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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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기다림이 있는 둥지

2007.02.18 08:39

윤금숙 조회 수:686 추천:92

기다림이 있는 둥지

   LA의 한국 양로원에 있는 최할머니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 나는 그곳을 찾게 된다.
  그날도 수수팥떡, 인절미, 밑반찬을 준비해 가지고 갔었다. 화창한 봄과는 거리가 먼 건물안의 긴 복도는 눅눅하고 퀴쿠한 공기가 하나의 다른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한 방에 네 명씩 있는 열려진 노인들의 방을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습관처럼 양쪽으로 고개짓을 하며 마치 사열식을 하듯 점검하게 된다. 누워 있는 분, 앉아 있는 분, 모두 고개는 문쪽을 향한 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허망한 눈빛이 뇌리에 가시인 양 박힌다.
  이곳은 문득 오래 전 대학교 기숙사를 연상하게 된다. 그곳에서 젊음의 꽃을 피우며 미래를 계획했던 일들이 엊그제 같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때의 선배들이 지금쯤 혹시라도 양로원에 있는 분이 있다면, 연보라빛 꿈을 꾸던 젊은 날의 기숙사를 연상하고 밝고 긍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최할머니가 있는 방의 네 분 중 두 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모르는 과거를 잃어버린 노인들이다. 벽에는 큰 글씨로 밥, 물, 변소, 약 등을 적어 놓았는데 그 옆에는 스페인 말로 토를 달아 놓았다. 시중 드는 간병인들이 거의가 멕시코 여자들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벽에는 길쭉한 옷장 네 개가 나란히 있는데 자물쇠가 채워져 있기도 했다. 잠그지 않아도 양로원 안에서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잠궈야 안심이 되는 노인들의 마음이 애처롭다. 침대 밑에도 무슨 박스들이 갈 때마다 늘어 나는지, 모든 것을 정리할 때인데도 자꾸만 늘리고 있는 모습들이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의  물욕에 대한 집착으로 보였다.
  최할머니 침대 옆 스탠드에 눈길이 갔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딸과 함게 아주 오래 전에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아름다웠던 지난날의 추억을 말해줬다.
  할머니는 팔십육 세라는 연세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곱고 깨긋해서 나이가 들어도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고운 주름살은 많은 인생의 역경들과 기쁨을 조화시켜 잘 견뎌낸 연륜의 흔적인 것이다.
  무남독녀 외딸을 일찍 하늘 나라에 보낸 후 아픔을 이기고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했다. 항상 딸은 할머니의 마음 한 가운데 자리잡고 함께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할아버지와 딸이 먼저 가서 기다려 주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는가고 반문하며 오히려 나의 젖은 눈을 바라본다. 슬픔을 승화시킨 할머니의 모습은 세상에 어머니들만이 가질 수 있는 들에 핀 야생초의 삶과 같은 것이다.
  화장실이 구석에 있고 그 옆에는 작은 프라스틱 통에 얼음 봉지와 함께 짭짤한 밑반찬이 몇 가지 들어 있다. 얼마 전에 만들어 왔던 장조림이 너무 맛있어서 죽을 매번 다 먹었다며 다음에 올 때는 냉장고가 없어 상하기 쉬우니 더 짜게 해오라 한다.
  최할머니는 밤이 되면 뼛속이 여기저기 쑤시지만 그래도 견딜만 하고 감사한 것은 무엇보다 치매증 없이 이렇게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명랑한 성격에 긍정적이고 무엇에나 감사가 떠날 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깨끗하게 차리고 여자 노인네들 방을 보조기에 의지하여 한바퀴 쭉 돌아 안부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날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할머니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다니며 이야기를 나눈다. 별로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외롭다고 한탄하지 않고 스스로 기쁘게 지내는 최할머니의 모습은 평화스럽게 보였다.
  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상대방의 지나간 이야기들을 들어 주는 일이다. 최할머니는 일체 본인의 이야기는 접어 둔 채 상대방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어주는 인내심이 있다. 그들에게 은근한 희망을 속삭이며, 마치 마른 꽃에 생명을 불어 넣어 다시 피언 난 듯 잠시나마 영롱한 빛을 반짝하게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할머니의 인기는 뜨는 해이다. 밑반찬 가져 오라는 것도 분명 주위의 노인네들을 위한 것일 것이다.
  최할머니 옆 침대의 박할머니는 같은 동갑이지만 약간 정신이 혼미한 분이다.
  “아들 셋이 다들 성공했어. 큰아들네는 뜰도 넓고 집도 크지. 내가 오르내리기 힘들다고 아래층 방을 주었지. 창밖으로 내다보면 온갖 꽃들이 보여, 내가 좋아하는 백일홍, 금잔화, 봉선화를 해마다 아들은 심어 줬어. 지금쯤 진달래, 개나리도 만발 했을 거야. 산도 보이고 초가집도 보이고 소달구지도 지나 갈 거야.  다음 주일에 나 집에 가. 아들이 데리러 온다고 했어.”
  똑같은 말을 삼 년째 계속하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집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박할머니의 희망사항이며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도 한 가닥 꿈인 것이다.
  어느 날 박할머니는 심장마비로 갑자기 자녀들도 당도하기 전에 숨을 거뒀다. 자식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와 그동안 용돈을 쓰지 않고 모아 놓은 것이 침대 밑에 꼬깃꼬깃 접힌 채 나와 자식들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너희들이 데리러 오기 전에 먼저 집으로 가는 에미를 용서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박할머니의 영혼은 충청도 고향 마을에 가셨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박할머니의 죽음은 최할머니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몇 년을 형제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박할머니의 깊은 속마음은 물론 한숨소리, 침묵의 의미까지도 짐작할 수 있었으니,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최할머니는 드디어 몸져 누워버렸다.
  황혼의 인생. 오십 대, 육십 대로 댜시는 돌아 갈 수 없는 일방통행.
  양로원의 노인들에게도 한때는 젊음이 있었고 뜨거웠던 사랑도 있었으리라. 아낌없는 사랑과 희생을 남편과 자식들에게 쏟아붓고 살았었다. 이제는 아름다웠던 지난 세월들을 뒤로 한 채 두 평 정도로 허락된 자신의 공간 안에서 그들은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래도 느낌이 있는 분들은 다행이다. 느낌과 감각이 없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아픔이었다.
  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내 모습은 어떨까?
  내 육신이 움직일 수 없게 되기 전에 내 스스로 먼저 양로원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자식들에 의하여 밀려 가느냐를 생각하면 슬픈 마음이 든다.
  그래도 내 자식들만은 나와 ㄱㅡㅌ까지 함께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오늘도 열심히 건강을 위해 운동도 하고 즐겁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 것이다.



(본국 ‘수필문학’ 추천완료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