겹이 한 벌의 옷을 깁는다. 그것을 나무들이 껴입는다.
4
그래, 그렇다. 세상은 내 생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낯선 이역에서의 밤을 하루 묵고 다시 창밖으로 길거리를 내다보리라.
밤이 하나 무거운 어둠을 지고 섰다가 제 가지에 실린 잔 가루눈을 빌미로 휘청댄다. 나의 삶도 저러하리라. 한순간의 파동으로 하늘에 별 하나가 함께 흔들린다.
한결 단단해진 밤 속으로 바람은 가파른 톱니를 들이댄다. 그 어둠 속으로 간간이 어깨를 웅크리고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파고든다.
5
저 외곽의 마른 건물 밑으로 떨군 발자국은 누구의 자취인가. 그 발자국 일정한 보폭으로 찍고 간 흔적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렇다. 북경의 밤은 없다. 다만 한 개씩의 어둠 갑옷을 지어 입었다 벗고 다시 벗는 반복일 뿐, 북경의 밤은 양파 속처럼 차올라 독한 시간을 잉태하고 내일을 기다리리라.
(<시와정신>, 200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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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간 곳에 마을이 있었다
김완하
어린 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언제나 맑게 고여 있는 작은 우물 하나가 놓여 있다. 채송화, 봉숭아 등의 꽃을 피우던 황토 꽃밭 옆의 작은 우물, 그것은 솔방울만한 크기의 별들이 솟아오르던 별들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에 갔다 오면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은 들에 일을 하러 가셔서 오지 않으셨고, 누나와 형도 안성에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아직 오지 않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대문 밑으로 기어 들어가 책가방을 던져 놓고 이웃집 친구들을 찾아가 놀려고 해도 몇 안 되는 친구들도 어디를 갔는지 집에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고 다시 친구들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지만 놀아줄 상대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서 우리 집과 인접해 있는 비포장도로의 먼지가 자욱이 날리며 안성읍 쪽으로 버스 한 대가 달려가고 있었다. 한길로 나와서면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길을 따라서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자주색 책가방을 든 채 양 갈래머리를 닿아 늘어뜨린 누나들이 그 길을 따라서 삼삼오오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을에서 안성읍까지 4킬로미터는 족히 되었는데, 누나들은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걸어서 학교를 오고갔다. 털털거리며 차가 지날 때마다 뿌옇게 날리는 먼지 속으로 누나들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드러나곤 하였다
마을 전체의 고요가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들로 하여 점점 생동감으로 살아나면서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때서야 어머니는 집 뒤의 콩밭에서 하루 종일 밭은 매시다가 호미와 고무신을 들고 맨발로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어깨에 삽을 메고 논에서 돌아오셨다. 비로소 집안은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활기를 되찾곤 하였다. 그때 집집마다 등불이 하나 둘씩 깨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우물가로 따라가서 어머니께 물을 길어드렸다. 작은 우물 한 가운데로 두레박을 드리우면 우물 속 어둠이 일렁거리며 두레박에 물이 가득 차고 그것을 들어 올려 세숫대야에 부었다. 어머니는 하루의 노동으로 배인 땀을 헹구며 얼굴을 씻으신 후에 고무신을 닦으셨다. 어머니가 황토 흙이 묻은 고무신을 짚으로 문지르면 어머니의 흰 고무신은 뽀얗게 빛을 띠며 살아났다. 어둠이 고일수록 어머니의 흰 고무신은 희게 빛을 발하며 빨랫돌 위에 앉아 한밤의 심장 속에 오롯하게 떠있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솔방울 만한 별들이 두레박에 길어 올려져 왔다. 그때 우물 옆의 아주 작은 황토 꽃밭에서는 채송화와 봉숭아가 어둠 속에서 꽃잎을 사리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 가족들은 모두 밥상에 둘러앉아 하나의 식구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사기그릇에 달그락거리며 수저가 닿으면서 내는 소리들이 선명해지면서 희미한 호롱불빛으로 밝히는 밤의 시간 속에서도 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내 상상의 세계는 더 넓게 펼쳐져 우주 끝까지 확장되어 가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는 내 유년의 우물가에 항상 서 계신다. 우물을 중심으로 나에게는 작은 꽃밭, 채송화, 봉숭아, 빨랫돌, 흰 고무신, 별 등의 이미지들이 풍요롭게 연대하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도 즉시 이상의 모든 것들을 연상해 내곤 한다. 내 유년의 한가운데는 찰랑거리며 우물이 고여 있고 그 우물에서 길어 올려진 물들이 서서히 주변으로 흘러가면서 내 잠든 유년의 사건들을 하나씩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우물은 아침저녁으로 달려가 얼굴도 비추어 보고, 한 여름 땡볕 속에서 퍼 올려 숨을 몰아쉬며 들이키면 가슴을 서늘하게 식혀주던 물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늘 어머니는 때묻은 삶을 헹구시고 닦으시며 가파른 삶을 꾸려 가셨다.
나는 요즈음도 내 상상력과 감수성의 샘이 고갈되면 고향집에 가 제일 먼저 뒤란으로 간다. 그리고 우물이 있던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어머님의 빨랫돌과 흰 고무신을 되새겨 보곤 한다. 어린 날 저녁 뒷산 솔바람 소리와 우물 안에서 솟아나던 솔방울별들, 그리고 살포시 꽃잎 접던 채송화며 봉숭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메마른 가슴 밑으로 아직 식지 않은 꿈의 우물이 잘박대며 차오른다. 어느새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다가와 나의 어깨에 닿는 것을 느낀다. 이렇듯 내 기억 속의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어머니의 고무신은 더 희게 빛을 토해내고 있다.
어린 날 정월대보름이면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서 뒷산으로 올라가 달을 맞았다. 한낮에 묶어놓은 짚단을 들고 그날 저녁이면 큰집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달뜨기 전 뒷동산으로 올라가 불을 피우며 기다리면 그날따라 달도 더디게 떠올랐다. 이윽고, 보름달이 건너편 산 위로 이마를 빼면 우리는 서둘러 짚에 불을 붙여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소원을 빌면서 절을 하였다. 거듭 거듭 한 해의 기원을 되새기며 달을 향해 소원을 되뇌었다.
할머니는 우리들 친손자와 손녀 열둘을 좌우에 둘러 세우시고 앞서서 기원하는 자세와 성의를 보이셨다. 금세 사방은 조용해지고 짚 타는 소리와 우리들 입술 달싹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날 밤 뒷동산은 온통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발길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때 껑충 뒤어 오른 달이 건너편 들마을까지 훤히 비추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요에 지도를 그리며 모두들 어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해마다 정월 보름날 마을에는 당제사가 있었다. 그날 하루 마을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고 허투루 웃지도 않았다. 어느 해인가 제주인 뒷집 종수 아버지는 한달 전부터 나들이도 줄이고 그 집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삽도 빌리러 가지 않았다. 그림을 잘 그리고는 종수는 뒷산 당집에 말 탄 사람을 그려 걸로 둥그런 달이 떠오르자 당집엔 등불이 훤히 내걸렸다. 일찍 저녁을 끝낸 우리들은 숟가락 놓기가 바쁘게 달려 나와 종수네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마을 어른들께서는 먼저 윗동네와 아랫동네 공동 우물에서 한 해의 풍요를 비는 제를 올렸다. 떡시루가 놓이고 제상 가득 과일과 음식이 차려지면 우리들 시선이야 모두 그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해 따라 가뭄 끝에 우물 바닥이 보이기도 하였다.
당집으로 가면 마을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모두 가슴을 졸였다. 종수 아버지는 마을 한 집씩 호명하며 한 해를 기원하고 소지를 사르는데, 불탄 종이 재가 높이 올라가는 집은 그해의 운수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든다고 하여 모두들 자기 집 차례가 될 때면 좌중의 떠드는 소리로 죽이려 애를 썼다.
그날 밤에 우리는 달빛 퍼붓는 마당에 모여 아주머니들이 주먹처럼 뭉쳐 주는 떡을 먹었다. 사탕이며 사과 몇 조각을 얻으려 줄을 서서도 우리는 하늘의 달을 보고 빌고 또 빌었다. 올해는 우리 집에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해주고 나도 학교에서 회장에 당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기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4학년 때부터 학급 자치회 화장이 되어 6학년 때에는 전교 회장을 맡기도 했다.
농사철로 바쁜 때야 부지깽이도 뛴다고 하지만 바쁜 중에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는 휴식시간은 있었다. 그때는 두레와 품앗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농사일과 마을 공동체의 푸근하고 넉넉한 삶이 살아 있었다. 농사일로 바쁘다가도 모내기가 다 끝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대동 천렵을 벌였다.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 빠짐없이 모여 뒷산에는 커다란 차일을 치고 덩그라니 가마솥 두 개가 걸렸다. 마을 아낙들은 하얀 쌀밥을 지으며 올해의 농사는 풍년이 들 거라며 즐거워했다. 한쪽 가마솥엔 고깃국이 끓고 솥뚜껑 사이로는 억센 김이 치솟았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달려와 그간의 안부를 나누며, 한솥밥을 먹고 한 솥의 국을 마시며 얼큰하게 취하면 상쇠가 쇠를 치고, 장구, 북, 징이 어울려 산은 온통 춤판으로 들썩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얼크러지고 풍악은 골짜기 차고 나가 쩌렁쩌렁하게 차령산맥을 울렸다. 흥이 난 마을 남정네들은 한천으로 몰려가 씨름으로 한판 힘을 겨루고 흠뻑 젖은 몸으로 시냇물에 뛰어들었다. 냇물에 검게 그을린 팔과 다리를 적시면 아낙들은 멀리서 제 사내를 바라보다 가슴이 더워져 흐뭇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된통스럽게 놀고 난 밤은 뒷동산이 먼저 취해 잠으로 떨어졌다. 그날은 마을이 온통 코고는 소리로 들썩였다. 그때 동구 밖의 느티나무 위로 새어 나온 달이 환히 웃고 있었다. 들판에서는 밤새워 개구리들이 육자배기를 뽑았다. 그 밤에 들판의 모들은 은밀하게 뿌리를 세워 땅 냄새를 맡고 있었다.
겨울에 우리 집 방안 윗목에 마시다 둔 냉수 사발은 자고 일어나면 얼어 터져 있었다. 새벽녘에 구들장은 사람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두꺼운 요와 쌀가마처럼 무거운 이불 속에서도 울타리를 쓸고 가는 바람 소리는 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자석에 쇠못 달라붙듯이 손가락이 찍찍 감겼다. 초가집 추녀 밑으로는 고드름이 발을 치고, 갈증이 날 때 꺾어 먹던 투명한 고드름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은 눈이 부셨다. 하루 종일 방안에는 화롯불이 몸을 녹여 주었다. 나는 화로 속에 묻어둔 알
밤도 없이 방을 들며 나며 불 속을 뒤적이곤 하였다.
어느 날 안성 장날 밤에 사나운 바람 몰려와 울타리 수숫대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버스로 새로 산 내 흰 고무신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셨다. 나는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어머니의 따스한 온기가 배어 있는 고무신만 내 품에 안겨서 홀로 호롱불에 희게 빛이 나고 있었다 한다. 그날 밤 나는 새 고무신을 신고 벌판을 치달려 가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다음날 아침 가로수들은 추위에 무처럼 갈라 터지고, 밤새 퍼부은 눈 짐을 감당 못해 뒷산 소나무 가지는 서너 개나 부러져 있었다. 이따금 뒤란의 울타리 팽나무에서는 눈덩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쿵, 쿵, 쿵, 쿵 가슴을 치고는 하였다. 간밤 눈발 속을 뚫고 들길을 질러가던 이웃 마을 사람들, 새벽이면 구부러진 둑길을 따라서 그들의 반쯤 지워진 발자국만이 건넛마을로 가고 있었다. 아침 들녘 먼 마을에는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어디선가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 우리 집 울타리를 덮었다. 그 참새들의 반짝 반짝거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깨곤 하였다.
내 어린 날의 기억 속에는 또 늘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솟아오르곤 한다. 우리 마을 마정리 언덕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깊이 내린 뿌리로는 땅 속으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고, 머리로는 둥그런 하늘을 인 채 마을 전체를 그 가슴 안에 품고 있었다. 봄이면 가지마다 초록 이파리를 새 부리처럼 내밀어 온 하늘로 휘파람을 불어 올려 오고 가는 새들이 날아와 앉았다. 여름이면 들판의 바람이 놀러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쉬었다 가곤 하였다. 마을 어른들이 나무 아래에서 장기나 바둑을 둘 때면 무성한 줄기로 서늘한 바람을 일구어 주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샛밥을 먹을 때면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함께 불러 들여 들밥을 나누고, 식사 후에는 한참씩 그 나무 밑에 누워 쉬기도 하였다.
그 나무는 때로 맨발로 기어오르는 아이들 하나하나 무동을 태워 하늘 끝에 닿기도 했다. 우리들은 나무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푸른 하늘의 향기에 젖어 있곤 하였다. 그때 나뭇가지 사이에서 신비롭게 하늘의 노래 불러 주는 매미를 잡기도 하고, 그러다가 더러는 나무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저무는 가을마당에 나와 서면 하늘을 떠받친 울창한 가지 사이로 저녁노을이 온몸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나무는 그 큰 둥치로 무너지는 가을을 통째로 받아내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사흘이나 밤새 눈이 퍼부은 뒤, 몇 십 가마니 눈짐을 지고서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도 그 나무는 끄떡없었다. 살며시 다가가 나무 둥치에 설레는 가슴으로 귀를 대면 차갑게 볼을 쓸고 가는 칼바람 속에서도 내 영혼을 흔드는 맑은 숨소리가 흐르곤 하였다.
그 나무 둘레는 내 양손을 다 펴서도 다섯 이름이나 두르고서야 둥치를 잴 수 있었다. 그 육중한 나무 둥치를 안고서 그 속에서 무엇이 들어 있을까, 밤이면 가지 끝마다 별들이 주렁주렁 열릴 때 나무와 별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끌어안아야 할 일들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하였다.
요즈음, 저녁이면 지친 걸음으로 한 꾸러미의 붕어빵을 껴안고 어둔 골목길을 들어설 때, 내 무겁게 기운 어깨 기댈 곳 없어 자꾸만 헛디딜 때, 컴컴한 골목 속에서 갑자기 그 느티나무가 불쑥 솟아오른다. 다가와 나의 처진 어깨를 받쳐 주고 잔잔한 이파 리 부채로 내 가슴을 식혀 주곤 한다. 어느새 그 큰 나무 둘레에는 총총하게 별들이 열리고 어둔 밤 내 발길 이끌어 나를 포근하게 품어주곤 한다.
나는 시를 쓸 때마다 내 유년의 체험 속으로 희귀하여 시상을 길어 올리곤 한다. 나는 내가 쓰는 시가 우리 마을의 느티나무를 닮았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세상 만물이 다 그 품안에 둥지를 틀 수 있는 그 느티나무처럼,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다가가 조금이라도 활력을 주고 삶의 이치와 지혜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시, 그러한 따뜻한 시를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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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외 2편
김완하
어머니는 집 가까운 콩밭에 김을 매시고 저녁이 되어서야 맨발로 호미와 고무신을 들고 돌아오셨지요. 우물가 빨랫돌 위에 고무신을 닦아 놓으시고, 하루의 피로를 씻으시던 저녁, 땅거미가 내릴수록 더욱 희게 빛을 발하던 어머니의 고무신. 어머니의 땀 밴 하루가 곱게 저물면 이제 막, 우물 안에는 솔방울만한 별들이 쏟아지고 갓 피어난 복숭아도 살포시 꽃잎을 사리는 것이었지요
지금 우물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싱싱한 꿈 길어 올릴 두레박줄 내릴 곳 없는데, 이제는 그곳에 서보아도 뒷산 솔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나의 저 어린 시절 어머니의 흰 고무신이 빛나던 저녁, 우리 집 우물에서 솟아나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대동천렵
마을에 모내기 다 끝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온 동네 사람들은 대동 천렵을 별였다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 빠짐없이 모여
뒷산엔 커다란 차일을 치고
덩그라니 가마솥 두 개가 걸렸다
마을 아낙들은 하얀 쌀밥을 지으며
올해의 농사는 풍년이 들 거라고
한 쪽 가마솥엔 고깃국이 끓고,
솥뚜껑 사이로는 억센 김이 치솟았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달려와
그간의 안부를 나누며, 한솥밥을 먹고
한솥의 국을 마시며 얼큰하게 취하면
상쇠가 쇠를 치고 장구, 북, 징이 어울려
산은 온통 춤판으로 들썩였다
온 마을 사람들 얼크러지고 풍익은
골짜기 차고 나가 산맥을 올렸다
흥이 난 마을 남정네들은
한천으로 몰려가 씨름으로 한판 힘을 겨루고
흠뻑 젖은 몸 시내에 뛰어 들었다
냇물에 검게 그을린 팔과 다리 적시면
아낙들은 멀리서 제 사내 바라보며
가슴이 더워져 흐뭇해 했다
그렇게 하루 된통스럽게 놀고 난 밤은
뒷동산이 먼저 취해 잠으로 떨어졌고
초저녁부터 마을은 온통 코고는 소리로 들썩였다
동구 밖 느티나무 위로 새어 나온 달이 웃으면
그때 들판에선 밤새워 개구리들이 달빛을 퍼마시며
한밤내 취해 육자배기를 뽑았고,
들판의 모들은 은밀하게 뿌리 세워 땅내를 맡았다
우리 마을 나무
1
우리 마을 언덕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뿌리깊은 땅속 흐르는 강물에 발 적시고, 머리로는 둥그런 하늘을 인 채 마을 전체를 제 가슴에 품고 있었지. 봄이면 가지마다 초록의 새 부리 내밀어 온 하늘로 휘파람 불어 올리면 오가는 새들이 날아와 앉고, 여름이면 들판의 바람이 놀러와 쉬었다 갔지. 할아버지들 나무 아래 장기 둘 때면 무성한 줄기를 부챗살처럼 펴서, 잔 바람으로 땀 식혀 주었지.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 밥 먹을 때면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도 불러들여 함께 들밥을 나누고, 식사후엔 한잠씩 그 나무 밑에 눕기도 했지.
우리들은 나무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푸른 하늘 향기에 젖곤 했지. 때로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하늘의 노래를 불러 주는 매미를 잡고, 그러다 더러는 나무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지. 저무는 가을 마당에 나와 서면 하늘을 떠받친 울창한 가지들, 저녁 노을에 온몸 발갛게 불태어던 나무. 그 큰 둥치로 무너지는 가을을 통째로 받아 내고 있었지. 어느 해 겨울엔 사흘이나 밤새 눈 내린 뒤, 몇십 가마니 눈짐에 큰 가지 하나 부러져도 끄떡없던 나무, 다가가 설레임으로 귀를 대면 귀를 저미는 찬바람 속에서도 영혼을 울리는 맑은 숨소리가 흐르곤 했지.
2
여름날에 아이들 상수리나무 밑둥을 파서 집게벌레 잡을 때면 발가락 간지러움에 나무줄기 가볍게 흔들다가 상수리나무는 제 몸에서 검은 집게벌레 몇 마리 내놓았지. 때로는 맨발로 기어올라 오는 아이들 하나하나 무등을 태워 하늘 끝에 닿게도 했지. 학교 갈때는 그 나무 밑에 들러 잠시 쉬고, 하교 길엔 달려와 나무 밑에 공책 펴놓고 밀린 산수숙제 했지. 그 나무 둘레는 내 양손을 다 펴서도 다섯 아름이나 두르고서야 둥치를 잴 수 있었지. 그 육장한 나무 둥치를 안고 있으면 그 안으로는 무엇이 오르내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밤이면 가지 끝마다 별들이 주렁주렁 열릴 때 별들이 가지 위에 내려앉아 나무와 무슨 얘기를 나눌까 생각하다가 그때 나는 문득,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끌어안아야 할 일들을 어렴풋이 떠올리기도 했었지.
3
그때 그 나무 위에 올라가 하늘 구름의 향기에 젖었던 아이들은 자라나 삼십대의 가장이 되었지. 어느 사이에 그 느티나무가 주변에 거느린 작은 나무들처럼 우리도 새끼를 품었지. 나는 오늘도 그때 느티나무 아름을 재던 자세로 이 세상 살아가려 하는데, 세상은 나의 팔 사이로 자꾸만 바람처럼 빠져 나갔지. 저녁이면 지친 걸음으로 한 꾸러미 붕어빵을 껴안고 젖은 골목으로 들어설 때, 내 무겁게 기운 어깨 기댈 곳 없어 자꾸만 헛딛는 걸음. 둘러보아도 기댈 언덕 하나 없는데 컴컴한 골목 속에서 갑자기 그 나무 불쏙 솟아났지. 그 나무 둥치 다가와 내 어깨를 받쳐 주고 잔잔한 이파리 부채로 가슴 식혀 주었지. 어느새 나무둘레엔 별들이 매달리고 밤길에 내 발 이끌어 그 나무 나를 포근하게 품어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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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대보름날 우리는 할머니 따라
뒷산에 올라가 달을 맞았다
한낮에 만들어 놓은 짚단을 들고
그날 저녁이면 큰집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달뜨기 전 뒷동산으로 올라가
불을 피우며 기다리면
그날따라 달도 더디 떠올랐다
이윽고, 보름달이 건너편 산 위로 이마를 빼면
우리는 서둘러 짚단에 불을 당겨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절하였다
거듭거듭 한 해의 기원을 되새기며
할머니는 우리들 친손자 외손자 열둘
좌우에 둘러 세우시고 앞서서
기원하는 자세와 성의를 보이셨다
금세 사방은 조용해지고 짚 타는 소리와
우리들 입술 달싹이는 소리만 들렸다
이웃집 이뿐이 어머니는 병환중이라
일곱 살 이뿐이는 큰소리 내어
우리 어머니 병 낫게 해주십시오
우리 어머니 병환 하루빨리 낫게 하시오
크게 외치는 소리에 모두들 웃다가 잠시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그날 밤 뒷동산은 온통
사람들 오르내리는 발길로 북적대고
껑충 뛰어오른 달 건너편 들말까지 훤히 비출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요에 지도를 그리며
모두들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지
마을 당제사
음력 보름날 마을엔 당제사가 있었지
그날 하루 마을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고, 허투루 웃지도 많았다
제주인 뒷집 종수 아버지는 한 달 전부터
나들이도 줄이고 그 집으로는
마을 사람들 삽 빌리러 가지 않았다
그림 잘 그리는 종수는
뒷산 당집에 말 탄 사름을 그려 걸고
둥그런 달이 떠오르면 당집엔 등불이 내걸렸다
일찍 저녁 먹은 우리는 숟가락 놓기 바쁘게
달려 나와 종수네 마당으로 모여들었지
윗동네 아랫동네 공동 우물에서
먼저 한 해의 풍요를 비는 제를 올렸다
떡시루가 놓이고 과일과 음식이 차려지면
우리들 시선이야 모두 그리 가는 것이었지만
그해따라 가뭄 끝에 우물 바닥이 보였다
당집으로 가면 마을 사람들 삥 둘러서 가슴 졸였다
종수 아버지 온 마을 집집마다 호명하며
한 해 기원을 하고 소지 사르는데,
불탄 종이 재가 높이 올라가는 집은
그 해 운수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든다고
모두들 자기 집이 불릴 때는
좌중이 떠드는 소리도 죽이려 애썼지
그날 밤 우리는 달빛 퍼붓는 마당에 모여
아주머니들이 주먹처럼 뭉쳐주는 떡을 먹었다
사탕이며 사과 몇 조각을 얻으려 줄을 서서
하늘의 달 보고 빌고 또 빌었다
올해는 우리 집에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도 학교에서 반장에 당선되었으면 <끝>
김 완 하
1
밤, 눈이 흩날린다. 그것은 송이 눈이 아닌, 아주 곱디고운 가루약. 눈은 소리 없이 부서져 내려 어둠 위로 고인다. 그렇다. 고인다.
저녁식당에 닿아 요리를 시켜놓고 이과두주 한 잔을 따른다. 화주(火酒)의 열기가 잔 밖으로 넘치며 식탁 위를 또 하나의 겹으로 감싸 안는다.
식당의 불빛이 새어나가 밝히는 거리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차들이 줄을 잇는다. 인도 위에는 간간이 사람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북경의 붐비던 자전거, 밤이 되면 그것들은 스스로 길을 따라서 돌아가고 더러는 어둠 속에 무겁게 묶여 있다. 굳게 입을 다문 침묵 속에서 나무들이 껴입은 몇 겹 밤의 딱딱한 어깨를 움츠린다.
홍성(紅星) 이과두주 한 잔이 가슴 속으로 불을 지른다. 찌르르 내면으로 타고 번지는 불길. 한밤의 깊디깊은 터널 속으로 드리운 심지에도 불이 옮겨 붙는다.
무엇이 이 한 밤 이국의 어둠을 떠받치고 있는가. 다시 독한 눈가루가 부서져 내린다. 그것은 소리 없이 고이며 어둠 속에 취한 뱀의 독한 눈을 뜬 채 웅크리고 있다.
내 앞에 고여 있다가 사라진, 잔속의 불을 내장(內藏)한 물. 그것은 어딘가 머나먼 곳으로 이 밤 전체를 밀고 끌고 가리라. 잔을 들자 그것이 놓여 있던 곳에 한 모금의 불빛이 고인다. 방금 닿은 빛의 여린 날개가 파르르 떤다.
잠시 눈길을 비껴 밖을 본다.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내리는 가루눈, 그것은 마약처럼 고운 가루, 땅에 닿아도 녹지 않는다.
밖으로 던졌던 눈길을 거두어 잔에 채운다. 어느 사이 빈 잔에 술이 고여 있다. 밤은 두꺼운 침묵의 옷깃을 여미고, 내 어깨에도 와 닿는다. 잠시 그 서늘함을 새긴다.
2
불빛, 아, 불빛, 불빛, 불빛들.
나무, 저 나무, 나무, 나무들.
거리는 오직 밤으로 가득하고 밤의 속살은 누군가의 거친 잠 속으로 흘러가 홑이불이 되어 펄럭일 것인가.
흰 약 가루 눈.
침묵의 간격.
시간의 거리, 빈 거리.
싸늘한 시간을 딛고 또 한 밤이 대지 위로 눕는다. 차가운 거리 위로 또 하나의 망사 같은 불빛이 덮인다.
잠시 밖으로 나가 가로수 둥치에 귀를 대본다. 그 싸늘한 허리를 쓸어본다. 나무들의 가슴속에 굳어있던 말인지, 불현듯 이국의 감회가 끓고 나무들이 내 어깨에 기댄다.
북경의 겨울, 바람은 차고 맵다.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들의 침묵. 사람들마다 모두 딱딱한 시간 하나씩을 안고 있다.
한 겨울의 북경, 북경 하면 침묵이 얼어붙는다. 길은 더 둔탁한 시간을 쌓고, 나무들 더 꼿꼿한 수직으로 선다. 수직, 하고 조용히 되 뇌이면 북경의 어둠은 더 짙은 숱 눈썹을 껌뻑거린다.
하, 입김으로 쏟아지는 내면의 폐허. 바람은 쉽사리 제 어깨를 드러내지 않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는 사이 심장이 있는 것이라면 어딘 가에라도 가서 꽂히리.
어쩌면 하늘의 별들은 모든 심장의 피들이 솟구친 것이리라. 그러나 하늘로 오르지 못한 혈기만이 구석으로 흩어져 침묵의 두께를 더하는 것이다.
3
두 개의 바퀴가 밀고 끌고 가는 겨울나무. 자전거처럼 그것들 잠시라도 걷기를 쉰다면 금방 쓰러지리라. 달리면서야 바로 서는 것, 더 꼿꼿이 제 중심을 향해서 곧추 세우는 것. 겨울나무들의 등 뒤로 밤바람 밀려와 닿는다.
나무들 두 개의 바퀴가 땅속으로 달리면서 비로소 어둠 속에 선다. 빈 길 거리에서도 어둠에 기대어 바로 세운다. 그 무엇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온 몸을
버팅긴다.
북경의 어둠 속에 성냥 한 개비를 긋는다. 탁, 탁, 탁, 둔탁한 소리를 튕기다 파르르 떨고 살아나는 불, 숨 가쁜 어둠을 밀고 푸른 꽃잎을 퍼덕인다. 주위 나무들이 굳은 어깨를 들어 불길 쪽으로 다가선다. 서서히 제 목을 조이다가 끝내 벼랑으로 목을 꺾는다. 뚝, 떨어져 내리는 불똥, 사위의 어둠이 이리처럼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그의 어깨는 차갑고 두껍다. 북경의 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려하지 않는다. 그의 심장만 따뜻한 열기로 가득하다. 우리만 모를 뿐, 골목마다 작은 불을 걸어두고 밤이 와도 절대 침묵을 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굳게 그 어깨를 움츠린다. 그의 어깨 쪽으로 가루눈은 낮게 낮게 스친다. 이따금씩 가파른 나뭇가지에도 가루는 쌓인다. 그러다 부스스 땅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어둠은 중심으로 더 가쁘게 몰리고 그 중심을 향해 가로수들 더 꼿꼿이 허리를 세운다. 북경의 밤, 밤이면 보이지 않던 골목들이 여기 저기 열리고 그 길로 소리 없는 발자국을 찍으며 형체 없는 발길들 줄지어 간다. 아니, 걸어간 것이 아니라, 다음날 발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밤은 양파의 속살처럼 어둠을 쟁이고 길가의 나무들은 모두 무거운 침묵을 입고 있다. 한낮의 나무들이 벗어놓은 그림자가 털고 일어서 겹겹이 한 벌의 옷을 깁는다. 그것을 나무들이 껴입는다.
4
그래, 그렇다. 세상은 내 생각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 낯선 이역에서의 밤을 하루 묵고 다시 창밖으로 길거리를 내다보리라.
밤이 하나 무거운 어둠을 지고 섰다가 제 가지에 실린 잔 가루눈을 빌미로 휘청댄다. 나의 삶도 저러하리라. 한순간의 파동으로 하늘에 별 하나가 함께 흔들린다.
한결 단단해진 밤 속으로 바람은 가파른 톱니를 들이댄다. 그 어둠 속으로 간간이 어깨를 웅크리고 사람들은 어둠 속으로 파고든다.
5
저 외곽의 마른 건물 밑으로 떨군 발자국은 누구의 자취인가. 그 발자국 일정한 보폭으로 찍고 간 흔적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일까.
그렇다. 북경의 밤은 없다. 다만 한 개씩의 어둠 갑옷을 지어 입었다 벗고 다시 벗는 반복일 뿐, 북경의 밤은 양파 속처럼 차올라 독한 시간을 잉태하고 내일을 기다리리라.
(<시와정신>, 200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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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간 곳에 마을이 있었다
김완하
어린 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곳에는 언제나 맑게 고여 있는 작은 우물 하나가 놓여 있다. 채송화, 봉숭아 등의 꽃을 피우던 황토 꽃밭 옆의 작은 우물, 그것은 솔방울만한 크기의 별들이 솟아오르던 별들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학교에 갔다 오면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부모님은 들에 일을 하러 가셔서 오지 않으셨고, 누나와 형도 안성에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서 아직 오지 않아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대문 밑으로 기어 들어가 책가방을 던져 놓고 이웃집 친구들을 찾아가 놀려고 해도 몇 안 되는 친구들도 어디를 갔는지 집에 없었다. 나는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하고 다시 친구들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지만 놀아줄 상대가 없었다.
저녁이 되면서 우리 집과 인접해 있는 비포장도로의 먼지가 자욱이 날리며 안성읍 쪽으로 버스 한 대가 달려가고 있었다. 한길로 나와서면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길을 따라서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자주색 책가방을 든 채 양 갈래머리를 닿아 늘어뜨린 누나들이 그 길을 따라서 삼삼오오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을에서 안성읍까지 4킬로미터는 족히 되었는데, 누나들은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걸어서 학교를 오고갔다. 털털거리며 차가 지날 때마다 뿌옇게 날리는 먼지 속으로 누나들의 모습이 사라졌다가 한참이나 지나서야 드러나곤 하였다
마을 전체의 고요가 집으로 돌아오는 가족들로 하여 점점 생동감으로 살아나면서 서서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때서야 어머니는 집 뒤의 콩밭에서 하루 종일 밭은 매시다가 호미와 고무신을 들고 맨발로 집으로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어깨에 삽을 메고 논에서 돌아오셨다. 비로소 집안은 모든 가족들이 함께 모여 활기를 되찾곤 하였다. 그때 집집마다 등불이 하나 둘씩 깨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우물가로 따라가서 어머니께 물을 길어드렸다. 작은 우물 한 가운데로 두레박을 드리우면 우물 속 어둠이 일렁거리며 두레박에 물이 가득 차고 그것을 들어 올려 세숫대야에 부었다. 어머니는 하루의 노동으로 배인 땀을 헹구며 얼굴을 씻으신 후에 고무신을 닦으셨다. 어머니가 황토 흙이 묻은 고무신을 짚으로 문지르면 어머니의 흰 고무신은 뽀얗게 빛을 띠며 살아났다. 어둠이 고일수록 어머니의 흰 고무신은 희게 빛을 발하며 빨랫돌 위에 앉아 한밤의 심장 속에 오롯하게 떠있었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솔방울 만한 별들이 두레박에 길어 올려져 왔다. 그때 우물 옆의 아주 작은 황토 꽃밭에서는 채송화와 봉숭아가 어둠 속에서 꽃잎을 사리는 소리가 들리곤 하였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 가족들은 모두 밥상에 둘러앉아 하나의 식구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사기그릇에 달그락거리며 수저가 닿으면서 내는 소리들이 선명해지면서 희미한 호롱불빛으로 밝히는 밤의 시간 속에서도 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런 밤이면 내 상상의 세계는 더 넓게 펼쳐져 우주 끝까지 확장되어 가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니는 내 유년의 우물가에 항상 서 계신다. 우물을 중심으로 나에게는 작은 꽃밭, 채송화, 봉숭아, 빨랫돌, 흰 고무신, 별 등의 이미지들이 풍요롭게 연대하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도 즉시 이상의 모든 것들을 연상해 내곤 한다. 내 유년의 한가운데는 찰랑거리며 우물이 고여 있고 그 우물에서 길어 올려진 물들이 서서히 주변으로 흘러가면서 내 잠든 유년의 사건들을 하나씩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 우물은 아침저녁으로 달려가 얼굴도 비추어 보고, 한 여름 땡볕 속에서 퍼 올려 숨을 몰아쉬며 들이키면 가슴을 서늘하게 식혀주던 물을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늘 어머니는 때묻은 삶을 헹구시고 닦으시며 가파른 삶을 꾸려 가셨다.
나는 요즈음도 내 상상력과 감수성의 샘이 고갈되면 고향집에 가 제일 먼저 뒤란으로 간다. 그리고 우물이 있던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어머님의 빨랫돌과 흰 고무신을 되새겨 보곤 한다. 어린 날 저녁 뒷산 솔바람 소리와 우물 안에서 솟아나던 솔방울별들, 그리고 살포시 꽃잎 접던 채송화며 봉숭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그러면 내 메마른 가슴 밑으로 아직 식지 않은 꿈의 우물이 잘박대며 차오른다. 어느새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다가와 나의 어깨에 닿는 것을 느낀다. 이렇듯 내 기억 속의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어머니의 고무신은 더 희게 빛을 토해내고 있다.
어린 날 정월대보름이면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서 뒷산으로 올라가 달을 맞았다. 한낮에 묶어놓은 짚단을 들고 그날 저녁이면 큰집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달뜨기 전 뒷동산으로 올라가 불을 피우며 기다리면 그날따라 달도 더디게 떠올랐다. 이윽고, 보름달이 건너편 산 위로 이마를 빼면 우리는 서둘러 짚에 불을 붙여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소원을 빌면서 절을 하였다. 거듭 거듭 한 해의 기원을 되새기며 달을 향해 소원을 되뇌었다.
할머니는 우리들 친손자와 손녀 열둘을 좌우에 둘러 세우시고 앞서서 기원하는 자세와 성의를 보이셨다. 금세 사방은 조용해지고 짚 타는 소리와 우리들 입술 달싹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날 밤 뒷동산은 온통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발길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때 껑충 뒤어 오른 달이 건너편 들마을까지 훤히 비추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요에 지도를 그리며 모두들 어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해마다 정월 보름날 마을에는 당제사가 있었다. 그날 하루 마을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고 허투루 웃지도 않았다. 어느 해인가 제주인 뒷집 종수 아버지는 한달 전부터 나들이도 줄이고 그 집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삽도 빌리러 가지 않았다. 그림을 잘 그리고는 종수는 뒷산 당집에 말 탄 사람을 그려 걸로 둥그런 달이 떠오르자 당집엔 등불이 훤히 내걸렸다. 일찍 저녁을 끝낸 우리들은 숟가락 놓기가 바쁘게 달려 나와 종수네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마을 어른들께서는 먼저 윗동네와 아랫동네 공동 우물에서 한 해의 풍요를 비는 제를 올렸다. 떡시루가 놓이고 제상 가득 과일과 음식이 차려지면 우리들 시선이야 모두 그리로 가는 것이었다. 그해 따라 가뭄 끝에 우물 바닥이 보이기도 하였다.
당집으로 가면 마을 사람들은 삥 둘러서서 모두 가슴을 졸였다. 종수 아버지는 마을 한 집씩 호명하며 한 해를 기원하고 소지를 사르는데, 불탄 종이 재가 높이 올라가는 집은 그해의 운수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든다고 하여 모두들 자기 집 차례가 될 때면 좌중의 떠드는 소리로 죽이려 애를 썼다.
그날 밤에 우리는 달빛 퍼붓는 마당에 모여 아주머니들이 주먹처럼 뭉쳐 주는 떡을 먹었다. 사탕이며 사과 몇 조각을 얻으려 줄을 서서도 우리는 하늘의 달을 보고 빌고 또 빌었다. 올해는 우리 집에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해주고 나도 학교에서 회장에 당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기원하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4학년 때부터 학급 자치회 화장이 되어 6학년 때에는 전교 회장을 맡기도 했다.
농사철로 바쁜 때야 부지깽이도 뛴다고 하지만 바쁜 중에도 마을 사람들이 함께하는 휴식시간은 있었다. 그때는 두레와 품앗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농사일과 마을 공동체의 푸근하고 넉넉한 삶이 살아 있었다. 농사일로 바쁘다가도 모내기가 다 끝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온 동네 사람들이 대동 천렵을 벌였다.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 빠짐없이 모여 뒷산에는 커다란 차일을 치고 덩그라니 가마솥 두 개가 걸렸다. 마을 아낙들은 하얀 쌀밥을 지으며 올해의 농사는 풍년이 들 거라며 즐거워했다. 한쪽 가마솥엔 고깃국이 끓고 솥뚜껑 사이로는 억센 김이 치솟았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달려와 그간의 안부를 나누며, 한솥밥을 먹고 한 솥의 국을 마시며 얼큰하게 취하면 상쇠가 쇠를 치고, 장구, 북, 징이 어울려 산은 온통 춤판으로 들썩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얼크러지고 풍악은 골짜기 차고 나가 쩌렁쩌렁하게 차령산맥을 울렸다. 흥이 난 마을 남정네들은 한천으로 몰려가 씨름으로 한판 힘을 겨루고 흠뻑 젖은 몸으로 시냇물에 뛰어들었다. 냇물에 검게 그을린 팔과 다리를 적시면 아낙들은 멀리서 제 사내를 바라보다 가슴이 더워져 흐뭇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된통스럽게 놀고 난 밤은 뒷동산이 먼저 취해 잠으로 떨어졌다. 그날은 마을이 온통 코고는 소리로 들썩였다. 그때 동구 밖의 느티나무 위로 새어 나온 달이 환히 웃고 있었다. 들판에서는 밤새워 개구리들이 육자배기를 뽑았다. 그 밤에 들판의 모들은 은밀하게 뿌리를 세워 땅 냄새를 맡고 있었다.
겨울에 우리 집 방안 윗목에 마시다 둔 냉수 사발은 자고 일어나면 얼어 터져 있었다. 새벽녘에 구들장은 사람 신세를 지기도 하였다. 두꺼운 요와 쌀가마처럼 무거운 이불 속에서도 울타리를 쓸고 가는 바람 소리는 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물 묻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자석에 쇠못 달라붙듯이 손가락이 찍찍 감겼다. 초가집 추녀 밑으로는 고드름이 발을 치고, 갈증이 날 때 꺾어 먹던 투명한 고드름 사이로 비치는 아침 햇살은 눈이 부셨다. 하루 종일 방안에는 화롯불이 몸을 녹여 주었다. 나는 화로 속에 묻어둔 알
밤도 없이 방을 들며 나며 불 속을 뒤적이곤 하였다.
어느 날 안성 장날 밤에 사나운 바람 몰려와 울타리 수숫대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마지막 버스로 새로 산 내 흰 고무신을 가슴에 품고 돌아오셨다. 나는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고 어머니의 따스한 온기가 배어 있는 고무신만 내 품에 안겨서 홀로 호롱불에 희게 빛이 나고 있었다 한다. 그날 밤 나는 새 고무신을 신고 벌판을 치달려 가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다음날 아침 가로수들은 추위에 무처럼 갈라 터지고, 밤새 퍼부은 눈 짐을 감당 못해 뒷산 소나무 가지는 서너 개나 부러져 있었다. 이따금 뒤란의 울타리 팽나무에서는 눈덩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쿵, 쿵, 쿵, 쿵 가슴을 치고는 하였다. 간밤 눈발 속을 뚫고 들길을 질러가던 이웃 마을 사람들, 새벽이면 구부러진 둑길을 따라서 그들의 반쯤 지워진 발자국만이 건넛마을로 가고 있었다. 아침 들녘 먼 마을에는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때 어디선가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 우리 집 울타리를 덮었다. 그 참새들의 반짝 반짝거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깨곤 하였다.
내 어린 날의 기억 속에는 또 늘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솟아오르곤 한다. 우리 마을 마정리 언덕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깊이 내린 뿌리로는 땅 속으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고, 머리로는 둥그런 하늘을 인 채 마을 전체를 그 가슴 안에 품고 있었다. 봄이면 가지마다 초록 이파리를 새 부리처럼 내밀어 온 하늘로 휘파람을 불어 올려 오고 가는 새들이 날아와 앉았다. 여름이면 들판의 바람이 놀러와 나뭇가지 사이에서 쉬었다 가곤 하였다. 마을 어른들이 나무 아래에서 장기나 바둑을 둘 때면 무성한 줄기로 서늘한 바람을 일구어 주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샛밥을 먹을 때면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들도 함께 불러 들여 들밥을 나누고, 식사 후에는 한참씩 그 나무 밑에 누워 쉬기도 하였다.
그 나무는 때로 맨발로 기어오르는 아이들 하나하나 무동을 태워 하늘 끝에 닿기도 했다. 우리들은 나무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푸른 하늘의 향기에 젖어 있곤 하였다. 그때 나뭇가지 사이에서 신비롭게 하늘의 노래 불러 주는 매미를 잡기도 하고, 그러다가 더러는 나무 밑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저무는 가을마당에 나와 서면 하늘을 떠받친 울창한 가지 사이로 저녁노을이 온몸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나무는 그 큰 둥치로 무너지는 가을을 통째로 받아내고 있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사흘이나 밤새 눈이 퍼부은 뒤, 몇 십 가마니 눈짐을 지고서 큰 가지 하나가 부러져도 그 나무는 끄떡없었다. 살며시 다가가 나무 둥치에 설레는 가슴으로 귀를 대면 차갑게 볼을 쓸고 가는 칼바람 속에서도 내 영혼을 흔드는 맑은 숨소리가 흐르곤 하였다.
그 나무 둘레는 내 양손을 다 펴서도 다섯 이름이나 두르고서야 둥치를 잴 수 있었다. 그 육중한 나무 둥치를 안고서 그 속에서 무엇이 들어 있을까, 밤이면 가지 끝마다 별들이 주렁주렁 열릴 때 나무와 별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생각하다가 나는 문득,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끌어안아야 할 일들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하였다.
요즈음, 저녁이면 지친 걸음으로 한 꾸러미의 붕어빵을 껴안고 어둔 골목길을 들어설 때, 내 무겁게 기운 어깨 기댈 곳 없어 자꾸만 헛디딜 때, 컴컴한 골목 속에서 갑자기 그 느티나무가 불쑥 솟아오른다. 다가와 나의 처진 어깨를 받쳐 주고 잔잔한 이파 리 부채로 내 가슴을 식혀 주곤 한다. 어느새 그 큰 나무 둘레에는 총총하게 별들이 열리고 어둔 밤 내 발길 이끌어 나를 포근하게 품어주곤 한다.
나는 시를 쓸 때마다 내 유년의 체험 속으로 희귀하여 시상을 길어 올리곤 한다. 나는 내가 쓰는 시가 우리 마을의 느티나무를 닮았으면 하고 생각해 본다. 이 세상 만물이 다 그 품안에 둥지를 틀 수 있는 그 느티나무처럼,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다가가 조금이라도 활력을 주고 삶의 이치와 지혜를 일깨워 줄 수 있는 시, 그러한 따뜻한 시를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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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외 2편
김완하
어머니는 집 가까운 콩밭에 김을 매시고 저녁이 되어서야 맨발로 호미와 고무신을 들고 돌아오셨지요. 우물가 빨랫돌 위에 고무신을 닦아 놓으시고, 하루의 피로를 씻으시던 저녁, 땅거미가 내릴수록 더욱 희게 빛을 발하던 어머니의 고무신. 어머니의 땀 밴 하루가 곱게 저물면 이제 막, 우물 안에는 솔방울만한 별들이 쏟아지고 갓 피어난 복숭아도 살포시 꽃잎을 사리는 것이었지요
지금 우물은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는데, 싱싱한 꿈 길어 올릴 두레박줄 내릴 곳 없는데, 이제는 그곳에 서보아도 뒷산 솔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나의 저 어린 시절 어머니의 흰 고무신이 빛나던 저녁, 우리 집 우물에서 솟아나던 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대동천렵
마을에 모내기 다 끝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온 동네 사람들은 대동 천렵을 별였다
윗동네 아랫동네 사람들 빠짐없이 모여
뒷산엔 커다란 차일을 치고
덩그라니 가마솥 두 개가 걸렸다
마을 아낙들은 하얀 쌀밥을 지으며
올해의 농사는 풍년이 들 거라고
한 쪽 가마솥엔 고깃국이 끓고,
솥뚜껑 사이로는 억센 김이 치솟았다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 달려와
그간의 안부를 나누며, 한솥밥을 먹고
한솥의 국을 마시며 얼큰하게 취하면
상쇠가 쇠를 치고 장구, 북, 징이 어울려
산은 온통 춤판으로 들썩였다
온 마을 사람들 얼크러지고 풍익은
골짜기 차고 나가 산맥을 올렸다
흥이 난 마을 남정네들은
한천으로 몰려가 씨름으로 한판 힘을 겨루고
흠뻑 젖은 몸 시내에 뛰어 들었다
냇물에 검게 그을린 팔과 다리 적시면
아낙들은 멀리서 제 사내 바라보며
가슴이 더워져 흐뭇해 했다
그렇게 하루 된통스럽게 놀고 난 밤은
뒷동산이 먼저 취해 잠으로 떨어졌고
초저녁부터 마을은 온통 코고는 소리로 들썩였다
동구 밖 느티나무 위로 새어 나온 달이 웃으면
그때 들판에선 밤새워 개구리들이 달빛을 퍼마시며
한밤내 취해 육자배기를 뽑았고,
들판의 모들은 은밀하게 뿌리 세워 땅내를 맡았다
우리 마을 나무
1
우리 마을 언덕에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 서 있었지. 뿌리깊은 땅속 흐르는 강물에 발 적시고, 머리로는 둥그런 하늘을 인 채 마을 전체를 제 가슴에 품고 있었지. 봄이면 가지마다 초록의 새 부리 내밀어 온 하늘로 휘파람 불어 올리면 오가는 새들이 날아와 앉고, 여름이면 들판의 바람이 놀러와 쉬었다 갔지. 할아버지들 나무 아래 장기 둘 때면 무성한 줄기를 부챗살처럼 펴서, 잔 바람으로 땀 식혀 주었지. 들판에서 일하던 사람들 밥 먹을 때면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도 불러들여 함께 들밥을 나누고, 식사후엔 한잠씩 그 나무 밑에 눕기도 했지.
우리들은 나무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푸른 하늘 향기에 젖곤 했지. 때로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하늘의 노래를 불러 주는 매미를 잡고, 그러다 더러는 나무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지. 저무는 가을 마당에 나와 서면 하늘을 떠받친 울창한 가지들, 저녁 노을에 온몸 발갛게 불태어던 나무. 그 큰 둥치로 무너지는 가을을 통째로 받아 내고 있었지. 어느 해 겨울엔 사흘이나 밤새 눈 내린 뒤, 몇십 가마니 눈짐에 큰 가지 하나 부러져도 끄떡없던 나무, 다가가 설레임으로 귀를 대면 귀를 저미는 찬바람 속에서도 영혼을 울리는 맑은 숨소리가 흐르곤 했지.
2
여름날에 아이들 상수리나무 밑둥을 파서 집게벌레 잡을 때면 발가락 간지러움에 나무줄기 가볍게 흔들다가 상수리나무는 제 몸에서 검은 집게벌레 몇 마리 내놓았지. 때로는 맨발로 기어올라 오는 아이들 하나하나 무등을 태워 하늘 끝에 닿게도 했지. 학교 갈때는 그 나무 밑에 들러 잠시 쉬고, 하교 길엔 달려와 나무 밑에 공책 펴놓고 밀린 산수숙제 했지. 그 나무 둘레는 내 양손을 다 펴서도 다섯 아름이나 두르고서야 둥치를 잴 수 있었지. 그 육장한 나무 둥치를 안고 있으면 그 안으로는 무엇이 오르내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밤이면 가지 끝마다 별들이 주렁주렁 열릴 때 별들이 가지 위에 내려앉아 나무와 무슨 얘기를 나눌까 생각하다가 그때 나는 문득,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끌어안아야 할 일들을 어렴풋이 떠올리기도 했었지.
3
그때 그 나무 위에 올라가 하늘 구름의 향기에 젖었던 아이들은 자라나 삼십대의 가장이 되었지. 어느 사이에 그 느티나무가 주변에 거느린 작은 나무들처럼 우리도 새끼를 품었지. 나는 오늘도 그때 느티나무 아름을 재던 자세로 이 세상 살아가려 하는데, 세상은 나의 팔 사이로 자꾸만 바람처럼 빠져 나갔지. 저녁이면 지친 걸음으로 한 꾸러미 붕어빵을 껴안고 젖은 골목으로 들어설 때, 내 무겁게 기운 어깨 기댈 곳 없어 자꾸만 헛딛는 걸음. 둘러보아도 기댈 언덕 하나 없는데 컴컴한 골목 속에서 갑자기 그 나무 불쏙 솟아났지. 그 나무 둥치 다가와 내 어깨를 받쳐 주고 잔잔한 이파리 부채로 가슴 식혀 주었지. 어느새 나무둘레엔 별들이 매달리고 밤길에 내 발 이끌어 그 나무 나를 포근하게 품어 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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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대보름날 우리는 할머니 따라
뒷산에 올라가 달을 맞았다
한낮에 만들어 놓은 짚단을 들고
그날 저녁이면 큰집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달뜨기 전 뒷동산으로 올라가
불을 피우며 기다리면
그날따라 달도 더디 떠올랐다
이윽고, 보름달이 건너편 산 위로 이마를 빼면
우리는 서둘러 짚단에 불을 당겨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절하였다
거듭거듭 한 해의 기원을 되새기며
할머니는 우리들 친손자 외손자 열둘
좌우에 둘러 세우시고 앞서서
기원하는 자세와 성의를 보이셨다
금세 사방은 조용해지고 짚 타는 소리와
우리들 입술 달싹이는 소리만 들렸다
이웃집 이뿐이 어머니는 병환중이라
일곱 살 이뿐이는 큰소리 내어
우리 어머니 병 낫게 해주십시오
우리 어머니 병환 하루빨리 낫게 하시오
크게 외치는 소리에 모두들 웃다가 잠시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했다
그날 밤 뒷동산은 온통
사람들 오르내리는 발길로 북적대고
껑충 뛰어오른 달 건너편 들말까지 훤히 비출 때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요에 지도를 그리며
모두들 어른이 되는 꿈을 꾸었지
마을 당제사
음력 보름날 마을엔 당제사가 있었지
그날 하루 마을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고, 허투루 웃지도 많았다
제주인 뒷집 종수 아버지는 한 달 전부터
나들이도 줄이고 그 집으로는
마을 사람들 삽 빌리러 가지 않았다
그림 잘 그리는 종수는
뒷산 당집에 말 탄 사름을 그려 걸고
둥그런 달이 떠오르면 당집엔 등불이 내걸렸다
일찍 저녁 먹은 우리는 숟가락 놓기 바쁘게
달려 나와 종수네 마당으로 모여들었지
윗동네 아랫동네 공동 우물에서
먼저 한 해의 풍요를 비는 제를 올렸다
떡시루가 놓이고 과일과 음식이 차려지면
우리들 시선이야 모두 그리 가는 것이었지만
그해따라 가뭄 끝에 우물 바닥이 보였다
당집으로 가면 마을 사람들 삥 둘러서 가슴 졸였다
종수 아버지 온 마을 집집마다 호명하며
한 해 기원을 하고 소지 사르는데,
불탄 종이 재가 높이 올라가는 집은
그 해 운수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든다고
모두들 자기 집이 불릴 때는
좌중이 떠드는 소리도 죽이려 애썼지
그날 밤 우리는 달빛 퍼붓는 마당에 모여
아주머니들이 주먹처럼 뭉쳐주는 떡을 먹었다
사탕이며 사과 몇 조각을 얻으려 줄을 서서
하늘의 달 보고 빌고 또 빌었다
올해는 우리 집에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도 학교에서 반장에 당선되었으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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