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keley literature class #3

2012.05.12 03:41

강학희 조회 수:180 추천:8

문학교육과 시의 해석

김완하(시인 ․ 한남대 문창과 교수)

1. 머리말

문학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는 문학작품을 읽고 그 작품이 주는 감동과 그것의 미학적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안목과 시야를 열어주는데 있을 것이다. 학생들 스스로 문학작품을 친숙하게 접할 수 있게 하여 그것을 감상하고 예술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사람에 대한 인식의 깊이를 꾀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그러한 목적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꾀하기 위해해서 그 동안 여러 가지 방법들이 원용되어 왔다. 그러한 방법들은 문학교육에서 작가와 작품(텍스트) 독자의 삼각관계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두어서 작품을 해석하느냐 하는 것과 연관을 갖는다. 문학 교육 방법론은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에 중점을 두고 텍스트를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작가와 작품, 독자 이 세 가지 요소의 중요성은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문학교육 방법론으로 작가를 중심으로 하여 접근하는 작가중심의 방법이 있다. 이것은 작가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작품의 의미를 파악해 가는 방법인데, 우리의 문학교육에서 고등학교까지는 전적으로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다음으로는 텍스트만을 중심으로 해서 그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문학 텍스트는 언어로 축조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 텍스트의 구조와 형식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는 입장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작품중심 방법이다.

전자의 입장은 그 작품이 씌어지게 된 배경을 중요시하여 그것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그 텍스트의 언어 형식 및 구조를 소홀하게 다룬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또한 후자의 경우는 언어에 대한 섬세한 관심으로 그 텍스트의 언어 형식 및 구조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이면에, 그 작품이 지니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간과한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둘 사이의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자수용미학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문학교육의 진정한 방법과 올바른 시작품의 해석이라는 관점을 모색해보기로 한다. 문학교육에 좀더 효율적인 방법론을 검토해보고 이를 토대로 실제 시를 해석해 가는 과정에 적용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를 해석하고 그것을 교육한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방법이 제기되어 있는 만큼 그리 쉽고 간단한 일은 아니다. 또한 문학교육 방법론은 텍스트에 접근해 가는 하나의 안내 지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곧 방법이 그 성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감상하는 것의 어려움만큼, 그것을 섬세하게 파악하여 그 의미와 시적 정서를 학생들로 하여금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일은 문학교육에서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문제이다.

시가 갖고 있는 최고 최선의 가치는 어떠한 학문이나 교과서에서도 획득하기 어려운 ‘창조적 상상력’을 구축하고 있으며, 환기하고 형성시켜 주는 요소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현대 사회에서는 시의 이러한 ‘창조적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라 하겠다. 시 교육의 절실한 필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시를 읽고 배우는 일은 고도로 표현된 언어의 묘미를 터득하고, 그 시어들이 서로 교직되며 엮어내는 심상을 통해 시인의 시적 정서와 분위기를 느끼며, 그 정서를 향유하는 일이다. 물론 ‘나’속에 내재하는 정서를 시 읽기를 통해 환기해내고, 또 세련시키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새롭고 의미 있는 세계 인식의 경험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화의 작업이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통해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는 바로 ‘창조적 상상력’에 기반한다.

따라서 시를 대하는 자세는 대상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압축과 생략, 비유와 상징 등 고도의 기법이 과감하게 발휘되는 시에 대하여 경직된 자세나 획일화된 결론을 유도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시에 내재하는 ‘공백’은 다른 여타의 문학 장르보다도 섬세한 마음자세와 자유로운 상상력 그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통해서 채워야만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주제나 핵심적 의미만을 찾아내려는 시 읽기의 태도를 벗어나서 한 편의 시가 지니는 다양한 의미의 공간 속으로 뛰어 들어 자신의 개성이 가미된 능동적 독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시에 대한 이해와 감상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이 강조되어야 하겠다. 이 점에서 우리는 독자반응이론의 관점에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시의 이해에 부여되는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은 차단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기존의 시 이해에서 연역적으로 접근해 가는 태도로써 학생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압하고 편향된 시각으로 시의 해석을 몰아갈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어떠한 방법론의 제안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시해석이나 감상의 실현 위해서 가능하므로, 이 글에서는 황진이 시조「청산리 벽계수」와 서정주의 시「鞦韆詞」을 택하여 문학교육과 시 해석의 실제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문학교육 방법론의 검토와 모색

기존의 문학교육에서 작가중심으로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해 감으로써 빚어지는 문제는 학생들이 능동적인 자세로 활동하기 보다는 수동적인 상태로 머물게 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입시위주의 현행 교육은 문학작품까지도 정답을 찾아야 하는 시험의 대상으로 전략시킴으로써 문학교육은 또 하나의 힘겨운 입시과목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문학교육에 안내된 학생들은 문학작품, 그것도 시를 앞에 두면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작가의 신상이나 생애 그리고 시대적 배경, 그의 사상이라는 단서를 전제하고 그 작품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문학교육이 이루어짐으로써 학생들은 누구의 도움 없이는 어떠한 작품도 읽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시는 매우 어렵고 따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작품 앞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펼 수 있는 자세를 얻지 못한 것이다.

가령 이육사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육사의 출생으로부터 그의 생애가 점검되고 그의 항일운동 경력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의 사상적 배경은 유교로써 여기에서 형성된 선비정신이 강조되었다. 따라서 이육사 생애의 저항적 모습은 곧 바로 시인의 의식으로 대비되었으며, 그의 시 세계로도 확장되어 급기야 「靑葡萄」와도 대비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靑葡萄」는 읽기도 전에 이미 저항시로 규정되고 「靑葡萄」에 대한 독서는 다만 이 시가 저항적인 것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질 뿐이었다. 그 결과로 어쩌면 이육사의 시에서 가장 서정성이 뛰어난 작품일 수 있는 「靑葡萄」 또한 매우 경직된 독서로 몰아가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이육사의 「靑葡萄」는 단지 “흰 돛단배”와 “내가 바라던 손님”이라는 부분만을 자의적으로 분리시켜서 주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즉 “흰 돛단배”는 우리 민족이 백의민족임을 들어서 곧 ‘우리 민족’을 의미한다 하였고, “내가 바라던 손님”은 만주 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던 ‘독립투사’들이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저항시이고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그 주제라는 기계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가 지닌 비유와 기법, 색상의 대비나 다양한 이미지, 안정된 어조와 시의 형식과 구조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문학작품의 의미 파악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독서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 대해서 지적한 볼프강 이저(Wolfang Iser)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매우 시사적이다.

독서 경험은 과거의 경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우리가 독서하는 언어는 실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적 가면 속에서의 인간의 언어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 허구적 언어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상상력의 대상을 수정하며 조정해 가는 과정이다. 독자는 마음속에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는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들도 계속적으로 수정되며, 독자가 텍스트를 읽어감에 따라서 기억들이 병행된다. 우리가 책을 읽을 때에 파악하려는 것은 단지 일련의 관점 변화일 뿐이지, 모든 시점에서 고정된 완전한 의미의 어떤 것이 아니다.

이상의 사실은 텍스트를 수용하는 독자의 입장을 단적으로 밝혀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아무리 자세히 밝힌다 해도 다 밝힐 수 없는 까닭으로 텍스트에는 수많은 ‘미정성’을 남기게 된다. 따라서 텍스트에서 작가는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말하지 못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그 빈틈을 메우도록 하는 것이다. 텍스트에 빈틈이 없다면 독자들은 독서과정에서 능동적으로 할 일이 없어질 것이며, 독서의 흥미도 줄어들 것이다. 텍스트는 낱말과 낱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수많은 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폭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텍스트의 ‘불확정성(미정성)’이라 한다. 바로 이 ‘불확정성’을 독자가 한 특정 경우에 임시로 확정하는 것이 해석이다. 독자가 그러한 ‘불확정성’을 자신의 관점에서 조정하면서 ‘확정성’으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 독서의 과정이다.

필자는 이육사의 「靑葡萄」에 대한 해석에서 빚어진 문제점을 제기하고 그것을 독자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독자반응이론으로 검토해본 바 있다. 이미 그곳에서 몇 가지의 문제를 제기해 놓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바도 있다. 지금까지 「靑葡萄」는 그 작품이 지닌 외연적 사실에 의해서 그 작품의 자율적 의미나 텍스트의 예술성은 간과되었고, 다만 저항시라는 사실의 확인에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이해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을 벗어나서 독자반응에 초점을 맞추어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도표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마을 전설
먼데 하늘
청포도 ▶ 완 숙

자연 ▼
내고장 ◀ 식탁
인간 ▲

나 ▶ 그를 만남
은쟁반
하이얀 모시수건

이로써 「靑葡萄」의 주제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시의 의미는 ‘내 고장의 전설’과 ‘먼데 하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청포도의 완숙(完熟)으로 제시되는 자연이 완성과 ‘나’가 ‘그’를 만나 이루는 인간의 완성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식탁의 세계, 곧 참다운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염원을 담고 있다.

이 시는 궁극적으로 이육사가 참다운 고향의 세계(낙원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했던 염원을 드러낸다. 즉, ‘청포도’의 완숙으로 이미 자연의 완성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만나지 못했다. 인간의 완성된 모습은 아직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그때를 기다리며 내가 그를 만나기 위해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은 ‘은쟁반’과 ‘모시수건’이다. 그것은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기쁨과 활기찬 삶을 더 적극적으로 깊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결국 이 작품은 자신이 맞이할 미래를 위한 다짐에 더 깊은 의미가 닿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육사는 1930년경에 이 작품을 썼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문학작품은 갑자기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이 시가 씌어진 시대와 배경과 이육사의 삶이 참조될 수 있다. 그래서 이육사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끌어들일 필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시인이 처한 배경은 바로 그 시대가 낳은 것이며, 시인 자신의 개인 상황도 여기에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나’는 현실적 자아이며 ‘그를 만남’의 단계는 내가 도달할 이상적 자아이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적 자아가 꿈꾸는 이상적 자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거기에 일제의 우리 민족에 대한 지배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이 시인을 고통 속에 처하게 했으므로 시인은 그것과 싸웠던가 이다. 따라서 일본이 우리를 강압적으로 지배했던 사실은 이 시를 쓰게 했던 배경인 것이지, 곧바로 이 시가 저항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절대로 이 시의 가치가 변질되거나 폄하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로써 이 시의 텍스트의 구조와 형식을 살필 수 있었고, 이와 함께 이 시가 지니는 역사 사회적 의미도 함께 파헤칠 수 있었다. 적어도 이육사의 「靑葡萄」가 지니는 언어의 결을 충실하게 살폈으며, 아울러서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도 함께 파악할 수 있었다. 따라서 「靑葡萄」의 감상을 통해 이 작품의 아름다움도 확인했으며, 이 작품이 씌어지게 된 배경도 함께 살핀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이 지니는 사회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텍스트의 분석과정에는 외연적 요소는 차단되어야 한다. 독자가 중심이 되어 시적 문맥에 깊이 천착해가면서 전체 의미를 파악한 후, 그것의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 과정에서 작가와 시대가 참조되어야 한다.

이상의 독서 과정에서 독자는 텍스트를 읽어 가는 주체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독자는 보다 자유롭고 능동적인 자세로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을 낳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본고에서 제기하였던, 올바른 문학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시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학교육은 학습의 과정을 통하여 학생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하며, 학생 스스로 작품을 분석하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할 수 있는 적용 능력, 창의성, 표현력을 증진시키고 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시작품 해석의 실제

우리의 문학교육에서 특히 그 작품에 대한 영향관계나 외연적 요소에 얽매이게 되는 것은 고전문학 작품의 이해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문학의 실증적 연구를 위한 방법론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작품을 읽는 학생들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자율적 자세를 억압하고, 창조적 상상력을 억제시킨 결과를 낳은 것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그러한 결과를 우리는 대표적으로 다음의 시조에서도 살필 수 있다.

靑山裡 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감이 어떠리
-황진이의「청산리 벽계수」

이 시조는 이조시대의 기녀로 널리 알려진 황진이의 작품이다. 황진이는 빼어난 시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그의 시조는 주로 애정문제를 소재로 다루고 있다. 따라서 위의 작품도 황진이의 생애와 관련된 애정문제에 초점을 두고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텍스트는 매우 다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의미해석은 표면적 이해에서 멈추어서는 안 되며, 그 이면에 깔려있는 심층적 의미를 동시에 파악해 내야 한다.

이 작품에 대한 이해에서는 항시 황진이와 서경덕 사이의 일화가 등장하곤 하였다. 이조사회의 관행으로 기생은 재와 색을 갖출 때 사랑을 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미모와 재주를 인정받았던 황진이는 당대의 호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하여 황진이의 치마폭에 놀아나지 않은 사내들은 없었다. 그러나 사내 중의 사내인 서경덕만은 황진이의 미모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황진이가 자신에게 보인 관심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이에 황진이가 오히려 몸이 달아 추파를 던지는 시조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이 시는 마치 황진이가 서경덕에게 써 보낸 연애시 정도로만 폄하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과오를 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이 시를 읽는데 있어서 고정관념을 줌으로써 편향되고도 경직된 시 이해의 결과를 낳았으며, 학생들을 단지 수동적인 상태로 묶어둠으로써 시 이해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이 시의 창작배경이 그와 같을지 모르며 그래서 그것이 이 시의 창작배경의 이해에는 도움을 줄지 모르나, 문학의 언어가 지니는 다층성을 배려하지 않는 단순한 문맥의 의미 파악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로 인하여 학생들에게 겨우 이 시는 황진이의 연정을 담은 연애시라는 단순한 사실로 읽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 시는 황진이의 생애 속에서 빚어진 사건과 연관시켜 단순한 표면적 의미 파악에 그쳤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가 인생의 비유를 통해 매우 사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은 간과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문학교육의 궁극적인 목표에도 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매우 선명한 이미지의 대립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시조가 보여줄 수 있는 형식미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이 시조의 외연적 요소의 주입을 배제하고 그들 스스로 자유롭게 읽고 의미를 새김으로써 텍스트의 공백을 메우도록 해야 한다. 학생들 스스로 이 시의 독서에 주체가 되어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서 텍스트의 내면으로 다가서도록 해야 한다. 부분적인 요소들의 세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 시조가 환기시켜주는 새로운 의미를 깨닫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문학 작품의 수용 측면에서 이해할 때 시 분석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개별적인 접근이나 분석보다는 통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비유나 이미지, 운율, 상징 등 부분별 분석의 과정은 생략하고, 이 시조에서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의미구조의 분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문학교육의 효과를 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문학 작품의 분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작품을 분석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단계에까지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생을 인식할 수 있는 깨달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이 시조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의 중심 내용을 파악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 작품은 시조로서의 뛰어난 비유 속에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참다운 삶의 문제도 예리하게 간파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품 해석의 깊이를 꾀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작품은 그것이 씌어지게 되는 배경을 전제하더라도 다양한 의미로 읽어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층적 형상으로서의 문학 텍스트, 복잡 다양한 삶의 세계를 통찰하는 문학작품의 의미는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과 의미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 작품이 지니는 가치는 황진이라는 한 여성이 그의 생 체험을 밝힌 단순한 사실은 아닌 것이다. 얼마든지 그 비유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확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시를 해석하는 독자의 능력과 상상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고 개발하여 학생들 스스로 문학을 통해서 삶을 좀더 넓고 깊이 있게 인식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학교육의 최종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조는 황진이라는 여성의 개인 의식구조 밖에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항시 현실 위에서 그것을 좀 더 넓게 파악하려는 안목으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살피며 미래를 내다보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 인간이 자기 앞에 놓인 개인적 삶에 몰두함으로써 좀더 포괄적으로 끌어안아야 할 문제들을 간과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조는 현실 삶의 좌우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삶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담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뒤에 있는 사람들의 삶도 두루 아우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가 이 시에서 읽어야 한다.

이 시는 흘러가는 물이 상징하는 바 시간에 이끌려 급급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달빛이 가득히 채우는 공간성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즉, 자신이 살아가는 전후좌우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삶을 더 광범위하게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즉, 우리 삶에서 시간의 문제보다는 공간의 문제가 더욱 중요하며, 속도의 문제보다도 그것이 얼마나 주변 사람들의 삶과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이조시대에 씌어진 시조이면서도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의미를 던져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이 황진이의 시조가 갖는 우수성이며, 이로써 좋은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그 의미를 재생산해 낼 수 있다는 점에도 부응하는 것이다.

문학교육은 문학 텍스트에 대한 기존의 외재적 접근이 초래한 문제점을 넘어서 학생들의 창조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새로운 의미파악에 육박해 가도록 해야 한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스스로가 지닌 문학적 감수성를 살려내고 독서의 주체가 되어 자발적으로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독서는 문학 작품을 읽고 즐기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 시조도 우리 삶의 인식과 생의 본질을 깨우치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서정주의 시를 통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서정주의 시 세계는 간략히 요약하면 인간의 운명에 가로놓여 있는 비극성을 제기하면서, 그러한 운명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육성의 몸부림이 지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곧바로 역설적 의미로 나타나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강렬한 애정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렬한 부정은 그만큼 강한 애착에서 비롯되는 까닭이다. 그만큼 그의 시는 좀더 깊게 내면의 의미구조를 파헤쳐야 한다.

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香丹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 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뎀이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조 내어 밀듯이, 香丹아
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눌로
나를 밀어 올려다오
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波濤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다오
香丹아.
- 서정주의「鞦韆詞」전문

이 시는 「춘향전」을 원텍스트로 하는 일종의 ‘패러디 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춘향전의 내용을 알고 있는 독자에게는 이 시가 좀더 다양한 의미로 읽힐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춘향전」의 내용을 상기하면서 「춘향전」의 서사구조 가운데 이 시는 어느 맥락에 닿을 수 있을까라는 면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가령 이 시의 맥락은 춘향이가 이도령과 만나기 이전인가, 또는 만나는 도중인가, 아니면 헤어진 뒤에 해당할 것인가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가운데서 이 시의 내용은 춘향이가 이도령과 헤어지고 변사또에게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상황에 더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춘향이에게 갈등과 고통이 가장 고조되어 있는 때에 이 시는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시인은「춘향전」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자신의 현실 삶의 고통의 크기를 비유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만큼 이 시는 시인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를 「춘향전」의 서사구조를 통해서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더욱 더 강렬하고도 효과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춘향이와 향단이라는 화자와 청자를 동원해서 이 시를 독자들에게 매우 친근하게 접근시키면서, 이 시에 처한 화자의 상황을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 모습으로 확산시켜 가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춘향이로 등장하여 청자인 향단이에게 간청하고 있다. 춘향이는 그넷줄에 올라 선 상태에 있다. 그리고 향단이에게 현실의 구속과 갈등을 벗어나기 위해서 힘껏 밀어 올려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조시대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춘향이의 고통을 향단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란 실제로 아무 것도 없다. 그만큼 춘향이가 기댈 곳이라고는 전혀 없이 궁지에 몰려있는 상황을 반영하기도 한다. 화자는 자신이 처한 구속과 갈등의 현실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고자 하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이 없다. 따라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향단이에게라도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며 간청하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자잘한 일상의 구속과 갈등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시인의 절박한 내면을 엿 볼 수 있다.

이 시의 중심 이미지 ‘그네’에 대하여 다양한 사고를 펼치도록 해야 한다. 그네는 인간이 지상을 벗어나서 좀더 하늘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욕구에 의해서 만들어낸 기구이다. 춘향이는 그네라는 기구를 통해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시에서의 중심적 의미를, 그네가 갖고 있는 속성을 살핌으로써 파악할 수 있다. 그네에는 근본적으로 내재하는 갈등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이 처한 운명과 숙명을 암시한다. 그네는 사람이 줄에 매달려 지상으로부터 공중으로 차오른다. 그리고 올라간 그 높이에서 지상으로 하강하지만 다시 그 힘에 의해서 하늘로 솟구쳤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게 된다. 그네는 이렇게 작용과 반작용에 의해서 지상과 하늘 사이를 오가는 반복 운동을 계속한다.

이러한 공간 이동이 우리들 인생의 메타포로 작용한다. 다시 말하면 그네는 하늘을 향한 상승과 지상을 향한 하강의 두 운동 축을 지니고 있는 우리 삶의 양식을 비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네가 오가는 두 지점에서 지상은 현실이며 하늘은 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그네의 움직임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내려오면서 다시 뒤편의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의 양극 사이에 땅이라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만큼 땅, 즉 현실은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춘향이를 묶어두는 것은 그넷줄이다. 그러나 그 그넷줄을 끊어버리면 그네는 존립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춘향이 또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네가 아니라면 춘향이는 하늘로 차오를 수조차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넷줄은 인간으로서의 숙명이며 타고난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가 둘러쓰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운명은 그네의 줄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넷줄이라는 구속을 통해서만 우리의 그네 타기는 가능하다. 그리하여 지상으로부터 상승하여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반면에 그넷줄 때문에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 와야 하는 것이 바로 그네이다. 이러한 모순의 의미가 그네 안에는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네로 밀어 올려 닿을 수 있는 하늘의 공간이 암시하는 이상세계와 지상으로 곤두박질쳐서 이르는 현실 사이의 거리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왕복으로 운동하는 것이 그네이고,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네의 흔들리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 삶의 갈등구조를 객관화시켜 보여주었다. 인간은 그네의 줄을 끊어버릴 수도 없으며, 그 그넷줄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이상세계이고, 다시 그 그넷줄에 의해서 지상의 현실로 추락한다. 즉 우리 인간이 살아가며 겪는 현실의 고통과 갈등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으로 살아가며 겪는 갈등과 회한을 형상화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표출되어 있다. 그네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적 숙명과 구속이며, 현실과 이상 사이를 오가는 반복 운동은 바로 인간이 처한 존재론적 갈등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시인은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네가 왕복운동으로 닿는 발아래의 현실과 머리 위의 이상 사이를 오가면서 그 어느 곳에도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인 까닭이다. 그넷줄은 인간의 구속이기도 하지만 인간은 그 그넷줄을 영원히 벗어날 수도 없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그네를 통해서만 현실로부터 이상 사이를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자 숙명으로서의 현실적 여건만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최선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인간적 한계와 갈등구조를 그네에 비유하면서 인생론적인 성찰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네가 지니고 있는 모순의 속성은 바로 인생이 지닌 아이러니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더 바람직한 삶인가. 그 점을 이 시는 암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네타기는 그네의 속성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네의 논리를 더욱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이렇듯이 우리의 삶도 인간적 실존의 한계를 좀더 깊이 있게 받아들이고 끌어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놓인 현실 위에서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한 힘찬 그네뛰기에 의해서 우리는 하늘과 땅의 더 먼거리를 오갈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현실에 더 깊게 다가설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 또는 회의적 어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을 넘어서 현실에 더욱 더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아가는 삶의 자세를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 그만큼 현실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점을 위 시는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의 과정으로 「鞦韆詞」의 해석은 학생들이 창조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파악하도록 유도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의 해석을 통해서 생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4. 맺음말

문학교육과 시의 해석은 제한된 사고 영역 안에서 일정한 결과를 전제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자율적이면서도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열린 공간이다. 학생 스스로가 지닌 창조적 상상력을 일깨우고 문학적 감수성을 불러 일으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층적 구조의 텍스트에 다가서 보다 깊이 있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 동안 시인의 생애와 시대적 환경을 그 작품의 창작배경으로 하여 텍스트에 연역적으로 접근하는 자세나, 입시위주의 문학교육은 학생들을 단지 수동적 자세로 머물게 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행 문학교육의 문제는 학생들로 하여금 작품 앞에 서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했던 것이다.

문학교육에서 한 편의 시를 읽거나 감상하는 자세는 철저히 학생들의 능동적 자세와 자유로운 상상력에 둘 것이지, 어떤 보편적 법칙을 정하고 거기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요즈음 문학교육과 시 해석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는 연구 활동이 활발한 것은 상당히 긍정적인 일로서 그 효과를 얻고 있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혼란과 독선으로 흐를 위험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문학교육 방법은 그 텍스트를 대하는 하나의 시각으로 작용할 뿐이다. 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그것을 감싸안는 애정의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이상적인 시 교육을 위해서는 학생들이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교육 참여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문학 텍스트는 내면에 수많은 공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독자의 입장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통해서 채워야 한다. 따라서 텍스트의 미정성을 확정성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독서이며, 그것이 바로 시의 해석인 것이다. 작품의 의미와 실체는 그 과정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 스스로가 지닌 창조적 상상력을 자유롭게 능동적으로 발휘해 가면서 텍스트 안으로 깊이 다가서도록 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이론은 매우 필요하다. 왜냐하면 문학 텍스트를 제대로 분석하는 기초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그 텍스트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교육은 문학 작품의 분석 단계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텍스트를 분석하고 그 이면의 의미를 해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문학교육과 시의 해석에 대한 문제점을 토대로 하여 좀더 바람직한 방법론을 모색해 보고 그것을 토대로 황진이 시조「청산리 벽계수」와 서정주의 시「鞦韆詞」를 분석해 보았다. 기존의 문학교육 방법론에서 작가중심 방법과 작품중심 방법의 성과와 한계를 통해서 독자반응이론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문학을 교육한다는 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문학작품을 대하고 감상할 수 있는 자세와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 이로써 문학작품 속에서 인생을 보는 눈과 인간적 진실에 대한 깨우침을 얻는데 있다고 하겠다. 학생들 스스로가 흥미를 갖고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문학 텍스트의 공백을 자유롭게 메워가면서 문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문학교육의 주체와 시 해석의 주체는 항시 학생들 스스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교육 방법론이나 교육자의 위치는 학생들로 하여금 시의 해석 과정에서 항시 자신이 주체적으로 움직여 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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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꿈과 상상력
- 시창작을 위한 몇 개의 메모

김완하(시인 ․ 한남대 문창과 교수)


1. 그 꽃 다 지고 나서야 지름길을 알았다

1991년 12월 문학행사로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전날 서울에 올라가 문학 판의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은 초등학교 때의 친구들과 만나서 저녁을 먹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강남터미널에서 차가 막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어제부터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 했고 새로이 여러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였으나 나의 마음은 매우 착잡한 심정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나의 마음은 복잡해지고 힘에 겨웠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이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부터 벗어나 대전으로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나는 창 밖을 내다보다가 하늘로 눈길을 들어 올렸다.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는 가득히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여 별들은 방금 태어난 풀잎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나의 입에서는 “아! 참 너무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왜 그 별들이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들이 머리 속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쓰여진 것이 첫 시집 ꡔ길은 마을에 닿는다ꡕ에 수록되어 있는 아래의 시이다.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 서로가 서로의 거리를 / 빛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 하루의 일을 마치고 / 허리가 휘어 언덕을 오르는 / 사람들 발 아래로 구르는 별빛, / 어둠의 순간 제 빛을 남김없이 뿌려 / 사람들은 고개를 / 꺾어 올려 하늘을 살핀다 / 같이 걷는 이웃에게 손을 내민다 //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 서로의 빛 속으로 / 스스로를 파묻기 때문이다 / 한밤의 잠이 고단해 / 문득, 깨어난 사람들이 / 새벽을 질러가는 별을 본다 / 창밖으로 환하게 피어 있는 / 별꽃을 꺾어 / 부서지는 별빛에 누워 / 들판을 건너간다 // 별들이 아름다운 것은 / 새벽이면 모두 제 빛을 거두어 / 지상의 가장 낮은 골목으로 / 눕기 때문이다 (졸시 「별․1」 전문)

1990년 추석을 며칠 앞두고 나는 아내와 선배 시인 내외와 선배의 차를 타고 논산의 관촉사 앞 벚나무 길-그때는 그곳이 관촉사인 줄을 몰랐다-을 지나 강경으로 가고 있었다. 2차선의 길 양옆을 따라서 줄지어 선 벚나무들은 제법 봄이 되었을 때의 화려한 꽃길을 예상하게 해주었다. 내가 그 벚꽃이 한꺼번에 피면 장관이겠다고 말을 하니 선배 시인은 다음 해 봄에는 꼭 벚꽃을 보러 오라고 하였다. 그때 다시 만나서 강경의 황산옥으로 메기탕을 먹으러 가자고 하였다. 나는 상상만으로도 그곳의 벚꽃이 눈에 훤하여 언젠가는 꼭 그 꽃을 보기 위해 그곳에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굳게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을 몇 년이 지나도록 실행에 옮기지 못 했다.

7년 후,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그해 봄 논산 소재의 한 대학에서 1학기 창작강의를 의뢰해 왔다. 나는 그때 강의보다도 바로 그 꽃길을 가 볼 수 있다는 기대감만으로 순순히 허락하였다. 그 강의는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다섯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의 강의를 마치고 또 다른 대학으로 강의를 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숨가쁘게 진행이 되었다. 3월부터 강의를 하기 위해 논산에 가면서 나는 이번에는 기필코 그곳에 가보아야지, 이번만은 반드시 그 꽃길을 걸어야지 하면서도 서둘러 갔다 급히 돌아와야 하는 까닭으로 경황없이 지내고 있었다. 그때는 관촉사를 거쳐서 그 대학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해 논산 시내로 돌아다녔던 것이다.

어느 날 그곳에 교수로 있는 비평가가 나의 차를 타고 함께 대전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그날도 이전에 내가 다니던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그 비평가는 반대편으로 가는 길을 내게 일러주었다. 나는 지름길이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면서 그가 알려주는 쪽 길을 따라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추어 버리고 싶은 심정에 휩싸였다. 아! 바로 그곳이 7년 전의 그 길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절은 이미 벚꽃이 다 지고 있는 때였다. 벚나무 아래로는 눈송이처럼 희게 깔린 꽃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봄날의 황량함을 한껏 연출해 내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바삐 쫓기면서 허겁지겁 다니며 그곳을 두고도 멀리 빙 돌아서 다녔던 것이다. 그 사이에 이미 꽃은 다 지고 말았다. 그때 나의 뇌리에는 다음과 같은 시 귀가 떠올랐다.

그 꽃 다 지고 나서야 / 지름길을 알았다 // 그대에게 가는 길

이것은 나의 3시집 ꡔ네가 밟고 가는 바다ꡕ에 「동백꽃」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 나의 시는 일상 체험 가운데서 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삶, 그것은 꽃이 다 지고 나서야 지름길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름길을 안다고 해도 그대에게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멀고도 가파른 것인가. 나는 그것이 또한 시의 길, 시인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시를 쓰고 있다.

2. 아, 내장산 밤바람 속의 그 눈발이여!

눈발
내장산 밤바람 속에서
눈발에 취해 冬木과 뒤엉켰다
뚝뚝 길을 끊으며
퍼붓는 눈발에
내가 묻히겠느냐
산이여, 네가 묻히겠느냐
수억의 눈발로도
가슴을 채우지 못하거니
빈 가슴에
봄을 껴안고 내가 간다
서래봉 한 자락
겨울바람 속에
커다란 분노를 풀어놓아
온 산을 떼 호랑이 소리로 울고 가는데
눈발은 산을 지우고
산을 지고 어둠 속에 내가 섰다
몇 줌 불꽃은 산모롱이마다 피어나고
나무들은 눈발에 몸을 삼켜
허연 배를 싱싱하게 드러내었지
나이테가 탄탄히 감기고 있었지
흩뿌리던 눈발에
불끈 솟은 바위
어깨에 눈 받으며 오랜 동안 홀로 들으니
산은 그 품안에 빈 들을 끌어
이 세상 가장 먼데서
길은 마을에 닿는다
살아 있는 것들이 하나로 잇닿는 순간
숨쉬는 것들은
이 밤내 잠들지 못한다
맑은 물줄기 산을 가르고
모퉁이에서 달려온 빛살이
내 가슴에 뜨겁게 뜨겁게 박힌다
내장산 숨결 한 자락으로
눈발 속을 간다

시인의 삶을 누구는 천형(天刑)에 비교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하는 순간의 희열은 그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크기라 할 것이다. 특히나 10대 중반부터 품었던 꿈으로서의 시인에 대한 갈망과 동경 속에서 십수 년의 기다림 속에서 성취되는 쾌감은 거의 절정에 달하는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등단 작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애정이 가기도 하는 것이다.(그러나 어느 경우에 등단 작이 대표작이 되기도 한다는 한계는 또 하나의 극복되어야 할 벽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눈발」이라는 작품에 애정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눈발」은 1987년 10월 창간 15주년 기념『문학사상』 증면 특대호에 실려 나를 이 세상의 한복판으로 불러내 시인으로 살아가게 한 바로 그 시다. 또한 이 시는 창작과정에서도 나에게는 지울 수 없는 순간의 경이로움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우리에게는 매우 흔한 사실조차도 상황에 따라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우리에게 겨울의 눈발이 주는 신선함도 매번 겪는 일로 치부해 버리면 그렇게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극적인 순간에 새롭게 다가올 때 하나의 자연현상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생의 진한 감동과 깊은 의미를 일깨우며 큰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의 시를 찾아 헤매던 20대 젊은 영혼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더 할 나위가 없는 것이었다.

내게는 눈발을 통한 지울 수 없는 순간의 경험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의 시 「눈발」은 태어났다. 1987년 2월경에 나는 겨울 내장산에서 실시된 1박 2일 일정의 학술세미나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정읍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한동안이나 기다리다가 도착한 내장산, 그때 눈이 내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지하에서 세미나를 끝낸 뒤 저녁을 겸한 간단한 회식을 마치고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와 막 지상에 섰을 때였다. 그때 나의 생애에서 최초로 인식될 만한 엄청난 눈발과 마주칠 수가 있었다. 그 눈발은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어둠 속을 휘몰아가며 거대한 군단을 이루어 계곡으로 휩쓸리는 눈발, 그 눈발 속으로 양옆의 산들도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경이와 충격 앞에서 나는 순간적으로 길을 잃고 말았다. 다소의 취기를 동반하고 한없이 계곡 사이를 걸어가며 양옆의 봉우리를 메우듯이 몰려오는 눈발에 나는 깊게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겨울바람은 사정없이 내 몸을 휩쓸어가고 눈발들은 잠시라도 눈을 떼면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나무들은 온통 눈을 뒤집어쓴 채로 싱싱한 몸뚱이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무들은 은밀하게 나이테를 감으며 겨울 한 복판을 통째로 견디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이 세상의 길들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나는 가슴을 온통 열어 그 눈발들을 다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가슴은 열리지 않았다. 엄청난 그 눈발의 위력에 주눅이 들었던 것이리라. 한동안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면 떼 호랑이가 울고 가는 서래봉 한 자락이 깊은 겨울 밤 눈발 속을 가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내 어깨에도 눈이 쌓여서 나는 어깨 가득 눈을 지고 서있었다. 그렇게 한참 파묻혀 있다가 내가 발을 옮기려면 이미 그 억센 눈발들은 뚝뚝 길을 끊어내고 있었다.

아, 그날의 서래봉 위로 눈발을 몰아오는 바람 소리 속에서 울부짖던 떼 호랑이들! 그 감격스러운 순간 속에 나는 아무 흔적도 없는 눈사태 속을 뚫고 가면서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언덕 위로 올라섰을 때였다. 눈발 속에 모든 것은 깡그리 묻혀버렸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어깨를 맞대고 팔짱을 낀 채 한 몸으로 파르르 떨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산이 큰 가슴을 열어젖히더니 그 품 안으로 빈 들을 끌어들이자 이 세상 가장 먼데서 한 줄기 밝은 빛이 달려와서 마을에 닿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서 하나의 길도 마을로 가닿고 나의 길도 열리고 있었다. 내 가슴으로는 아주 시원한 바람이 한 자락 지나가고 있었다.

요즈음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들 삶이 너무나도 무덤덤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겨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다. 어쩌면 겨울은 양쪽 볼을 가르는 차가운 칼바람과 지상의 길을 모두 끊어버리는 눈발 속에서 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겨울이면 나는 다시 그 날의 겨울 내장산에서 맞닥뜨린 눈발에 한 번 더 세차게 휘말려보고 싶어진다.

이 시 『눈발』에는 그러한 순간의 희열과 열정이 반영되어 있다. 겨울, 밤, 어둠, 눈발이라는 시련을 의미하는 이미지의 중층적 상황 속에서 시적 화자는 “내장산 숨결 한 자락으로 / 눈발 속을 간다”는 의지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나의 첫 시집 『길은 마을에 닿는다』의 표제 시이기도 하고, 또 이 세상에 나를 ‘눈발’의 시인으로 각인시켜 준 시이기도 하다. 나의 첫 시집은 이 시의 한 구절인 “길은 마을에 닿는다”에서 따왔다. 사실 우리가 자신의 초기 시에 대하여 그 의미나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은 첫 시집을 내고 나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시집을 내고 나서도 한동안은 “길은 마을에 닿는다”는 의미를 명확히 새기지는 못 했던 듯하다. 첫 시집에서 중요한 것은 ‘길’과 ‘마을’인데, 길은 곧 시간성에, ‘마을’은 곧 공간성에 많이 기대고 있다고 본다.

나는 1980년대를 지나온 시인이지만 그 시대를 향해서 직격탄을 날리지는 못 했다. 그러면서도 그 시대에 대하여 아파하고 그것을 어떻게 지양해 나아갈 것인지 고심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것을 시를 통해서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한결 어려운 문제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지나보니 ‘길’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의 여러 갈래의 길들 모두를 의미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밝은 길도 있지만 어둡고 시련에 처한 길들이 더 많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길들은 우리가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아도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걸어오고, 앞으로도 걸어가야 할 길 가운데 우리에게 고통이나 시련을 주었던 길은 다 버릴 것인가. 그럴 수도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 삶의 역설적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은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온 부분에 의해서도 추진되지만, 우리에게 어둠으로 다가왔던 부분들에 의해서도 추진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게 우리 삶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이나, 다가오지 말아야 할 길까지도 모두 우리를 마을로 닿게 해준다고 믿는다. 이점이 바로 삶의 역설이고 아이러니이다. 나아가 역으로 말하면 우리에게 다가온 시련들이 오히려 우리 생을 더 강화시켜 주며 성장시켜 준다는 사실이다.

첫 시집에 이어 나의 두 번째 시집 『그리운 없인 저 별 내 가슴에 닿지 못한다』은 이점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의 두 번째 시집은 첫 시집을 좀더 천착해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내 첫 시집에서의 ‘길’은 비극적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마을’은 공동체 삶이 살아있던 마을로 이해한 것이 바로 두 번째 시집이다. 그 결과 비극적 세계관은 「노인의 강」이라는 장시에서 보여주고자 하였다. 또 마을공동체 삶의 아름다움과 활력은 「우리 마을 나무」「마을 당제사」「대동 천렵」「달맞이」「잃어버린 겨울」 등을 중심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하회에 가서 보았던 노인의 삶은 비극적 세계관의 비유로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노인은 죽음을 통해서 강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나룻배로 강을 건너 동시대의 삶을 실어 나르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삶이라는 강을 벗어나는 순간까지는! 바로 그 노인이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열정, 그것은 ‘길’에 걸어가는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모습의 한 전형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마을’은 우리가 공동체 삶으로 다가서야 할 모습이다. 적어도 나의 유년시절 우리 마을에는 두레와 협동에 의한 신성한 노동과 축제가 함께 하는 삶이 남아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시 「눈발」은 여러모로 나에게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나를 이 세상에 시인으로 세워준 시, 그리고 나의 시집 서두에 놓임으로써 나의 첫 시집의 대표적 성격을 보여주며 향후 시세계의 방향키 역할을 하는 시였다. 아, 나는 그 날의 눈발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3. 야간비행

수년전에 프랑스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쌩텍쥐베리의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는 갖가지 행사를 펼쳤던 적이 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어린 왕자』로 잘 알려져 있다. 프랑스가 이 행사를 펼치는 동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어린 왕자』는 불티나게 팔리고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죽음의 향방을 찾아 나서려는 일련의 움직임들도 있었으나 그것은 도로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다. 쌩텍쥐베리는 2차 대전 중에 파일로트로 참전하여 하늘을 날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로 그는 비행기의 추락으로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그의 최후의 알리바이이다. 또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가 밝혀진 것이 없기도 하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제 2차 대전 말기에 사하라 사막으로 추락했다, 태평양 어딘가에 추락했다는 추측들만 무성할 뿐이다.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이 두 곳을 탐사하기도 하였지만 그 것은 불가능한 일일 뿐이었다. 오히려 나는 그의 이 ‘종적을 찾을 수 없음’이라는 맥락이 더욱더 쌩텍쥐베리답고 그의 예술가적 삶에 의미를 부여해준다고 판단한다. 그는 우리가 그의 죽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남긴, 나에게 거의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말 한마디에서 그의 새로운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를 남겼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마주칠 뿐만 아니라, 추월할 수 있어야 한다”
쌩텍쥐베리는 작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어린왕자』 외에도 『야간비행』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또한 실제로 비행조종사로서 ‘야간비행’을 즐기기도 하였다. 나는 그가 남긴 앞의 말 한 마디와 야간비행에서 그의 죽음이라는 의미의 맥락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왜 야간비행을 즐겼을까.

그가 남긴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마주칠 뿐만 아니라, 추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운명을 미리 알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해도 눈치 챌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현실에 충실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에 대한 연결고리를 좀 더 튼튼하게 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쌩텍쥐베리는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마주칠 뿐 아니라, 그것을 추월해야 한다고 했다. 마주친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 앞에 서서 뒤에 오는 운명을 마주 바라본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추월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앞질러 간다는 것, 자신의 운명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은 개척하는 것, 나아가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이끌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쌩텍쥐베리가 바라본 자신의 운명론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야간비행을 즐겼을까. 인간이 운명은 시간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해진 시간을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운명에 이끌려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쌩텍쥐베리는 그냥 앉아서 하루의 시간이 어둠으로 자신을 덮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운명의 지배 아래 놓이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서 나는 쌩텍쥐베리의 야간비행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일상의 시간이 지배하는 생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을 앞질러 가기 위해 그는 빛을 향해 계속 날아가려 야간 비행을 즐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야간비행은 자신의 운명을 추월하기 위하여 벌였던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그는 또한 자신의 죽음까지도 추월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쌩텍쥐베리의 예술정신 또는 모든 ‘예술가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매일 밤마다 하늘을 살핀다. 오늘 밤에도 나는 어둠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하늘의 별을 살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우주의 어느 행성을 타고 쌩텍쥐베리는 시간을 앞질러 4차원, 5차원의 공간을 날고 있으리라고 믿어본다. 그리하여 내가 밤이면 밤마다 하늘을 살피면서 별의 행방을 쫓는 것은 단지 별들을 바라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약 력>
1987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
시집 『길은 마을에 닿는다』외
비평집 『한국 현대시의 지평과 심층』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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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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