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대 유학  결혼, LA  전업주부로 생활
50대에 림프암 말기 진단, 3   유방암 수술

 

 

암 투병 중이던 50대 중반 시인으로 등단해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도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김영교 시인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투병 중이던 50 중반 시인으로 등단해 고희를 넘긴 지금까지도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김영교 시인이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상진 

 

 
 

94년 투병 중 시인 등단
시집 8권·수필집 4권 내 

장학회 운영·후학양성 열심 
"암 통해 감사·은혜 깨달아"
 

눈 맑은 노시인과 마주 앉았다.

화가 모딜리아니 연인 잔 에뷔테르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긴 목을 가진 시인은

닿으면 베일 듯 섬세한 그녀의 시와는 달리 무척이나 털털하고 소박했다.

김영교(76) 시인이다. 지천명 넘어 두 번이나 불쑥 들이닥친 암이란 녀석 덕분에

평탄치 않은 시간을 통과했을 터인데도 그녀는 그늘 한 점 없는 아이처럼

유쾌하고 밝은 에너지로 충만했다.

덕분에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부터 암투병과 시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 그녀와의 오랜 대화 혹은 수다는 꽤 즐거웠다. 

#유학생에서 주부로 

경남 통영이 고향인 그녀는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은행 국제부에서 잠시 근무하다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어교육을 공부했다.

당시 미국 유학생들은 미 정부에 폐결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X레이 원본 필름을 들고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는 흑백 다큐멘터리 같은 이야기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그녀의 드라마틱한 러브스토리.

유학 와 첫 여름방학 때 샌프란시스코 친구 집에 갔다 유학생인 남편을 보고

첫눈에 반해 학교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고 1년여 열애 끝 결혼에 이르렀단다.

꽤나 21세기스러운 20세기 러브스토리 속 여주인공이 당시로선 보기 드문

강단진 신여성 캐릭터인 것 같다고 농을 건네자 그녀가 웃는다. 

"뜨거운 청춘이었으니까요.(웃음) 학업을 포기한 걸 후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덕분에 듬직한 남편과 멋진 두 아들 만날 수 있었으니 오히려 득이죠.(웃음)"

결혼 후 1969년 LA로 이주해 시작한 남편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말 그대로 그녀는 '부잣집 사모님'이 됐다.

두 아들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암 환자에서 시인으로 

그러나 꽃길만 걷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녀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93년 임파선 암 말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당시 그녀 나이 54세.

대학 때부터 쳐온 테니스가 수준급이고 싱글 골퍼에 당시 수영까지 배우는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녀에게 위암 선고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당시 다른 증상은 없었어요. 살이 좀 빠지긴 했는데 수영 때문에 그런가보다 했으니까요.

그러다 남편이 출장을 간 날 시어머니 댁에 갔다 새벽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어요. 어머니 가 절 살리신 거죠."

그날로 병원에 입원한 그녀는 7시간의 수혈을 거쳐 위의 3/4가량과 비장까지 절제하는 큰 수술을 했다.

수술 후 다음날이 돼서야 깨어난 그녀는 수술 후 절제한 위 때문에 한 숟가락만 먹어도 바로 토했다.

먹고 토하고, 토하고 먹는 일상이 반복됐다. 어디 이뿐이랴.

이후 2년간 30여 차례가 넘는 독한 키모테라피도 견뎌야 했다.

그 고통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그녀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시였다. 

"병상에 있으며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 됐죠.

그러면서 살아 있는 것에, 사랑하는 이들이 옆에 있는 것에

감사한 마음을 기록하고 싶어 일기를 쓰게 됐어요."

펜을 들 힘도 없어 하루에 몇 줄씩 써내려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렇게 꾸준히 쓴 그녀의 병상일기는 1995년 시집 '우슬초 찬가'로 엮여 세상에 나왔다.

그녀의 문단 데뷔는 이보다 1년 앞선 1994년 '자유문학' 4월호에 시 '이민 우물'을 발표하면서다. 

"한국에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큰 오빠가 미국에 병문안 왔다 제 습작 노트를 보고 등단을 권유했죠.

분명 투병 중인 이들에게 삶의 의지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오빠의 말에 힘입어 등단을 했어요." 

병마가 가져다 준 '선물'은 비단 시집뿐만이 아니었다. 

"암에 걸리기 이전까진 잘난 척, 있는 척, 아는 척하며 살았죠.

그러나 병상에서 진정한 저를 발견하면서 그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고 나니 삶 앞에 겸손하게 되고 세상을 보는 눈이 긍정적으로 변하게 됐습니다. 축복이며 은혜였죠."

건강이 회복되자 그녀는 왕성한 창작의지를 불태워 지난해까지 총 8권의 시집과 4권의 수필집을 발간했다.

또 해외 문학상(2005), 이화 문학상(2006), 노산 문학상(2010), 미주 문학상(2014), 올해의 재미시인상(2016) 등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미주문인협회 부이사장 및 재미시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주 문단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런가하면 1999년엔 시어머니와 자신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딴 '귀영장학회'를 만들어

장학사업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암을 통해 행복을 배우다

이후 그녀는 가디나 글사랑 창작교실과 사우스베이 평생대학에서

시 창작 지도를 하는 등 후학양성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다 2014년 두 번째 암이 들이닥쳤다.

정기검진에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소리가 절로 나왔을 듯싶었다. 

"뭐 담담했어요. 그래도 그때라도 알게 돼 천만 다행이다 싶었죠.

그러면서 암에게 말했죠. 나 림프암도 이겨낸 여자야라고.(웃음)"

수술을 통해 왼쪽 가슴을 부분절제 했고 1년간 방사선 치료도 받아야 했다. 

"분명 힘든 시간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제게 암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고

이전엔 몰랐던 감사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됐으니까요."

일흔 중반에 만난 암과 동행한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그녀의 시작(詩作) 열정은 꺾을 수 없었다.

2012년 출간된 수필집 '꽃구경'에서 그녀는 '글을 쓰고 싶은 열정과 꿈이 가늘게 흔들리던

나의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지 않았나 뒤돌아보게 된다. 눈물도 많았고 외로운 날도 많았다.

밤잠 설치며 내 몫의 고통을 잘 감당하도록 참을성 없는 내가 다듬어져 가고 있었다.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밤잠 설쳐가며 쓴 시들을 모아 지난해 여덟 번째 시집 '파르르 떠는 열애'를 펴냈다.

시집 속 수 많은 시들 중 서울지하철 승강장 안전문에도 게시돼

서울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쉬어가는 의자'가 눈길을 끈다.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이제 앉기로 한다/(중략)/내리막길이 다리 뻗고 앉으니/맑은 바람이 앉고

/햇살이 퍼질러 앉고/마음을 지나가는 고마운 생각들/무리지어/어르며 흔들며/

아삭아삭 앉는다' 아마도 이 시는 삶을 향한 수줍은 떨림과 치열한 열애 사이를 건너온

여류 노시인의 자기고백인 동시에 세상 모든 약한 것들에게 내미는 따스한 위로이며 응원일지도 모르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LA 중앙일보]

2017. 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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