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금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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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백양사 가는 길

2007.03.04 01:25

윤금숙 조회 수:1089 추천:90

백양사 가는 길
                                                        

   여섯 살짜리 해나는 나의 첫 번째 외손녀이다. 해나는 뉴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센트럴 팍에서 첫발을 떼어 걷기 시작했고 뉴욕 번화가를 거닐던 해나다.
  나는 그런 해나에게 한국을 구경 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 봄에 딸네 가족 네 명을 데리고 고국을 방문했었다. 한국의 봄날은 환상적이었다. 온 세상이 연초록 이파리들로 팔랑대고 꽃들은 서로 다투듯이 아름다움을 뽑내고 있었다. 길 가는 사람들의 어깨에도 봄볕은 따뜻하게 내려쪼였고, 거리에는 봄을 파는 꽃가게가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무거운 겨울을 훌훌 털어버린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 찬 봄을 맞아 발걸음 마저도 가벼워 보였다.    
  봄에 산사를 찾아가는 마음은, 젊은 날의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한껏 나를 들뜨게 했다. 해나와 나는 일행과 한참 처져 오솔길을 걸었다. 백양사로 가는 오솔길은 길섶을 따라 개울이  흐르고 있어 운치가 있었다. 해나와 나는 돌맹이를 집어 개울물에 돌팔매질을 하며 끼들댔다. 작은 파장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문득 작은 바위 위에 자라가 엎드려 있는 걸 발견하고 그곳을 겨냥했다. 해나는 돌을 던졌으나 그곳에 미치지 못해 자라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러다가 작은 돌이 그 근처에서 퐁당하고 물을 튀기며 떨어졌다. 자라는 놀랐는지 머리를 등딱지 속으로 감추고 서서히 움직였다. 해나는 움직이는 자라를 보고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해나는 흙먼지를 일부러 내며 오솔길을 잘도 걸었고 예쁜 조약돌을 주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걸을 때마다 찰랑찰랑 구슬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나도 공기돌 다섯 개를 주워서 쟈켓 주머니에 넣었다. 해나와 공기놀이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란 꽃은 왜 이렇게 많이 피어 있을까? 개울물은 어디서 흘러 왔을까? 나비는 예쁜데, 벌들은 왜 꽃 속에 있다가 나를 놀라게 할까?”
  해나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컴퓨터 게임과 만화영화를 즐기던 해나는 자연 속에서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궁금한 것이 많아 더 즐겁고 생기 있게 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길섶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토끼풀 꽃이 눈에 띄었다. 예쁘게 눈을 흘기며 나도 꽃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풀꽃의 향을 맡아 보았다. 화원에서 키워진 꽃과는 향기가 달랐다.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은 꽃은 수줍음을 탔다. 나는 가는 줄기를 되도록 길게 잡고 두 송이를 꺾었다. 조심스럽게 줄기를 가르고 다른 가지를 사이에 끼웠다. 두 송이가 맞물려 앙증맞은 꽃반지가 만들어졌다. 해나의 장지에 끼워주고 꽃시계도 만들었다. 해나는 꽃반지가 떨어질까봐 손을 들고 폴짝폴짝 뛰어간다.
  뛰어가는 옆으로 노란 개나리 꽃들이 화사하게 반겨준다. 노란 병아리 주둥이 같은 개나리 꽃을 따서 헤어밴드 사이에도 쪼르륵 꽂아 넣었다. 노란 화관을 쓴 공주는 양쪽 귀밑머리에 진달래꽃까지 꽂아 달란다. 나풀나풀 개나리 꽃 사이로 보일듯 말듯 뛰어가는 해나의 모습은 꽃인가 선녀인가 눈이 부시다. 문득 노랑나비 한마리가 깜짝 놀라 포르르 날아 해나의 길라잡이가 되어 진달래꽃 사이를 날고 있다.
  나는 진달래 슬픈 꽃술을 들여다 보다 꽃잎을 따서 잘근 씹었다. 들쩍지근한 맛이 제법 시장기를 돋군다. 갑자기 진달래꽃으로 빚은 술 한잔에 화전을 안주 삼아 취해보고 싶었다. 해나도 예쁜 꽃이파리 하나를 따서 입에 넣었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냈다. 나는 그러는 해나의 얼굴에 뽀뽀를 했다. 입에서 진달래 꽃냄새가 젖내처럼 났다.  
  가다보니 징검다리도 나왔다. 그곳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데 해나는 기어코 징검다리를 건너겠다고 했다. 둘이는 손을 잡거니 말거니 하며 한 개씩 건넜다. 해나는 폴짝 뛰어 한개를 건널 때마다 성공했다고 엄지 손가락을 하늘로 쳐들었다. 띄엄띄엄 놓인 돌은 어른 걸음으로 족히 한 걸음은 될 것 같았다.
  내가 먼저 건넌 다음 해나의 반지 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순간 발을 헛디뎌 둘이는 동시에 미끄러져 물에 빠졌다. 얼굴에 차거운 물이 튀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까르르 웃었다. 옆에 프라타나스가 하얀 이파리를 뒤집으며 합세했다. 제법 써늘했지만 시원하다고 말하는 해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침 이슬을 먹음은 연초록 이파리 같은 얼굴에 물방울이 또르륵 굴러내렸다. 오염 되지 않은 천연수 냄새가 상큼하게 났다. 해나는 앞니 빠진 잘잘한 흰 이를 드러내고 깔깔거렸다. 해맑은 웃음이 향그럽게 퍼지며 진달래, 개나리 향기와 어우러져 개울물에 섞여버렸다.  
  나는 해나한테 나의 약혼 시절의 이야기를 했다. 어디 쯤이었을까. 약혼자와 나는 이곳엘 왔었다. 그는 뽀시락 장난이 심했다. 갈대를 붙잡아 매어 경치에 빠져있던 나를 걸어 넘어뜨렸다. 숨어서 보고 있던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장난끼 어린 웃음을 눈에 가득 담았었다. 그때가 벌써 언제였던가. 그때는 봄풀 같은 꿈이 나에게도 있었는데...
  해나는 젊은 날의 할머니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할머니도 그런 젊은 날이 있었던가 싶은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정말이냐” 고 되물었다.
  여섯 살짜리 해나에게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가끔은 숙제가 많아 스트레스가 많다고 징징거리기도 하지만 장난감 하나에 곧 행복해졌다. 그런 해나도 언젠가는 사랑을 하게 될 것이고 실연도, 슬픔도, 아픔도 혼자서 이겨내며 삶을 살아 갈 것이다.
  잠깐 사이에 해나는 개나리꽃 사이로 몸을 감추어버렸다. 갑자기 뒤에서 “부!” 하고 나를 놀래키며  배를 잡고 까르륵댔다. 노란색깔이 봄볕에 찬란하게 빛나며 해나의 갈색머리칼 위에 우수수 쏟아졌다. 해나와 내가  서로 마주보고 활짝 웃는데 어디선가 찰칵하고 사진 찍는 소리가 났다.
  해나가 살면서 가끔은 엄마의 나라 이곳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렸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