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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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단풍은 다시 물 들지만

2011.12.28 13:05

윤금숙 조회 수:458 추천:14

                     단풍은 다시 물 들지만
                                                                                                                                        윤금숙
                                                                                        
  햇빛 잘 드는 남향 이층방에 친구는 종일 누워 있었다. 전망 좋은 친구의 방, 창 밖에는 아름다운 단풍나무 한 그루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초봄에 별 모양의 속 이파리를 반짝거리며 내놓더니 어느덧 단풍으로 물이 들어가고 있었다.
  날마다 붉은 색깔을 안으로 깊숙이 삭이고 있는 단풍을 바라보며 나는 친구의 병세를 안타깝게 가늠해 봤
다. 친구는 위암 수술을 받았는데 회복된 줄 알았던 암이 6개월 만에 재발되고 말았다. 현대의학으로도 어쩔 수가 없어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 싶이 나는 친구를 보러 갔다.
  친구의 집 앞에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운치있게 서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흔치 않은 나무라 더 눈에 띄었다. 가을이 되면 주위의 친구들은 단풍나무를 핑계 삼아 이 집에 모여들곤 했다. 즐겁게 모이던 친구들은 이제 병문안을 하러 와서 슬픈 마음으로 단풍을 보게 됐다. 단풍잎은 머지않아 화려했던 지난 날을 접고 땅에 떨어져 비참하게 짓밟혀질 것이다.
  산위에 있는 친구의 집, 침실의 한쪽 벽면은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그 창문에는 아른아른 속살을 비칠듯 물항라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양쪽으로 가는 허리를 잘근 동여맨 자주색 꽃무늬 커튼이 방안의 분위기를 낭만으로 이끌고 있었다. 속 커튼까지 양쪽으로 활짝 젖히면, 서울의 대한극장에서 친구와 보았던 씨네마스코프 화면에 “밴허”라는 영화가 스팩타클하게 펼쳐질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보다 더 화려한 자연의 무대가 막을 올려 친구의 병실 분위기를 수시로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은, 산봉우리가 구름에 싸여 한폭의 동양화 병풍으로 둘려진 안방마님으로 다가오고, 또 어느 날은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창문을 두드려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주기도 했다.
  창너머 보이는 단풍나무는 연회색 구름을 배경으로 더욱더 붉게 물들어 속앓이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비 바람을 맞으면서도 잎을 떨구지 않으려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단풍의 자세는 이별을 예감하고 있는듯 애처러웠다.
  단풍의 변화는 마치 인간사를 생각하게 했다. 단풍은 찬서리를 이겨내고 붉게 물들어 있는데, 오히려 인간은 자연을 거부하고 추위를 견디려 하지 않는다.
  인내하며 비 바람을 견뎌내는 단풍을 바라보며, 친구는 인내와 용서에 인색했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실패로 이끌었다고 자백했다. 오랫동안 혼자 지냈던 친구는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자유스럽고 행복해 보였지만 텅빈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나 보다. 죽음을 앞에 두고 지난 일들을 후회하는 친구를 보며 내 마음 또한 착잡해졌다.
  인생을 사계절로 구분한다면 친구와 나는 가을 나이가 되었다. 가을은 올 때부터 이별을 안고 오는지 잡을 사이도 없이 빨리 지나가버려 더 아쉬운 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나는 내년의 가을을 여유롭게 기다리지만 친구에게는 아마도 마지막 가을이 될 것 같아 더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온몸으로 피를 토하고 있는 단풍은 친구의 아픔을 말해주는 것 같아 슬프다 못해 처절했다.
  나는 그녀를 방문할 때마다 단풍의 건재함에 마음을 졸이곤 했다. 바람 부는 날은 친구보다도 단풍잎이 떨어질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어쩐지 단풍잎이 하나씩 옷을 벗기 시작하면 친구 몸의 세포 조직도 하나씩 죽어 갈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서이다.
  문득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올랐다. 제발 친구는 이 작품을 기억해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음악과 꽃을 좋아하고 책을 아끼는 친구가 그 작품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도 속으로 깊이 삭이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단풍이 더 아름답지?”
  노을이 붉게 타들고 있는 어느 해질 녘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노을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홍시색깔로 물들어 너무나 아름답게 내 눈에 들어왔다.  
  “내 장례식에 조사를 꼭 좀 읽어 줘!”
  친구는 반짝하고 눈을 떠 나를 올려다봤다. 친구는 자기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듯 남의 이야기처럼 무심코 말을 던졌다. 나도 농담처럼 가볍게 받았지만 친구의 인생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다가 친구는 자기가 던진 말이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갑자기 쓸쓸한 눈길을 창밖으로 보냈다.
  “단풍은 다른 나무보다 설탕분이 많아서 붉게 물든다는데 내 마음에는 설탕분이 없었나봐.”
  나는 친구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시선을 쫓아갔다. 거기에는 이별 앞에 마지막 불꽃으로 절정을 토해내는 단풍나무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단풍은 곧 화려했던 잎을 미련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가벼워지겠지. 친구도 그러겠지.




2011년 12월
재미 수필 제 13집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