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을 위해 걷는다
매년 레블론 화장품 회사가 주최하는 여성들의 암을 위한 캠페인이 어머니날 바로 전날에 열린다. LA 콜러시움에서 대대적으로 열리는 이 행사(Revlon Run/Walk for Women’s Cancer)는 올해가 19년째이며 거의 4만 명에 이르는 참가자들이 모인다.
지난 5월12일, 토요일 새벽에 나는 암을 이겨낸 친구 세 명과 또 그들을 위해서 참가하고 싶다는 친구들과 함께 집 근처 모임의 장소로 갔다. 도네이션으로 빌린 스쿨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우리 팀 40여 명이 아이들까지 모두 모였다.
7시가 조금 넘어 도착한 콜러시움은 참석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저기에서 팀의 캡틴은 피켓을 들고 멤버들을 챙기고 있었고 그룹마다 울긋불긋 유니폼이 아름다웠다. 어느 그룹은 핑크 깃털모자에 부츠를 신고 마치 K-Pop을 방불케 하는 모습으로 춤들을 신나게 추고 있었다.
우리 팀장인 수잔은 흰 티셔츠를 본부에서 받아 짙은 하늘색으로 염색을 해서 팀들에게 입혔다. 유니폼은 화창한 봄 날씨에 잘 어울렸고 눈에 확 띄어 팀에서 이탈될 염려가 없었다. 참가비는 일 인당 35불이며 로고
가 있는 티셔츠와 번호표를 받게 된다.
간단한 개회식과 암을 이겨낸 생존자들의 경험담이 끝나고 9시부터 출발해서 3마일을 뛰거나 걷는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부부들, 휠체어를 밀고 가는 가족들, 가슴에는 모두가 번호판을 달고 등에는 누구누구를 위해서 이 대회에 참석한다는 글, 또는 암을 이겨낸 생존자들이 무슨무슨 암을 몇 년째 이겨내고 당당하게 살고 있다는 글. 나는 그 글들을 읽느라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모두가 아름답고 자랑스런 모습들이다.
2005년 5월 2일, 37세밖에 안된 내 딸 수잔이 자궁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던 날. 7세, 5세짜리 딸과 겨우 돌이 지나 아직도 엄마 젖을 찾는 아들이 있는데... 둘이 다 젊고 건강해서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왠지 내가 잘못해서 내 딸이 병이 난 것만 같아 나는 밖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2006년 부터 수잔은 주위의 친구들에게 ‘레블론 런/워크’ 에 참석하자는 간절한 편지와 도네이션을 부탁했다. 그리고 팀을 모아 40여 명이 어머니날을 기념해서 이 행사에 참석하기를 시작했다. 첫 해에는 미국인들 속에 나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참석을 했었다. 누구를 위해 걷는다는 푯말도 달지 못하고 번호판만 가슴에 겨우 달고 걸었다.
딸은 당당하게 그동안의 사연을 자세하게 적어 등에 크게 써 붙이고 씩씩하게 걷는다. 나는 딸 뒤를 쫓아가며 그 사연을 가리고 싶었다. 그런데 50쯤 돼 보이는 예쁜 여자의 등판에 쓴 사연이 내 눈에 들어왔다. 무슨무슨 암을 두 번이나 이겨낸 지가 30년이 지났다는 글이었다. ‘30’ 이라는 숫자를 보는 순간 내 눈이 확 떠지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숫자에 내가 이렇게 위로를 받는데 암 생존자들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될 것인가. 나는 내 딸의 푯말을 가리고 싶었던 알량한 속 마음을 누가 알까봐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내 딸의 모습이 자랑스럽고 커 보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고 등판에 써 붙이고 돌 지난 아들의 유모차를 씩씩하게 밀면서 걸어가는 사위의 어깨가 든든해 보였고, 두 손녀 등에 붙인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라는 푯말이 하트 안에서 빤짝빤짝 빛났다.
7년째 참석하고 있는 나에게 올해 행사는 어느 때보다 뜻 깊고 더 힘이 났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함께 한 것도 있지만 유모차를 탔던 손자가 여덟 살이 되었는데 자기는 앞으로 평생 이 행사에 참석할 거라며 씩씩하게
걷는 모습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암 정복을 위한 연구기관이 많고 그들을 위해서 많은 모금 운동이 활발하지만 오늘도 주위에서는 나이에 상관없이 암 환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끝나고 나서 모두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이런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자체가 행복하고 감사하다며 상기된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내년에는 더 많은 분들이 이 행사를 위해서 따뜻한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라며.
한국일보 6월8일(금요일) 2012년
문화면 / 수필로 쓴 삶에 게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