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작가인 친구에게
나 죽을 것 같아. 내일 아침 눈도 못 뜰 거야. 지금 세 시간째 이렇게 앉아 있다. 대화체에서 한 마디도 생각이 안나 그다음 대화로 못 넘어가고 있어. 어떡하니? 그냥 넘어 가! 시청자들은 별로 못 느끼니까. 그렇다고 밤을 홀랑 새울 거야? 나, 아무래도 이번 드라마 끝내고 작가 그만 둘까봐. 이제는 참신한 아이디어도 없고 젊은 작가들 머리 핑핑 돌아가는데 도저히 못 따라가겠어.
그러지 말고 힘내. 너는 그래도 가치관이 뚜렷하고 따듯한 드라마를 쓰잖아. 젊은 작가들 막장으로 막 나가버리는 드라마 눈살 찌푸려져. 작가 그만둔다고 한 게 하루 이틀이니? 매번 그랬잖아. 시청률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네 스타일대로 써. 건전하고 따뜻하게 감동을 주는 네 드라마가 나는 너무 좋아.
고마워! 너만 내 편이야. 시청자가 다 너만 같았으면 얼마나 좋겠냐? 욕심이겠지. 월요일 아침 7시 되면 시청률이 인터넷에 뜨거든,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끔찍해.
한국시간 새벽 3시에 드라마 작가인 친구 P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P는 본국에서 43년째 성공한 드라마 작가로 대가의 명목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쓸 때마다 죽는다 산다 숨이 턱에 걸려 있다. 그러면서도 결국엔 40회 주말극을 성공적으로 끝내게 될 것이다.
왜, 미리 다 써놓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물론 대본도 한 10회분까지를 미리 써놓고 드라마를 시작하지만 금방 대본이 딸리게 된단다. 그래서 드라마 쓰는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방에 틀어박혀서 대본에 몰두한다. 한 시간이 아까워서 하나밖에 없는 손주 돌잔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쪽대본은 한 번도 날리지 않았다고 했다. 일주일에 단편소설 3편 정도의 분량을 써내야 된다니 일단은 분량에 치어서 죽을 것 같다는 것이다.
나는 소설 한 편을 쓰는데 몇 달을 뭉개다가 그나마도 끝을 못내고 미루어 두게 되는데 감히 친구 앞에서 글 쓴다는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다른 글보다 시간을 정해놓고 쓰는 드라마는 정말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의 노고가 안쓰럽다. 쪽대본까지 날려야 되는 작가들의 절박함을 알겠지만 배우들이 시간에 쪼들려 충분히 대본을 소화시킬 수 없다면 무슨 연기를 기대하겠는가.
친구야! 요즘 드라마 추세가 막장 드라마로 많이 흘러가고 있어서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것 한심한 일이다. 근친혼으로 얽히고설키지를 않나, 위아래도 없이 삿대질을 하고 대들지를 않나, 미혼녀들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남자 등에 업혀가질 않나. 안방에서 온 가족이 보기엔 정말 민망한 장면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드라마는 전혀 현실감이 없고 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어 외면하게도 된다.
시청자들의 추세인지 아니면 작가들이 시청률에 민감해서 그런 건지 알 수 없는 없지만 매 회 자극적인 변화를 원하는 시청자들의 요구에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지 않을까.
젊고 톡톡 튀는 인기 드라마 작가인 조카도 나를 들볶기(?)는 마찬가지다. 가을에 나갈 드라마의 시놉을 쓰고 있는데 잘 안돼 머리에서 쥐가 난다며 이모가 작가되라고 했으니 책임지라고 내게 푸념을 해댔다. 막장 드라마가 아닌 세상을 따뜻하고 밝게 바꿀 드라마만 쓴다면 그 정도의 푸념인들 대수인가.
사랑하는 친구야, 조카야! 냉정한 시청자로서 부탁한다. 드라마작가들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엄청나기 때문에 작가들의 냉철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 착한 드라마가 성공하기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너희들이 먼저 깰 수 있는 작가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정말 좋은 드라마, 아름다운 드라마, 세상을 밝게 해주는 드라마에 시청률이 팍팍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주 한국일보 4월 20일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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