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6일 이곳 중앙일보는 "야한 여자가 좋다"...시대와 불화했던 마광수 떠나다. 기사를 읽었다. 

서울 방문, 그 어느 해  한강이 바로 옆에 있는 동부이촌 서빙고동 

그 동네 

슈퍼에서

마광수교수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도 그 근처에 살고 있는듯 했다.

외견으로는 지극히 수수했던 옷차림이 기억에 남아있다. 

큰 오라버니 댁이 서빙고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 김영교

그리고 9월 8일 한국 중앙일보 양성희기자가 <내가 오해했던 그 남자, 마광수> 중앙칼럼으로 발표했다. 공감했다. 오려서 clipping해 두었다. 참고자료로 보관하고 싶어서다.



*비지상적 욕구와 이성주의에 대한 저항

 -- 마광수의 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해설

                                                 유재천 (경상대 국문과 교수) 


서빙고인간의 역사는 신적인 세계관과 지상적인 세계관 사이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 시대에 신적인 질서가 지배적이면 다음 시대에는 지상적인 질서가 들고 일어나게 된다. 신적인 질서가 지배적일 때 인간의 지상적 욕망은 억압된다. 반대로 지상적 질서가 지배적일 때 무질서와 혼돈이 초래된다. 

인류 역사가 시대별로 지향점을 바꾸는 이유는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신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인류 역사가 두 축을 중심으로 교체되기는 하지만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지상적인 질서와 욕망에 억압이 가해지지 않는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는 않았다. 조선시대 엄숙한 유교적인 전통 속에서도 <어우야담>이나 <고금소총> 같은 외설적인 내용의 문헌이 존재했고 서민들의 판소리나 풍속화, 민요 속에 나타나는 성적인 묘사는 엄숙한 이성주의에 냉소를 보내고 있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일 뿐 아니라 감정과 욕망체계로 이루어진 지상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지상적인 욕구에 대한 부정은 그런 면에서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많은 문학 작품들이 성적인 자유와 해방을 외쳤던 것도 이성주의적이고 신적인 세계관의 억압으로부터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자유를 획득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인 자유를 외쳤던 많은 문학들은 당대에는 외설로 지탄받고 법정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뒷날 그런 문학들은 엄숙주의에 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일보 진전시킨 고전으로 추앙받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 거짓 같다
감추려 하는 표정이 없이 너무 적나라하게 자신에 넘쳐
나를 압도한다 뻔뻔스런 독재자처럼
적(敵)처럼 속물주의적 애국자처럼
화장한 여인의 얼굴에선 여인의 본능이 빛처럼 흐르고
더 호소적이다 모든 외로운 남성들에게
한층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가끔씩 눈물이 화장 위에 얼룩져 흐를 때
나는 더욱 감상적으로 슬퍼져서 여인이 사랑스럽다
현실적, 현실적으로 되어 나도 화장을 하고 싶다
분으로 덕지덕지 얼굴을 가리고 싶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라도 하여
내 몸을 주렁주렁 감싸 안고 싶다
현실적으로
진짜 현실적으로

―- 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79)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지상적 속성을 부정하는 이성주의의 엄숙성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연 구분 없이 전체 23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의미상으로 화장한 여자에 대한 예찬, 화장기 없는 여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도 화장하고 싶다는 내용의 세 단락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 단락에서 시인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파격적인 발언에 이어 "꼭 금이나 다이아몬드가 아니더라도/ 양철로 된 귀걸이, 반지, 팔찌를/ 주렁주렁 늘어뜨린 여자는 아름답다", "화장을 많이 한 여자는 더욱더 아름답다", 다음 단락의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로 화장의 농도를 점층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면서 화장한 여자가 좋다는 주장을 과장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첫 단락의 과장적인 어조는 시를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부분이 지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육체적 욕망의 추구에만 마음을 쓰는 여인들의 천박한 속물성을 비꼬기 위한 언어적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묘미는 그러한 상식적인 논리를 뒤집어엎는 마광수 특유의 어법에서 나온다. 시인은 순진한 척 하면서 화장한 여자가 좋다고 우겨댐으로써 실제로는 화장기 없는 메마른 얼굴보다 감정과 욕망을 가진 화장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는 엄숙주의적 태도의 이중성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숙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진지하고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그것에 부딪칠 만한 힘이 없는 시인의 자신에 대한 씁쓸한 시선이 반어적인 어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 시인은 화장한 여자와 화장기 없는 여인을 대조시켜 화장한 여자의 얼굴에서는 순수한 얼굴이 보석처럼 빛나고 화장기 없는 여인은 독재자, 속물주의적 애국자 같다는 역설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장은 거짓이나 감춤, 속임수 등의 상징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덕지덕지 바른 한 파운드의 분(粉) 아래서/ 순수한 얼굴은 보석처럼 빛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거나 화장기가 없는 여인은/ 훨씬 덜 순수해 보인다"는 구절은 논리적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구절은 화장이라는 것이 남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의 표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표면적인 논리 이면의 또 다른 진리를 드러내게 된다.

이성 중심적 사고에서 지상적 욕망이나 감정은 부정적인 것, 또는 억압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감정과 욕망은 생명 그 자체의 자연스런 표출이며 어떤 의미에서 생명 자체와 동일시될 수도 있는 성질의 것이다. 시인이 보석에 비유한 순수한 얼굴은 바로 이성에 의해 억압되지 않은 원시적인 발랄한 욕구와 생명력을 의미한다. 화장은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원시적 생명력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양식이기 때문에 화장한 여자는 아름다운 것이다. 

억압되지 않은 발랄한 생명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거기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완벽한 조화와 통일이 있다. 현대의 이성 중심적 사회는 그러한 조화와 통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정한 가슴과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만이 가득할 뿐 인간의 발랄한 생명력은 가슴 속 깊이 억압되어 묻혀 있다. 이성 중심적 사회에서 그것은 마치 땅 속 깊이 묻혀 있는 보석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화장은 묻혀 있는 보석, 즉 억압되어 있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인간적 욕망과 감정을 드러내주는 수단인 셈이다. 따라서 화장한 여자는 욕망을 억압하고 감추는 이성 중심적인 냉정한 가슴을 의미하는 화장기 없는 얼굴보다 훨씬 더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시인이 화장기 없는 여인을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와 비유하여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는 그들의 획일적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자유와 욕망을 억압한다. 그들에게 지상적 욕망은 부정적이고 천박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엄숙한 얼굴을 가장한다. 그들의 엄숙주의 밑에서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생명과 욕망은 질식당한다.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은 여인이나 화장기 없는 여인은 인간다운 욕망이 없거나 그것을 감추고 엄숙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똑같이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억압하는 독재자나 속물적 애국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시인은 자신도 현실적으로 되어 화장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되어" 라는 구절은 시인 스스로 현실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것, 즉 엄숙주의적 세계에서 욕망을 숨기고 그것을 가장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인을 억압하고 있는 엄숙주의적 세계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연 그대로 마광수로서의 삶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시인의 자아는 질식당할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다. 

시인은 과장적인 어조로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로 주렁주렁 몸을 감싸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데 이는 이성 중심적 사회 속에서 극도로 억압된 욕망의 자기실현을 위한 애절한 몸짓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성중심적 사회에서 엄숙주의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시인의 지상적 자아는 극도로 위축되고 억압될 수밖에 없다. 분열 직전의 위축된 자아는 화장한 여자들처럼 화장을 덕지덕지 바르고 귀걸이, 팔지, 반지, 목걸이로 몸을 주렁주렁 감쌈으로써 자연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살고 싶은 것이다.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화장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지상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을 위축시키는 경직된 엄숙주의적 사회의 이중성을 비판하고 있는 시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성적인 이야기를 넘어선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압하고 이성의 탈 속에서 탈색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독재문화, 엄숙한 윤리주의, 엄숙을 강요하는 많은 이데올로기와 편견 등 우리 주위의 모든 엄숙주의 문화 전반에 대한 마광수식 저항이 바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시인 것이다.
    


출처: http://formks.tistory.com/1052 [마광수 교수의 <표현의 자유>와 <즐거운 사라>의 자유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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