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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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

2011.12.28 13:08

윤금숙 조회 수:677 추천:14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
              
                                                                                                                                   윤금숙

  한국의 아침시간에 맞추어 국제전화를 했다. 음력 정월 보름이 어머니의 생신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다 모이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를 선두로 세 명의 동생들이 줄을 서서 나와의 통화를 기다린다고 했다. 마지막 막네 동생 차례가 되었다. 동생은 “아이구! 늙은이들 상대하려니 유치해서 죽겠네. 비싼 국제전화에 쑥떡 얘기만 하니 어디 수준 안 맞아 상대 하겠어.”했다. 끊고 나서 생각하니 정말 그동안 안부는 묻지도 않았고 웬 쑥떡 얘기로 시작해서 쑥떡으로 끝을 내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큰동생은 어디 인편 없는가고 찾다가 끝을 냈고, 둘째 동생도 언니가 빨리 와서 가져가라는 얘기였다. 마지막 끝맺음 대화를 다시 어머니로 와서 “야! 쑥떡 얼
려 놓았다가 푸라이팬에 참기름 살짝 둘러 노릿노릿하게 구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 줄 아냐?” 하고 장장 1시간이 넘는 통화의 내용은 쑥떡 이야기 밖에 없었다.  
  몇 년 전, 어머니 팔순에 갔었을 때 집에서 만들었던 씁스름한 쑥떡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당장 달려가서 한데 어울러져 어릴적 시절을 다시 꽃피우고 싶은 마음이 팽배해졌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의 붉디붉은 동백꽃을 바라보니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그 꽃에 어른거렸다. 행사 때마다 가족이 모여 있을 때
같이 하지 못하는 아픔이 디아스포라의 외로움을 더 짙게 했다.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상념에서 갑자기 생각을 훌훌 털고 일어나 한국시장에 가서 쑥떡이나 사다 먹어야 되겠다싶어 차를 몰았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얼핏 한국 노인네인듯 싶은 분이 앉아 있었다. 이미 지나쳤지만 쓸쓸히 혼자 앉아 있는 노인네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분명 한국분일 것 같았다. 얼핏 본 모습에서 어머니의 단정한 자태가 비쳤다. 한국에 계신 어머니도 택시값이 아까워 버스를 타고 시장엘 가신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회전을 해서 한 블록을 돌아 다시 그자리에 와서 차를 멈췄다.
  “할머니! 한국분이시죠? 타세요. 어디든지 모셔다 드릴게요.”
  그 할머니는 잠시 눈을 껌벅껌벅 하시더니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내 차 옆으로 오셨다.
  “한국 사람이구먼. 아이구, 반가워라.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차문을 열고 옆자리에 앉았다. 할머니는 어쩌면 내 어머니의 연세보다 좀 더 들어보이시기는 해도 노인네답지 않게 자세가 꼿꼿했다. 곱상하시고 늘씬하신 키에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것 같았다. 은백색 쇼트 커트 머리가 진보라 블라우스와 잘 어울렸다. 우리 어머니도 보라색을 좋아하셔서 귀국 선물로 언제나 보라색 계통의 옷을 사 가곤 했었다. 볼 수록 우리 어머니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할머니! 멋쟁이세요.”
  기분이 좋으신지 할머니는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혼자 노인 아파트에 살며 매주 금요일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한국시장에 가서 3시간 동안 교회 전도지를 논아 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반찬거리를 사 가지고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이 일주일 중 가장 즐거운 날이라 했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와 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 하찮은 일에도 너무나 감사해 하시며 매일 나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한국시장 가는 도중에 할머니의 아파트가 있다. 조금만 마음을 쓰면 매주 태워다 드릴 수 있건 만은 그일이 그렇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다 할머니를 깜빡 잊고 혼자 느지막하게 시장에 들르면 할머니는 피곤한지 빵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아마도 전도지를 다 논아 주고
버스 시간을 기다리시는 것 같았다. 한국에 홀로 계시는 우리 어머니도 저러시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느날 할머니 아파트에 약식을 조금 해가지고 갔었다. 방 하나에 응접실, 부엌이 있는 인형의 집 같은 아파트 안을 예쁘게 꾸며 놓고 혼자 살고 계셨다. 침실이나 응접실에는 가족 사진이 즐비하며 큰아들 가족이 한국에서 잘 살고 있으며 가까운 곳에 딸이 살고 있는데 효녀라고 했다.
  바쁜 생활에 잊어버리고 살다가도 철이 바뀔 때가 되면 문득 할머니가 생각나서 “할머니!”하고 전화를 건
다.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번에 알아보고 “아이고! 반가워라. 이렇게 전화를 받으려고 어젯밤 꿈에
보였나보다.” 해서 나를 미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이른 겨울비가 부슬부슬 흩뿌리고 있으니 어머니의 쑥떡 생각이 간절해졌다. 할머니를 찾아 갔다. 할머니는 어쩐지 내가 올 것 같아 어제 쑥떡을 조금 해놓았다며 푸라이팬에다 참기름을 둘러 노릿노릿하게 구워 내놓으셨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와 똑 같은 식으로 하실까. 멋쟁이 할머니는 커피까지 예쁜 잔에 받쳐서 내오셨다. 우리 어머니와 얘기하듯 정답게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돌아올 때는 내일 아침에 신랑 그냥 출근 시키지 말고 쑥떡 구워 먹여 보내라며 얼려놓은 쑥떡 보따리를 챙겨주셨다. 할머니의 정을 가슴에 가득 담고 돌아와서 한국에 전화를 했다. 이제는 쑥떡 걱정은 아예 하지를 마시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한테서 못 배운 쑥떡 만드는 법을 전수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입맛을 잃은 누군가의 건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대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2011년 12월
재미수필 13집에 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